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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4> 장덕수

Posted by 신이 On 4월 - 3 - 2018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59호)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民族·民主·文化 社是 만든 웅변가

 

 

설산 장덕수 ( 雪山 張德秀, 1894~1947.12.2)는 동아일보 초대 주간(주필)으로 창간호 1면에 실린‘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를 집필한 인물이다. 이론이 정연하고 웅변가였던 그는 당시 26세 청년이었다. 창간사는 ①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②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③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라고 밝혔는데 오늘날까지 동아일보의 사시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장덕수는 황해도 재령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과 아우 삼형제가 모두 의롭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이다. 형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 1892.6.29~1920)은 동아일보 창간 논설위원으로 한국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었고, 동생 장덕진(張德震, 1898~1924)은 상하이 임시정부 의경단원(義警團員)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려다 중국인의 총에 맞아 숨졌다. 3형제가 비명(非命)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장덕수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다가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연의학교(私立演義學校)에서 공부하였다. 1907년부터 1912년 사이에는 진남포 이사청과 평양부청의 급사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1911년 보통문관(판임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예과를 거쳐 정경학부에 진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는 전일본 학생웅변대회에 1등 입상했을 정도로 뛰어난 웅변가였다. 졸업 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呂運亨)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고, 1919년 2월 국내로 잠입하려다 인천에서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荷衣島)에 유배되어 있던 중 3·1운동 후 여운형이 일본정부 초청으로 도일했을 때에 통역으로 지명되어 풀려났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때부터 김성수와 깊은 유대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은 와세다대학 동문이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김성수가 장덕수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장덕수가 창간사를 집필하였을 때의 직책은 주간이었는데, 곧 주간제를 폐지하고 장덕수는 부사장 겸 주필(1921.9~1923.4)이 되어 신임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초창기 동아일보를 이끌었다. 또한 조선노동공제회, 조선청년회연합회, 조선체육회와 같은 조직도 주도하였다.

 1923년 4월 19일에는 부사장 겸 미국 특파원 자격을 지닌 채 미국 유학을 떠났다. 동아일보는 그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1면에 ‘본보 주필 장덕수군을 송(送)함/ 본사 특파의 미국시찰’이라는 글을 싣고 그가 신문사 초기의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공헌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장덕수는 이 때 2년 예정으로 도미하였지만 13년 동안이나 귀국하지 않았다. 처음 1년간은 오리건대학 신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뉴욕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에서 MA학위를 받은 뒤 영국 런던대학에서 3년간 산업정책을 연구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영국산업평화에 관한 방법론; British Methods of Industrial Peace’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산업평화(Industrial Peace)’란 말은 그때 조선에 처음 소개되었다.

 장덕수가 런던에서 영국의 산업정책을 연구하던 때에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에서 물러난 후 중앙고보를 재단법인으로 만드는 일을 추진하여 1929년 2월 23일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는 12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1년 8개월간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견문도 넓힐 겸 선진 여러 나라의 교육시설을 직접 살펴보자는 목적이었다. 이 때 런던대학에 유학 중이던 장덕수는 김성수의 여행과 유럽 여러 나라 정세를 살피는 과정을 도왔을 것이다. 김성수는 런던에 1년 동안 머물면서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를 둘러보았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37년 1월에 귀국한 장덕수는 동아일보에 복귀하지 않고 취체역(이사) 직책을 유지한 채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었다가 해방 후 1945년 12월 복간되었을 때에도 취체역에 피임되었으나 그의 활동무대는 언론이 아니라 정계였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 때 외무부장을 맡았고, 그후 같은 당 정치부장으로 수석총무(당수)인 김성수를 도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앞두고 헌신하던 중 1947년 12월 2일 제기동 자택에서 괴한의 흉탄에 쓰러졌다. 

                                                   – 글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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