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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 박영효

Posted by 신이 On 4월 - 3 - 2018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59호) 

                                           

                 

       춘고 박영효 (春皐 朴泳孝)  

일제도 무시못한 개화파 기수, 초대 사장 맡아

 

 

 

 

 춘고 박영효(春皐 朴泳孝, 1861∼1939)가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한 것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인촌은 동아일보 창간 1년 전인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할 때 총독부가 하도 까다롭게 굴어 설립허가 신청서에 박영효를 사장으로 이름을 올려 겨우 인가를 얻은 경험이 있다.

 인촌이 동아일보 발행인가 신청 때도 그를 추대하기로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조말 개화파의 기수였던 박영효는 한일합병 때 일본으로부터 후작을 받고 조선귀족 회장이 되어 세간에서는 그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12대 사장을 지낸 최두선의 말처럼 박영효는 개화운동에 관계했고, 민족정신도 있고, 총독부에서도 호락호락하게 보지 못할 인물이었다.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로 조선왕실의 일원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비록 한일합병에 항거하고 싶어도 행동에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고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가 무자비하게 시위군중을 살상해 세계의 관심이 쏠리자 실태조사차 서울에 온 일본 국회의 각파 대표들에게 “통치는 역시 조선인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조선인들도 아마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다” 는 등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만세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들이 수립되었을 때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생긴 대한국민의회에서는 그를 부통령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3·1운동의 폭발로 종래의 무단통치에 한계를 느낀 일본정부는 한국인들에 대한 유화정책, 즉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전환했다. 일본정부는 그 일환으로 당시 총독부 기관지밖에 없던 조선에 한국어 민간지를 허가하기로 했다. 그 내용은 친일신문과 중립지, 그리고 민족지를 각각 하나씩 발행토록 하는 것이었다.

 박영효가 이 중에서 민족지 동아일보의 발행에 참여한 것은 역시 그의 결단이었다. 당시 박영효는 총독부에 제출된 동아일보 설립 발기인 78명 명단의 맨 앞에 그의 이름을 넣었다.

 하기야 박영효는 일찍부터 신문에 큰 관심을 가진 개화파로 한국역사상 최초의 근대신문 발행사업에 관여한 인물이다. 그는 동아일보 발행시기보다 38년 전인 1882년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 교육장려, 신문발행, 신식군대양성의 3대 국정개혁안을 고종에게 올려 윤허를 받았다. 그는 신문발행은 자신이 한성부윤으로서 직접 담당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수구파의 책동으로 그가 한성부윤 자리에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는 바람에 당시 계획했던 한성순보(漢城旬報)의 발행업무가 그의 손에서 떠나 창간호 발간이 1년정도 늦어진 일이 있다.

 박영효가 동아의 초대사장으로서 남긴 훌륭한 공적은 창간호 지면에 밝힌 동아일보의 사시인 ‘3대 주지(主旨)’이다. 그 내용은 ①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②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③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라는, 100년이 지난 현재 기준으로도 멋진 표현이다. 1920년 1월 14일 발기인총회에서 사장에 박영효, 편집감독에 유근, 양기탁, 주간에 장덕수, 편집국장에 이상협, 영업국장에 이운 등의 진용이 결정된 직후 박영효의 자택에서 이들 회사 간부들이 회합을 갖고 이 주지를 결정했다.

 박영효는 사장 취임 2개월 째인 1920년 5월 8, 9일 양일에 걸친 문제의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棒)’이라는 칼럼이 유림의 반발을 사 물러났다. 이 칼럼의 내용은 한국의 유학자들이 시대착오적인 중국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었다. 유림측이 신문불매운동 기세를 보이자 박영효는 회사로 서한을 보내고 사과문을 싣도록 종용했다.

 회사간부들은 사안이 중대한 만큼 사원총회를 열어 토론했지만 사과문 게재에 뜻을 모으지 못했다. 이에 박영효는 ‘사장으로서 회사를 통제하지 못하는 지위를 지키고 있을 수 없다’하여 6월 1일자로 스스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후임에 인촌이 취임했다. 박영효는 그후 총독부 중추원 의장과 일본 귀족원 의원에 피선되었다. 이 점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   글 남시욱(화정평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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