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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4 논설위원, 편집국장, 논설위원실장, 편집고문, 편집인, 이사, 66. 7 사임.”

(동아일보사사 2권, 인명록)

 

 

“▲1903년 10월 3일 서울에서 출생 ▲1985년 8월 13일 서울에서 별세 ▲1923년 上海惠靈전문학교 졸업 ▲31년 中央日報 기자 ▲35년~40년 朝鮮日報 사회부· 지방부 기자 ▲40년 每日新報 기자 ▲46년 朝鮮日報 편집부장 ▲48년~49년 京鄕新聞 편집국장 ▲49년 6월~52년 서울신문 편집국장 ▲56~65년 東亞日報 논설위원· 편집국장· 논설위원실장 역임 ▲66년 東亞日報이사 편집고문· 편집인 ▲68년 동사 客員

  1931년 옛 중앙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나절로는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언론탄압때부터 시작, 8.15해방, 자유당, 4.19, 과도정부, 민주당은 물론이며 5.16공화당정권의 초기까지 근 40년 동안을 동고지필(董孤之筆)의 논객으로 일관해왔다. 그랬기에 나절로에 대한 에피소드는 하도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 어느 얘기를 꺼내야할지 엄두가 안난다.

  ‘나절로’하면 동아일보를 연상하게 되고 ‘동아일보’하면 나절로를 연상하게 되는 때가 있었다. 나절로 논단(論壇)이 세상을 풍미했던때가 50년대에서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니 그동안에 일어난 숱한 비화(秘話)며, 무용담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선 두주(斗酒)를 불사했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여 ‘저기 나절로가 좌정하고 있다’는 것을 밖에서도 금시 알 수가 있었던 논객이었다는 것부터 말하고 나가야겠다. 8.15 광복전에는 당주동(唐珠洞) 목천(木川)집이 주호들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여기서 모이는 멤버는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 석영 안석주(夕影 安碩柱), 횡보 염상섭(橫步 廉尙燮), 팔봉 김기진(八峰 金基鎭), 성재 이관구(誠齋 李寬求)등이었다. 이 목천집은 술맛이 삼회주 비슷한 향긋한 술과 더덕무침이 일품이라서 선비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이 멤버들을 위해 아무리 손님들이 밀려와도 아예 방 하나는 비워놓고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나절로와 현진건은 막상막하의 주량에다 집이 같은 방향(紫霞門 밖)이 돼서 더욱 자주 어울렸다. 

 

□ 편집국장 하란다고 사표낸 옹고집

 

  30년대부터의 언론인들중 나절로만큼 화려한 경력을 지닌분도 드물 것이다. 46년(해방 다음해)에는 조선일보 편집부장, 48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49년 시사신문 편집국장 겸 주필, 이 신문이 폐간되자 이내 서울신문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으로 3년 있다가 56년 4월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겼다.

  언론인치고 편집국장이나 주필 한번 해보고픈 것이 누구나의 상정(常情)이오, 소원인데 나절로는 역으로 편집국장 하란다고 논설위원 사표를 낸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절로의 옹고집은 더욱 명성을 떨쳤지만-.

  83년 3월 편협보(編協報)원로의 근황(元老의 近況)란 인터뷰에서 나절로는 그때 그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런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는 또 어디서 들었어. 암 있었지… 동아일보 최두선 사장때였는데 논설위원으로 들어간지 두달도 안됐는데 편집국장을 하라는 거에요. 그래 싫다고 했지. 그러나 최사장은 내일 오후나 모레는 발령을 낼테니 그리 알고 있으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 길로 나와서 사표를 우송했지”하고는 해소기로 기침을 연거푸 하면서도 독한 엽궐련(葉卷煙)‘한강’을 피워 물었다.

  기자가 그 까닭을 묻자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야 하구말구… 그러나 심강(心崗)의 천하에서 그걸 뭐하러해?… 맨날 싸우다 볼일 못보게?…”
하고는 다시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몇 달 후엔가 다시 동아일보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갔었지. 9개월 동안인가 방랑했지. 놀고 있는 동안 백상 장기영(白想 張基榮)이 찾아와 한국일보로 오라는 거예요. 생각을 좀 해보고 대답하리다 했더니 다음날 유광렬(柳光烈)이 와서 또 조르는 거야. 고민이더군. 동아일보에서 이 낌새를 알고 옛 동료들이 찾아와서 술한잔 하게 나가자는 거예요. 오래간만이라서 선뜻 따라나섰더니 청요리집 태화관(泰和館)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야. 그랬더니 방에 최사장과 심강(心崗)이 앉아 있다가 ‘우리가 나절로 납치해 오라 했어요’하며 반가워 하더구먼. 배갈 술잔이 오가고하다가 심강이 ‘속 썩이지 아니할테니 소신껏 편집국장 한번 해봐요. 최사장 앞에서 내 약속할게’이렇게 다짐하기도 하고… 결국 그노메 술기운에 승낙하고 말았단 말이야”나절로의 그 옹고집도 동아일보의 고집에는 당해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 … )

