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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1일자부터 게재된「공기총」난의 필자는 최호(崔皓)였다. 몇자 안되는 글자 속에 사회풍자를 매섭게 쏘아대는 이 난은 1961년초까지 실리다 중단된 뒤 1963년 8월 15일자에 ‘부활’했으나 다음해 다시 중단됐다.

 

“이 난은 단상단하(壇上壇下)란과 거의 같은 시기에 게재되어 고정됨으로써, 양 란은 정치 · 사회의 압권으로 동아일보 독자의 인기물이었다.” (동아의 지면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 50년대 초에서 60년대에 걸친 10여년동안 많은 독자의 공감을 샀던 사회면 칼럼 「공기총」은 최 국장의 작품이었다.「고바우 영감」「단상단하(壇上壇下)」와 더불어 동아일보의 인기물로서 격찬을 받았던「공기총」은 그의 예리한 관찰력 위트, 글을 갈고 다듬는 재능을 단적으로 일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달의 얼굴-동아방송 방송국장 최호 씨, 신문과방송, 1977년 9월호 통권 82호, 93쪽)

 

최호(崔皓) (서울, 1924~    ) ▲ 52. 9 기자, 취재2부차장, 취재2(사회)부장, 조사부장, 편집국부국장, 편집국장대리(소년동아 담당), 상임정책위원, 동경지국장, 편집국장, 이사 방송국장(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동아일보에서 편집국장과 동아방송 국장을 모두 역임한 사람은 최호가 유일하다. 그만큼 그는 뛰어난 ‘東亞맨’이자 기자였다.

 

다음은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대한언론인회 발행, 2010)에 “사회부 기자 때부터 ‘공기총’ 집필”이란 제목으로 실린 崔皓 (1924~2005)기자론.

 

○1924년 2월 19일 함경남도 함주(咸州) 출생, 2005년 4월 17일 별세 ◇학력 일본 와세다 고등 학원 졸업(45) ◇주요경력 동아일보 취재2부 기자, 사회면 단평 ‘공기총’집필, 동아일보 편집국 취재2부 차장, 사회부장, 동경지국장, 편집국장(이사) 동아방송 국장(이사)(77) 연합통신 상임감사(83) 한국정치 PR연구원 원장(99) ◇저서 ‘공기총’ 사회 촌평란 집필(56~68)

 

사회부 기자 때부터 ‘공기총’ 집필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꾀하던 50년대를 거쳐 5 16군사 쿠데타로 정치의 전면에 나선 군부세력이 민정이양으로 정권을 잡게 되는 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은 한국의 정치는 혼란했고 사회는 암울했으며 국민은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세태를 신문지면의 한구석에서 꼬집고 비틀고 때로는 거침없이 찌르면서 촌철의 위트와 해학으로 서민의 답답한 심경을 어루만지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던 단평이 동아일보 사회면의 ‘공기총’이었다.

50년대의 동아일보는 백광하(白光河)기자의 정치칼럼 ‘단상단하(壇上壇下)’와 최호(崔皓)기자의 사회면 단평 ‘공기총’ 그리고 김성환(金星煥) 화백의 시사만화 ‘고바우’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최호기자의 ‘공기총’은 그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듬해인 1953년 4월 1일부터 사회면에 선을 보였다. 불과 서너 줄, 때로는 10여행의 짤막하면서도 예리한 풍자와 특유의 시사비평으로 수많은 고정 독자를 가지고 있었다. 독자에게는 시원한 통쾌감을 안겨주지만 정작 그 따끔한 공기총에 맞은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는 거의 치명적인 촌철살인의 아픔을 느끼게 했다.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당시의 ‘공기총’을 몇 가지 소개함으로써 최호의 번뜩이던 촌철의 해학을 음미해보자. 느낌을 그대로 전하는 뜻에서 한자표현을 살렸다.

 

『黨訓―三大自由』

1. 分黨自由

1. 內紛自由

1. 聲明自由

― 自由黨 (1953년 5월 2일 개점휴업의 국회비판)

 

『搜索願』

選良들의「志操」를 찾아주십시오. ― 國民

(1953년 4월 2일 자유당의 내분을 풍자한「공기총」)

 

『昻騰理由』

당신이 없으니 내 맘대로 해볼 작정입니다. ― 物價

白總理貴下

(1953년 6월 7일 물가파탄 속의 백두진 총리 외유를 비판)

 

『獨島侵占』

저는 火災터 좀도둑이외다 …―日本首相

(1953년 7월 4일 일본 시마네현 경찰 독도에 상륙, 우리어민 6명을 강제 퇴거시키고 ‘竹島’팻말을 꽂은 사건 발생)

 

최호의 공기총은 시대와 세태를 냉철하게 반영하면서도 정치권력에 굴하지 않는 그의 강직한 기자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50년대 초 자유당이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꾀하던 개헌시도를‘공기총’으로 예리하게 꼬집었고, 특히 혼탁했던 선거분위기 속에 국회를 도외시하던 의원들을 가차없이 비판하기도 했다.

