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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2 취체역 사장, 63. 7 사임.〔국무총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명록)

 

 

“동아일보 창간의 산파역

 

각천 최두선은 언론인이자 교육자요 국무총리에 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우리나라 근세에 드문 명사의 한 사람이다.

각천은 1894년 11월 1일 서울 을지로 2가에서 최헌규의 3남으로 태어났다. 바로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각천은 1917년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 20년에는 독일에 가서 마부르크대학, 예나대학, 베를린대학에서 3년간 철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한 연유로 일본 와세다대학과 독일 마부르크대학에서는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그리고 고려대학에서는 명예법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각천은 일제시대에는 육당의 동생이라하여 경찰의 집요한 감시를 받으며 지내야하기도 했다.

각천이 와세다대학에 가게 된 것도, 독일 유학을 하게 된 것도 모두 인촌 김성수의 뒷받침으로 수학을 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연유로 인촌과 각천은 특별한 관계였고 인촌 생전에 신임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각천이 74년 9월 9일 팔순의 천수로 별세하기까지 언론계와 교육계 그리고 적십자사업에 남긴 공적은 실로 지대한 것이다.

각천은 동아일보사를 설립하고 신문을 창간하기까지 다시 말해서 태동으로부터 산파역까지를 한 주역의 한 사람이다.

각천이 인촌에게 최초로 신문을 발간하자고 권했으며 인촌이 동아일보사 설립에 나서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하몽 이상협과 추송 장덕준이 신문을 발간하려고 돈줄을 여러 곳으로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돈 있는 사람은 문화사업에 선뜻 응하려 하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하몽이 재력 있는 사람으로 문화사업에 출자할만한 사람은 인촌 이외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인촌을 움직여 보기로 한 것이다.

인촌을 움직이는 데에는 신임이 가장 두터운 각천과 의논하는 것이 빠른 길이라 생각하고 하몽은 당시 중앙학교 교장으로 있는 각천을 찾아가 신문발간에 관한 이야기를 한 다음 계획서를 주고 인촌의 의향을 타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그러나 각천은 내심 어려운 일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친구의 부탁이요 또한 좋은 문화사업이라는 공감대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선을 해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각천은 인촌에게 전후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한 다음 계획서를 주고 인촌의 의향을 타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그러나 각천은 내심 어려운 일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친구의 부탁이요 또한 좋은 문화사업이라는 공감대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선을 해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각천은 인촌에게 전후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한 다음 사업계획서를 보였다.

각천이 내심 걱정한 것은 그 무렵 인촌과 각천은 경성방직주식회사와 보성전문 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몰두해 있을 때에 이러한 난데없는 사업을 천거한다는 것이 사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촌은 사업계획서를 훑어 보고나서 “좋은 사업이고 우리 민족에게는 필요한 사업이긴 하나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 때문에 손을 대기 어렵지 않소”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할 줄 알았더니 의외에도 부드럽게 나오자 각천은 이때다하고 “교육사업도 급하지만 신문을 발간하는 일 또한 교육사업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총독부에서 민간 신문을 한두 개 발간을 허락한다는데 민족진영의 뜻이 그러하니 민족 언론의 창달을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신문사업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권했다.

인촌은 “신문사업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한 사업이고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사업에 지장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요”하며 달갑게는 생각하지 않는 의견이었다.

각천은 내심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는 인촌을 설득하는 데에는 역부족임을 알고 유근과 공동으로 인촌 설득에 나섰다.

각천과 유근 두 사람의 끈질긴 설득은 급기야 인촌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을 했다.

그 후 신문사 설립은 순조롭게 진척을 보아 신문제호를 ‘동아일보’로 정하고 창간호가 20년 4월 1일자로 그 전날 석간으로 발행되었다.

( … )

광복된 47년 2월 각천은 동아일보사 10대 사장으로 언론계에 몸을 담기 시작해 63년까지 17년 동안 동아일보사의 발전과 자유당 정권에 대항하여 반독재 언론투쟁에 크게 공헌했다.

각천이 동아일보 사장으로 재직하던 60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제5대 총재로 선임되어 1인 2역의 중책을 맡게 됐다.

각천이 신문사 사장이면서 적십자사 총재를 겸임하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4.19 민주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탄생되고 사회의 각 분야에서 새롭게 변모를 하는 때라 자유당 시절의 총재였던 손창환이 재임 중 보사부장관을 겸임하고 있던 관계로 총재직을 물러나게 됐고, 그 후임 총재를 결정 못한 채 당시 부총재인 김활란 박사가 총재 직무 대행으로 재임하면서 후임 총재를 구하고 있었다.

