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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9 촉탁(편집국), 논설위원, 60. 7 퇴사.〔민의원의원〕”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22년 12월 15일 平北 定州에서 출생 ▲89년 2월 26일 별세 ▲44년 1월 일본 東京帝大法科3년 재학 중 學兵 동원 ▲44년 7월 日軍서 탈출 중국 망명 항일전 가담 ▲46년 定州중학교원 ▲50년 서울大 강사 ▲53년 興士團 이사 ▲54~60년 東亞日報 논설위원 ▲55~60년 成均館大 교수 ▲60년 5대 民議院 ▲65~74년 中央日報 논설위원 ▲65년 慶熙大 교수 ▲74년 中國問題硏究員長 ▲76~81년 9대~11대 國會議員 ▲84년 北韓學會長 ▲85년 反共聯盟 이사장

 

□ 괴벽스러운 천재

논설위원과 대학교수와 국회의원을 겸직하거나 번갈아 가며 할말은 거침없이 하던 신상초(申相楚) 그도 북한에 부친과 막내동생을 남겨둔 채 단신 38선을 넘어야 했던 이 땅의 이산가족이며 실향민이었다.

신상초는 고향인 평북 정주(定州)에서는 소년 때부터 선우휘(鮮于輝)와 지명관(池明觀 전 德成女大 교수)과 함께 3대 수재로 불리며 자랐다. 이 3대 수재는 모두가 지주인 부잣집 맏아들이었고 해방직후에는 고향에서 교편을 잡다가 38선을 넘어오게 된 공통점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신상초는 당시 식민지의 시골읍인 정주에서 신의주(新義州) 동중(東中)과 일본 후쿠오카(福岡)고교를 거쳐 당시 일본에서 최고로 진학하기 어려웠던 동경제대(東京帝大) 법과에 합격함으로써 가장 돋보인 수재였는데 모교인 신의주동중에서는 ‘괴벽스러운 천재’로 기록됐다. 괴벽스럽다는 평을 듣게 된 것은 일본에 대한 반항심이 유달리 강했고 고교시절부터는 폭음을 하며 놀기를 좋아했지만 학업성적은 앞섰기 때문에 붙은 것 같다.

신상초 자신은 “나는 원래가 성격이 퍽 내성적이었고 키도 작은 편이었는데 자유분방한 고교생활에 영향을 받아 활달해지고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데 솔직 대담해졌을 뿐 아니라 키도 부쩍 크게 되었다”고 말한다.

( … )

 

□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탈출

신상초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소련군 점령 하에 있던 북한은 공산화의 격동기였다. 민족진영의 거두 조만식(曺晩植)은 감금되고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권이 출현하더니 토지개혁 등 공산화작업이 무자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신상초와 같은 인텔리는 눈 위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로 공산당의 감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46년 5월 신상초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평안북도 보안부에 연행되어 3개월 동안이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고 풀려난다. 그는 38선 이남으로 가족과 함께 월남할 준비를 서두르면서 감시의 눈초리를 완화시키려고 정주중학교 수학교사로 취직을 했다. 인문과학 계통의 학과를 맡았다가는 사상성이 노출될 위험이 있기에 수학을 택했던 것이라고 한다.

47년 3월 그는 방학을 이용하여 38선을 넘으려다 황해도 남천(南川)역에서 체포된다. 감방에서 제자인 정주중학 학생이 인사하는 바람에 신분이 노출되어 고향인 정주로 압송되고 반동죄(反動罪)로 재판에 회부, 5년형을 받게 된다.

그는 강제중노동수(强制重勞動囚) 603번으로 평남 안주 신리(新里)탄광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수용소에는 1천5백여 명의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었고 바다 밑 수백 미터의 악조건 속에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이 신리탄광 강제노동수용소는 북한이 해방직후 함경북도의 아오지탄광과 함께 죄수들을 투입한 탄광이며 작업 조건이 험악하여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곳이다. 그래서 인간 소모율이 아오지탄광과 함께 북한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악명이 높다. 신상초는 이 곳에서 수용소에 부식을 납품하는 이(李)모라는 제자와 동향인인 수용소 간부의 도움으로 재소자 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 채탄노동을 면하게 되는데 그 후 의사와 짜고 매일 설사약을 먹고 중환자로 위장, 병보석으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 48년 12월 31일 밤 38선을 넘어 49년 1월 1일 자유의 땅을 밟는다. 그는 그 순간의 감격을 죽도로까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자유의 땅에 서니 공기만 빨고서도 살 것 같았다” 고.

 

□ 직언·직필의 反共論客

신상초는 공산주의에 관한 한 이론과 생명을 건 체험을 겸비한 비판자였다. 그가 대한민국에서 얻은 첫 직업은 서울대학교 강사직(50년)이었고, 6·25피난시절 부산에서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다. 그리고 휴전 이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성균관대학 교수직을 겸하며 이승만(李承晩) 정권을 상대로 한 반독재 필봉을 들게 된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동아일보가 날카로운 공격을 계속하면서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선거 부정에 대해서는 폭탄과도 같은 논조를 퍼붓는데 있어서 신상초의 역할은 크게 돋보였다.

( … )

89년 2월 26일 그는 자신이 브레즈네프 병이라고 명명한 지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동구…소련…소련…’하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최후를 지켜본 김창순(金昌順) 북한연구소이사장의 말인즉 “신 선생은 동구가 무너지기 시작하던 그때 소련의 붕괴를 확신하며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은 것 같다”고 했다.”

(김집 전 KBS전문위원, 괴벽스러운 천재,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 1992)

 

 

신  상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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