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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인, 편집자, 기자 이상로(李相魯)

Posted by 신이 On 6월 - 14 - 2017

“▲ 55. 1 촉탁(편집국), 소년동아부장, 65. 9 퇴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16년 10월 18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宮里에서 출생 ▲73년 8월 2일 서울 상도동에서 별세 ▲43년 일본 明治學院 고등문학부 중퇴 ▲해방후 民衆日報 기자를 거쳐 월간 民族公論 편집장 ▲50년 공보처 문화선전계장, 공군정훈감실 편수관 ▲53년 서울신문 월간부장으로 ‘新天地’ 편집 ▲54년 국제 PEN클럽 사무차장 ▲55년 1월 東亞日報 문화부장 ▲64년 6월 소년동아 부장▲66년 서울대학 大學新聞 편집국장 ▲67년 불교신문 편집국장

 

□ 시인, 편집자, 기자, 칼럼도 쓰고

 

 소향 이상로(素鄕 李相魯)는 언론인이며 시인이었다. 언론인으로서는 신문의 문화부 기자, 잡지 편집자, 소년신문 기획 제작과 지면 편집 등을 담당했으며 때에 따라 칼럼도 집필했다.

 아호 소향 외에 이오류(李午柳)라는 필명을 썼고 자신의 이름의 한글표기를 ‘이상로’ 아닌 ‘이상노’라고 썼다.

 사람들과 사귀며 일단 마음을 허락하면 무조건 호의를 베풀었다. 그것은 단순하다기 보다는 타의가 없는 양성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타의가 없고 흉허물을 느끼지 않아 남도 내 마음과 같은 줄 알며 생각하는 바를 잘 무혐하게 때로는 맵게 드러내놓고 말했다.

 그런 성격은 타의를 가지고 꼭 해야 할 말도 잘 안하는 음성적인 사람들에게 비해서 세속적인 손해를 보는 일이 많다. 겸손해야 할 때는 퍽 겸손하면서도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손해를 보는 일을 무릅쓰고 바른 소리를 하곤 했다.

 오랫동안 잡지를 직접 편집하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지면 디자인에도 새로운 감각을 담고자 했고 그런 감각이나 개성이 신문지면의 편집 디자인에도 종종 나타났다.

 50년대 당시는 한글맞춤법을 제대로 쓰는 문인이나 신문기자가 적은 때였는데 소향은 일찍부터 그것을 정확하게 쓰는 문인이었고 언론인이었다. 특히 편집자로 각종 부호의 정확한 사용 기준의 확립 등에 남달리 신경을 썼다.

( … )

 55년에 동아일보 문화면의 ‘무제(無題)’라는 단평란에 쓴 글에서도 그런 소향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요새 서대문 구역에서는 대문마다 붙은 표어 중에 ‘울면서 후회말고 우스면서 방화하자’는 것이 있다. ‘우스면서’는 관(경찰서)에서 한 것이니 소위 ‘한글간소화안(필자주:웃으면서’라는 맞춤법이 틀렸는데 당시 맞춤법을 간소화하자는―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에 따른―문교부의 안이 나와서 논란을 빚었었다)을 따랐는지 모르나 ‘웃으면서 불조심’해도 좋을 것을 ‘방화’란 방화(防火)보다도 ‘살인방화(放火)’의 방화 편인 것을 모르는가(55. 1. 27. ‘標語·揭示文의 非文化性’ 동아일보 ‘無題’)” 이 표어는 나중에 ‘웃으면서 불조심’으로 고쳐졌다.

( … )

 재수복 후 서울신문(월탄 박종화 사장)이 발행하는 월간 ‘신천지(新天地)’의 편집을 하다가 55년 1월 동아일보에 편집국 촉탁이라는 특이한 직책으로 입사를 했는데 새로 생긴 문화면을 기획 제작하는 문화부장의 직능을 수행했다. 김성환의 일일 연재만화 ‘고바우’를 기획해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계속해서 문화면의 편집을 담당하는 한편 주1회 1면이 배정되는 ‘소년동아’를 기획 제작 편집했으며 64년 6월부터 소년동아부장으로 타블로이드판 ‘소년동아일보’의 제작 책임을 맡았다. 문화면이나 소년동아의 지면제작 등에서 소향은 편집자로서도 새로운 안목과 감각을 발휘했었다.한편 DBS(東亞放送)에도 출연한바 있다. 

( … )

 73년 8월 2일 상도동 자택에서 별세, 경기도 안산시 양산동 산57 장로교 남현교회(상도동 소재)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93년 5월 유족들이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장되었다. 1주기에 박두진 시인 등의 주선으로 화가 박서보가 디자인한 시비 ‘李相魯 詩碑’가 세워졌다. 박두진의 글씨로 고인의 51년 작품 ‘밤이 새면’의 다음 대목이 새겨졌다.

 “우리들은 山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
 날이 새면
 이 눈물의 山谷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 밤이 새면
 얼마나 더 잠못 이루고 기다려야 할 것인가
 날이 들기를”

이장 후에도 시비는 양산동 묘자리에 그대로 세워져 보전된다. 유족인 부인 하복순 여사와 3남이 있으며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산다.”

(이흥우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시인, 편집자, 기자, 칼럼도 쓰고, 한국언론 인물사화-8.15전후, 1992)

 

 

이  상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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