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9 논설위원, 심의위원겸, 신동아주간겸, 편집국장, 필리핀특파원, 수석논설위원, 이사겸 논설주간, 75.2 퇴사.”
(동아일보사사 3권, 인물록)
“▲1927년 7월 27일 서울서 출생 ▲83년 5월 26일 별세 ▲45년 3월 京畿中學 졸업 ▲54년 3월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업 ▲58년 3월 한국일보 편집국장 ▲62년 7월 동 논설위원 ▲62년 9월~65년 5월 東亞日報 논설위원 겸 심의위원, 新東亞주간겸임 ▲68년 6월 IPI한국위원회 사무국장· 아시아 신문재단 사무국장 ▲68년 12월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구속 ▲72년 4월 東亞日報 수석 논설위원 ▲75년 2월 동아일보 퇴사 ▲80년 3월 德成女大교수
홍승면(洪承勉)은 한마디로 천부의 언론인이요, 문필인이다. 49년 합동통신기자로 출발 근 4세기반동안 한국일보 동아일보등에서 일한는동안 쓴 수많은 칼럼, 사설, 그리고 사상계(思想界) 신동아(新東亞)등 잡지에 기고한 글등을 통해 그는 가히 금세기 후반기 한국언론계가 낳은 굴지의 칼럼니스트라고 일컬을 만큼 큰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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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국일보에 입사하게된 동기는 대학동창인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韓雲史)의 청탁으로 당시 통일교에 관한 기고를 문화면에 싣게되자 대학생들이 몰려와 항의데모가 있었는데 장기영(張基榮)사장이 그의 글에 주목을 하고 한운사의 추천으로 그를 외신부차장으로 발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일보는 54년부터 명문대학 출신의 인재들을 견습기자로 공채해 참신한 인력을 양성하고 한편 한운사, 홍승면과 같은 재사를 맞아 국제적 뉴스와 새로운 시대감각을 지면에 불어넣어 청년신문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특히 대학생등 젊은 독자층에 인기가 높았다. 그는 한국일보 일요판에 56년초경부터 매주 ‘모노클’(왜말 안경)칼럼을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로서는 비교적 생소한 외국의 시사성있는 인사이드 스토리를 소재로 흥미진진한 글을 썼다. ‘勉’이라는 이니시얼이 들어간 이 ‘모노클’이 아마도 그의 칼럼니스트로서의 데뷔였다고 기억된다. ‘모노클’에 이어 그는 한국일보 칼럼 ‘메아리’지평선(地平線)을 집필, 칼럼니스트로서의 자리를 굳히게됐다. 58년 3월에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그해말 아시아재단 후원으로 미국 스탠포드대학에 유학, 그는 처음으로 외국의 문물을 몸소 만끽 ‘미국잡기’를 싣기도 했다. 귀국후 60년 10월 경희대학교 강사를 맡았다가 62년 7월 한국일보사 논설위원으로 복귀했는데 두달후 62년 9월 동아일보로 옮겨 논설위원 겸 심의위원, 65년 5월엔 논설위원 겸 신동아(新東亞)주간을 맡게 됐다. 그런데 68년 12월 신동아 12월호에 실린 차관(借款)기사가 문제되어 그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게 되었다. 이 기사는 당시 조야에 일고있던 ‘차관망국론’을 진지하게 다룬 심층보도였는데 59년 1월부터 그때까지 9년간에 도입된 12억8천1백만달러의 내역은 물론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외국빚이 우리 경제건설에 끼친 공과 과를 면밀히 분석검토한 말하자면 차관의 백서(白書)라고 볼수 있다. 대부분 국회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한 것이었지만 특히 이목을 끈 것은 차관과 정치자금에 관련된 부분들이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 기사를 아무리 따져도 반공법에 얽어 공소할수없게 되자 할수없이 이를 덮어두고 그대신 신동아 68년 10월호에 실린 미국 미주리대학의 조순승(趙淳昇)교수의 북괴(北傀)와 중소분열 기사에서 억지로 트집거리를 잡아내 일대반격을 시도하게 되었다. 조교수가 쓴 영문원고를 번역한 남만주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 김일성부분을 문제삼았는데 영어원문 ‘LEADER’를 ’‘지도자’로 번역한 것을 걸고 넘어간 것이었다. 가령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를 공비의 두목정도로 번역했더라면 트집을 못잡았을 것이다. 68년 12월 7일 동아일보는 1면에 사고로 사과문을 실은 다음 홍승면, 손세일(孫世一) 두사람은 석방되었고 이어 천관우(千寬宇)주필까지 세사람이 의원해임되었다. 신동아 사건은 60년대 중앙정보부의 폭거에 동아일보가 맞서 고군분투하다가 굴욕을 강요당한 분노의 기록이기도하다. 그리고 실은 3선개헌이라는 영구집권에의 길을 닦는 정치권력의 폭주과정에서 그런 정치적 목적 달성에 장애요인을 하나 하나 제거하는 정치탄압의 일환으로 취해진 계획된 조치였다고도 볼수있을 것이다.
