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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부수립 후 취재 지휘한 김홍수(金泓洙)

Posted by 신이 On 6월 - 14 - 2017

“▲ 취재부장, 퇴사연월 불명.”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12년 9월 1일 咸南 元山시 山祭동에서 출생 ▲1965년 3월 21일 별세 ▲30년 元山中學校 3년 중퇴(讀書會사건으로) ▲41년 7월 18일 일본 大版每日新聞 淸津支局 기자 ▲44년 5월 同社 京城支局기자 ▲45년 1월 同社 기자 ▲45년 9월 同社 퇴사후 朝鮮日報 사회부장 ▲國都新聞 주필 ▲中外經濟新聞 논설위원 ▲中央新聞 논설위원 겸 정경부장 ▲東亞日報 취재부장 ▲
京鄕新聞 상임논설위원 ▲國都新聞 주필 ▲大韓日報 논설위원

 

□ 少年시절 抗日로 명예졸업

 

김홍수(金泓洙)의 본적은 원산(元山) 산제동(山祭洞 )42번지의 3호로 돼 있으며 1912년 9월 1일생이다.

따라서 그가 본적이 서울출생으로 돼있는 것은 아마도 편의상 호적을 소울로 옮긴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간다. 

그는 원산에서 원산 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28년에 원산중학(元山中學)에 입학한다. 그러나 원산중학의 생활은 결코 순조롭지 못했고 드디어는 3학년때에 중도퇴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김홍수가 독서회(讀書會)사건에 연루되어 3학년때에 그것이 화근이 되어 퇴학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독서회사건이라면 배일항일(排日)운동과 투쟁에 있어 하나의 방법론이었으며 첫 출발의 단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홍수는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런 운동의 싹이 텄던 것 같다. 김홍수와 보통학교 동기동창이었으며 원산중학교도 동기 동창이었던 노동설(盧東卨)은 이를 소상하게 증언했다. 김홍수는 소년시절부터 머리가 명석하고 비범했던 것 같다. 보통학교시절부터 그의 별명은 과분수(過分數)였다고 한다. 과분수라면 수학(數學)용어이기도 하지만 두뇌가 너무도 예민하고 발달하여 이 같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종의 신동(神童)이었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담임선생이었던 한(韓)선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그 선생은 항일투쟁정신이 아주 강한 사람으로 마침내 함흥(咸興)형무소에 투옥되었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장을 지낸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그런 관계로 김홍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는 마르크스의 자본론(資本論) 적기(赤旗) 가난 얘기(日名 ‘賓乏物語’) 게잡이 배(蟹工船) 등등의 소위 공산좌익 소설(日文)을 탐독하고 서클활동도 하다 보니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려 그의 동창 3,4명과 같이 퇴학처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중학시절엔 이영수(李永秀. 예명 李曙香)와 친교가 두터웠고 이영수는 8.15이후 월북했다.

그런데 아마도 김홍수란 이름은 해방후에 개명(改名)한 이름같다. 그의 중학교시절 이름은 김대봉(金大鳳)이었다. 그래서 동창간에는 ‘김대봉’하면 금방 알아도 김홍수는 잘 모르는 동창들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노동설도 그냥 어린시절에 부르던 김대봉이 부르기 편하다고 했다. 

김홍수,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학자타입이기도 한다.

 

□ 화려한 言論경력에 넘치는 才談

 

김홍수는 신문사에서 여러 부문을 맡아서 신문생활도 오래 했지만 논설(論說)기자감이다. 술도 무척 좋아했다. 항상 소주를 즐겨 마시며 무엇이든 이론정연히 날카롭게 비판했다. 웃음도 크게 가가대소(呵呵大笑)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조용하게 미소짓는 타입이어서 어떻게 보면 그것이 인상적이곤 했다. 특히 여성문제는 그 나름대로 오묘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가견을 가졌다. 한번 얘기가 터지다 보면 몇시간도 강론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어쩌면 여성문제의 대가 같기도 했다. 

김홍수는 41년 7월 18일에 일본 대판매일신문(大版每日新聞)의 청진지국(淸津支局)원으로 근무하다 42년 1월 1일에 준사원(準社員)이 된다. 그리하여 44년 5월 1일에 경성지국(京城支局)원으로 전보되어 45년 1월 1일자로 정식입사, 정식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45년 8.15광복과 더불어 동년 9월 15일 의원퇴직했다. 그런데 청진지국원으로 근무할 당시는 가무라요시미쓰(香村義光)라고 소위 창씨개명을 하게 되는바 일본의 2대지(2大紙)인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더불어 대판매일신문(大版每日新聞)도 쌍벽을 이루는 신문이었던 만큼 김홍수로서는 창씨 개병을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처지였을 것이다. 

