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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2 논설위원, 편집국부국장 겸, 논설위원, 주영특파원, 논설위원, 동아연감주간 겸, 신동아․여성동아주간 겸, 상임정책위원 겸, 출판국장, 이사, 편집국장, 출판국장, 74. 2 퇴사. ▲ 재입사, 이사, 논설주간(현). 편집인(현).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19년 1월 17일 함남 풍산 출생, 2010년 9월6일 별세 ◇학력 􄤎함남 중 졸업, 일본 야마구치(山口) 고교 문과 갑류 졸업, 일본 동경대 법학부 법학과 중퇴, 영국 맨체스터대 대학원 석사(65) ◇주요경력􄤎사상계 주간(55~57)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집국 부국장, 주영특파원, 논설위원 􄤎동아연감 주간, 신동아 주간, 여성동아 주간, 상임정책위원, 출판국장, 편집국장(이사), 출판주간(이사) 논설주간(상무이사), 편집인(상동), 안보통일문제조사연구소장(상동)(58~81) 􄤎예술원 회원(86) ◇문학경력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무명로(無明路)’당선, 등단. 단편‘김가성론’‘자유인’‘선인장의 후예’‘제우스의 자살(후에 개구로 개제)’‘오분간’‘바비도’등 발표. 장편‘이성계’‘이마’‘요하’‘왕건’‘임진왜란’‘秀吉朝鮮の亂’‘진시황제’‘시인과 사무라이’(전3권) 발표 ◇수상 제1회 동인문학상(1956), 제5회 아세아자유문학상(1958),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8), 보관문화훈장(1987), 인촌상(1989), 대한민국 예술원상(1995)

 

권력 멀리한 선비형 언론인의 전형

 

하남 김성한(霞南金聲翰)은 언론인으로서 보다는 소설가로서 일반인들에게는 더 유명하다. 작가로서 워낙 거물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의 언론계 경력은 동아일보에서만 23년, 사상계 주간 시절까지 합하면 26년에 달하는 직업언론인이다. 다만 그는 일선기자 출신 직업언론인과는 달리 신문사에 입사할때 처음부터 논설위원으로 영입된 논객이다.

김성한은 동아일보에서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출판국장, 편집국장,출판주간, 논설주간, 편집인 등 지휘라인을 두루 거친 중량급 언론인이다. 그의 생애의 특징은 신문사를 물러난 다음 별세할 때까지 근 30년 간 작품활동을 계속, 대하 역사소설들을 연거푸 세상에 내놓으면서 평생을 문필가로 깨끗하게 지낸 점이다. 이 점에서 참다운 문사(文士)인 그는 무릇 언론인은 정치와 권력을 멀리해야 한다는 구한말 이래의 한국 언론의 훌륭한 전통을 지킨 선비형 언론인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김성한은 함경남도 풍산(豊山)군 천남(天南)면 장파(長坡)리 하남(下南) 마을에서 김해(金海) 김씨인 한학자이자 한의사인 김병협(金炳協)의 5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풍산군은 백두산에서 멀지 않은 개마고원 남동부의 산수가 수려한 지역으로 현재는 김일성 숙부의 이름을 딴 양강도‘김형권군’으로 바뀌었다.

김성한의 고향인 하남 마을은 부근의 큰 호수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었는데 그는 고향 마을 이름을 자신의 호로 하면서‘아래 하’(下)자를 ‘안개 하’(霞)자로 바꾸어‘하남’(霞南)이라 했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부친에게 서예를 배운 다음 중학은 도청소재지인 함흥의 함남중학교를 나왔다. 그의 글씨가 단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김성한은 당시 일본 국내에서 인문계로 이름 있던 야마구치(山口)고등학교에 지원해서 문과 갑류에 다녔다.

혼슈(本州)의 서남단에 위치한 야마구치현은 옛날의 조슈(長州) 지방으로 명치유신 주역들의 고장이자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비롯해 최근까지 일본수상만 7명을 배출한 곳이다.

김성한은 야마구치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일본의 수재들만 들어갈수 있었던 동경제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는 바람에 2년 만에 중퇴하고 귀국, 해방에서 건국과 전란으로 이어진 사회적 혼란기인 1947년부터 53년까지 중학과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아일보사에 비치된 그의 이력서에 의하면 김성한은 인천공립여 중, 한성고 및 숭문고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1953년부터는 동양의학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다가‘사상계’(思想界) 주간으로 언론계에 입문했는데 그 후에도 잡지사 일을 보면서 약 1년간 한국외대에 출강했다. 그가 1950년 초에 단편‘무명로’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것으로 보아 한성고 재직 중 이 작품을 써서 응모한 것 같다.

