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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5 기자(사회부, 정경부, 정치부), 도쿄특파원, 도쿄지국장서리겸, 정치부차장, 정치부장, 71. 7 퇴사. ”

(동아일보사사 3권, 인물록)

 

 

“▲1934년 1월 16일 경북 안동에서 출생 ▲99년 1월 20일 별세 ▲57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업 ▲57년 세계일보사 기자 ▲61년 동아일보사 사회부, 정치부 기자 ▲65년 도쿄 특파원 겸 도쿄지사장 ▲67년 정치부 차장 ▲  69년 정치부장 ▲70년 하버드대 니만 펠로우 연수 ▲71년 청와대 정무 비서관 ▲73년 청와대 정무 제1수석비서관 ▲81년 문화방송 및 대구문화방송 상임고문 ▲84년 영국 전략문제연구소 한국위원회 위원장 ▲99년 주포르투칼 대사 ▲91년 한국국제문화협회 회장,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91년 한호(韓濠)재단 이사장 ▲92년 공보처 장관 ▲93년 포르투칼 십자대훈장 ▲93년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워원장 ▲97년 국제퇴계학 연구원 이사장

 

부드러운 인상에 예리한 관찰력

 

  경주 류혁인(經洲 柳赫仁)의 인상을 일컬어‘만원홍안(滿月紅顔)’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그럴 듯한 표현이다. 둥근 보름달 같이 밝고, 항상 소년같이 활기가 있던 그의 인상은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도 금방 친숙감을 주었다. 그의 이름에서 풍기듯 언제나 온화하고 어진 그의 품성 또한 다른 사람에게 무한 신뢰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그의 풍모와 성격이 취재기자로서는 무시하지 못할 자산이었다.

  1960년대 초 5.16 군사혁명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긴 이름이 붙은 군사위원회는 기자들에게는 고압적인 분위기로 인해 취재하기가 까다로운 출입처였다. 그러나 그는 부드럽고 호감을 주는 대인관계로 당시 야당지라는 평 때문에 군부의 경계대상이던 동아일보 기자로서의 어려움을 거뜬하게 극복하고, 효과적인 취재활동을 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그는 예리한 관찰력과 기민한 행동력에다 날카로운 비판력으로써 취재도 잘 하고, 글도 잘 쓰는 만능기자로 인정되어 그 때로서는 유일한 해외특파원 자리인 동경특파원을 거쳐,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동아일보 정치부장으로 발탁되었다.

  류혁인은 경북 안동(安東)군 임동(臨東)면 박곡(朴谷)동 393의 전주 류씨(全州 柳氏)집에서 1933년 음력 5월 23일 태어났다. 그 무렵 시골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홍역을 치른 다음에야 호적에 올리는 관습이 있어 그의 호적상 생년월일은 양력 34년 1월 16일로 되어있다. 그는 1남 3녀중 둘째로 큰집과 합해도 유일한 아들이어서 처음에는 큰아버지에게 입양됐다가, 큰집에 아들이 태어나자 파양하여 생가로 돌아왔다.

( … )

자유당 정권 말기때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기자로서 가장 활동력이 왕성한 4년차 때인 60년에 4.19 학생혁명을 맞이하고, 5년차 때인 61년에 5.16 군사혁명을 맞는다. 그가 61년 봄 동화통신으로 옮겨 잠깐 있다가 바로 동아일보로 가기 전까지 민국일보에서 약 4년간 주로 사회부에서 활동했다. 글 재주 덕으로 그는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중요한 사회면 기획물들을 많이 다루었다. 61년 4월 민국일보‘맥박’이하는 제목아래 총7회 연재한 4.19혁명 1주년 시리즈의 제1회는 의욕과잉의 대학현황을 다룬 내용인데, 기사 서두가‘잔인한 4월’을 노래한 T S 엘리어트의 시로 시작된다. 제2회인 민주당 정권하의 청와대 이야기는 직원 수가 450명에서 4분의 1로 감축되면서도 예산액은 오히려 늘어났다고 지적하는 등 예리한 대목이 많았다.

 

박 정권을 비판한 일선기자 시절

 

  61년 5월 동아일보로 옯긴 그는 사회부 출입처 중에서 경쟁이 치열하기로 이름난 문교부를 맡아 나가면서 중요한 사회면 기획물을 많이 다루었다. 그는 62년 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충남 예산의 백송 등 전국의 이름있는 수목들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거수(巨樹)’라는 총18회의 읽을거리 시리즈중 그 절반에 해당하는 9회를 맡아 전국을 누비면서 취재했다. 당시는 군정하여서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언론통제가 엄격했기 때문에, 기사거리가 적어 신문사들이 읽을거리 기사 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이런 상황인지라 글 잘 쓰는 기자들이 특집기획에 우선적으로 동원되었다. 그가 동화통신에서 동아일보로 스카웃된 것도 뛰어난 글 재주 때문이었다. 동아일보는 젊은 피를 보충하기 위해 59년에 수습기자를 처음으로 뽑는 한편, 이 무렵부터 61년에 걸쳐 타사의 젊고 유능한 기성기자들을 대거 영입했다. 당시는 언론계 사정이 지금보다 더욱 빤한 때여서 어떤 기자가 좋은 기사를 쓰면 바로 언론계의 주목을 받았다.

