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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 1 기자(학예부, 경제부), 경제부장, 편집국차장 겸 경제부장, 편집국장, 1940. 8 폐간. ▲ 1945.12 재입사,

▲ 폐간전 편집국장. ▲ 45.12 편집국장, 편집인, 주필, 편집고문, 주간, 편집국장 겸 부사장 겸 주필, 사장, 발행인, 회장, 주필 겸 편집인, 명예회장, 76. 6 재임중 사망.”

 (동아일보사사 1,2권, 인명록)

 

 

“▲1903년 5월 3일 전남 담양군 청평면 삼천리에서 출생 ▲1976년 6월 22일 별세 ▲21년 3월 서울중앙학교 졸업 ▲30년 3월 일본 동경제대 경제학부 졸업 ▲31년 1월 동아일보 학예· 경제부 기자 ▲33년 8월 동아일보 경제부장▲39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46년 1월 동아일보 주필 ▲58년 11월 동아일보 주필겸 편집국장 ▲61년 7월 동아일보 부사장겸 주필 ▲65년 8월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 ▲71년 2월 동아일보 회장겸 주필 ▲75년 2월 동아일보 명예회장

  고재욱은 평생을 신문에 바친 20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한국 언론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그 이듬해인 193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 76년 73세에 작고할 때까지 일제말 동아일보의 폐간기간(1940~1945년)을 제외한 40년간을 한 언론사에서 재직했다(별세당시 그는 동아일보사의 명예회장이었다).

  그래서 생존당시부터 그의 경력을 말할 때는 “고재욱은 이력서가 단 한줄인 인물”이라고들 이야기를 했다. 즉 “1931년 입사, 현재에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한국신문편집인협회회장등 적잖은 사외활동을 했으며 이력서에는 당연히 이런 대목도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그가 언론인으로 생애를 일관했고, 그것도 한 언론사에서만 계속 일한 것을 말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 것이다.

  고재욱이 언론인으로 활동한 시대적 여건은 한 마디로 고만의 연속이었다. 그가 28세의 나이에 동아일보 학예· 경제부 기자로 입사한 31년은 일본 제국주의세력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된 때였다. 일제의 소위 문화정치는 20년대말을 전환점으로하여 서서히 조선탄압정책으로 다시 바뀌고 있었다. 일본 총독당국은 3.1운동으로 충격을 받아 식민정책을 무단정치에서 일시적인 완화책을 써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10년이상 가지못하고 결국 다시 본색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고재욱은 33년에 경제부장이 되고 39년에는 약관 36세에 편집국장으로 승진한다. 이때는 이미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드디어 편집국장이 된지 1년도 채 못되어 일본 식민당국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폐간시키고 총독부 기관지 하나만 남겨두었다. 그는 해방되는 해인 45년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 신문에 복귀, 46년에는 주필이 된다. 그후 65년 사장이 될 때까지 주필, 주필겸 편집국장, 부사장겸 주필을 역임하여 19년간의 ‘고주필시대(高主筆時代)’가 동아일보에서 열리게 된다. 그는 회장자리에 있을 때도 한때 주필직을 겸했는데 제작의 총사령탑으로서의 그의 위치는 75년에 그가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을때까지 사실상 계속된 셈이다. 이렇게 따지면 그는 30년대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여년간을 동아일보의 제작 총책임자로 군림한 셈이다. 아마도 이러한 예는 한국언론사에는 없지않은가 생각된다.

  고재욱은 신문의 제작책임자로서 여러 시대를 살았다, 오늘날 언론자유를 만끽하는 상황에서는 상상도 못할 시련을 이겨내야 했으며 때로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해방, 남북분단, 6.25, 자유당독재, 4.19. 5.16, 한일국교정상화, 그리고 유신독재에 이르는 30년대에서 70년대까지의 20세기 중반기를 살면서 영광과 고난을 동시에 겪지않으면 안되었다. 
 

