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1. 동아일보 사람들- 강성재

Posted by 신이 On 10월 - 16 - 2018

 

※ 2020년 창간 100년을 1년여 앞두고 동아일보 사람들을 시작합니다. 동아일보를 빛냈거나 동아일보에서 빛난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강성재(姜聲才, 1939~2002)는 전남 순천 출신으로 순천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 사회부와 정치부 기자를 하다 80년 신군부 집권 후 강제 해직됐다. 고인은 1984년 복직해 출판국과 편집국의 편집위원을 지낸 뒤 1988년 정계에 입문했고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됐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서 목격한 역사의 현장을 담은 저서를 다수 출간했다.

 

강성재(姜聲才) (승주, 1939~ ) △ 67.1 수습(편집국), 기자(사회부, 지방부, 기획부, 정치부), 80.8 퇴사. △ 84.9 재입사, 기자(신동아부)(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取材餘祿] 不發 出張餘話

코트를 챙겨 입고 다급히 기자실 문을 나서는데 곧 이어 계속 걸려온 他社기자들을 찾는 전화에서 승객·승무원 51명을 태운 KAL기가 납북되었다는 빅뉴스를 귓전에 들었다.

權(권근술)기자와 뉴스부 송경선(宋炅璿), 사진부 윤석봉(尹錫奉) 기자, 그리고 조종사·정비사 등 5명이 탄 시계비행(視界飛行)에만 의존하는 세스나기는 이날 오후 4시 반경 수색비행장을 이륙, 강릉을 향했으나 대관령 못 미쳐 날씨가 어둑어둑해지면서 퍼붓기 시작한 눈보라와 시계를 ‘세로지대’로 만드는 짙은 안개에 박혀 이륙 40분 후 강릉행을 포기하고 서울로 되돌아가기로 결정, 기수(機首)를 돌렸다는 것이다.

(…)

액(厄)이 겹친 출장(出張)기자의 괴로움을 생각해서라도 뛰어야겠다 싶은 우리 경찰기자와 사회부 소속 11기생들은 피랍자 사진 구하기 작전에 나서서 동분서주한 결과, J일보의 30장, S신문의 16장 등에 비해 월등한 40장의 피랍 사진을 입수 게재, 단연 타지를 압도 지면을 빛냈음은 물론, 타사기자들에게 “구득(求得) 게재사진 숫자는 바로 그 신문사의 사세(社勢)”라고 큰 소리로 뽐내었음을 밝혀 둔다.

權기자가 무사히 돌아오고 그 사고도 한낱 ‘지난 일’로 부담 없이 회상할 수 있게 된 며칠 전 박원근(朴原根) 차장은 권기자의 생환을 축하하는 주석(酒席)에서 “20kg이나 더 무거운 자네가 탑승했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나의 비대를 꼬집기도 했으나 나는 스스로 이번 사고에서 “운 좋은 사나이”로 자처하고 있음을 부기(附記)한다.

(강성재, ‘취재여록- 불발 출장여화’, 동우, 1969년 12월 31일, 24쪽)

 

 

[取材餘祿] 푸대접·연금

‘포오드’ 방한(訪韓)중 우리 취재 기자들은 ‘코 큰’ 기자들 덕택에 과분한 대접을 받는 수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푸대접을 받았으며 취재, 송고에 적잖은 불편을 느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포오드’ 대통령이 방한하던 날인 11월22일 오전 8시반 김포공항에 도착, 두차례의 철저한 신체검색을 받은 후 공항 국내선 출구를 통해 환영식장으로 들어갔다. 환영식장은 식단(式壇)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주한미국인들과 경제계, 학계, 문화계, 언론계 등 사회각계 대표들의 자리가 마련돼 있었고 왼쪽에는 헌법기관을 비롯, 입법 행정 사법 요인 군장정 순으로 자리가 표말에 명시돼 있었다.

(…)

30분간의 식이 끝났다. 기사도 급하지만 사진이 더 급하다. 기사를 보내려고 재빨리 식장을 빠져나왔으나 군인들이 공항건물 안으로는 한발짝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할 수 없이 사진부 송호창 형과 회사차를 탔다. 그러나 빠져나갈 수가 없다. 교통정리 하는 군인들이 요인(要人)들 차만 보내고 기자들 차는 극력제지, 결국 맨 나중에 공항을 떠났다. 도중에 차가 막혔다는 방송을 듣고 할 수 없이 제1한강교→남산→삼일로로 돌아오는 바람에 회사 도착이 약간 늦어지기도 했지만 결과는 크게 다행.(그날 도하(都下)신문 중에서 우리 사진이 제일 좋았기 때문)

(…)

오후 3시반부터는 중앙청에 가지는 물론 일체의 사람 출입이 금지된다는 얘기에 박순철(朴淳鐵)씨에게 맡기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날 중앙청 기자들은 당국의 엄격한 줄입금지로 예상치 못한 곤욕을 톡톡히 당했다고 한다.

