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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8> 이상협

Posted by 신이 On 5월 - 31 - 2018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0호) 

 

     

        

 민중의 길잡이 창간 실무주역 3人-  이상협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간주역 들을 훑어보면 20대 청년들이 주동이 된 청년신문이란 것을 알 수 있지만 유근(柳瑾), 양기탁(梁起鐸) 등 노장층 두명이 편집감독이란 이름으로 끼어있다. 일종의 부조화(不調和)랄 까, 심한 세대적 격차가 느껴진다. 창간주역인 김성수가 29세이고 주간 장덕수가 26세, 편집국장 이상협이 27 세, 정경부장 진학문은 26세, 정경부의 핵심멤버인 염상섭은 고작 23세 였다. 이에 반해 편집감독 유근이 59 세의 노령이고 양기탁은 49세의 장년 으로 노장년 원로층이 앞줄의 청년들을 뒷받침하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중략)

 

  1919년 3⋅1운동 후의 열화와 같은 독립열망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상협 장덕준 등이 신문창간의 자금마련을 위해 김성수를 만났을 때 이들을 도운 것도 유근이었다. 당시 김성수는 중앙학교와 경성방직 개편 준비로 신문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는데 그를 참여의 길로 인도한 사람이 유근이 었다. (중략)

 

 유근 양기탁 등 두 편집감독은 창간호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 「지(知)아? 부(否)아?」란 기명기사로 얼굴을 보인 이후 직접 지면에 나타나지도 않고, 제작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주간 편집국장 이하 제작진 전원이 20대의 젊은이들인데 노령의 편집감독들이 끼어들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근은 틈만 나면 신문 사에 나와 젊은 기자들을 격려하며 그들을 붙잡고 바둑을 두기도 하고 한담도 즐겼다. 그 당시 신문사 경영이 핍박해서 기자들이 몇 달씩 월급을 받지 못하여 하숙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있었으며 편집국 책상 위에서 쪽잠을 자는 기자들도 있었다. (중략)

 

 편집국장 이상협은 동아일보 창간의 실질적인 산파역이었다. 1919년 가을 총독부에 제출한 신문 발행 신청서도 그의 명의였다. 이상협은 1911 년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매일 신보에 입사한 이후 편집과장을 역임 하기도 한 당대 조선사회에서는 신문 계의 제일인자로 꼽혔다. 신문 편집뿐 아니라 인쇄 광고 판매에 이르기까지 그는 만능의 신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설가로서도 명성을 떨쳐 「재봉춘」 (1912년), 「눈물」 (1917 년)등 작품이 있고 「정부원」 (貞婦 怨⋅1914년) 등의 번안소설도 있다. 27 세의 청년이었으나 당시 그의 사회적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는 또 사회부장 정리부장까지 겸하여 편집국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 당시 기자들 중에는 신문경력이 전무한 초년생들이 많았으니 편집국이 그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끄는 당시 동아일보의 지면은 3⋅1운동 이후의 사회분위기를 투영하듯이 연일 불을 뿜었다. 조선독 립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격렬한 기사가 잇따랐다. 사이토(齊藤實)총독 투탄사건의 강우규 의사 공판기사, 황태자 이은(李垠)의 약혼녀인 민규수 비화 등 당시 민족감정에 불을 지르는 기사들이 연일 계속되었다. 1923 년 9월 일본 관동지방의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전파되는 등 심각한 재해가 일어나자 일본당국은 느닷없이 조선인거류민의 폭동설을 유포하여 조선동포 3천명이 피살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편집국장 이상협은 재해현장인 도쿄를 직접 취재 보도하기도 했다. 1924년 4월 박춘금테러사건 등으로 동아일보사가 심각한 내홍에 휩싸였는데 이때 이상협을 위시하여 많은 기자들이 신문사를 떠났다. 이해 9월 조선일보가 경영진이 바뀌고 지면을 혁신할 때 이상협과 함께 여기에 참가한 기자들 거의가 동아일보 창간멤버들이었다. 이상협은 1926년 에는 중외일보를 직접 창간 경영하였 으나 신문이 경영난에 빠지며 이후 그의 신문인으로서의 성가가 빛을 잃기 시작했다.

 

                                                                                                                           – 글 이종석 (장지연기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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