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2호)
창간 초창기 지면 빛낸 ‘필봉’
– 진학문
진학문(秦學文), 언론계 관계 경제계에 족적을 남긴 재사
총독부 기사삭제 압수 강력 항의…부음광고 화제도
“그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사옵고, 또 적지 아니한 폐를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1974년 2월3일 진학문”
1974년 2월7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 이색광고가 실렸다. 광고의 주인 진학문이 2월3일 죽자 5일장을 치르고 7일자로 광고를 낸 것이다. 부고는 죽은 진학문이 미리 써놓은 것이고 사망날짜는 친구 최승만이 나중에 써넣은 것이다. 이 광고는 장안의 화제가 됐다. 죽은 사람이 자신의 부음광고를 낸 최초의 사례이자 그후로도 찾아보기 힘든 진기한 일이었다. 이처럼 진학문(1894∼1974)은 별난 데가 있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와 도쿄외국어학교 러시아과를 중퇴한 진학문이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동경 유학시절 인촌과의 교우관계에서 비롯됐다. 인촌이 민족을 대변할 신문사업을 구상할 때부터 함께 한것은 물론, 창간후에는 정경부장 겸 학예부장을 맡아 핵심간부로 활약했다. 창간 초기 진학문은 정치 경제학예 등 전 지면의 4분의 3을 담당하는 데스크이자 총독부 출입기자이기도 했다. 당시 기자 5명과 함께 지면을 꾸려가느라 일인다역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진학문은 툭하면 당하는 압수나 기사삭제 등의 조치에 항의하거나 무마하는 임무도 맡았다. 진학문은 후일 “당시 사원들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월급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다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는 당시 동아의 사원들이 직장을 단순히 생계 방편으로 안 것이 아니고, 일종의 민족계몽운동 내지는 독립운동전열에 나서고 있다는 자부와 정열을 가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고 술회했다.
진학문의 동아일보 재직기간은 논설반 기자를 포함해 3개월에 그쳤다. 1921년 주간지 「동명」 주간에 이어 다음해 편집인 발행인을 겸하더니 24년에는 시대일보 편집국장 겸 편집인 발행인이 됐다. 1927년에는 가족과 함께 당시로는 드문 브라질 이민을 떠났다가 다음해 귀국하는 등 부침을 거듭했다.
언론계를 떠난 진학문은 30년대 만주로 가서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 생활필수품회사 상무이사 등으로 변신, 뒷날 친일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해방후 진학문은 또 한번 인생의 진로를 바꾼다. 이번엔 경제계였다. 한국무역진흥회사 부사장이 되더니 60년대에는 전경련 상임부회장에 올랐다. 1923년 소설집 「암영」(暗影)을 발표하기도 한 진학문은 다사다난한 시대에 다양한 족적을 남긴 재사였다.
– 글 황의봉 (동우회보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