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2호)
창간 초창기 지면 빛낸 ‘필봉’
– 유광렬
유광렬(柳光烈), 면서기에서 글발·말발 뛰어난 언론인으로
3·1운동을 계기로 면서기 생활을 청산하고 상경해 매일신보와 만주일보 경기지국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청년은 1920년 동아일보 창간동인으로 참가, 경찰과 재판소를 담당하는 사회부 기자가 된다. 훗날 한국언론계의 내로라하는 대기자 반열에 올라선 유광렬(1898∼1981)이 신문기자로 빛을 발하기에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없었다.
초창기 창간축사나 받으러 다니던 유광렬은 이른바 48인 사건의 공판기사를 쓰면서 스타가 된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한 48인의 재판을 취재하고 방청기를 쓰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창간 이후 가장 중요한 재판이어서 이상협 편집국장이 직접 취재에 나서 방청기를 썼으나 업무상 오전 공판만 담당했고 오후 공판을 풋내기 유광렬 기자가 맡게 된 것이다. 박학하고 꼼꼼한 유광렬의 공판 기사는 이상협이나 타사의 기사보다 훨씬 주목을 받았다.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사위인 절친 방정환을 통해 풍부한 관련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광렬은 방청기뿐 아니라 특종기사도 많이 터뜨릴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1923년에 이르러 해외정세 취재를 기획해 장덕수를 미국으로, 김형원을 일본으로, 그리고 유광렬을 중국 상해로 특파했다. 유광렬은 봉천 북경을 거쳐 상해에서 이동녕 이시영 김규식 김구 이청천 등을 만났으나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의 분열과 대립상에 실망하게 된다. 그가 독립을 위해서는 해외보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이때의 취재여행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해 12월 사회부장으로 승진하였으나 이듬해인 24년 이상협이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옮기자 동아일보를 떠나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되었다. 이후 유광렬은 시대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 한국일보 등 신문매체들을 섭렵하면서 사회부장 논설위원 등으로 활약했다.유광렬은 보성법률상업학교 중퇴 학력이기는 하나 그의 지식은 전적으로 독학에 의해 얻어진 것이다. 기억력이 비상했던 그는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사하는 문장가였고, ‘걸어다니는 사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힘이 없었다.일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박학다식한 데다 정확한 발음, 구수한 화술을 갖춘 유광렬은 라디오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1960년대 이서구 조풍연 등과 더불어 출연한 동아방송의 대담프로 ‘이 얘기 저 얘기’를 비롯해 여러 프로그램의 인기 출연자가 됐다. 그야말로 글발 말발이 뛰어난 팔방미인 언론인이었다.
– 글 황의봉 (동우회보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