김성한은 문단 등단 이후 1958년 2월 동아일보에 입사하기 전까지약 5년간 정력적으로 단편들을 발표했다. 앞의 연보에는 이 기간 동안 쓴 ‘바비도’등 그의 대표적인 작품 이름만 올라있지만 실제로는 22편에 이른다. 필자가 그를 처음 뵌 것은 1959년 초 동아일보사 수습기자시험을 칠 때였다.

그는 1차 시험 합격자들에게 구두시험을 실시한 면접위원의 한 사람이었다. 입사 후에 알았지만 그는 당시 편집국장을 잠정적으로 겸하고 있던 고재욱 주필 아래서 정경부장 출신인 백광하와 함께 편집국 부국장을 맡고 있었다.

고재욱 주필은 임원실이 그의 정위치였으므로 무슨 일이 있을 때만 편집국에 들르거나 편집국 간부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에 두 부국장이 사실상 편집국의 책임자 역할을 했다.
예리한 정치단평란인‘ 단상단하’로 이름을 날리던 백광하도 굉장한 영향력을 지닌 언론인이었지만, 김성한은 필자가 대학시절에 읽고 감동한 ‘바비도’의 작가여서 문학에 취미를 가진 애송이 기자였던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시대배경인 1950년대 말은 권력의 부패와 사회적 혼란이 판을 쳐 진리와 정의가 목마른 상황이었다. 그가 쓴 초기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이 같은 사회 부조리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은퇴 후 역사소설에 전념 – 거작들 남겨

 

김성한은 신문사 입사 후 약 8년간 창작활동을 쉬었는데 이는 신문사 부국장 주영특파원 등 바쁜 자리에 근무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그는 신문사 안에서 비교적 덜 바쁜 직책인 출판부문 책임자 자리에 있던 1966년에 장편 3부작‘이성계’를 냈다.

김성한은 그 후 편집국장을 지낸 다음 동아일보 기자해직사건의 여파로 75년 회사의 임원들이 총사퇴할 때 퇴사했다가 77년 재입사하기 까지 약 2년간의 휴직기간에 해당하는 76년, 10년만에 장편‘이마’를 발표했다. 동아일보의 상무 겸 안보통일문제조사연구소장 자리를 마지막으로 1981년 2월 신문사를 떠난 그는 신문사 퇴직 이후 2003년까지 약 20여 년간 작품 활동에 전념해‘요하’‘왕건’‘임진왜란’‘진시황제’등 장편 소설들이 이 때 나왔다.
김성한은 폐암으로 투병하기 직전인 2009년, 즉 90세까지 2년 여간 월간지에 역사이야기인‘야화동서’(夜話東西)라는 연재물을 썼다. 중년이후 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성한은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붓을 놓지 않은 집념의 문필가였다.

김성한은 편집국장과 논설주간 시절 필자가 직접 상사로 가까이서 모신 선배지만 그가 논설주간으로 있던 시절이 필자의 논설위원 기간과 비슷해서 특히 긴밀하게 접촉했다. 필자가 한 번은 자료 조사차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다녀오겠다고 보고를 드렸더니 그는 한 가지 부탁을 하자면서 필자에게 자료 리스트를 주고 이들을 복사해 오라고 했다. 서울대에 도착해서 봉투를 열어보고 필자는 대단히 놀랐다.

그가 복사해 오라는 자료는 모두 초기 고려사 관련 논문들이었다. 지금 정확한 논문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체로‘고려 초기 군인들의 복장에 관한 연구’‘고려 초기 개경(開京)의 행정구획 연구’‘고려 초기 여성의 복식 연구’등 5, 6편에 달하는 전문논문들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성한은 장편역사소설‘왕건’을 쓰기 위해 이처럼 치밀하게 자료 준비를 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른 작가의 역사소설이나 역사드라마의 토대가 된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보적 입장을 취하지만 김성한의 역사소설에 한해서만은 그의 자료고증에 신뢰를 가진다.

김성한이 부탁한 자료를 복사하면서 필자가 또 한 번 놀란 것은 이들 전문논문들이 모두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쓰인 연구논문이라는 사실이다. 해방된 지 30년이 넘은 당시 까지도 한국사를 연구하는 우리 학자들은 대체로 통사(通史)를 쓰거나, 특정 시대사의 경우 대체로 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거나, 또 그것도 아니면 독립운동사 같은 거창한 문제에 정열을 쏟아도 이들 논문처럼 근세 이전의 부분사(部分史)를 연구하는 데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다.