 

□ 황금기의 동아일보

 

 한국 현대사의 격동속에서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기 마련인 언론인이 고재욱처럼 한평생을 언론계에 몸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시대적 전환기에는 언론인들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언론계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제때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격변기에는 많은 신문들이 생겼다가 없어졌다 했다. 그러나 고재욱은 일편단심 한곳에서만 머물렀다. 그가 흔들림없이 한 언론사에만 머무러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동아일보가 당시에 비료적 순탄한 경영체재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자신이 설립자의 특별한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그는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처질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 평생을 한 신문사에서, 특히 제작의 총 사령탑으로 30여년동안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완전한 설명은 될 수 없다.
  고재욱이 언론인으로 한평생을 걸은데는 그의 온화한 성격도 한몫을 한 것 같다. 그는 과격한 성격이 아니었다.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할 줄 아는 격동기의 지혜를 몸소 실천한 언론인이었다. 신문제작에 있어서 유연한 그의 대처방침은 이런데 기인하며 이것이 또한 그의 비판자들에게는 공격자료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조용하고 단아한 선비형의 풍모를 지녔었다. 평소에 과묵하고 신중했으며 좀처럼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크지 않은 몸매에 걸음거리 역시 단정했으며 희로애락을 표시하는데도 극히 절제할줄아는 성품의 소지자였다. 누가 무엇을 부탁해도 즉석에서 예스나 노를 하는 법이 없고 “검토해 보겠다”, “생각해 보겠다”정도의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고재욱의 이런 성격은 거의 천성적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마 그의 엄격한 가풍이 더욱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조부는 구한말 때 정3품 규장각 직각(奎章閣 直閣)을 지냈으며 벼슬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학교를 세웠다. 고재욱은 신식학교인 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기전에 여기에 다녔으며 따로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13세때까지 4년간 한학을 수학했다. 그는 신식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제대(京都帝大)경제학부를 나왔으나 그의 유년교육의 영향이 크지않았나 생각된다.

  회사밖에는 잘 알려져 있지않던 일이지만 고재욱을 말할 때는 최두선(崔斗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최두선은 1894년생으로 1903년생인 고재욱보다 9년 선배였으나 최두선이 중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나중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고재욱은 학생이었다. 최두선은 47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5.16혁명후 박정희 정권의 초대 국무총리로 가기전까지 17년간 사장으로 재직했다. 따라서 고재욱은 주필 또는 부사장겸 주필로서 중학교때의 은사를 사장으로 모시고 있었다. 최두선은 고재욱을 부를때는 언제나 “고군”이었다. 당시의 풍습으로 이 두사람의 엄격한 관계가 어떠했으며 또 고재욱의 입장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젊은 기자들끼리 술자리같은데서 고재욱을 가리켜 “고군-”하고 불러보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여하간 고재욱은 일상태도에서 언제나 겸손했다. 쿄토제대 경제학부를 나온 학력임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자기가 경제통임을 자처하지 않았다. 제작 책임자로서 오랜 경험의 축적으로 그는 사물의 판단에 있어서 균형감각을 중요시 했다. 이 때문에 과도한 형용사는 기사건 사설에서건 금기시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데도 비판도 중요하지만 잘된 것을 칭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잘못된 것을 나무라는 방법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고 평소에 강조했다.

  이렇듯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성격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고재욱을 회사밖에서 본 글들이 주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의 온화한 성격의 일면만이 부각되었을 뿐이다.