□ 군사정권에 실망, 象牙塔으로
자유언론의 투사로 막사이사이상을 탄바있고 요즘 그의 사인에 의문이 일고있는 장준하(張俊河· 당시 신민당)는 국회에서 신동아사건을 따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었다. “천관우, 홍승면이라하는 인물들이 그래 대한민국에서 그렇게밖에 대접을 받지못할 인물들이냐 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대신문사의 주필이라 주간이라하는 인사들이 그 직위에 도달하기까지는 정부에서 대통령이다 총리다 장관이다 하는 따위의 직책을 얻기까지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도 더욱 더 높은 차원에서 연륜과 경력과 연마와 존경이 곁들여서 비로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들은 국민앞에 군림하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들은 적어도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대상이라함을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69년 2월 동아일보사에 복귀,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71년 8월 아시아신문 재단 사무국장으로 필리핀에 주재하면서 동아일보 마닐라 특파원직을 겸했다.
72년 4월 동아일보사 수석논설위원으로 복귀, 73년 8월 출판국장겸 이사 성곡(省谷)언론문화재단 운영위원 74년 4월 편집국장 직무대행겸무 74년 9월 이사 논설주간등을 역임하다 75년 2월에 동아일보 광고사태로 퇴사를 하게 되었고 그다음달부터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를 선언하며 농성에 들어가 대량 해고의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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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언론인을 자부한 홍승면은 최소한 두가지면에서 높이 평가받아야만 할 것 같다. 그 하나는 그가 투철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봉했다는 점일 것이다.
4.19때 한국일보 편집국장이었던 그는 바쁜 신문제작 이외에도 연일 매섭고 감동적인 칼럼을 썼고 때로는 몸소 시(詩)까지 써서 싣기도 했다. 그는 별세하던 해만 못갔지만 해마다 4.19때는 어김없이 수유리 4.19묘지를 찾았고 신문의 칼럼에도 4.19를 되새기는 글을 꼭 썼다.
한번은 아이들을 데리고 4.19묘지에 갔다가 기념비 앞에서 참다못해 터진 울음에 아이들이 충격을 받았던 일을 그의 유족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 4.19당시가 그로서는 기자로서 가장 보람있었고 기대에 부푼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4.19직후에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는 사진기자 최경덕(崔慶德)과 함께 한국의 언론계를 대표하여 오키나와까지 마중가서 함께 탑승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것은 그의 영어 실력때문이 아니라 4.19를 전후한 그의 분투와 노고를 치하한다는 한국언론계의 뜻때문이었다.
그의 글 문체에 대해도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는 종래의 딱딱하고 고답적인 신문문장의 문어체(文語體)의 글을 탈피하고 부드럽고 평이하고 그러면서도 짜임새있는 구어(口語)의 글, 대화(對話)의 글을 구사한 선구적 역할을 했고 그래서 그의 신문문장은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된 한글세대를 맞아 새로운 저널리즘의 물꼬를 트는데 큰 몫을 했다.
□ ‘和而不同’, 명 시평남긴 직업언론인
그는 부단한 독서로 동서고금의 다양하고 해박한 지식을 축적해가면서 거기에 예리하고 이성적인 시대감각과 타고난 문장력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친근감있고 순화된 그러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격조높은 글들은 남겼다.