□ 명문 시위소찬(尸位素餐)의 부통령 사임서 집필

 

  나절로는 역시 참모총장격인 편집국장보다는 논설주간이나 주필이 더 어울렸다고 평하고 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논설위원실장이 된 나절로는 경세(經世)의 필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논단(論壇)<나절로>가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불의(不義)와 사악(邪惡)에 대해서는 가위 독설에 가까운 필치로 논평했고 그 문장에는 서리가 어렸다할 만큼 의기(毅氣)가 넘쳐 한때 동아의 지가(紙價)를 올린바 있었다.

  나절로의 필봉은 그 이전에 이미 소문난 명문이었다. 6.25전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에 환멸을 느끼고 사임한 이시영 부통령의 ‘국민에 고함’이라는 제하(題下)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사임서라고 붙인 이 명문의 탄핵문 집필자가 나절로였다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다.
  당시는 이승만정권의 독재가 하도 무서워 감히 누가 이런 사임서를 집필하겠다고 썩 나설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는데 나절로는 그 집필을 흔쾌히 응했던 것이다.

  시위소찬이란, 무력하게 앉혀 놓고서 들러리로 삼기만 하는 모욕과 서러움을 뜻한 문자다. <국민을 알기를 옛 군왕(君王)치하의 백성이나 노(奴)로 아느냐? 더 이상은 그 전단과 독재· 반민주적인 정사들을 참아 볼 수 없다>고 비분강개한 그 문장은 지금 읽어봐도 오싹해지는 명문장이다. 그때 나절로가 그 집필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더라면 아마 어떤 누명으로라도 옥고(獄苦)를 치렀을 것이다.

  그런데 6.25때 부산으로 정부가 옮겨졌을때 인촌 김성수 부통령의 사임서도 나절로가 썼다는 말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확인이 안되고 있다.

  어쨌든 나절로의 논설은 5.16군사정권하에서도 거침없이 날카로웠다. 그 대표적인 논설은 그가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장으로 있을때 신동아(新東亞· 64년 11월호)지에 쓴 <병 든 조국은 어디로-국민의 일원으로서의 용의적(庸醫的) 진단(진단)>이라는 대논단이다.

  언론 규제법을 만들어 시행하려 했다가 소위 언론파동이 일어났었고, 집권당(共和黨)은 의석수효로써 야당을 짓밟았고, 공무원은 이 이도(吏道)가 말이 아니었을때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비장한 각오를 한 끝에 결연히 붓을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병들어가는 조국의 앞날이 어찌 될 것인가?고 개탄한 원고지 2백50장의 그 슈퍼논설은 위정자를 비롯 정치인들의 폐부를 찔렀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의해 신동아 일보가 서점에서 압수되고 나절로는 중앙정보에 끌려가 노구에 경을 치고 나왔다.

 

□ 말년에 자각대 거사(紫閣黛 居士)로 유유자적

 

  68년 동아일보 객원(客員)을 끝으로 약 40년만에 세필(洗筆)을 한 나절로는 옥인동(玉仁洞) 옛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30여평 남짓한 ㄷ자집 서재문지방 위에 자각대(紫閣黛)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글씨는 완당(阮堂) 추사의 낙관이었다. 그 현판의 뜻에 대해 나절로는 “글세, 눈썹을 단장한다는 뜻이니까 정신을 맑게 한다는 뜻이 될까?…”했다. 어렵고도 희귀한 현판이었다. 고색이 찬연한 고서(古書)로 사방의 벽이 메워진 서재 겸 거실이 대논객 나절로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세계였다.

  그런데 옥인동의 이 집은 연고가 있는 집이었다. 1920년대에는 사학자 호암 문일평(湖岩 文一平)이 살았던 집이며, 30년대 후반서 8.15까지는 그 아들 문동표(文東彪· 조선일보 14대 편집국장)가 살았다.
  이 자각대의 거사(居士) 나절로는 망구(望九)에도 카랑카랑하고 학처럼 고고했는데 85년 8월, 83세로 별세했다.”

 (김천수 대한언론인회 이사, 편집국장 하란다고 사표 낸 옹고집,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편(하), 1992)                              

 

 

우 승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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