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2호)
창간 초창기 지면 빛낸 ‘필봉’
– 이서구
이서구(李瑞求), 초창기 사회부 기자의 애환 온몸으로 겪어
일본순사 혼내고 사죄 받아낸 배포…라디오劇 개척자
1920년 어느 날, 21세 문학청년 이서구(1899∼1981)가 동아일보 창립사무소로 창간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상협을 찾아갔다. 이상협을 잘 안다는 할아버지의 말만 믿고 간 것이었다. 이상협이 다짜고짜 찾아와 기자가 되고 싶다는 그에게 무슨 글이든 써보라고 요구하자 이서구는 그 자리에서 「서울 스케치」라는 수필을 써서 제출했다. 일종의 작문시험이었다. 이미 그해 1월 매일신보 신춘문예 공모에서 2등을 차지한 이서구의 글솜씨는 합격하기에 충분했고, 그는 동아일보의 창간기자가 됐다.
사회부로 배속된 21세의 청년 이서구는 고향이 안양이어서 종묘 뒷담 부근에서 하숙을 하며 회사를 다녔으나 생활이 궁핍해지자 나중에는 편집국 책상 위에서 잠을 자야 했다. 풍채가 당당한 데다가 재담이 뛰어났고, 매사에 낙천적이었던 이서구는 사회부 외근기자로 맹활약을 했다. 후일 각종 기고문이나 회고담을 통해 초창기 동아일보의 분위기나 기자들의 생활상을 리얼하게 증언해 한국언론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기도 하다.
사회부 기자 이서구의 첫 기사는 창간호에 실린 태형 폐지 관련기사였다. 창간일인 1920년 4월1일부터 태형이 폐지되는 데 대한 총독부 의원장(의사)의 견해를 듣고 작성한 것이었다. 억수처럼 퍼붓는 빗속을 인력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작성한 기사는 무사통과됐고, 이후 이서구의 활약은 수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진고개 화재현장에 두루마기 한복차림으로 뛰쳐나간 이서구 기자를 본 일본인 순사가 ‘네가 무슨 기자냐’는 눈치로 접근을 막자 다짜고짜 경찰서장실로 찾아가 따져 사과를 받아냈고, 일본인 순사가 직접 편집국으로 와 백배사죄한 사건에서 당시 기자들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서구의 기자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24년 동아일보를 나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를 거쳐 경성방송국 연예주임으로 변신하면서 극작가 연출가의 길을 걷는다. 박승희 김기진 등과 함께 신극운동단체 토월회를 창립, 동인활동을 시작하면서 6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만년에는 주로 방송극을 쓰며 정력적으로 활동해 「햇빛 쏟아지는 벌판」등으로 초창기 라디오 드라마의 개척자가 됐다. 조선왕조 야사를 극화한「장희빈」「강화도령」, 대중가요「홍도야 우지마라」의 작사로도 이름을 떨쳤다.
– 글 황의봉 (동우회보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