  류혁인은 동아일보 사회부에서 1년쯤 있다가 62년 정치부로 옮겨 대활약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정치부 담당부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최고회의에 나가다 63년 민정이양 후에는 출입처를 청와대로 옮겨, 65년 주일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박정희 대통령을 계속 취재했다. 민정이양 전의 최고회의 시절에는 국회와 정당이 해산된 상태여서, 정치가 없고 군사정부와 군정만이 있었다.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신문이 사실상 유일한 비판세력이었다.

  동아일보는 62년 5.16 군사혁명 1주년을 맞아, 그 동안의 군사혁명의 공과를 분야별로 나누어 상당히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 정치부로 옮긴지 얼마 안된 류혁인은 총 13회이 시리즈중 2회를 맡아 사회부에서 취재경험을 쌓은 문교정책과 사회정책을 다루었다.

  이 무렵 동아일보 정치면 기사중 아주 인기가 있고 영향력이 컸던 고정란이‘기상도(氣象圖)’라는 해설란이었다. 군사쿠데타를 감행한 군부세력은 혁명완수후 군으로 복귀하겠다던 당초의 공약을 어기고, 원대복귀 문제를 둘러싸고 몇 번이나 번복에 번복을 거듭하다 계속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이른바 민정참여를 결정했다. 군사혁명 직후부터 군정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육사 8기생과 5기생간의 충돌이 일어나고, 육군과 해병대간에도 알력이 생겨 소위 반혁명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민정이양 과정에서는 신당 결성문제를 둘러싸고 김종필파와 반대파간에 엎치락뒤치락했으며, 김종필의 이른바 ‘자의반 타의반’외유사건도 일어났다. 이런 모든 사건들이 ‘기상도’의 자료였는데 류혁인이 집필한 것만 22회나 된다.

  청와대 출입 당시인 64년 2월에는 민정이양 2개월을 맞아‘투시도(透視圖)라는 총 20회에 걸친 박정권의 국정수행을  해부하는 정치적 기사가 나왔는데, 류혁인은 그 중 2회를 맡아 비판을 가했다. 군정이 민정이라는 옷을 갈아입고 출범을 했지만 박 정권의 본질은 그대로였던 긴장된 분위기였으나, 그는 박정희의 청와대에 과거 이승만 시대와 같은‘인의 장막’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썼다. 그는 일본의 일개 상사 대표가 청와대를 드나들면서 박 대통령을 면회하지만, 여.야 영수회담은 풍설로만 그쳤고, 여.야 총무단의 접견요청도 거부당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과로로 자리에 이틀이나 누울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정작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고 비꼬았다. 류혁인은 또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차일피일 기자회견을 미루어 오면서 2개월 동안 한번도 기자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윤보선 대통령의 잦았던 기자회견에 비해 대통령 휘임 이후 단 한번도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 … 혹은 하지 못하는 뒷면에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지”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중에 그는 청와대 비서관으로 들어갔지만, 일선 기자이던 이때는 아주 예리하게 권력을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주일특파원 시절의 특종

 

  이 무렵 류혁인의 글 중에서 화제를 모은 것이 월간지 <신동아>에 실린 ‘박 대통령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장문의 기사였다. 일제때인 36년에 손기정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화보를 내어 폐간되었던 이 잡지는 64년 9월에 복간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호에 류혁인의 이 기사를 실어 낙양의 종이 값을 올렸다.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이 월간지는 당시 한국 잡지계를 주름잡던 <사상계(思想界)>와는 약간 다른 새로운 편집방침을 내걸고 넌픽션을 자주 다루어 인기를 모았는데, 류혁인의 기사가 여기에 알맞은 메뉴였다.

  65년 한.일협정 협상 막바지 단계에 주일특파원으로 부임한 유혁인의 주된 업무는 매일 진행되는 회담의 취재였다. 그해 6월 협정이 조인된 다음에는 국교정상화로 없어질 평화선과 새로운 차원의 어업협력 문제 및 재일교포 문제, 그리고 전반적인 한.일 협력문제 등 현안들과 당장의 국회비준 문제가 중요한 취재거리였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조총련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조총련계 학교를 집중 취재하여 3회의 시리즈로 연재하는가 하면, 일본 언론에 난 중국문화대혁명과 홍위병 난동을 엮어 송고하는 등 왕성한 취재력을 과시했다.