해방 전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경영을 하려면 이런 정도의 전문지식이 필요하겠지만 시대별로 이처럼 일본 학자들이 한국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수행한 데 대해서는 필자로서는 상당히 의외였던 것이다.

김성한은 1950년대 말 자유당 정권 말기에서부터 80년대 초 신군부 등장 때 까지 언론통제가 극심하던 시기에 동아일보에서 출판 편집 논설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가 논설주간 시절은 유신말기였는데 필자는 그를 모시고 정치 분야를 썼으므로 많은 일화가 있다. 유신정권은 어떤 문제는 사설로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해오는가 하면 어떤 문제는 사설로 써달라고 요구하는 노골적인 언론간섭을 가해 왔다.

예컨대, 유신정권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외국신문과의 회견을 트집 잡아 국회에서 제명했는데 야당의원들이 일제히 등원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큰 딜레마에 빠졌다.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당국자들은 필자에게 야당의원 등원을 촉구하는 사설을 써달라고 끈질기게 압력을 가해 왔다. 그 속셈은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유신정권 때 논설로 시달림 받아 물론 필자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지만, 그들이 같은 요구를 논설책임자인 김성한에게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그를 훨씬 더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성한은 일체 이를 필자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필자의 정치적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중요한 정치사설을 쓸 때도 일체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하지 않고,‘ 소신대로 쓰라’고만 했다.

당시 권력자들이 가해온 압력 가운데 가장 몹쓸 압력은 일단 신문지면에 나간 사설의 특정 부분을 수정 또는 삭제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종류의 압력에 견디는 최선의 방법은 문제될 만한 사설이 나간 후 몇시간 동안 논설주간과 담당 논설위원이 자리를 뜨는 것이다.

그 때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어서 두 사람이 회사 밖으로 나가 버리면 연락이 안 되었기 때문에 회사의 다른 사람이 사설에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성한 주간과 필자는 같이 점심식사를 하고 그의 차를 타고 북악산에 올라가 바람을 쏘이다가 귀사한 일도 있다.

이 무렵 김성한은 필자를 자기 방으로 자주 불러 정치문제를 토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간 직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와서 잠깐 동안 세 김씨가 집권을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을 때였다. 그는 필자에게 시국전망을 물었다.

필자는 이런 경우가 되면 누가 유리하고, 저런 경우가 되면 누가 유리하다는 식의 정국분석을 했더니 그는 한참 듣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닐걸요. 앞으로 군부가 권력을 잡을 겁니다…”얼마 후 그의 진단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역사소설가인 그의 남다른 안목에 경탄했다. 그의 역사소설에는 인간과 권력의 세계를 다룬 것이 많았다.‘ 임진왜란’의 신문연재를 마치고 쓴 글을 보면 그는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음에 몰아넣은“무능한 통치자는 역사의 죄인”이라고 준열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저항적인 언론인이라든가, 올곧은 언론인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차원 높은 역사적 안목과 통찰력을 지닌 언론인이었다. 김성한은 신문사 재직 시 어떤 이유 때문인지 천관우 홍승면 박권상 등 그의 비슷한 연배에 비하면 그의 필력이 아까울 정도로 신문에 개인칼럼을 쓰는 것을 삼갔다.

짐작컨대, 그것은 그가 박정희 정권 기간 중 상대적으로 언론탄압이 덜한 1960년대에는 주로 출판 분야를 책임을 지고 있었고 언론탄압이 상대적으로 심하던 1970년대 유신시절에는 직접 편집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드시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이 무렵 동아일보에서는 편집책임자는 개인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 신문은 광고수입의 증가 덕택에 신문 면수가 늘어난 1980년대에서부터 논설위원과 편집국 부장들이 주로 칼럼을 쓰기 시작해서 1990년대에는 경쟁적으로 본격적인 오피니언 신문시대를 열었다. 이 무렵부터 좋은 칼럼으로 두각을 나타낸 상당수의 언론인들이 언론계의 스타가 되었다.

만약 김성한도 좀 더 젊은 세대였더라면 80년대, 90년대 상황에서 칼럼을 쓸― 아니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왔을 것이고, 만약 그랬다면 그는 명문 칼럼 덕으로 좀 더 화려한 언론인 경력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누구보다도 올 곧게 생각하는 경우 바른 언론인이었고, 그의 문장은 누구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세종대 석좌교수, 권력 멀리한 선비형 언론인의 전형   필자   남시욱,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대한언론인회 발행), 2010)

 

 

김  성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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