(…)

아뭏든 지난번의 ‘포오드’ 방한 취재는 실제 취재에 나선 기자들로서는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여론의 나라’임을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해준 기회가 됐다는 점에서 자위(自慰)할 수 있을지.

당초 영빈관에 묵기로 돼 있던 ‘포오드’가 기자들과 숙소를 같이 하겠다고 우리측에 요청해서 조선호텔로 변경됐으며 수행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한미공동성명이 하루 앞당겨 나온 것이라 한다.

또 ‘하비브’ 차관보와의 인터뷰에서 피차간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해 가면서 ‘자유롭게’ 질문하고 질문에 답하는 그 분위기. 환송식장의 열렬한 환영인파를 보고 “‘포오드’가 저런 환영을 받고 얼마나 가슴이 부풀가” “그러나 그는 다음 선거엔 절대 안된다”는 등 국민과의 ‘친근감’을 그대로 나타내는 ‘소감’ 등을 스스럼없이 표시하는 것을 볼 때 또 그것을 자유롭게 기사화할 수 있다고 상상할 때 부럽기만 했다.

(강성재, ‘취재여록- 푸대접·연금’, 동우, 1974년 12월 31일, 9쪽)

 

 

‘자율숙정’의 탈을 쓴 언론인 해직

이른바 ‘80년 언론 대학살’로 불리는 언론인 대량 해직과 언론기관의 통폐합은 개혁주도세력을 자처하는 신군부의 새 집권층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자행되었다. 언론장악의 제1단계 조치라고 할 이 언론인 해직은 7월초 방송 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7월에 접어들면서 검열거부와 제작거부에 앞장선 기자들을 비롯해 반체제 언론인들을 숙청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이러한 소문이 곧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

당시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가 작성한 ‘언론계 자체정화 계획’에 의하면 해직 기준은 ① 반체제 용공불순분자 또는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자 ② 검열거부와 제작거부 주동 및 동조자 ③ 부조리 부정부패한 자 ④ 특정 정치인, 경제인과 유착되어 국민을 오도한 자 ⑤ 기타 사회의 지탄을 받는 자로 되어 있으나, 사실 해직자는 검열거부와 제작거부에 참여했거나 체제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보안사령부 언론대책반(반장 이상재·李相宰)의 실무집행에 따라 진행된 언론인 해직은 드디어 8월9일 본사에서도 단행돼 모두 33명이 의원(依願)해임의 형태로 강제해직되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권상(朴權相 ․ 논설주간) 김진현(金鎭炫 ․ 논설위원) 한우석(韓宇錫 ․ 사장실 기획위원) 박원근(朴原根 ․ 기획조정위원) 조용철(趙鎔澈 ․ 기획조정실) 김성환(金星煥 ․ 편집국 화백) 최일남(崔一男 ․ 편집부국장) 이경재(李敬在 ․ 정치부) 강성재(姜聲才 ․ 정치부) 김성익(金聲翊 ․정치부) 이종각(李鍾珏 ․ 정치부) 김용정(金容正 ․ 경제부) 전만길(全萬吉 ․ 사회부) 심송무(沈松茂 ․ 사회부) 최맹호(崔孟浩 ․ 사회부) 배인준(裵仁俊 ․ 사회부) 박병서(朴秉瑞 ․ 문화부) 김재홍(金在洪 ․ 외신부) 이정구(李正求 ․ 지방부) 여태섭(余泰燮 ․ 지방부) 박명용(朴明用 ․ 지방부) 이종숙(李鍾肅 ․ 지방부) 신광연(辛光淵 ․ 지방부) 이혜만(李惠滿 ․ 지방부) 사상길(史相吉 ․ 지방부) 윤재걸(尹在杰 ․ 신동아부) 천승준(千勝俊 ․ 방송국 방송위원) 백환기(白桓基 ․ 해외부) 김근(金槿 ․ 사회문화부) 이규민(李圭敏 ․ 정경부) 전진우(全津雨 ․ 정경부) 최열찬(崔冽瓚 ․ 사회문화부) 박종열(朴鍾烈 ․ 사회문화부)

(동아일보사사 5권, 동아일보사, 1996)

 

 

 

언론계에 몸담고 있을 때 두 김씨를 등거리(等距離)에서 취재했던 필자는 이 책을 저술 하면서도 가급적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썼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

거산에 대한 박대통령의 시각과 그의 ‘정서’를 확인하게 된 것은, 백두진 파동이 마무리된 4일 후인 (79년) 3월 21일, 청와대 경내 상춘재(常春齋)에서 있은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석상에서였다. 당시 필자는 공화당을 거쳐 6개월 전부터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었다.