  동아일보 제작 책임자로서의 고재욱은 회사안에서는 왕과도 같은 절대권위자였다. 그는 부하에게 개인적으로 따스하기는 했으나 업무에는 엄격했다. 그가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논설위원에게는 사설집필을 금지시켰으며 누구도 이에 감히 이의를 달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 엄격했기 때문에 그의 지시나 명령은 제작자들에게는 절대적이었다. 오늘날의 언론계의 풍토로서는 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중요한 기사를 빠뜨리는 사태가 생기면 기자들은 고주필실에 불려가 일종의 재판을 받았다. 그는 대개 오후 3, 4시면 편집국을 순시했는데 60년대초 언젠가 한번은 어떤부에서 1판에 꽤 큰 기사가 빠졌다. 그는 바로 편집국에 올라왔으나 담당부장은 아직 점식먹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돌아가더니 얼마후 다시 편집국에 올라왔다. 고재욱은 그때서야 돌아와있는 담당부장에게 “○○부장은 그 기사 취재하러 갔었나?”고 호되게 질책을 했다. 화를 낼때 그의 얼굴은 빨개지곤 했다.

  고재욱은 주필 재직시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논설위원으로 채용하여 신문지면을 빛냈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논설위원실의 주류는 기자출신이 아니고 학자출신이었는데 그는 문명(文名)을 날린 저명한 교수들을 논설위원으로 발탁해서 썼다. 논설위원 뿐 아니라 타사의 젊고 유능한 기자들은 스카웃하는데도 고재욱은 관심을 가져 60년대초까지 많은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고재욱은 언론계 입문이후 얼마 안되어 제작책임자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붓을 잡을 기회는 적었다. 그는 또 신문논조의 최고책임자인 주필입장에서 개인의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글쓰기를 삼갔다. 이 때문에 그가 남긴 글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떻게 보면 개인으로서는 자기 희생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작 책임자로 있던 70년 중반까지의 30여년간 그가 이끌던 동아일보는 황금기였다. 기라성 같은 인재들로 독자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이것은 고재욱의 제작책임자로서의 능력, 즉 깊은 사려와 신중함, 공정함, 남보다 앞서는 안목과 경륜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서 언론인 고재욱은 높이 평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 자유언론을 위한 그의 투쟁

 

  고재욱은 이나라 정통의 보수적 언론인이었다. 그는 당시 언론인의 학벌로서는 엘리트 코스인 일본 쿄토제대 경제학부 출신인데다가 민족적, 사상적 안목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생시에 기자를 지망한 동기에 대해 “배운 지식이 박해받는 민족에게 보탬이 될까해서”였다고 했다. 동아일보를 택한 것은 민족의 표현기관으로서 민주, 민족, 문화주의를 내건 사시가 그의 생각과 일치했으며 당시의 민족지도자인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가 동아일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했었다.

  과연 고재욱이 입사한 당시의 동아일보는 일본 총독부의 단말마적 탄압을 받았으며 입사 5년만인 36년에는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나 동아일보가 무기 정간을 당했다. 당시 고재욱은 경제부장으로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편집국의 몇 안되는 간부로서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냐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39년 11월에 편집국장이 되었으나 40년 8월에 신문이 폐간되자 낙향하여 5년간 농사일을 도왔다. 이같은 깨끗한 처신은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이다.

  해방에서 6.25까지 약 5년간 이 나라에는 극심한 사상대립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는데 이런 현상은 언론계에서는 가장 첨예화한 형태로 나타났었다. 당시에는 유행병처럼 기자들이 좌익사상에 물들었으며 인기있는 쪽은 좌익이지 우익이 아니었다(동아일보는 당시 우익지로서는 최대부수였으나 전체로는 4위였다). 그러나 고재욱 주필 아래서의 동아일보는 외로운 보수지로서 꿋꿋한 자세를 허트리지 않아 48년 5월 좌익들의 사옥습격과 방화사건까지 일어났다. 고재욱 자신은 좌익계열의 조직인 조선기자회에 맞서 47년 8월 조선기자협회를 만들고 그 위원장에 취임했다. 평소에 풍기던 그의 온화한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파적 활동이 아닐 수 없다.

