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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세중립화론자 김삼규(金三奎)

Posted by 신이 On 6월 - 14 - 2017

“▲ 45.12 조사부장, 편집국장, 주필, 취체역 주필, 편집국장 겸, 취체역, 도쿄특파원, 53.11 퇴사.〔민족문제연구소장(재도쿄)〕”

(동아일보사사 2권, 인명록)

 

 

“망명 아닌 망명

 

김삼규는 현역언론인들에게는 거의 전설상의 선배가 되어가고 있다. 그가 급서한 뒤 일본 아사히신문 사우들이 중심이 되어 ‘언론인 김삼규’간행이 계획되었다. 필자에게도 집필의뢰가 있어 ‘망명 아닌 망명’이란 제목아래 추도사를 기고한 바 있다. 언론인 김삼규하면 누구나 왜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하다 급서했는가? 가장 의문스러운 점으로 제기된다. 그 해답을 얻기위해 ‘망명 아닌 망명’을 그대로 옮기기로 하고 뒷부분에 그의 생애를 연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작년(88년) 서울에서 1주일쯤 선생과 함께 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 선생 추도사를 쓰게 되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서울에서의 선생은 배탈로 죽으로 보내시는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노령답지 않은 건장한 모습이셨는데….

선생의 생전에는 ‘왜 조국을 버리고 외국에서 생활하고 계시느냐’고 비난하는 소리도 적지않았습니다. 40년도 지난일, 더구나 선생은 유명을 달리하고 계십니다. 선생의 훈도를 받은 후학의 한사람으로서 선생을 대신하여 ‘망명 아닌 망명’의 진상을 밝히는 것도 조금은 선생의 공양이 되지 않을까하고 감히 펜을 들었습니다.

선생을 뵌 것은 필자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49년 6월이었습니다. 역산해보니까 선생이 꼭 40의 언덕에 도달한 즈음이었습니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던 만년의 선생의 모습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타는 무서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습니다. <그 전해(1948년) 이승만 김구 양 민족지도 자가 회견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덕수궁에서 회견한 것처럼 사진(몽타즈)까지 곁들여 보도한 책임을 지고 고재욱 주필이 고문으로 물러섰기 때문에 선생이 겸임하고 있었다.>

더구나 필자가 병아리 정리부기자(사회면 담당)여서 매일처럼 ‘이게 제목이야!’고 고함치시기가 일쑤였습니다.

선생은 연일처럼 사설을 통해 민주주의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이승만 정권을 정면 질타하여 정부여당을 전율케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정부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음으로 양으로 이손저손으로 언론탄압을 하기 시작해 언제부터인가 선생 주머니 속에는 사직원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수일 후 서울이 북괴군의 수중에 떨어져 신문은 자연휴간.
그 후 동년 9월 28일의 서울탈환 후 10월에는 신문도 다동뒷골목의 조그마한 인쇄소에서 속간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눈 깜빡할 사이, 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중순부터 다음해(51년) 1월 3일의 서울철수까지의 약 2주간, 선생은 겨우 다섯명의 편집진과 수명의 문선(文選), 식자공과 가까운 수표동 소재 조인상 당시 취재부장 댁에서 합숙하면서 유일한 중역-49년 11월 외부로부터 편집국장으로 영입된 장인갑은 전쟁 발발직후 북괴군에 납북되어 선생은 또다시 편집국장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고재욱 고문을 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 낙선 후 퇴사상태-으로 잔류하여 ‘신문이 휴간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아래 독자도 없는 신문제작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51년 1월 3일 영하 10여도의 혹한 속 수명의 사원과 쓰다 남은 신문용지 30수련을 가지고 입추의 여지도 없는 화물차에 몸을 싣고 피난수도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그 동안의 고난은 필설을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에서는 그곳 지방지 민주신보의 호의로 석간지인 동지가 인쇄를 끝난 다음 그 공장에서 조간으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셋방살이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동아일보의 성가는 날로 늘어나 철야로 인쇄해도 모자라는 놀라운 발전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방위군사건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부 측의 실정이 선생의 예리한 필봉에 의해서 파헤쳐져 동아일보의 사설은 피난 수도의 화제를 독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날 조간제작을 끝낸 뒤 합숙소(영도)에 있던 선생 친지의 공장 한 구석에 돌아가 몇시간 가면(假眠)후 아침 일찍 일어나 받아 든 신문을 보니 사설란이 삭제된 채 인쇄되어 있지 않습니까.