 

『改憲案續出』

내 얼굴이 그렇게도 못났는지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있습니다.

― 憲法 (1954년 3월 21일)

 

『改憲案上程』

「擧手機」試運轉中

― 自由黨 (1954년 11월 26일)

 

『分裂症』

名牌는 議事堂에

身體는 出馬地에

精神은 得票數에

― 缺席議員 (1954년 2월 21일)

 

『招請狀』

多忙中罪悚하오나 上京時에는

一次議事堂에 來訪하여 주시옵

기 仰請하나이다. ― 國會議長

議員諸位 (1954년 4월 25일)

 

나날의 동아일보 사회면의‘공기총’을 읽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찬바람이 들게 했던 이 단평은 최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분신과도 같았다. 동아일보 수습1기 출신의 남시욱(南時旭) 전 문화일보 사장은 최호가 사회부장 시절에 사회 부원이었다.

“냉정한 분이었어요. 찬바람이 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원리원칙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서슬 퍼렇던 자유당 시절에도 사회부장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역시 동아일보 수습1기 출신의 박경석(朴敬錫)전 국회의원도 “사리가 분명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최호-이명동’ 콤비, 5천분의 1의 사진특종

 

2010년 인촌상(仁村賞) 언론부문 수상자인 이명동(李命同)전 동아일보 사진부장 부국장은 최호와의 오랜 인연을 ‘악연(惡緣)’이라고 표현했다.

“치밀하고 꼼꼼했어요. 사회부원들이 그 앞에서는 꼼짝 못했지요. 함경도 출신에 곱슬머리, 옥니에 최 씨 아닙니까. 화날 때도 화도 안내고 조용히 한마디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힘이 있었어요.”

50년대 중반에는 사진부가 따로 없이 취재부서 장의 지휘를 받았다. 최호부장은 언제나 이명동을 찾았다. 사건현장의 사진, 사건주인공의 인물사진에서부터 선거와 국회 등 정치현장의 사진을 누구보다 중시하고 챙겼다. 사회부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사진기자 이명동은 최호의 사진취재 독려에 시달린 나머지 화장실에서 만난 사회부원 이효식과 함께 “저 독종 칼로 찔러 직여(죽여)버릴까 부다”하고 ‘최호부장 살인모의’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동은 최 부장의 사진취재독려에 시달리는 가운데 신문지면에서 사진과 영상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최호부장에게서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사회면에서 사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한 실제로 사진을 과감하게 실어 현장 감각을 살림으로써 보도 저널리즘을 실재화(實在化)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말한다. 사회부장 시절에는 옆에 항상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현장이 발생하면 곧바로 투입했던 것. 언제나 신문마감 30분전에는 사진기자로 하여금 취재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30분간 돌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명동이 “서울 시내에 이상 없음”이라고 보고하면 그는“4백만 명이 사는 서울시내에 아무 이상이 없어요? 당신 눈이 이상한 것 아니요?”라고 쏘아붙였다.

이명동은 최호 사회부장의 사진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는 ‘취재비화’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최 부장으로부터“서울시내 다방 종업원(레지)사진 앨범을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서울시내 다방이 1천여 곳이나 되었으니 4천~5천명의 얼굴을, 그것도 본인들 몰래 찍어야 할 판이다. 하는데 까지 해보자는 심경으로 다방을 순례하면서 가슴앞자락에 숨겨진 라이카 카메라로 열심히 찍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충무로의 유명한 모니카 다방의 미모의 레지가 헌병대 소속의 군인에 의해 총으로 피살되는 치정살인사건이 발생하여 모든 신문사가 이 레지의 사진 구하는데 필사적이었다. 이때 이명동은 그동안 모아둔 다방레지 앨범에서 그 레지의 사진을 찾아내 최호 부장에게 전달, 동아일보는 큰 특종을 하였다.‘ 5천분의 1’의 확률로 이룬 사진특종은 각고의 노력의 소산이었으며‘최호―이명동’콤비의 치밀한 사진 저널리즘의 결실이었다.