  이 무렵 국내 최대의 재벌이던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다. 삼성그룹 계열인 한국비료가 일본에서 공장 건설 자재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비료공장과는 관련없는 사칼린 원료 OTSA 58톤을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에서 비밀리에 수입해온 것이 66년 5월 초의 일이었다. 이 사건이 처음으로 언론에 활자화된 것이 그해 9월이었는데, 곧 박 대통령의 지시로 대검의 수사가 시작되자, 삼성측은 한비(韓肥)를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밀수책임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계속 의문이 제기되면서 정치문제로 비화하여 국회의 진상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본회의장에서 야당의원이 국무위원석에 오물을 투척하는 사건이 일어나, 정일권 총리이하 국무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류혁인은 동경 미쓰이물산 본사의 수출관계자와 회견하여“한비측 공식 요청에 따라 비료공장 건설자재 명목으로 사카린원료를 정식으로 수출했으며, 수출대금도 비료공장용 차관자금에서 결재했다”는 답변을 얻어내어 이를 대서특필했다. 미쓰이측의 답변은 밀수사건에 한비의 한두 사람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삼성그룹 총수가 대표로 있는 한비라는 법인이 저지른 밀수사건’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그때 이 기사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정치부장을 끝으로 언론계 마감

 

 류혁인은 67년말 본사로 돌아와 정치부장이 되었다. 이 해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여 2기 집권에 들어갔으나, 그가 취임한지 얼마 안되어 권력 핵심부의 박정희 3선 음모가 꾸며졌다. 정치부 차창은 안에 들어앉아 부장 밑에서 데스크를 보는 자리이기 때문에 류혁인은 더 이상 일선 취재는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3선 개헌 음모를 직접 취재하거나 정치면 제작의 책임을 지지 않았으므로 일선 기자나 부장에 비해 스트레스는 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영구집권을 위해 언론을 길들일 음모를 하고 있었으므로 언론탄압의 태풍이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언론을 그냥 놔둔 채로는 영구집권 음모가 순조롭게 추진될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68년의 <신동아>  필화사건이다. 그해 12월호에 실린 외국차관 관련 기사를 트집잡았다. 중앙정보부는 이 기사를 공동집필한 2명의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을 연행해 신문을 하고, 잡지 편집실의 담당기자들도 데리고 가서 수사를 벌이다가 수사 1주일째가 되는 날에는 류혁인도 소환, 조사했다. 정치부 차장이던 그는 차관 기사와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수사관들이 편집실을 수색한 끝에 찾아낸 외국의 학생 운동관련 서적을 그가 동경에서 가져들어온 것으로 밝혀져, 그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불려간 것이다. 그는 조사를 받고 곧 풀려났다. 그런데 차관관련 조사는 언론탄압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중앙정보부는 나중에 끝내 다른 혐의를 찾아내러 대대적인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류혁인은 2년간의 차장생활을 마치고 69년 여름 정치부장으로 승진했다. 3선 개헌안은 그해 9월 14일 새벽 서울 중구 태평로로 프레스센터 북측 지금의 금융센터 자리에 있던 국회 제3별관에서 날치기 통과되었다. 국회 본회의장이 야당에게 점거되자 공화당 의원들은 이곳에 몰래 집합하여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는 권력에 여지없이 유린되고 한국 민주주의에 조종이 울린 것이다. 이날 류혁인이 만든 동아일보 정치면은 이 엄청난 사태에 관한 자세한 보도로 도배질 했다. 논조는 아주 비판적이었다.

  류혁인은 이듬해인 70년 여름 정치부장에서 물러나 외신부에 적을 둔채 하버드대학의 니만 펠로우로 미국 연수길을 떠났다. 박 대통령의 3선을 위한 7대 대통령 선거는 류혁인이 미국에 있는 동안인 71년 4월 실시되었다. 박 대통령은 선거운동 때“다시는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밝혀서 주목을 끌었다. 일반 국민들은 이것을 박 대통령이 3기만 하고 물러나겠다는 말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국민의 직접투표 가 아닌 다른 방식에 의해 선출되는 종신 총통제 개헌을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그 이듬해 유신단행으로 증명되었다. 류혁인은 미국에 간 1년후인 71년 7월 하버드로부터 귀국하여 월남파병으로 시끌시끌하던 미국 사회를 분석한 ‘미국의 여론과 양심’이라는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연재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청와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정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언론계를 떠났다.”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부드러운 인상에 예리한 관찰력, 한국언론인물사화-제5권, 1992 )

 

 

류  혁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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