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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8 취체역사장, 65.7 퇴사.”

(동아일보사사 3권, 인물록)

 

 

“▲1896년 4월 26일 경기도 廣州군 儀谷면(현 의왕시) 浦一리에서 출생 ▲89년 11월 28일 별세 ▲30년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졸업 ▲40년 동경제대 대학원(언어학) 수료 ▲32년 이화여전 교수 조선어학회 간사 ▲42~45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복역 ▲45~61년 경성제대 서울대 교수 ▲54년 학술원 종신회원 ▲57년 서울대 문리대학장 ▲63년 8월~65년 7월 동아일보 사장 ▲65년 대구대 대학원장 ▲66~69년 성균관대 대학원장 ▲70년 학술원 부원장 ▲71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

 

□ 오척 단신의 유일한 조선어 전공

 

 1927년 봄, 필자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그때 이 학교는 문과 A, B와 이과로 나뉘어져 문과 A반은 대학에 올라가 법학을 전공하게 돼있었고 문과 B는 문학과에 올라가서 철학과 사학 및 문학과로 나뉘어 각각 전공을 달리하게 돼 있었다. 철학과는 다시 서양철학, 중국철학, 윤리학 및 미학과로 나뉘고 문학과는 일본문학, 영문학, 조선문학과로 세분되어 있었다.

 필자가 입학한 해 일석(一石 李熙昇)은 예과(문학)을 마치고 학부로 올라가 조선문학과 전공생이 되었다. 그때 일석의 나이는 서른살, 필자보다 10년이나 연상이었는데 그는 중앙학교를 마치고 회사에 다니다가 다시 청운의 뜻을 품고 학문을 하고자 뒤늦게 대학에 입학 한 것이었다.

 검은 얼굴의 일석은 그 무렵 다섯자가 될까말까하는 작은 키에 사각모자을 눌러 쓰고 무거운 책가방을 든채 동숭동 학부를 분주하게 들락날락했다.

 그 무렵 문과 B의 학생총수 50명 중 한국인 학생은 많아서 1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여러 학과로 분산되다보니 어떤 과에는 한국인 학생이 한사람도 없는 과도 있었다.

 일석이 속한 조선문학과도 1회에 조윤제(趙潤濟) 한사람 뿐이고 2회에도 이희승 한사람, 3회에 이재욱, 김재철의 두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그나마 4회에는 단한사람도 없어서 필자더러 과를 옮기라고 했지만 영문과인 필자는 그대신 조선문학과 강의를 자주 들었다.

 일석은 1930년 35세때 조선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보통학교선생을 양성하던 경성사범에서 조윤제는 조선문학 선생으로 일석과 같이 일했다.

( … )

 한편 그는 광복직후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에 취임, 국어학문을 강의했다. 52년에는 서울대 대학원 부원장이 되었고, 54년에는 학술원의 종신회원이 되었다. 61년 서울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후 63년에는 교직생활에서 언론계로 전환하여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인촌(仁村 金性洙)의 아우인 김연수(金秊洙)와는 중앙학교때 동창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일석은 경성제대 입학 전에 김연수가 경영하는 경성방직의 사무원으로 있었다.

 그때만해도 모두가 법학이나 경제학 아니면 외국문학 전공을 선호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경성방직을 나와 나이 서른에 학자의 듯을 세우면서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 하는 한국어와 국문학의 연구에 일생을 바칠 각오를 했던 것이다.

 일본인 교수 중에서도 뜻있는 사람은 일석의 그같은 선택을 존경하고 또 칭찬했다. 

 ( … )

 

□ 隨筆·詩作에도 독특한 境地

 

 63년 8월 중앙학교 동창인 김연수의 권고로 동아일보 사장이 된 그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타고난 성격으로 말많은 언론사를 잘 이끌어 나갔고 그의 연래의 주장이던 한글 맞춤법을 실제로 적용해 보았다.
 2년후 ‘동아’를 나온 일석은 다시 교육계로 돌아와 65년 대구대학원장이 되었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그이듬해부터 69년까지는 성균관대의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 … )

 그는 90이 넘게 장수하여 노후에 평온한 삶을 즐기다. 지난 89년 11월 28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의지의 사람으로 결심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실한 사람으로 털끝만큼의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또 근검절약하는 사람으로 항상 검소하고 낭비라든지 사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국어학자, 한글학자였고 동아일보 사장은 수당(秀堂 金秊洙)의 권고와 알선으로 3년 동안 잠시 지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순수한 언론인은 아니었다.”

(조용만 대한언론인회 고문, 오척 단신의 유일한 조선어 전공, 한국언론 인물사화-8.15전후, 1992)

 

 

이  희  승

 

1973년 3월 5일 부인 이정옥 여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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