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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아일보 사람들- 고영환

Posted by 신이 On 10월 - 17 - 2018

 

고영환(高永煥, 1895~1950)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1925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보성전문에서 가르치다 1933년 4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정리부와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1945년 12월 동아일보가 복간된 뒤 논설위원으로 복간된 뒤 논설위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 중 피살됐다.

” 적치(赤治) 3개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학살 또는 납북됐다. 동아일보 사원 가운데도 희생자가 있었다. 취체역 김동섭(金東燮), 편집국장 장인갑(張仁甲), 사진부장 백운선(白雲善) 등이 북으로 끌려갔고, 영업국장 정균철(鄭均轍), 논설위원 고영환(高永煥) 등은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112쪽)

 

고영환(高永煥) (광주, 1895~1950) ▲ 1933. 4 사원(정리부, 정치부), 1940. 8 폐간. ▲ 중간후 재입사. 이하 권2 참조.〔대한독립신문주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고영환(高永煥) (광주, 1895~1950) ▲ 폐간전 정치부기자. ▲ ? 논설위원, 재직중 사망.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高永煥

▲ 1895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

▲ 1950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자택에서 부인 허영순과 함께 좌익청년들에 의해 학살 당함

▲ 1925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졸업뒤 귀국, 보성전문 강사

▲ 33년 4월 동아일보 정리부, 정치부 기자

▲ 40년 8월 10일 동지 강제폐간으로 퇴사

▲ 45년 동지 복간후 논설위원 등 역임, 동년 11월 3일, 대한독립신문 주간

▲ 46년 7월 7일자 동지에 보도된 콜레라기사 필화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구속됨

▲ 47년 2월 15일 「民報」(대한독립신문 改題) 주간

□ 언론인 受難史에 참혹한 기록 남겨

근세 민족최대의 비극인 6.25의 수난은 우리 언론계에도 큰 상흔을 남겼다.

중진 언론인들의 납북, 피살, 전사 등…… 이로인한 이산(離散)의 슬픔은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비롯,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 전 자유신문사장 정인익,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장인갑,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신태익과 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이길용 등이 납북됐고, 전 서울신문 종군기자 한규호가 전사(납북 피살) 했으며 전 조선일보 주필 신일용과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대한독립 주간을 지낸 고영환이 서울에서 학살됐다.

그 중에서도 부부가 함께 학살된 고영환의 경우는 언론인들의 수난중 가장 참혹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고영환은 1895년 전남 담양에서 토호(土豪)인 명문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곳 창평 출신인 전 동아일보사장 고재욱과는 한 집안이요, 동아일보 창립자인 인촌(仁村)과는 외척간이다.

그는 20년대초 일본에 건너가 사학의 명문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입학, 25년에 졸업했다. 고영환은 같은해 귀국하여 보성전문에서 교편을 잡다가 33년 4월, 동아일보에 입사함으로써 그의 언론계 생활이 시작된다. 고영환은 이곳에서 정리부를 거쳐 정치부기자가 되면서 활동의 날개를 펼쳤다.

30년대 초엽, 동아일보가 주최했던 「브나로드」운동이 일제의 중지명령으로 계속하지 못하게되자 동사는 이의 대응책으로 35년부터 전국을 순회하는 교양강좌를 실시하게 된다. 이 특별강좌는 정치, 경제, 문예, 역사, 법률, 교육, 신문, 철학, 위생 등 9개 부문으로 강사진은 당시 국내의 저명한 학자 17명과 사원으로 구성, 민중의 계몽에 나섰는데 그중 정치에 유진오, 고영환, 경제에 이순택, 문예에 이희승, 위생에 유일선, 신문에 설의식, 역사에 백낙준 등 당시의 석학과 재사(才士)들이 포함돼 있는 것을 보면 정치부 기자로서의 고영환의 비중을 엿볼 수 있다.

□ 「포도송이」 사진 실린 동아일보 廢刊辭

고영환은 그 당시로는 비교적 긴 평기자생활 8년만인 40년 8월 10일, 조선일보와 함께 양대 민족지에 내려진 일제의 강제폐간이란 우리나라 언론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이때 동아일보는 폐간호 3면 상단에 탐스럽게 포도송이가 엉켜있는 사진을 크게 게재했다. 이 사진은 폐간으로 지금은 사원들이 뿔뿔이 헤어지지만 언젠가는 전사원들이 다시 만나 알알이 열린 포도처럼 뭉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지닌 것이었다. 또한 동지는 이날 지면에 폐간당시의 임원 및 사원 2백15명의 명단을 돋보이게 게재했는데 고문 송진우, 사장 백관수, 편집국장 고재욱(경제부장 겸임), 정치부장 김장환, 사회부장 임병철 등을 적고, 「입사순」이라고 가로표시를 한 기자명단에는 고영환(정치), 전홍진(경제), 양재하(사회), 최형종(지방), 홍순준(정리), 노수현(조사) 등 순위로 적었으니 폐간당시 고영환은 제일 고참 기자였음을 알 수 있다.

(…)

□ 李承晩노선 지지한 혁신 극우성향

5년간의 긴 폐간끝에 45년 광복과 더불어 복간된 동아일보에 복귀한 고영환은 이후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하게 된다.