  이 무렵 고재욱은 주필로서 보수적이고도 점진적인 발전론자였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소걸음(牛步)론”을 폈던 것이다. “천천히 걸어가기는 하나 전진이 있을 뿐, 후퇴는 없소, 붓을 들때 언제나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보, 이것이요”라고 강조했다. 논설위원중에서 계획경제나 국유화 같은 진보적 주장을 하면 그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하는 이솝우화를 예로 들면서 “얼른 보면 토끼가 빠를 것같이 보이지만 결국에 가서는 거북이 먼저 가게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철저한 계획경제론을 펴던 진보적 논객들이 고재욱의 영향으로 자유경제론자로 전환하기도 했다.

  고재욱의 반일, 반공적 자세는 이승만정권 아래서는 반독재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정권에 맞서 경향신문과 함께 가장 비판적인 논조를 편 당시 동아일보는 51년 부산 정치파동때 편집국이 자유당정권의 하수조직인 땃벌떼와 백골단의 습격을 받았으며 고재욱 자신은 투옥된다.

  고재욱은 5.16이후 이번에는 군사정권으로부터 더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62년 7월 논설위원 황산덕이 쓴 사설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로 집필자와 함께 중앙정보부에 구속되어 혁명후 사설로 인한 언론인 구속의 첫 케이스를 기록했다. 흥미있는 것은 두사람의 구속에 대해 동아일보가 이틀후 구속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한 것인데 5공때와 비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용기였다. 고재욱은 구속 6일만에 풀려났으나 황산덕은 4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그의 언론자유투쟁중 가장 빛나는 업적은 아마도 언론윤리위원회 법안을 좌절시킨 사건일 것이다. 군사정부는 64년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위해 이 법안을 국회에서 강행 통과시켰다. 전언론계가 국회심의전부터 반대운동을 벌이자 정부는 회사별로 압력을 가하여 언론계의 분열을 꾀했다. 당시 편집인협회회장이던 고재욱은 기자협회회장등 다른 언론계 대표들과 함께 유명한 박정희 대통령과의 유성담판을 가짐으로써 결국 법안의 공포 보류 형식으로 이 법안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

  고재욱은 이 공로로 다음해인 65년 5월 런던에서 열린 IPI 14차 총회에서 사회자로부터 단상에 초치되어 300여명의 세계 언론인들 앞에서 “IPI가 추구하는 언론자유의 영웅”이라고 소개되는 영광을 가졌다. 그는 이 대회에서 한국어로 “한국언론의 현상”이라는 제목의 연설까지 하고 연설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사회자로부터 “귀하와 귀하가 영도하는 한국신문들의 승리를 축하한다”는 치하와 함께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고재욱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난 고재욱은 아시아지역의 언론발전과 상호교류를 위한 아시아신문재단 창설에 적극 참여하여 67년 3월 스리랑카에서 재단창립총회를 가졌다. 그는 스리랑카의 위크레메 싱게(1966~68년 IPI본부 의장), 필리핀의 치노 로세스와 함께 이 재단창설자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가 국제적으로 “에이시언 세이지”(Asian Sage· 아시아의 賢者)라는 말을 듣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의 작고후 아시아지역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고재욱기념상이 제정된 것 역시 이러한 그의 명성에 힘입은 것이다.

  고재욱의 언론계활동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이외에도 한국신문회관 이사장, 한국신문연구소이사장, 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 IPI한국위원장으로 다양했으며 사회활동으로는 64년이래 전국재해대책협의회 회장, 인촌기념회이사장,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운정장학재단 이사장등을 지냈다.

  언론인 고재욱의 생애야 말로 우리 현대사의 축쇄판이다. 갖은 영광과 고난과 좌절과 오욕의 역사속에서도 그는 끝내 선비로서 일관하여 언론계는 물론 온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은 언론인이다.”

(남시욱 동아일보 상무이사, 한국 현대언론의 큰 나무,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편(하),  1992)

 

 

고 재 욱

 

IPI회의에 참석키 위해 케냐로 출발하는 본사 고재욱사장(오른쪽)과 홍승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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