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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언론학회 초대회장 곽복산(郭福山)

Posted by 신이 On 6월 - 14 - 2017

“▲ 폐간전 사회부기자. ▲ 45.12 재입사, 사회부장, 47. 2 퇴사. ▲ 52. 3 재입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겸, 52. 4 퇴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명록)

 

 

“▲1911년 1월 30일 서울에서 출생 ▲71년 12월 24일 별세 ▲32년 일본 早?田大 정경학과 2년 수료 ▲35년 上智大 신문학과 졸업 ▲35년 4월 동아일보기자 평양지국 및 사회부 기자 ▲40년 8월 每日申報 사회부 기자 每日申報 ▲45년 12월 동아일보 사회부장 ▲47년 4월 朝鮮新聞學院 창설, 초대원장 ▲52년 3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 ▲ 54년 중앙일보 주간 ▲59년 한국신문학회 창립 초대회장 ▲62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66년 한국신문연구소 이사 ▲69년 中央大 신문방송연구소장 역임

 

□ 소처럼 외길만을 걸어온 牛堂

 

 우당 곽복산은 평생을 신문사와 학원을 내왕하며 우리 언론의 후배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다 가신 보기드문 인재였다.

 결코 길었다할수 없는 그의 꽉찬 60년 생애를 분석해 보면 언론인으로서의 현직생활보다는 언론인교육을 위한 교단생활쪽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할애했음을 누구나 쉽게 어림할 수 있다.

 요컨대 우당의 일생은 신문과 후배양성 그리고 특히 언론학정립에 바쳐졌으며 그의 신문학에 대한 무서운 집념은 71년 12월 24일 한낮 강연도중에 쓰러진 견지동 중앙여고에서 남긴 마지막 메모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즉 우당은 평소 앓던 혈압으로 쓰러지자 그 자리에서 쪽지한장에 “한국신문학의 발생지는 중앙여고의 한교실이었다”고 적어놓은 채 숨을 거두었던 것…그의 이같은 유언이 47년 4월 6일 첫 강의를 연 조선신문학원의 창설을 말한것임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신문학교수 제1호인’ 우당은 한국언론학(韓國言論學)을 태동시키고 체계화한 당대의 석학이자 8.15와 6.25, 4.19, 5.16등으로 이어진 격동의 현대사를 굴지의 논객으로 그리고 타협과 유혹을 모르는 대쪽같은 언론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어느모로 보나 시원스럽게 잘생긴 호남형이었으나 늘 과묵한 편이었다.

 그래서 50고개를 넘으면서 쓰기 시작한 아호 우당(牛堂)은 그의 인품을 무엇보다 잘 표현한 셈이었다.

 우당에게서 과격한 면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었으며 그는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대립보다는 타협을, 누굴 나무라기 보다는 설득하기를 좋아했다.

 한마디로 대인관계에서 부드럽고 완만했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벗이 몰렸고 광복직후의 어려운 여건아래서 ‘신문학원’을 꾸려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의 그같은 인품 때문이었다.

 

□ 新聞學전공을 위해 대학도 옮겨…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하면서 망국의 한 속에 온겨레가 맨주먹으로 일어섰던 3.1만세운동도 서서히 가라앉고 타의에 의한 개화의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오던 1911년 1월 30일(음) 서울에서 곽수천(郭洙千) 김수경(金수卿)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우당은 어려서 어버이를 잃고 5세때부터 전북 김제읍의 한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히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후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영신학교와 소성의숙에서 보통교육과정을 마친 우당은 15세때인 25년부터 와세다대학 통신강의록에 의한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치고 30년 일본의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 32년 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거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정치경제학은 도무지 그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을 뿐더러 전공하는 학생도 많았고 별로 장래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고민에 빠져있던 그에게 우연히 하나의 낭보가 전해졌다. 조지대학(上智大學)에 일본에서도 유일한 신문학과(新聞學科)가 새로 개설된다는 것…우당은 서슴지않고 그 대학으로 옮겨 35년 제1회 졸업생으로 신문학사가 됐다.

 그렇지 않아도 통신강의록으로 한창 고학을 하던 27년에서 29년 사이 동아일보의 지방주재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에게 신문의 매력은 이미 몸에 배어있었던 듯…우당은 조지대 졸업에 앞서 34년 동아일보 본사에서 2개월 동안의 실무훈련을 자진해서 치르기도 했다.

