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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철저한 ‘동아(東亞)맨’ 신용순(申用淳)

Posted by 신이 On 7월 - 18 - 2017

“▲ 58. 4 수습(편집국), 기자(취재부, 사회부), 60. 1 퇴사. ▲ 60. 5 재입사, 기자(사회부), 방송뉴스부차장, 정치부차장, 주일특파원, 사회부장, 편집국부국장, 정치부장 겸, 방송국부국장(보도담당)(현). ”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31년 12월 30일 서울에서 출생 ▲96년 별세 ▲58년 한국외국어대학 졸업 ▲58년 동아일보 기자 ▲70년~73년 동 주일 특파원 ▲74년~77년 동 사회부장, 정치부장 ▲80년 동앙일보 이사 겸 편집국장 ▲83년 미주리대학 연수 ▲86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84년 동아일보 연구실장 ▲85년~90년 동 상무이사 ▲93년 강원일보 사장, 동 고문 ▲93년 성도산업 회장 ▲서울시 문화상 수상

 

철저한 “東亞맨”

 

신용순(申用淳)은 철저한‘동아(東亞) 맨’으로 삶을 마감했다. 사내 뿐 아니라, 타사에서도 공인하는 이미지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다른 좋은 직장도 있었지마는 동아일보의 기자가 되기를 바랐다. 굳이 가시밭길을 택한 이유를 밝힌적은 없다. 그러나 행동으로는 많은 것을 남겼다.

  그가 사회부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 58년 자유당 독재가 한창이던 때였다. 첫 시련은 부정선거를 파헤치는 데에서 닥쳐왔다.

  서울 서대문구(西大門區) 변두리에서 폭력배들이 우글거린다는 소굴로 뛰어든 것이다. 이를 폭력배들이 눈치채고, 죽일 듯이 덤벼들었다.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편집국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만…

  박태선 장로 신도(약 1천명)들이 동아일보를 습격했을때(60.12.10)의 일이다. 활자판이 엎어지고 곳곳에서 불이났다. 화가 치민 그는 몽둥이를 휘둘러 몰아내려했다.

  동아맨십을 보여준 일화로, 오랫동안 입에 오르내린 일화 한 토막이다.

  그렇지만 만사가 그토록 순조로운 것만은 아닌 듯…

  서울역 압사사건(60.1.26)은 두고 두고 그를 가슴 아프게했다. 31명이 짓밟혀 숨지고 40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을 동아일보만이 낙종한 것이다.

  사과 사고(社告)가 나가고, 다른 숙직기자와 더불어 몇 달 동안 회사를 쉬어야하는 아픔을 겪어야했다.(60.5. 재입사)

  당시 서울시경 산하 경찰서는 9개, 아침 일찍부터 전차나 버스를 타고 돌아다녀야했다. 회사차를 얻어타기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다.

  어쩌다가 특종을 쓰는 나라에는 “독자의 제보가 있었어…”“사회부장이 사상검사 오제도(吳制道)와 담판을 해서 쓴거야…”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곤 했다.

   봉급도 많은 편이고, 독자도 가장 많으니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그 무엇보다도 좋은 선배들의 귀여움을 받은 것은 그의 행운이라고나 할까(이효식, 조동오, 어임영)

  타사의 쟁쟁한 기자(시경출입)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를 불렀지만, 한마디로 사양해버렸다. 그의 의리심을 엇보인 한토막이다.

 

張暻根 일본도피 기사로 구속돼

 

  그가 이효식 뒤를 이러 시경출입을 하게 된 첫날부터 야릇한 분위기에 휩싸인 셈이다. 훗날 사회부의 대부(大父)라 불리는 이효식의 제2인자 자리를 굳히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공채로 들어오기 시작한 기자들이 거의 그 밑에서 일선경찰기자를 거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법원에 출입할 때에는 기자들의 고난이 가장 심했던 암흑기였다.

“연행 구속되지 않은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언론가에서는 이런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5.16쿠데타 정권 주모자들은 “신문사 하나쯤 탱크로 밀어버리겠다”고도 했다. 실제로 탱크로 밀어붙이지는 않았지만, 장교들이 숙직실을 덮치기도 했다.

  이처럼 살벌한 상황에서도 신용순은 ‘하루의 역사 기록자’란 사명을 다하고자 몸부림을 쳤다.

  선배 조동오와 함께 서울지검 박승서 검사방에 들렀다. 서기의 책상에 놓인 수사보고서가 두 기자의 눈을 의심케했다. 그는 곧 서기의 눈길을 막고 이것 저것 딴전을 피웠다. 조동오가 메모를 하도록 양동작전을 편 것이다.

    “장도영 전 최고회의 의장, 장경근 일본 도피 방조”“보좌관이 에스코트”

  다음날 이런 제목의 기사가 동아일보 1면 머리에, 민국일보에는 사회면에 실리게 됐다.

  이 기사를 보고 가장 화를 낸 것은 박정희 장군이었다.