적십자사의 총재직이란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덕망 있는 인사를 추대해야 되는데 그런 인물을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끌기 3개월여, 각계의 의견이 동아일보 사장 각천이 가장 적임자일 것이라는 의견이 모아져 교섭단이 각천을 찾아가 총재에 취임하여 줄 것을 간청하고 수락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각천은 “나는 신문사일로 도저히 적십자사의 총재직을 수락할 수 없다”고 고사했다.

여러 차례의 교섭과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권고도 있어 각천은 드디어 수락하게 되었는데 다만 좋은 후임 총재가 선출될 때까지만 일을 보겠다는 조건과 또 한가지 동아일보 사장직은 그만둘 수가 없으니 겸임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선출 절차를 거쳐 60년 8월 12일 총재로 정식 취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63년 12월까지 오전 중에는 동아일보사 사장으로 집무하고 오후에는 적십자사에 나가 총재로 집무하는 1인 2역의 고된 하루하루였다.

각천이 동아일보 사장과 적십자사 총재로 겸무중인 63년 12월 제3공화국의 국무총리를 맡아달라는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입각지명을 받았다.

각천은 “나는 총리를 맡아 감당할만한 자격도 없으려니와 정치에는 생각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지명하시오”라고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지명이 쉽게 철회되지 않아 급기야는 국무총리를 수락하고 입각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동아일보사의 사장직도 물러나게 되었다. 다만 대한적십자사의 총재직만은 겸임한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들어가 반년동안 총리직에 있으면서 하루에 한번은 반드시 적십자사에 나가 총재로서의 직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적십자사로 되돌아가서부터는 총재로서의 전임을 했다. 그가 총재로 재임 중 특기할만한 일은 남북 이산가족재회를 위한 가족찾기 운동인 인도적 남북회담을 제안한 총재의 성명발표로 국내외에 큰 파문을 던졌다.

( … )

끝으로 각천의 인품은 과묵한 성격에 명철보신하는 선비요, 언론인으로서 인생의 실패를 모르고 살다간 사람이다.

명분 없는 일이면 하지 않았고 공선사후의 정신으로 사리를 멀리한 사람이다.

각천은 명석한 두뇌와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사를 한번 나누면 그 사람의 이름을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는 천부적 재주가 있었다. 수리에도 밝아 아무리 복잡한 회계라도 정확히 오차를 발견하는 특기가 있었다.
“빛이 강하면 그늘은 엷어진다”는 말과 같이 각천은 강한 빛을 가진 큰 별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각천이 왜 단명 국무총리로 입각하여 옥에 티를 남겼느냐는 뒷말도 있으나 그가 생전에 밝히지 않고 간 이상 그 속사정은 영원한 비밀로 되고 말았다.”

(김호진 전 대한통신 편집국장,  한국언론인물사화 4권, 1993)

 

 

“동아일보 입사 한 달 후 5·16 맞아

 

동아일보 입사시험 때 1천여명이 응모했다. 이 가운데 5명이 선발되었다. 육당 최남선의 동생인 최두선(崔斗善) 사장이 직접 면접을 보았다. 최두선 사장은 경찰을 통한 필기시험 합격자 신원조회 자료를 토대로 면접을 한다고 그 뒤에 들었다.

최 사장은 키가 훤칠하고 육중한 몸집의 비교적 거구로서 인간적 위엄이 넘쳐흘렀다. 말도 매우 신중하게 했다. 입사 바로 다음날 최 사장은 편집국에 올라와 갓 입사한 견습기자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열심히 근무하라고 일러주었다. 최 사장은 우리나라 3대 천재인 육당 최남선의 아우로서 같은 DNA 관계인지 역시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았다. 최 사장은 그 후 박정희정권의 초대 국무총리로 입각함으로써 정치에 투신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으로서는 일제시대부터 우리나라 민족지인 동아일보라는 후광을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정통성의 취약성을 보완하려는 전략인 것 같았다.

최두선 사장은 그날 아침 편집국 사회부 책상에 앉아 있는 백광남 기자에게 다가가 언젠가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올 테니 러시아어를 잊지 않도록 꾸준히 갈고 닦으라고 권고했다. 백 기자는 외국어대 러시아어과 출신이었다. 당시는 미·소 동서냉전이 극에 달한 시기였고, 남북간에도 긴장이 고조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런 발상을 떠올린다는 것은 혁명적인 것으로 미래를 꿰뚫어본 선견지명이라고 생각되었다. 백광남 기자는 아주 착하면서도 수재로서 러시아문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60년 중반 베트남전쟁 시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갔다가 교통사고로 아깝게 순직했다.”

(여영무, 관훈저널, 2009.3)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장기영 사장이 경제부 차장으로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는데 채 1시간도 안돼 이관구 사장님으로부터 또 동아일보 입사통고를 받은 것이다. 아버님께 연락드렸더니 역시 즉답을 못하셨다. 문뜩 생각난 것이 당시 세계일보 경제부장 겸 부국장으로 계시던 안정모 선생님이었다. 경제언론계에서는 명실공히 현역으로서는 최고의 선배였고, 재무부 출입시절에 보니 판단이 제일 완숙하셨다.