영애인 근혜 씨를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선 박 대통령은 미리 대기 중이던 30명 가까운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4명씩 앉을 수 있는 7, 8개의 교자상에는 6, 7가지 안줏감이 차려져 있었고, 술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 나중에 대통령의 설명으로 알게 됐지만, 이 술 주전자에는 김포 어느 술 도가에서 특별히 만들어 배달한 김포 막걸리에 맥주를 섞은 혼합주가 들어 있었다. 마실 때는 부담이 적은 농주(農酒)지만, 한두 사발만 들이켜도 금방 취기가 오르는 술이었다.

이날 저녁 상춘재 온돌방은 불을 너무 많이 지핀 탓이었는지, 방바닥이 뜨거운 편이었다. 방안이 더운 데다 다들 빈속에 독한 술이 들어가니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대부분 거나해진 얼굴이 되었다.

대부분의 기자들을 볼 수 있는 중앙의 교자상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박 대통령은 기자들이 피운 담배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고는 금연(禁煙)을 화제로 말문을 열었다. 당시 목감기 기운이 있던 대통령은 “하루 3, 4갑을 태우던 담배를 최근 끊어가고 있다. 어제는 두 대를 피웠다”면서 담배를 끊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울 적에도 집에 와서는 피우지 않았다면서 “TV 연속극에서 담배를 멋있게 태우는 탤런트들을 보면 피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방안에서는 새로 도배한 장판지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어 상춘재가 준공된지 얼마 됮 않았음을 실감케 했다. 그 전날, 바로 같은 자리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이 신임 여당권 간부와 신임 국회상임위원장들을 불러 축하 만찬을 했었다.

박대통령은 이에 앞서 2월20일 공화당의 요직을 개편, 당의장서리에 박준규, 정책위의장에 구태회, 사무총장에 신형식, 원내총무에 현오봉 의원을 각각 임명했었다. 또 유정회 의장엔 태완선 씨를 지명했다.

아무튼 경호책임자에 불과한 차실장이 여당권과 국회 간부들을 청와대로 초대해서 베푼 만찬은, 당시 막강했던 그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많은 간부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그의 위세에 눌려 내색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모양이 만찬이 이뤄졌을까 궁금했다.

그날 밤, 박대통령은 그런 궁금증을 조금은 풀어주는 말을 했다. “이 별채를 지은 뒤 집들이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들이 많았는데, 마침 며칠 전 국회 간부들이 새로 뽑혀 (차 실장에게) 여당 신임 간부들까지 합쳐서 ‘네가 한잔 내라’고 얘기해 어젯밤에 축하만찬이 있었지.” 많은 기자들은 차실장을 ‘네’라고 호칭하는데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취기(醉氣)가 상승작용을 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거산(YS의 호)이 백두진 의원의 국회의장 취임을 반대했던 것을 겨냥, “백 의장이 유정회 의원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면, 유정회 의원을 뽑는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도 선출된 만큼, 나에 대해서도 반대하겠다는 뜻이 아니냐”며 백두진 파동의 본질과 관련된 대통령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거산을 정면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이가 유신체제를 뒤엎겠다고 나선다면 우리는 ‘예, 예’ 손놓고 있겠느냐. 지금까지 (그가) 법(긴급조치)을 위반한 게 7건이나 되지만 야당 탄압이라는 오해를 받기 싫어 신민당 전당대회(5월 말) 전엔 절대 안 잡아넣는다. 김영삼이는 절대로 신민당 총재로 당선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물러나고 김영삼이든 누구든 집권해서 국민이 행복하게 된다면 언론이 밀어주어도 좋다.”

이렇게 토로한 대통령은 백두진파동을 크게 취급한 언론에 화살을 돌렸다. 그는 “언론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충정에서라면 나 자신을 비판해도 좋다. 그러나 누가 집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국가를 안전하게 하고 발전시킬 수 있겠느냐가 더 중요한 만큼, 이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언론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 자신보다 이 나라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는 자신감이 언하(言下)에 깔려있는 표현이었다.

필자는 대통령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반주를 들고 있었다. 긴급조치하여서 “신문이 모두 비슷비슷한 것 같다”는 얘기들이 나온 때였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당시 정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특히 백두진파동에 대해서는 동아일보가 타 신문에 비해 월등히 크게 취급했고, 논조(論調)도 신랄했기 때문에 정부여당 쪽에서는 동아일보가 사태를 더욱 부추긴다고 보고 있었다.