 “당장 잡아넣어!”

  불호령이 떨어진 것이다. 혐의는‘비밀표시 무효’중앙정보부에 연행된 두 기자는 “소스를 대라”는 온갖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두 기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당해 본 사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며칠씩 잠을 안 재우는건 그래도 약과다. 인격적 모욕을 주다가 달랬다가…, 나중에는 “38선에 가서 쏘아버리겠다”까지….

   담당 법무사가 구속영장 청구를 망설이다가 상관으로부터 호통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된다.

“두 기자를 풀어주고 대신 들어가시오”

  구속여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는데도 영장은 발부됐다. 조동오는 특방에, 신용순은 잡방에 갇히었다. 출입기자를 도둑이 득실거리는 잡범들 방에 가둔 것은 보기드문 일이다.

“내가 잡범이야?”

  그가 재판(고등군법회의)을 받으러 나가는 길에 조동오에게 던진 투정이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참을 수 없는 모욕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두 기자는 교도소장실로 안내됐다.

“내일 석방될 것입니다. 청와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교도소장은 담배 한 갑을 탁자에 놓고 방을 나갔다. 출입기자에 대한 마지막 호의였다. 두 기자는 이만섭(東亞)등 다른 기자들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됐다. 구속된 지 38일만이었다.

  이 때는 기자에 대한 구속, 기소, 기소중기 등을 청와대에서 결정했던 것이다.

  잇따라 나온 비상계엄, 포고령은 언론의 숨통을 죄고도 남았다. 그것도 모자라 ‘구악기자’를 몰아낸다 했지만, 더 큰 신악이 고개를 들고있었다.

 

  東京大 신문연구소서 연수

 

  신용순은 이런 암흑기에 방송 뉴스 취재2부 차장으로 자리를 옮긴다.(66.8) 그러나 10개월도 안 돼, ‘도쿄대 신문연구소’로 떠나버렸다.

  이를 두고 ‘방송기피증’이 있는 것 아니냐는 등 참새들은 입방아를 찧곤했다. 워낙에 말이 적은 편인데다, 거기에 자랑 한번 늘어놓은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이 때가 언론학이론을 익히는 기회였고, 특파원 예행연습 기간이었던 셈이다.

  특파원 나가기가‘하늘의 별따기’이던 때인만큼 화려한 데뷔이기도 했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마음까지 평안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료 특파원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했던 갈등이 그것이다.

  치졸한 지사내 경쟁과 본사 실력자에 대한 아첨등이 그를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 조그만 파동으로 동아방송 특파원 TO가 소멸된다. 우여곡절을 겪어 방송TO를 다시 살려냈을 때는 편집국장 직속으로 다시 바뀌게 되는 것이지만…

  아무튼 그가 실세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대목이기도 하다.

  특파원 임기를 마친 그는 외신부장(73년), 사회부장(74년),정치부장(74)을 두루 거치게 된다. 동료 특파원은 편집국을 떠나 파워 넘치는 광고부장으로 변신하게 된다.(광고파동후에 퇴사)

  이즈음 동아에는 외환(外患)이 끊이지 않았다. 주필 고재욱이 구속되고, 방송국 간부들이 줄줄이 감방으로 끌려갔다.(내란음모혐의)

  이런 어수선 속에 내우(內憂)가 꿈틀거리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발단은 후배가 차장으로 발탁된데 있었다.

  능력이 뛰어난 후배가 특진할 수도 있겠지만, 반발이 너무나 거셌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부서나 출입처에 대한 불만을 품은 기자들도 가세한다. 젊은 기자들의 모임이 매일밤 열렸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자유언론 실천선언’이다.(74.10.24)

  1. 외부의 간섭을 거부한다.

  2. 기관원의 출입을 금지한다.

  3. 연행기자가 나올 때까지 퇴사를 않는다.

  이것이 주요 골자다. 이날은 편집국장과 지방부장(한우석)이 정보부에 연행된 바로 다음날이다. 그렇더라도 툭하면 레슬링 선수같은 고약한 거한들이 발길로 문을 박차고 들이닥치던 때다. 과연 기자들이 힘으로 막을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고나 할까. 이 선언에 앞서 기자들이 신용순을 찾아가 동참을 호소했다. 그러나 사주를 ‘토호(土豪)’라하며 매도하는데에는 단호하게 거부감을 보였던 게 아닐까?

  인척관계인 사주와 사항하는 후배들의 틈바구니에서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나날은 계속된다.

  특히, 언론에 악랄했던 쿠데타정권이지만 해병대, 특수부대나 탱크를 앞세우지 않고 우회전법으로 나왔다. 광고를 탄압한 것이다. 언론사주가 돈에 약하다는 점을 노린 듯 하다. 아니 언론인 출신 당원들의 잔꾀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때에도 신용순은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 밤낮없이 뛰어다녀야만 했다. 그 공로가 컸음인가, 그는 부국장으로 승진하면서(방송) 뉴스부 책임자로 부임한다.(77년) 방송국장은 입사했을 때의 사회부장이고, 특파원 시절에는지사장이던 최호이다. 참으로 오랜 인연이다.