사진취재에 얽힌 또 하나의 에피소드. 1952년 4월 야당의원 서민호(徐珉濠)씨가 ‘살인피고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 최호부장은 이효식 기자에게 옥중인터뷰를, 이명동 기자에게는 인터뷰 사진취재를 지시했다. 이명동은 “형무소에 갇혀있는 사람의 사진을 어떻게 찍느냐”며 못하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최호 부장의 집념은 끈질겼다.“ 한 달, 반년, 아니 1년이 걸려도 좋으니 찍어오라”는 취재지시는 계속되었다.

몇 달간의 공작 끝에 두 기자는 서 씨의 가족을 가장하여 가족면회 때 형무소에서 서씨를 만날 수 있었고, 이명동은 코트 앞쪽에 감춘 카메라로 천신만고 끝에 서씨의 사진 한 커트를 입회간수 몰래 찍는데 성공했다. 옥중인터뷰 기사와 사진은 특종으로 인쇄공장의 연판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서씨 가족이 어떻게 알고는 회사에 찾아와“이 사진 나가면 다시는 면회 못 한다”면서 눈물로 매달리는 바람에 사진은 온통 연판이 긁힌 채 신문이 인쇄되었다. 그러나 장안에서는 서 씨의 옥중사진이 분명 있는데 당국의 압력 끝에 지면에는 자국이 긁힌 채 불발된 것으로 다들 인식하여 더 큰 효과를 보았다고 이명동은 회고했다.

“최호는 한마디로‘뉴스의 화신’이었어요. 24시간 뉴스만 생각하면서 뉴스에 어떻게 하면 사진을 붙여서 현장 감각을 살릴까를 생각하는 분이었지요.”

1959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한 홍성혁(洪性革)전 사진부장 부국장도 최호 부장과 일을 함께했던 기억을 회상 한다.“ 말이 없는 가운데 분위기가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어요. 하루는 최 부장이 전화를 걸어서 ‘오늘이 춘분이지요?’하는 한마디를 하고는 전화를 끊더군요. 더 이상 군더더기 지시가 필요 없다는 뜻 이지요.”

 

5 16과 함께 ‘공기총’도 수난의 길

 

다시 ‘공기총’으로 돌아가자. 4 19당시 대학생이었던 조선일보 기자출신의 허문도(許文道) 전 문광부 장관은“당시 대학생들은 거의 모두 공기총의 애독자였습니다. 공기총을 보고 4 19 데모에 뛰쳐 나간거지요”라고 회고했다.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계에서나 정부기관 등 관계에서는 공기총이 그날의 화제가 되었다. 동아일보 가판 판매대에는 공기총을 보고자 가판을 기다리는 독자들로 줄을 이었다. 공기총은 독자 특히 서민들의 삶을 해학과 풍자로 어루만지면서 독자와 더불어 웃고 우는 삶의 반려자처럼 애독되었다.

그만큼 독자의 인기를 끌었던 공기총에 대한 외부의 압력 또한 적지 않았다. 사회부장 때에도 공안기관의 주시를 받았고,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언론의 길을 걷다보니 후에 편집국장 때에도 몇 차례 연행조사를 받기도 했다. 5 16과 군정, 그리고 민정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공기총도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

“… 1961년 1월 필자의 건강사정으로 쉬게 된 것이 5 16사태로 인하여 때를 얻지 못하다가 1963년 8월 15일에 재개되었다. ‘고바우’가 休載될 때도 그랬지만 속 시원한 ‘공기총’의 재 발사를 갈망하는 소리는 비판부재의 군정기간에 더욱 절실하였다. 예를 들어 1963년 5월 25일에 열린 본보의 서울시내 보급소장회의에서는 18명 가운데 대부분의 보급소장들은 ‘공기총 부활하라’고 아우성이었다. 이에 대해 고재욱 주필은 이렇게 답했다.‘ 공기총은 언론정책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 부활할 방침이다. 독자가 갈망하는 것은 아나 공기총의 성격상 당분간 중단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社史에서)

1963년 8월 15일 마침내 다시 살아난‘공기총’은 2년간의 군정 끝에 박정희가 민정참여문제로 거듭‘번의’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 당시의 세태를 빗대어 다음과 같이 잇따라 쏘아댔다.

 

「第1次飜意」

나도 갑자기 편하게 살아볼 욕심이 생겨서 實彈發射는 保留하겠습니다.

廉恥야 있든 없든… (1963년 8월 19일자)

 

「第3次飜意」

「宣誓」고「나발」이고 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本銃은 앞으로 4個月間實彈發射延期에 대하여 그 可否를「讀者投

票」에 附하여 讀者의 意思를 묻기로 決心하였습니다.

