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59호)
고하 송진우 (古下 宋鎭禹)
일장기 말소 당시 사장을 지낸 선각 언론인,
민족 지도자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는 일제강점기에 근대사를 열어간 선각자로 항일 독립운동과 애국애족운동에 심혈을 쏟은 민족지도자이며 정치가요, 선구적 언론인이다.
고하는 1890년 담양에서 송훈(宋壎)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6년 창평 영학숙에 입학,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와 만났다. 1915년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후 귀국해 인촌과 함께 중앙고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했다.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동원망을 조직하고 국내외 각계 지도자와 제휴를 모색하면서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 현상윤, 최남선, 최린 등과 조국독립운동을 기획했다. 이어 1919년 3·1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48인중 1인으로 피검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내란죄, 보안법 등 죄목으로 1년반동안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고하는 1921년 동아일보 제3대 사장에 취임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을 추진하고 전국 우량어린이 선발대회, 여자정구대회 등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다. 또 여름방학마다 브·나로드라는 국민계몽운동을 4년간 계속했는데 이 역시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단되었다. 그 즈음 조선총독부는 수많은 친일조직들을 규합하고 있었는데 1924년 동아일보는 ‘소위각파 유지연맹에 대하여’라는 사설로 이를 강력 비판했다. 이 일로 총독부 압력으로 동아일보 사장에서 물러났다.
1925년 하와이 제1회 범태평양민족회의에 신흥우, 유억겸, 서재필, 김활란 등과 함께 참석한 후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명논설을 12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게재, 선각적 시각으로 조선의 장래를 조망해 주목을 끌었다. 이듬해에 모스크바 국제농민회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낸 3·1운동 7주년 기념사 ‘국제농민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를 동아일보에 게재했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동아일보는 제2차 무기정간되었다.
고하는 1927년 동아일보 제6대 사장에 재취임해 문맹퇴치운동을 광범위하게 펼쳤으며. 1930년 동아일보 창간 10주년을 맞아 동아마라톤대회를 창설, 개최했고 10주년 기념호에 미국 네이션지 주필의 축사를 게재했는데 그로인해 동아일보는 제3차 무기정간을 당했다.
1931년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했고 동아일보 전속 삽화가 청전 이상범에게 충무공의 영정을 그리도록 해 그해 6월 5일 새 사당에 영정 봉안식을 거행했는데 이날 수만의 백의인파가 몰려와 주변의 산야를 뒤덮었다. 그해 만보산사건이 발발하자 고하는 일본의 한중(韓中)이간의 간계임을 간파, 사설로 한중 양국민간에 보복중지를 호소했고 설의식, 서범석 기자를 특파하여 취재 보도했으며 비밀리에 국제연맹조사단에 진실을 알리기도 했다. 뒤에 장제스가 감사패를 보내왔다.
고하는 민족의 대각성, 대단결 목표로 1931년 월간 신동아(新東亞), 1933년 조선여성 권익신장을 위해 월간 신가정(新家庭) (여성동아의 전신)을 창간했으며 1936년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삭제 보도할 때까지 동아를 이끌었다. 이길용, 백운선 기자, 이상범 삽화가 등에 의해 발생한 소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은 제4차 무기정간을 당했다. 신동아, 신가정의 폐간과 함께 고하는 동아일보 사장직을 강제로 사임했다.
1945년 해방직전 4차에 걸쳐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교섭을 받았으나 불응하고 연합군 환영을 위한 국민대회준비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민족진영의 4당 합당에 따라 결성된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당수)로 추대되었다. 이어 중간(重刊)된 동아일보의 제8대 사장에 취임했다. 고하는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을 이끌면서 12월 28일, 29일 임정요원들과의 회의에서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면서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해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력하는 등 나라세우기에 진력하다가 12월 30일 아침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저격을 받고 별세했다.
평생친구 위당 정인보는 “고하가 일제 암흑시대에 불굴의 정신으로 민족을 이끌고 희망과 빛을 주어 갈길을 밝힌 공로는 임란시의 충무공의 공적에 비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 글 조강환 (동우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