  공적으로는 기사에 관한 모든 것을, 사적으로는 술 마시는 법도까지 배웠다는 선배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그가 이따금 던지는 말로 미루어 가장 무서워하는 분으로 여겼다. 그러나 후배기자는‘경외’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정정해주었다. (이시헌 기자의 말)

  그런데 최국장 밑에서의 부국장 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안았다. 형식상 부국장이지, 타사에서는 뉴스책임자인 국장과 동격이다. 하지만 영업담당 부국장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예를 들면 “한강을 살리자”는 캠페인 프로그램에 CM을 붙이지 않아 방송을 중단시키기까지 했다.

  심지어 매일 아침 방송국장실에서 열리는 간부회의를 보이콧하고 영업회의에 나오라고 했다. 이를 거부하니까 프로그램 제작을 방해하는 수법을 쓴 것이다.

  성미가 급한 신용순은 두들겨 패려고 마음 먹었다. 이를 눈치챈 후배기자들이 가로막았다.

  “국장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저희가 패겠습니다.” 이 말이 위로가 돼, 별 탈없이 넘어간 일이 있었다. 이처럼 ‘욱’하는 성미가 나면, 사주의 동생이라도 갈기려는 일면이 있었다. 이와같이 신용순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후배가 있는가하면, 명문고 출신만을 편애한다는 불만파도 꽤 있었다. 따라서 규탄성 모임이 열리기도…

  이 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점은 고준환기자의 기소에 이어 천승준, 박종렬기자가 광주사태 이후에 구속된 사건이 아닌가싶다. 아니면, 군사정권이 싫증이 났던가?

  신용순은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등록금을 송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자(万字)선생(金相万회장의 애칭)이 롯데호텔에서 방송국 부국장들을 초대했다.(이윤하, 신용순, 이정규, 신상현)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였으나, 그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었다.

 

언론통폐합과 편집국장의 눈물

 

 “용순이는 부정선거를 취재하다가 죽을번했지….”

  万字선생의 이 한마디는 유학을 포기하고 편집국장을 맡아달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20년전의 일을 끄집어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 가지 인상에 깊이 암은 것은 언론사 통폐합에 따라, 방송이 문을 닫는 전날이었다.(80. 11. 29)

  신문사와 방송국 중역, 간부들이 작별을 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신용순은 여기서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최호국장이 나더러 말리라고 해, 다가갔다가 함께 울어버렸다. 그는 끝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이어야 했다.

  그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된 지 석달쯤 지나서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22년전 처음 만나 서로가 울면서 헤어지는 꼴이 됐다. 한 가지 고마운 것은 나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주었다는 점이다. 편집국장이 되자마자, 기사 ‘한 문장을 50자 이내’로 제한한 것이다.‘한 문장을 100자 이내’로 돼 있던 규정(동아 핸드북)을 절반으로 줄였다가 강력한 반발이 일자, 50자가 넘는 기사 위에 기자의 이름을 적어내도록 함으로써 확고한 신념을 관철했다.

  그는 기자로서 여러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동아사사(東亞社史)에 길이 빛날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요즘 문제가 되는‘신문개혁’의 한쪽을 장식했다는 평가다.

  이로부터 3년후엔 미국 유학(미주리대)을 떠난다. 돌아와서는 임원(상무)로 경영에 참여하지만, 사주와 맞서다가 사표를 던지고 東亞를 떠났다.

  그는 애오라지 동아맨으로 남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곧 강원일보 사장으로 선임됐지만 8개월만에 스스로 물러서고 만다.

  30년간 그가 선배로 모셨던 김준하(金準河 ; 동아)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부 기자를 희망했어요. 나중에 정치부장이 된 것도 그 뜻이 이뤄진 셈이죠. 기자 윤리를 지키려는 사나이였구요. 평소 성급하지 말라는 충고를 여러번 했었지…. 부부동반으로 강릉해변에 갔을 때에도 죽은 물고기를 보며 성질이 급하면 저렇게 된다고 일깨워 주었는데… 참으로 아깝게 생각해요.”

  기자로, 친구로, 지냈던 이종전(이종전 ; 경향)은 회고한다.

  “착하고 부지런했지요. 중앙정보부와 말썽이 생기면 전화로 의논도 하고요, 내가 실직자(언론통폐합으로 강제해고) 됐을 때에는 점심, 술을 사기도 했어요. 눈물도 많은 반면 ‘욱’하는 성격이 있어 오해를 받기도 했죠, 그도 사람이니까요, 사주의 빰을 쳤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

 

(신상현 대한언론인회 논설위원, 철저한 “東亞맨”, 한국언론인물사화-제5권, 1992)

 

 

신  용  순

 

 

1982년 12월 신용순 편집국장 1일우체국장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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