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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 이승훈

Posted by 신이 On 9월 - 28 - 2018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2호) 

 

 창간 초창기 지면 빛낸 ‘필봉’

 –  이승훈  

  

 

 

 

이승훈(李昇薰), 4대 사장으로 창간 초기 위기상황에 등판 

 

  창간 이후 짧은 기간에 도약을 거듭하며 성가를 높여오던 동아일보는 4주년을 앞둔 1924년 내우외환의 시련을 맞게 된다. 박춘금 일당에 의한 송진우 사장 식도원 폭행사건 및 그로 인한 안팎의 물의,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에 의한 동아일보 배척운동과 일제의 언론탄압 가중(연평균 15회 압수가 24년 한해 56회로 증가) 등이 잇따르면서 커다란 위기상황에 몰렸다. 평소 송진우 사장과 알력이 심했던 이상협 편집국장이 식도원 사건을 트
집잡아 많은 동조사원을 이끌고 퇴진하는 자중지란이 벌어지면서 한꺼번에 먹구름이 몰려든 것이다.

 

  5월14일 임시주주총회는 남강(南岡) 이승훈(1864∼1930)을 제4대 사장으로, 오산학교 교장인 홍명희를 주필 겸 편집국장에 영입하기로 결의했다.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기에 오산학교 설립자와 교장을 난관극복의 선봉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승훈은 취임후 첫 중역회의에서부터 사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승훈 사장의 노력으로 큰 고비를 넘기는 듯했으나 9월에 다시 최익진 공장장과 유광렬 사회부장, 최영목 정리부장 외에 5명의 중견기자들이 일시에 퇴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취임 5개월 만에 고문으로 물러앉고 인촌이 제5대 사장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고문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이승훈은 평안북도 정주로 내려가 그가 설립한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산학교를 떼어놓고 이승훈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운동에 뜻을 품고 교육사업에 헌신하기로 한 이승훈은 오산학교 경영에 유기공장 사업으로 모은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은 것은 물론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1907년 그의 나이 43세 때 평양 모란봉 아래 공설운동장에서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은 이승훈은 강명의숙과 오산학교 설립, 신민회 가입,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참여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으면서 때로는 전면에서 때로는 뒤에서 오산학교를 키워왔다.

 

  남강은 4대 사장 취임에 앞서 1922년 7월 네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에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계 대표로 천도교 지도자들을 규합하는 데 크게 기여한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가출옥하게 된다. 출
옥하자마자 수인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주장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한 것으로, 일제탄압에 굴하지 않는 투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글 황의봉 (동우회보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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