주필, 편집국장은 고사하고 편집자도 모르는 사이 사설란이 없어지다니….
언론사상 전대미문의 일대춘사에 선생은 격노했습니다. 물론 사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의 압력에 의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명명백백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설은 당시의 백재정(백두진 재무장관-부완혁 이재국장-황호영 이재과장)을 신랄히 규탄한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이들 중 누군가가 어느 선인가를 교묘히 움직여 이뤄놓은 간계임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후일담이 되지만 그때 선생은 ‘이젠 안되겠다’고 단념하셨다는 것입니다. 통한 이를 데 없는 선생의 자태는 패군지장 그대로였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조금전에 선생의 가족은 일본인이었던 부인의 향리에 기거하고 있었으므로 선생도 잠시 가족과 상봉하기 위해 일본도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51년 9월 ‘두 달쯤 후에 돌아올께’하며 선생은 현해탄을 건너가셨는데 이때 선생 흉중에는 깊이 간지하는 바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것이 선생의 망명 아닌 망명의 진상이다.

김삼규의 일본망명(?)의 시비는 고사하고 지금 되돌아보면 동아일보 7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활기찬 시대는 그가 진두지휘했던 그 시대였는 것 같다.

 

 

일본 쓰루가 시에서 숨진 ‘중립통한론자’

 

김삼규는 1908년 6월 16일, 전남 영암군 영암면 서남리에서 김주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21년 일본에 유학중인 둘째형 민규를 의지하여 도쿄 유학길에 올라 가이조(海城) 중학에 입학한다.

그 후 김삼규는 22년 4월 신설된 7년제 도쿄고등학교 심상과 2년에 편입, 고등과정을 마치고 28년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좀처럼 힘들었던 수재들의 동경의 표적이던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독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부터 김삼규의 무정부주의는 싹트기 시작한다. 그가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여 무산자사 동인이 되어 반제동맹에 가입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이러던 중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난다. 도쿄에서 궐기한 김삼규는 영암 도쿄유학생회 위원장 명의로 격려문을 보낸 것이 경찰에 발각되어 현지에서 체포되어 유치되고 만다.

얼마 후 풀려나온 김삼규는 이 무렵인 30년, 무산자사 위원장이 되면서 일본인 고노(河野依子)와 결혼, 다음해인 31년 도쿄대학을 졸업한다.

그러나 신혼의 즐거움도 잠시, 김삼규는 그해 8월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되고 만다.

34년 8월 석방된 김삼규는 그 해 10월 다시 도쿄로 되돌아가 가네코(金子和)라는 필명으로 레뷘 슈킹의 ‘문학과 취미’를 번역,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필생활을 시작한다. 그러고 그의 형극의 길은 다시 시작된다. 36년 그는 조선예술좌와 관계, 다시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된 후 38년부터는 헌책방 아오바라(靑原)서방을 경영한 일도 있다. 김삼규는 40년 1월,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목포에 정착, 장형 봉규의 사업에 참여한다.

김삼규의 신문사 생활은 해방된 45년 12월 동아일보에 입사, 조사부장이 되면서 시작된다. 이 때 그는 서울 돈암동에 살고 있었다.

4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주필을 겸했던 그는 7월에는 취체역이 되었는데 50년 6.25가 터지자 부산에 내려가 신문을 내다가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에 유엔군 종군기자로 참가했다.

51년 김삼규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폭정을 탄핵하는 논조로 독재정권과 맞서다가 정부의 언론탄압이 극에 달하자 “일본에 잠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긴 채 조국을 떠나고 만다.

일본에 간 김삼규는 53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중립화 통일론을 제창, 일본의 유력지인 에코노미스트를 비롯 가이조(改造), 주오코롱(中央公論)등에 조국의 중립화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기 시작한다.

김삼규는 57년 조선중립화운동 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해 10월에는 ‘코리아평론’을 창간, 논평을 펴다가 60년 6월 9년만에 귀국한다. 조국으로 돌아온 김삼규는 서울에서 각 신문과 잡지에 중립화 통일론을 기고하는 한편 서울대학에도 출강, 주목을 받는다. 이때 김삼규는 영구 귀국을 희망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여권교부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명 아닌 망명길을 떠나고 만 것이다.

김삼규는 일본에서 63년 ‘조선현대사’를 출간했다.

김삼규는 89년 4월 23일 재일교포 자제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쓰루가(敦賀)에 가 결혼피로연에서 축사를 하다가 쓰러져 급서했다.

형석 김삼규, 흔히들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졌던 대논객 김삼규, 전후 일본 언론계에서 더욱 유명했던 아카몬(도코제국대학)의 수재 김삼규는 파란만장의 그 생애를 이렇게 마쳤다.”


(권오철 출판사 삼천리 회장, 한국언론인물사화 3권, 1993)

 

 

 

김 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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