 졸업 후 잠시동안 모교의 신문연구실에 머무끝에 우당은 그해 4월 고하(古下 宋鎭禹) 사장의 권유로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 사회부 소속으로 평양지국을 다녀온 뒤에는 주로 경성부청(京城府廳.시청) 출입을 맡았다.

이로써 그의 오랜 꿈은 이뤄진 셈이었으며 이듬해에는 고당(古堂 曺晩植)의 주례로 장영덕(張永德)과 결혼식도 올렸다.

 그러나 그해 여름 이른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의 비운을 맞게되자 신혼의 단꿈은 실업자 신세로 전락, 다른 사우들과 함께 오랜 고난을 겪게 된다.

 37년 6월에 우당은 첫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곧 바로 동아일보의 장기정간도 풀렸기 때문에 그는 장남의 이름을 집안의 돌림자 대신 동아일보의 약자인 ‘東日'(현 高大의대교수)이라 지었다.

 그런데 우당이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하던 무렵 처음부터 그를 스카우트했던 고하와는 20여년 터울로 부자관계 이상의 두터운 사이였던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고하의 민족주의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투철한 민족주의에 입각한 언론관을 견지, 해방직후의 혼탁한 이념논쟁에 대처하면서 비뚤어진 사상경향을 선동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동아.조선의 두 민족지가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을 당하던 40년8월 또 다시 직장을 잃은 우당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옮겨 중군기자로 중국전선을 순회하는 한편 연예인들을 이끌고 이른바 전쟁수행을 위한 대중계몽에 동원되기도 했다.

 

□ 東亞를 나와 ‘신문학원’ 창설

 

 첫번째 부인인 장씨와 사실상 이혼한 상태로 광복을 맞은 우당은 45년 12월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 재입사, 사회부장 겸 논설위원이 됐다.

그리고 47년 4월에는 동아일보를 나와 우리나라 초유의 신문기자 양성기관인 사단법인 조선신문학원을 창설, 초대원장으로 취임했으며 조매리(趙梅里)여사와 재혼, 슬하에 차남인 동성(東星.현 중앙대 교수)과 동임(東任), 동실(東實), 동희(東姬)의 4자매를 얻게된다.

 조여사는 바로 조경희(趙敬姬)의 친동생으로 일제말기 부청출임때 알게 된 조씨의 소개로 성혼이 된 것�두 내외의 금실은 꽤나 유명했었따.

6.25전쟁이 터지자 제주신문(濟州新聞)의 주필로 부임한 그는 군의 군납부조리를 폭로한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한달동안의 옥고를 치렀고 52년 3월에는 동아일보로 다시 돌아가 이듬해 4월까지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세계통신(世界通信) 고문을 거쳐 54년 이북(李北)의 중앙일보(中央日報) 주간과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우당은 55년 홍익대학에 처음 신문학과가 개설되면서 주임교수로 부임, 최초의 신문학교수가 된다.

우당이 신문학원을 통해 후진향성에 진력하는 판편으로 대학강단에 선 것은 물론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49년 4월 서울대 문리대의 신문학개론 강좌개설을 비롯해서 그는 52년 연희대학에서도 신문학을 강의했으며 그후에도 고려대 중앙대등 여러대학에서 자주 강단에 서왔다.

우당은  57년에는 홍익대에 이어 중앙대에도 신문방송학과를 창설, 64년부터는 석사과정까지 만들어서 전문적인 매체교육과 연구사업의 길을 트기도 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순수 신문학 이론서인 ‘신문학개론’을 저술, 많은 후학들의 유일한 길잡이가 되도록 했으며 71년에는 다시 ‘언론학개론’을 출간, 이나라 언론학의 체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언론학개론’은 우당이 급서한 다음날인 71년 12월 25일에야 제본이 끝났기 때문에 저자 자신은 끝내 책구경도 못한채 눈을 감고 말았다.

( … )

※ 저서:新文學槪論, 言論學槪論
※ 참고자료 : 韓國言論人物誌(한국신문연구소), 전교학신문 제94호, 新文學報 창간호, 新聞百年人物事典(編協), 東亞日報社史 ”

  (최준 전 중앙대 신문학교수,  소처럼 외길만을 걸어온 우당 (책 내용의 첫 제목),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 1992년)                             

 

 


곽 복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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