신문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자, 그 불똥이 필자에게도 옮겨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대통령과 눈길이 마주치지 않게끔 앞 사람을 방패로 적당히 비켜 앉아 있었다. 시선을 술잔에 고정시킨 채 앉아 있는데, 갑자기 “동아일보 강기자! 강기자 어딨어”라고 찾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조금 움직이면서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했다. 필자와 시선이 마주친 대통령은 약간 언성을 높여 “김영삼이가 동아일보 같은 신문에서 가세해 주니까 힘을 얻어, 무슨 영웅처럼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내가 물러나고 김영삼이가 (정권을) 잡으면 동아일보가 행복하게 될 거 같애!”라고 힐난조로 말했다. 대통령이 또다시 “동아일보가 그러면 안 돼!”라고 쐐기를 박았다.

신문사를 대표해서 청와대를 출입하고 잇는 필자의 입장으로서는 무언가 한마디 하지 않으면, 대통령의 힐난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극히 원론적인 말을 했다.

(…)

필자가 말을 마치자 방안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어느 자리에서나 재치있는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온 K신문의 정치부장이 화제를 바꾸어 “이제 웬만큼 치안도 정착돼 있으니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시킬 의향은 없으십니까”고 물었다. 분위기를 바꿔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조금 전의 화제는 잊은 듯 지체 없이 “통행금지 시간을 밤 10시로 앞당기겠다”고 했다. 그 어투를 보아서는 농담이었지만, 의미로 보아서는 더 강경하게 나가겠다는 뜻이 함축된 의사표시였다. 의표를 찔린 좌중은 웃으면서도 혹시 더 강경하게 나가겠다는 뜻이 아닌가 해서 다소 진지한 표정들이 되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몇 개월 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민족중흥의 길’ 인세 문제로 화제로 돌렸다. 동 저서의 인세는 1천 9백만원이나 되었는데,  이 돈을 모두 새마을 성금으로 기탁했다는 것이다. 비정치적인 얘기로 냉정을 되찾은 대통령은 그날 밤 자신이 너무 말을 헤프게 했음을 의식한 듯, “이건 모두 ‘오프 더 레코드’(기사화해서는 안되는 것)야”라고 못을 박고는, 근혜 씨에게 “아버지가 취해서 다 털어 놓기 전에 사인(신호)을 보내라”고 했다.

이날 밤 출입기자들은 당시 그의 속마음을 어림해 볼 수 있는 깊숙한 정치 얘기에서부터 술 깨는 비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얘기들을 들은 뒤, 대통령과 함께 자리를 일어선 것은 1시간 반이 지난 저녁 7시가 넘어서였다. 술을 삼가거나 전혀 못한 몇몇 기자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상당한 취기를 느꼈다.

이날 밤 7시 15분경 기자들은 상춘재를 나왔다. 박 대통령이 정원 잔디밭에 서서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배웅할 태세를 취하자, 기자들은 자연스레 일렬로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평소 술에 약간 취해도 일어날 때는 당당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는 대통령이었는데 이날은 어쩐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바로 옆 좌석에 앉지 않았기 때문에 그날 밤 대통령이 마신 주량은 알 수 없지만, 막걸리 세 사발 이상은 마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날따라 다변(多辯)이어서 음주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요즘 대통령의 심신이 피곤해진 탓일까, 생각하면서 네 번째인가로 몇 걸음 나아가 대통령 앞에 섰다. 임방현 청와대 대변인이 무슨 생각에선지 “아, 동아일보 강성재 기잡니다”라고 새삼스러운 소개를 했다. 그러자 다소 흔들렸던 박 대통령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잡더니 “뭐! 강 기자라고?” 하더니, 갑자기 머리로 내 앞이마를 들이받았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데, 대통령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만지면서 “얼얼한데” 했다. 필자 역시 대통령 표현대로 얼얼했지만, 취기 때문인지 아프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취기를 알아차린 임 대변인과 근혜 씨가 대통령의 양팔을 부축하고는 어두워진 본관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필자는 한 나라 명운과 절대 무관하지 않은 국가원수가 저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다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화제로 삼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두려운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의 해프닝은 다음 날로 언론계에 쫙 퍼지게 됐고, 그것이 정보관계자들을 통해 더욱 확산되는 동안 사건은 변질되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오죽 미웠으면 대통령이 박치기를 다 했을까”하는 해설도 곁들여졌다. 종내엔 필자의 청와대 출입이 금지될 것이란 말도 들려왔다.

(강성재, ‘金泳三과 운명의 大權’, 도서출판더불어, 1992, 90~96쪽)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