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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9> 이광수

Posted by 신이 On 7월 - 26 - 2018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1호) 

 

 

동아일보 빛낸 ‘조선 3대 천재’  

   이광수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는 ‘조선의 세 천재(三才)’였다. 세 사람은 도쿄 유학생 출신으로 언론과 문학활동을 병행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를 아끼는 절친한 친구였다. 이들은 약간씩 다른 활동으로근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동아일보를 활동무대로 민족의 정체성을 널리 전파하였던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세 사람은 언론 이외의 분야 활동이 워낙 두드러졌기 때문에 오히려 ‘언론인’이라는 사실은 자신의 그림자에 묻혀버린 경향이 있다.

 

 동아일보에 제일 먼저 입사하여 가장 오래 근무했던 인물은 이광수였다.  1907년 1월부터 매일신보에 ‘무정’을 발표하여 근대문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으며 6월에는 매일신보-경성일보 ‘특파기자’에 임명되어 두 신문에 한국어와 일어로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게재(6.26~9.7)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3?1운동 후 상하이에서 ‘독립신문’(1919.8.21 창간) 사장을 맡아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경력이 있었다.

 

 이광수는 1923년 5월 16일 동아일보 촉탁기자로 입사한 이래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거나 발병으로 휴직을 하면서도 편집국장 두 차례, 소설 13편을 연재했다. 논설, 사설, 소설, 횡설수설 등 “신문의 4설(說)을 도맡았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였다. 이광수의 소설 때문에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도 많았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광수는 동아 입사 후 1년이 지나지 않았던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연속논설 ‘민족적 경륜’을 연재했다가 4월 26일 일단 동아일보에서 퇴사했다. 민족주의 강경파와 사회주의 성향 청년 학생 등이 합세하여 동아일보 비매동맹(非買同盟)을 형성하고 각지에 성토문을 내는 등 격렬한 공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동아 입사 1년 전인 1922년에는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는데 식민통치의 극복을 위해서 철저한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하며, 도덕성 회복을 주장하는 논리를 폈다가 비판의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이광수가 물러난 지 약 20일 후인 5월 15일에 홍명희가 입사하여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았다. 동아 입사 전에는 언론경력이 없었지만 입사와 동시에 중책을 맡은 것이다. 이광수와는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긴밀한 우정을 쌓았던 사이였다. (중략)

 

 이광수는 홍명희가 동아를 떠나 시대일보로 옮긴 뒤인 1925년 8월에 복직하여 1926년 11월 8일에는 편집국장을 맡았으나 1927년 9월 10일에 폐병으로 일단 국장직을 사임했다. 신장결핵(腎臟結核)으로 1929년 5월 24일 좌편신장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은 뒤 12월 두 번째로 편집국장에 취임(1929.12~1933.8)했다. (중략)

 

 편집국장 재임 중에 이광수가 벌인가장 큰 민족운동 캠페인은 이순신장군 유적보존운동과 브나로드운동이었다. 충남 아산 충무공 묘소의 위토가 후손의 부채로 말미암아 경매 직전에 놓이게 된 사실을 동아일보1931년 5월 13일자에 상세히 보도하면서 보존운동이 시작되었다.

 

 이광수는 편집국장의 중책을 잠시 내려놓고 5월 19일 ‘충무공 유적순례’의 길에 올랐다. 5월 21일 지면에서 시작하여 6월 11일까지 기행문 15회를 연재했다. 역사 소설을 쓰는 소설가, 언론인, 논객의 면모가 동시에 드러난 르포기사인 동시에 기행문이었다.

 

 신문사로 돌아와서는 6월 26일부터역사소설 ‘이순신’ 연 재를 시 작하여 1932년 4월 3일까지 178회로 끝을 맺었다. 민족정기를 고양하고 충무공유적보존운동을 독려하는 캠페인 소설이었다. 이 운동은 전국적인 호응을 얻어 성금 16,021원30전으로 사당과 영정을 모시고 남은 돈 386원 65전은 현충사 기금으로 하여 동년 6월 5일 영정 봉안식을 가졌다.

 

 동아일보는 1928년 4월 1일을 기해 ‘글장님 없애기 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다. 이광수는 신병으로 그 전해 9월 10일 편집국장을 사임하고 편집고문으로 전임한 상태였다. 하지만 총독부는 운동을 시작하기 직전인 3월 29일 금지명령을 내렸다. ‘문맹퇴치’라는 표어가 러시아로부터 번져 나왔으며 포스터에 붉은 근육의 노동자를 그려 넣어 공산주의적 색채가 풍긴다는 이유였다.

 

 동아일보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31년부터 문맹타파를 비롯하여 농촌계몽운동으로 범위를 확대한 브나로드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편집국장 이광수의 역사관에 현실인식을 반영하여 실천적으로 구현한 사업이었다.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동아일보는 1월 1일 특집으로 ‘식자(識者)운동, 낙오의 설치(雪恥)는 문맹타파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20개 보통학교 선생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열고 한글과 숫자 계산법을 가르칠 방법을 토론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한글강습 외에도 위생강연, 학술강연 등 광범한 계몽운동이었고 문맹타파가 주축이었다.

 

 이광수는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하면서 1932년 4월 12일부터 ‘흙’을 연재했다. 농촌계몽 운동을 그린 캠페인 소설이었다. 6월에는 단군릉 답사계획을 세우고 이광수가 직접 떠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사회부장 현진건이 답사했다. 동아일보는 단군릉 수축(修築)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다.

 

 이광수는 1933년 8월 23일 조선일보 부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이 공정한 평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언론활동은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후략)

 

 

                                                                                                                          – 글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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