고영환은 작달막한 키에 깡마른 체구로 진취적이었으며 매사에 자기의 소신이 한번서면 남들과 얼른 타협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때 고재욱, 이동욱 등과 함께 논설위원으로 있었는데, 광복후 정치의 격동기에 그는 주로 정치문제에 관계되는 논설 등을 주도적으로 다루었다.

그후 고영환은 얼마안가 대한독립신문 주간(主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45년 11월 3일에 창간된 대한독립신문은 속보(速報)를 발행해오던 대한독립협회(大韓獨立協會)에서 이승만의 환국을 맞아 창간한 타블로이드판 2면의 등사, 석판 인쇄 신문이었다. 속보판의 지령를 환산하여 제85호로 출발한 일간시사지로 이때 발행 겸 편집인은 고정휘 인쇄인은 이영구였다.

이승만의 절대 지지지(支持紙)였던 대한독립신문은 창간호 1면, 「독립신문의 유래」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독립신문」의 역사를 설명하고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과거 위엄을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여 옛 독립신문의 뜻을 계승할 것을 밝혔었다.

그후 곧 활판인쇄로 정상제작에 들어간 동지는 광복지후 찬·반탁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이승만의 편에 서서 당연 반탁에 앞장섰다. 대동단결(大同團結)을 내세운 대한독립협회(이승만이 주도)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 그후 잠시 휴간했던 동지는 46년 6월20일 속간하면서 주간에 역시 고영환, 편집국장에 유광렬, 정보부장은 고철수였는데 49년 2월 14일자 지상에 「시대의 요청에 순응, 본지개제 혁신단행」이라는 제목의 사고를 내고 민보(民報)로 개제(改題)되었다.

이때 고영환은 주간이었고, 유광렬은 편집국장이었다. 주간 고영환은 2월 15자 민보 첫호에 <민주언론 창달의 임무를 일층 강력하게 수행하고자 일제의 구각(舊殼)을 탈각(脫却)하고, 2월 15일부로 「민보」로 개제함과 동시에 혁신적인 보도와 주장을 가지고 명실상부한 재출발을 한다>고 개제이유를 밝혔다.

이승만이 주도하던 대한독립협회에서 발행하던 속보를 대한독립신문으로 개제해서 발행했고, 이승만노선을 절대지지하여 대한독립신문을 독립협회의 기관지화 시켰을뿐 아니라, 동지를 민보(民報)로 개제하면서 그가 밝힌 강력한 소신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영환은, 일면 혁신적이면서도 과격한 극우적 성격이 내재돼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주간으로 대한독립신문의 편집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을때(당시 편집국장은 성준덕에 이어 유광렬) 46년 7월 7일자 지면에 동지는 서울시내에서 발생한 콜레라 기사를 크게 다루었다.

미 군정하에서 일부나마 언론이 통제 받던때라, 동지는 서울시장으로부터 민심을 불안하게 하고, 사회불안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고발돼 부사장 오장환과 고영환은 종로경찰서에 구속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미 군정재판에 회부되기 직전, 각각 5만원(圓)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다.

이후 고영환은 정치단체 등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50년의 6.25. 잠시나마 적치하에 놓였던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고영환은 부인 허영순과 함께 공산당원들에게 학살되고 만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 부부가 한날 한시에 한자리에서 함께 간 탓인지 고향 담양에 수소문했으나 그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참고자료 : 동아일보 70년사 제1권, 한국신문백년지, 신문백년인물사전.

<필자 권오철 전 동아일보 편집부국장>  

(권오철 전 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언론인 受難史에 참혹한 기록 남겨,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1992)

 

 

6·25 납북자 명단에서 찾아낸 200여 언론인 공개

세계 어디서도 없었던 언론인의 受難

200여 명의 납북 언론인

(…)

1952년에 공보처가 조사한 「피살자 명부」에 피살로 확인되는 언론인은 李鍾麟(이종린·한말 대한민보 기자)을 비롯하여 高永煥(고영환·동아일보 논설위원), 孫相輔(손상보·여론신문 사장), 韓五赫(한오혁·상공신보 편집국장, 동아일보 기자), 鄭秀日(정수일·前 조선일보 기자)과 신문사의 소속이 확실하지 않은 朴瑢夏(박용하·신문사장, 국민회 간부), 洪承信(홍승신·기자), 安龍雨(안용우·기자), 康弘一(강홍일·기자)과 KBS의 李重根(이중근) 등이 피살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

학살당한 高永煥(고영환·55)은 6·25 당시에는 동아일보 소속이 아니었지만 경력으로 보아 동아일보로 분류되어야 할 사람이다. 전남 담양 출신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高在旭(고재욱)과는 한집안이었고, 동아일보 창립자인 金性洙와는 외척간이었다. 1925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보성전문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3년 4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정리부와 정치부 기자로 근무했다. 1945년 동아일보가 복간된 뒤 논설위원으로 근무했고, 잠시 대한독립신문 주간을 맡았다가 다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9월21일 종로구 삼청동 자택에서 부인 許永淳(허영순)과 함께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高永煥(고영환·55) 문인, 민국당. 9월21일. 피살. 종로구 삼청동 35의 105(삼청동부동 3통 5반).

(…)  

(정진석, 6·25 납북자 명단에서 찾아낸 200여 언론인 공개, 월간조선, 200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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