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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7 편집국장, 논설위원, 수석심의위원, 상임정책위원 겸, 동아연감주간 겸, 수석정책위원, 심의실장 겸, 73. 9 퇴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17년 11월 20일 충남 아산 출생, 2003년 7월 11일 별세 ◇학력 􄤎양정고등보통학교 졸(37) 􄤎일본 릿교대(立敎大) 영문학과 졸(41) ◇주요경력 􄤎매일신문 사회부(41) 􄤎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 겸 논설위원(45~50) 􄤎서울시 사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겸 정치부장 􄤎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위원, 심의실장(60~62) 􄤎IPI회원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회 부회장 􄤎서울시 문화재 위원(80) 􄤎대한언론인회 부회장(81~83) ◇저서‘서울의 고적 명소’‘서울의 전통문화’‘서울 6백년’(전 5권) ◇수상 문화훈장 보관장, 한국일보 제 6회 서울시민대상 대상, 향토문화 대상

 

향토 사학가로 명성 높아

 

김영상은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향토사학가로서 두 가지 전공을 동시에 이룩한, 언론계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다. 일선 언인으로서의 활동은 1943년 매일신보에서 출발하여 1974년 동아일보를 떠날 때까지 31년간 이었으며 견습기자에서 편집국장, 논설위원에 이르기까지 발로 뛰는 기자,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고 증인이 된 언론인이었다. 그리고 김영상은 국사에 가려진 서울 향토사를 개척하고 갈고 닦아 한국 문화사의 중심축에 올려놓았다.

김영상은 1917년 충청남도 아산군 안주면 공통리(貢統里) 223번지에서 태어났다. 선친은 서울태생이고 조부는 무반벼슬을 하다가 경술합방 때 아산으로 낙향하면서 그곳이 김영상의 고향이 되었다. 1932년 서울 양정고보에 입학하면서 이후 서울사람으로 되돌아 왔다.

일본 동경 입교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동경유학시절 독서회사건으로 일제 시대 내내 보호관찰소의 감시를 받아왔다. 그러던 중 1943년 한글신문으로서는 유일한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에 1백대1의 경쟁을 뚫고, 견습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김영상은 6개월간의 견습과정을 거쳐 사회부 그리고 정리부(지금의 편집부)에서 언론을 익히고 있는 중에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일제로부터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 … )

1960년 4·19는 김영상에게 언론인으로 회귀하게 하는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김영상이 7월 1일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 다시 언론 일선에 복귀했던 것이다.

김영상의 일선 기자시절을 먼발치에서 보아온 최두선(崔斗善) 동아일보 사장이‘서울 육백년’시리즈를 애독하면서 그를 발탁한 것이었다.

4·19 후 민주당 장면(張勉) 내각이 출범하면서 장면 총리가 각사 편집국장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김영상 편집국장만은 타협하지 않고 잘못되고 어지러운 비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약체 내각을 자주 비판하곤했다. 이러한 일들로 해서 김영상은 장면 내각으로부터 미움을 많이 샀으며 심지어 동료 편집국장들로부터 핀잔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김영상은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에게 민의(民意)를 업은 간청으로 독재아성으로 비치는‘경무대’(景武臺)를 ‘청와대’(靑瓦臺)로 개명토록 건의하여 드디어 윤보선 대통령이 1961년‘청와대’로 바꾸는 결단이 내려졌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혁명군이 한강교를 넘어 시내 중심부로 진입했다는 숙직자의 전화를 받자마자 김영상은 신문사로 달려갔다. 상황을 점검하고 취재 지시를 내리는 등 숨 막히는 시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총칼을 앞세운 군사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 특히 언론계 중진 인사들은 일단 피신하고 동태를 살핀 연후에 운신을 해야 하는 급박한 순간인데도 불구하고 김영상 편집국장이 이날 새벽같이 출근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군과 내통하지 않았겠느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1962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년호 1~2면에 걸쳐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김영상 편집국장의 단독회견 기사가 나가자 대단한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동시에 사내외가 온통 들끓기 시작했다.
김영상은“이 단독대담 기사를 기획한 것은 박 의장과 협력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민정이양 한다 안한다던 때라서 박 의장의 속을 끌어내려고 한 의도였을 뿐이다”라고 해명 했다. 그리고 혁명군의 제1인자 박의장을 만나 취재하는 것은 기자로서 당연한 의무이며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기회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해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외에서 ‘동아일보가 5 16 군사 쿠데타에 가장 반대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데 박정희를 선전하는 것 같은 1면 톱 전단 기사를 어찌 낼 수 있단 말이냐’는 의혹이 난무했다.

김영상은 이 일에 책임을 지고 결국 그 해 3월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고 단명의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 후 동아일보 논설위원, 심의실장, 수석정책위원 등을 역임하다가 1974년 10월 동아일보를 끝으로 언론계를 떠나 다시 서울시향토사학가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 … )

“ 돌이켜 생각해보면 올챙이 기자로 출발하여 일제시기를 겪고 8 15해방 후 새나라 건국의 역사적 격동기를 저널리스트로, 그리고 향토사학가로서 한눈팔지 않고 남과 더불어 어울리되 작당하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로 살아오다보니 처세에 실패하고 인생에 성공한 일생이었다”고 김영상이‘녹취한국 언론사’녹음말미에서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자평했다.”

 

(김성배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향토 사학가로 명성 높아,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2010)

 

 

김  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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