― 空氣銃 (1963년 8월 21일자)

 

공기총은 1964년 동아일보 지면에서 사라질 때까지 10여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후 월간 ‘新東亞’는 복간(復刊)을 계기로 ‘공기총 풍자 10년’이라는 시리즈를 기획하여 공기총 필자 최호로 하여금 10회의 연재물로 쓰도록 하였다. 그 시리즈에서 최호는 공기총의 생성과 소멸을 담담하게 밝힌바 있다.

“공기총을 東亞日報紙上에 쓰기 시작한 것은 1953년 4월 1일 ―어느덧 10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독자와 더불어 웃고 더불어 울며 삶의 呼吸을 같이 해보려고 나 딴에는 애도 써보았지만, 워낙이 菲才인지라 별로 신통찮은 文字밖에 나올게 없었다… 해학과 사회풍자라는 이 短評의 성질상 자연 어두운 면에만 쏠린 듯한 感도 없지 않으나, 바라건대 독자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나마 자신만의 한 가닥 즐거운 연상의 실마리를 찾아주시기를… ”

최호는 新東亞시리즈의 마지막 회 머릿글에서 공기총을 접어야했던 시절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담담히 적고 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불안과 초조와 공포의 불연속선… 軍政에서 民政으로 가기까지의 갖가지 곡절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61년 1월부터 쉬고 있던 공기총은 얼마 후 5 16의 폭풍 속에 계속 쉬는 수밖에 없었고 2년여의 冬眠에서 소생한 것은 1963년 8월―그것은 민정으로 가는 마지막 진통기였다 … ”

 

‘正道의 길’ 걸어온 ‘언론인’

 

최호는 사회부장으로서의 쉴 틈 없는 취재지시와 데스크 워크의 한가운데에서도 매일 아침 ‘공기총’을 집필했다. 초인적인 업무처리 가운데에서도 번개같이 스쳐가는 촌철살인의 해학과 풍자를 단평으로 압축해 내는 집필 작업은 아마도 숙명적인 의무감 때문에 가능했으리라고 비천한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1980년대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감히 상상해 본다. 1967년 내가 동아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했을 때 그는 편집부국장이었다. 견습기자 교육 중에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기자가 되면 무슨 부에 가겠다고 희망 했는가.”

“제1지망에서부터 제3지망까지 사회부라고 적어냈습니다.”

최 국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저녁 최 국장을 중심으로 한 선배들의 저녁자리에 불려갔는데 술 한 잔씩이 돌아가자 최 국장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역시 기자는 사회부 기자를 해봐야지.”

강직한 성품으로서 사내외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어쩌다 ‘2층’(임원실)에서 부탁이 오면 더 크게 썼다. 기자들이 시달리던 끝에 ‘살인모의’까지 하게 된 ‘취재지시’, 지금도 그 분을 상상하면 찬바람이 인다는 ‘명 사회부장 최호’는 ‘기자의 길’을 하드트레이닝으로 가르치면서도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언론인의 표상으로 남았다.

‘正道의 길’을 걸어온 언론인들의 삶이 청렴한 만큼 외로웠듯이 최국장도 퇴직 후에는 고고한 생애를 지냈다. 부인이 먼저 타계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최 국장이 별세했을 때 동아일보에서 부음담당기자가 나에게 생전의 최 국장에 대한 추모의 코멘트를 요청해왔다.

“고인은 유신치하에서 동아일보가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편집국장

으로 취임해 지도력과 포용력으로 후배들을 이끌면서 편집국의 안정적인 분위기를 도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2010년 9월 ‘올해의 仁村賞’ 언론부문 수상자가 동아일보 지상에 발표된 날 언론상 수상자로 선정 발표된 90세의 이명동은 아침 일찍 최호가 살던 자택을 찾아가 장남 준권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가 인촌상을 받게 된 것은 아버지(최호)의 덕분일세. 그 분이 오늘날의 내가 있게 가르쳐주고 만들어 주셨네. 최 국장은 우리나라의 보도저널리즘을 실재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한‘참 언론인’일세.”

이명동은 장남 준권에게 금일봉을 전달하면서 최호가 생전에 자신에게 깨우쳐준 ‘언론인의 길’을 새삼 되새겼다.

내가 그 대선배 최호를 향하여 한번 감히 공기총을 쏘아 바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공기총」子최호를 추모함

―「死제갈 走生仲達」― 三國志의 羅貫中

―「故皓兄猥生命同」― 仁村賞의 이명동

―「아니야 며칠전에 만났는데 나보다 훨씬 무섭고 지략이 뛰어난

독종이드군」

― 天上의 제갈량

 

집필 : 정구종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동아닷컴 사장, 현 동서대 교수 일본연구센터 소장)

 

최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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