이관구(李寬求)는 조사에서 “그대는 품격이 높고 견식이 풍부하여 근대적인 직업언론인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대기자였으며… 민주언론의 용감한 투사였다. 소리는 잔잔한채 메아리는 우렁차고, 태는 느슨한채 정은 불같이 뜨거워 말로 글로 이것이 고르고 멋있게 옮겨지매 듣고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논단의 거백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프라하의 가을’(77) ‘백미백상(百味百想)’(84)의 저서를 남겼지만 그가 작고한지 5년만인 88년 1월에 그의 친지 동료들이 뜻을 모아 그가 생전에 남긴 생생한 글들을 두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상권인 ‘잃어버린 혁명’에는 ‘지평선’‘메아리’‘횡설수설’‘정동탑’등에 실렸던 칼럼이, 그리고 하권인 ‘화이부동(和而不同)’에는 신동아에 ‘화이부동’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됐던 칼럼과 자유민주주의 언론자유등을 주장하며 쓴 사설 시평등이 들어있다.
논어(論語)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란 구절중에 있는 ‘화이부동’을 그는 좌우명으로 삼다시피 했는데 그는 그 글귀를 “군자는 화목을 지키되 결코 뇌동(雷同)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며 자기의 주체성은 항시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풀이하고 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무골호인같이 보이고 사실 누구에게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언행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늘 자기의 원칙만은 지키는 즉 균형속의 뚜렷한 개성을 견지한 외유내강의 참 언론인의 모습을 잃지않았다.
그는 그렇게 부드럽고 무르기만 한 듯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경우를 따질때는 시비를 분명하게 가리는 놀라울 정도로 추상같은 때가 있다. 이 두권의 책엔 그가 20여년동안 쓴 2천 1백여편의 글중에서 주로 ‘4.19’ ‘5.16’‘유신(維新)’등의 상황과 관련된것과 그의 개성이 잘 나타난 6백여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가령 5.16당일 쓴 칼럼에서는 “일선에서 국민을 지킬 군대가 어째서 후방에 밀려나와 정권을 행사토록 나라꼴이 엉망진창이 되었을까”라고 절규했다.
그는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금남리 선영에 묻혔는데 한운사가 글과 글씨를 쓴 묘비가 서있다.
“무관의 제왕, 洪承勉墓(一九二七· 七 · 二七~一九八三 · 五 · 二六) 京畿중학의 이름난 수재였던 洪公은 서울 大學文理大를 나오자 韓國日報社에 入社 곧 편집국장으로 韓國을 보여주더니 東亞日報 편집국장· 論說主幹· 이사를 역임하는 사이 자라나는 韓國에 기회있을때 마다 혹은 나무라고 혹은 채찍질하여 無冠의 帝王자리를 의연히 지켰다. 해박한 지식으로 엮어내는 칼럼은 天下一品의 定評이 있었으니 和而不同을 신조로 人間답게 살자고 외치던 그의 열정은 우리 言論史에 특기되리라. 大韓民國 정부는 그에게 金冠 文化勳章을 추서하였다. 아 그러나 分斷된 祖國을 애통해하던 그의 恨을 어찌 달랠수 있겠는가. 一九八四年 五月 二十六日 벗을 代表하여 글· 글씨 韓雲史”
그리고 묘비 후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洪公의 글-”누가 나에게 專攻을 묻는다면 나는 저널리스트입니다 라고 말해 왔지만 내마음 한구석에는 나의 專攻은 人間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自由人이고저 걸어온 道程’에서. 아내 李基媛 아들 奎植, 딸 奎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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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면은 한창 일할 나이에 애석하게도 타계했지만 그가 만약 건재했더라면 그동안 그 주옥같은 좋은 글을 우리에게 더많이 읽게 했을 것이다. ”
(정연권 동아일보 이사, 소요가(消遙歌)사건에서 싹튼 장유의 투혼(鬪魂), 한국언론인물사화-8.15후편(하), 1993)
홍 승 면
마닐라에서 개최된 아시아신문재단총회에 참석후 9월 19일 김포공항에 안착한 고재욱(왼쪽)과 홍승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