41년 당시 청진지국장은 이무라야스하루(飯村保治)였고 일본인 2명과 김홍수 아울러 청진지국원은 4명이었다.

김홍수는 해방과 더불어 우리의 신문들이 속속 창간 또는 복간되는 등 활발해 지면서 신문사의 중요 포스트에 앉아서 자유언론창달을 위하여 활약한다. 그는 중앙일보(中央日報)주필 국도신문(國都新聞)주필, 조선일보(朝鮮日報)사회부자, 중외경제신문(中外經濟新聞)논설위원, 중앙신문(中央新聞)논설위원 겸 정경부장, 동아일보(東亞日報)취재부장, 경향신문(京鄕新聞) 상임논설위원, 항도신문(港都新聞) 주필, 중앙일보(中央日報)주필, 연합신문(聯合新聞) 상임논설위원, 국도신문(48년 서울서 창간함) 주필, 대한일보(大韓日報) 논설위원으로 폐간무렵까지 집필하는 등 우리나라 언론신장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의 일생은 한평생 언론에 종사했다고 볼 수 있거니와 그나름대로의 공적은 우리나라 언론사에 높이 기록될 것이다.

 ( …)

김홍수는 수십년간의 언론생활을 통해서 아마도 49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톱에 게재된 이승만과 김구의 덕수궁 사진 몽타즈오보사건으로 동아일보  취재부장직을 물러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기자 생활에는 이런 따위의 넌센스 같고 우스꽝스럽고도 바보스런 돌발사고가 마귀처럼 따라 다니기가 일쑤다. 이 몽티즈사진사건으로 해서 고재욱(高在旭)주필 겸 편집국장은 편집고문으로, 편집부국장 민재정(閔載禎)과 추지부장 김홍수(金泓洙)는 해임되고 김삼규(金三奎)가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임명된다. 마치 김홍수는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동아일보에서 물러났다.

 

□ ‘조선은행’ 東京지점 개설의 뒷바라지

 

김홍수는 원산중학교 3학년에서 퇴학을 당했지만 원산 중학교 동창회에서는 그를 준졸업(準卒業.33년 8회졸업)생으로 대우해 주고 있다. 

김홍수와 가까웠던 이영수(曙香 李永秀)도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김홍수의 원산중학교 동기동창인 노동설(盧東卨 전 大成木材사장) 서재식(徐載軾 전 한일은행장, 부산은행장) 김경호(金京鎬 醫博), 이명보(李明甫 전 梨大藥大 교수) 이용우(李龍愚 전 韓電이사)등이 있으며 25회까지의 졸업생 명단이 실린 원산중학동창회보도 발행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이 있거니와 그것은 바로 한국일보 창설자인 장기영(張基榮)과 김홍수와의 관계이다. 그것은 해방 후 조선은행(朝鮮銀行)의 동경지점(東京支店)설치 당시 김홍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은행의 조사부장으로 있던 장기영이 김홍수를 통하여 조선은행의 동경지점설치를 실현시켰다는 대목이다. 김홍수와 장기영은 해방전 김홍수는 대판매일신문 청진지국원으로, 장기영은 조선은행 청진지점행원으로 청진바닥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의기가 상호 투합한 사이로 친교를 맺고 있었던 터라 김홍수가 일본의 대장성(大藏省)관리와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장기영이 알고 조선은행 동경지점개점을 그에게 부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듣고 보니 김홍수에겐 언론인 이외에도 사업가 적이고 모사(謀事)적인 측면도 있었구나 싶다. 

필자는 그가 병석에 있었을 때 원남동(苑南洞)자택으로 틈나는대로 그를 찾아 건강이 회복돼 재기하길 빌었으나 마침내 쌀쌀한 어느날 파주땅 용미리묘지에 그를 파묻고 말았다. 그렇게 잘하던 여성예찬론, 흥미가 샘솟듯하던 그 잔잔한 화술이 지금 내귀에 가냘프게 들려오는 것 같다.”

(김형균 전 자유신문 편집국장, 소년시절 항일로 명예졸업,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 1992)

 

 

김  홍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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