을지로 입구 일일신문사에서 남대문 세계일보까지 부지런히 걸어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안 부장께서는 주저 없이 동아일보로 가라고 하셨다. 젊으니까 한국일보가 매력 있을지 몰라도 직업의 안정성이나 대우는 물론, 역사의 권위나 회사의 재정건전성이 단연 한국일보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녁에 아버님과 다시 상의하여 동아일보로 결심하고 다음날 동아일보 최두선 사장 방으로 갔다. 인터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인터뷰가 끝나자 “자, 고군한테 가보게” 하시는데 ‘고군’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게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만큼 위풍과 권위가 당당하셨다. 방을 나와 당시 비서로 있던 임학수씨에게 “고군한테 가보라는데 누굽니까?” 하니까 크게 웃더니 바로 옆의 고재욱 부사장 방으로 안내했다.

당시 김상만(전무인지 상무인지)씨와 같은 방을 썼는데 두 분 책상 사이가 꽤 멀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두 분 다 아주 노인으로 보였는데 최 사장이 부사장을 ‘고군’이라 부르는 것이 당연한 당시 예의범절의 한 단면이었다.”

(김진현, 관훈저널, 2006.9)

 

 

“고 각천 최두선 선생 일화

 

성실하고 기억력이 남다르기로 유명한 각천 최두선 박사의 80평생은 정력으로 일관했다. 약관 25세에 중앙학교(현 中央中高校)의 교장으로 발탁된 각천은 칠순을 바라보는 69세에 국무총리,78세에 적십자사총재를 사임하기까지 실로 50여년을 사회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다. 중앙학교 보성전문 경성방직 동아일보 등 인촌의 그림자처럼 일해 온 그는 과연 교육자인가 사업가인가 언론인인가 아니면 정치인인가. 그 거구에 못지않게 그의 발자취도 뚜렷하여 한마디로 그를 무엇이라고 평하기 어렵지만 측근들은 다음과 같이 그의 풍모를 말하고 있다.

“각천 선생은 정말로 성실한 분이었어. 그렇게 판단력이 빠를 수가 없고. 아마 인촌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한 분야에서 인촌을 도운 분들은 많겠지만 젊은 20대부터 환갑이 넘도록 인촌이 경영한 여러 분야에서 일한 단한분일거야” 라고 유진오씨는 말한다.

“그분은 결코 무리한 일은 안하셨어요. 아주 자상하시고요” 유족은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金相浹 고대총장은 “그렇게 公私가 분명할 수가 없어요. 어른들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각천은 내 돈을 전부 맡겨도, 심지어 유산을 맡겨도 능히 처리할 만큼 공정한 분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어요” 라고 전했다.

지난 7월 폐암으로 백병원에서 퇴원명령을 받고나서 운명의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는 손수 자신의 이력서를 명예직을 빼고 간단히 쓰도록 지시하는가 하면 재산관계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신경을 썼다고 한다. 운명하기 바로 이틀 전인 7일 밤 자신의 장례비를 경방 고려중앙학원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내도록 했다는 소식을 듣자 각천은 가족들에게 ‘경방신세 너무 지지마. 내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신세지면 안 돼. 내가 참 젊었을 때 정력을 송두리째 바친 곳은 보성전문이었어. 누가 알겠나. 인촌만이 알거야’ 해방 전후 7년간 경성방직의 전무와 사장을 지냈고 17년 동안이나 동아일보 사장의 책임을 맡았으며 一人之下인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그가 6년 동안 일한 보성전문 상무이사 시절을 마지막 순간에도 잊지 못하는 것은 웬일일까. 그의 측근들은 30대의 젊은 날을 불살랐고 인촌과 함께 안암리의 산기슭과 논밭을 헤매며 보성전문의 校地를 사들이고 화강암을 쌓아올리던 날의 안타까움과 기쁨이 그토록 보람을 느끼게 했을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1차는 사장이라는 간판이 산거야. 이제 내가 한잔 사지” 그는 술자리에서마저 자기의 공직과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술값을 냈다는 것이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하도록 해요. 마당이 넓으니 가까운 친구들 2, 3백 명은 와도 불편이 없겠지, 허허’ 각천은 이렇게 가족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도봉구 수유동 95의3 널따란 정원이 있는 집은 관리가 어려워 팔았고 그 보다 작은 새집을 신축 중이었다. 각천은 ‘우리 이제 작은집으로 이사해서 몇 년 살다 조용히 가면 되겠지’라고 부인 金順英여사(75)에게 말했지만 이사도 가기 전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동아일보 1974년 9월 10일자)

 

 

최  두  선

 

최두선 사장의 퇴임식 광경(196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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