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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11> 최남선

Posted by 신이 On 7월 - 27 - 2018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1호) 

 

 

동아일보 빛낸 ‘조선 3대 천재’  

 –  최남선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는 ‘조선의 세 천재(三才)’였다. 세 사람은 도쿄 유학생 출신으로 언론과 문학활동을 병행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를 아끼는 절친한 친구였다. 이들은 약간씩 다른 활동으로근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동아일보를 활동무대로 민족의 정체성을 널리 전파하였던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세 사람은 언론 이외의 분야 활동이 워낙 두드러졌기 때문에 오히려 ‘언론인’이라는 사실은 자신의 그림자에 묻혀버린 경향이 있다.(중략)

시대일보는 최남선이 1924년 3월 31일에 창간한 신문이다.

 최남선은 1908년 초에 신문관(新文館)을 세우고 ‘소년’(1908.11)을 시작으로 적어도 6종의 잡지를 발행했다. 그는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귀중한 고전과 실용서적을 발행하여 1910년대 무단통치 기간 조선의 아카데미아를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3·1운동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가 투옥되었고 출옥 후에는 타블로이드판 20페이지 주간 신문 형태의 ‘동명’(東明)(1922.9.3)을 창간하였는데 이듬해 6월 3일까지 통권 41호를 발간한 후 주간신문은 중단하고 새로운 일간지 ‘시대일보’(1924.3.31)를 발행했다.

 

 시대일보는 기존 신문보다 편집과 내용이 참신하여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최남선은 신문경영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계속해서 투입할만한 재정적인 능력은  없었다. 여러방면에서 자본을 끌어들일 계획이었으나 투자를 약속했던 사람들이 이행하지 않았다. 신문은 구독료와 광고료를 수입원으로 운영하는 기업인데 구독자의 숫자도 제한되어 있었고, 빈약한 조선의 당시 경제상황에서 광고 유치도 여의치 않았다. 4년 먼저 창간된 동아일보는 김성수의 재정적인 뒷받침으로 안정된 운영이 가능했지만, 조선일보도 경영난으로 주인이 여러차례 바뀌는 진통을 겪던 시기였다.

 

 최남선은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창간 2개월 후인 6월 2일, 사교(邪敎) 집단이었던 보천교(普天敎)에 발행권을 넘긴다는 조건으로 경영에 소요되는 자본을 끌어들이는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에 직면하자 신문 경영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후임 사장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홍명희가 맡았다. 하지만 홍명희도 경영난을 타개하지는 못하고 1926년 8월 중순부터는 발행을 중단하였다. 이와 함께 무한책임사원 전원이 퇴사함에 따라 시대일보는 발행허가가 소실되어 2년 5개월 정도의 짧은 수명으로 종간하고 말았다. (중략)

 

 홍명희가 동아를 떠나고 이광수가 복직하던 때인 1925년 8월 최남선이 동아일보에 촉탁기자(∼1928년 10월)로 입사했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단군과 백두산을 주제로 논문을 실었다. 1926년 3월 3일부터 7월 25일까지 「단군론,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 연원연구(淵源硏究) (77회)를 연재하여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식민사관에 맞선 논리를 전개했다. 단군론이 50회까지 연재되고 있던 6월 22일에는 최남선이 백두산 참관단에 참여한다는 ‘사고’가 실렸다.

 최남선은 ‘단군론’ 연재를 끝낸 지3일 뒤인 7월 28일부터 ‘백두산 근참(覲參), 광명은 동방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10월 28일까지 68회 연재된 백두산 기행문은 한반도 전체가 백두산을 영봉으로 형성된 듯이 묘사하면서 웅건한 필치로 나라사랑의 마음을 펼쳐나갔다. 우리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을 어둠 속에 묻어두었음을 한탄하고 정계비(定界碑)에 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여 학술적인 고증을 겸하였다.(중략)

 이광수와 최남선은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이 공정한 평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언론활동은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후략)

 

                                                                                                           – 글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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