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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9 기자, 취재부차장, 취재1부장, 편집국부국장, 논설위원, 심의위원 겸, 62. 7 퇴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21년 12월 4일 平北 雲山군 東新면 馬場리에서 출생 ▲86년 9월 2일 별세 ▲38년 寧邊農業 졸업 ▲43년 평양 大同工專 광산과 졸업 ▲44년 총독부 鑛務局 근무 ▲47년 朝鮮新聞學院졸업(제1회) ▲ 47년 9월 동아일보 기자  ▲53년 동 정경부장 ▲56년 동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62년 7월 퇴사 ▲63년 自由民主黨 대변인 

 

□ ‘洛陽紙貴’ 파문일군 壇上壇下

 

 “上學시간을 알리듯 의사당 문앞에 달린 종소리가 두차례나 울린 다음에야 선량들 어슬렁 어슬렁 모여들기 시작-역시 케케묵은 조세특례볍(租稅特例法) 개정안에는 기분이 나지 않는 모양…” 이것은 52년 10월 22일자 부산에서 발행되는 동아일보의 피난국회의 모습을 그린 첫 번째 정치가십 ‘壇上壇下’의 도입무다.

  단상단하는 수복후인 54년 11월 29일자에서도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파동에 언급, “203의 3분의 2는 정확히 계산하여 135.333…이고 보니 3분의 2가 되려면 0.333이 더 있어야 할 판이라 결국은 한사람이 더 필요하게 되어 최소한 136표는 있어야 할 것이고, 그보다도 재적 203인중 135를 제외한 63인이라는 숫자는 3분의 1을 넘고보니 한쪽이 3분의 1이 넘는데 한쪽이 3분의 2가 된다는 이론은 어떤 학자라도 수학으로는 세우지 못할것”이라고 꼬집었다.

  조국광복의 환희에 이은 6.25전쟁으로 온 국토가 잿더미로 바뀌고 독재정권의 장기집권으로 재건의 삽질과 함께 반독재투쟁으로 늘 소란스러웠던 50년대를 살아온 사람치고 동아일보의 단상단하를 모른는 이는 없다.

  그리고 52년 피난국회이래 10여년간 그 고정란을 집필해온 산모가 바로 대기자 백광하(白光河)였음을 잊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55년 ‘단상단하’가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올때 나절로(禹昇圭)는 “허구헌날 편집국에는 백군을 격려하는 투서뭉치가 날아든다. 어떤때는 일면식도 없는 신사 숙녀가 그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고 전화로, 서신으로 혹은 전편으로 면회를 간청한다. 참으로 사상 유례가 드문 폭풍적 인기다”라고 썼다.

  또 김동명(金東鳴)은 “백기자는 감연히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필검을 휘두르되 구차스런 논ㄹ에 구애됨이 없이 기지와 풍자와 해학을 휘몰아 문제의 핵심에 육박함으로써 일거에 독자를 움켜 잡는다”고 격찬했으며 주필 고재욱(高在旭)은 단상단하야말로 “현하 한국 정치의 정사(正史)인 동시에 야사(野史)요, 축도인 동시에 그 전모라 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오죽했으면 자유당 국회부의장을 지낸 고 이재학(李在鶴) 자신이 “동아일보의 단상단하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3분의 1이상의 역할은 했다”고 회고했겠는가…

  백광하의 ‘단상단하’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국회의사당 중심의 의정활동과 정가 및 관가의 움직임 가운데 중요한 대목들을 골라 짤막하고 읽기 쉽게 소개한 끝에 토막마다 뜻이 깊고 멋들어진 한시(漢詩) 한수씩을 곁들임으로써 만인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그야말로 한시대의 등불이자 길잡이었으며 해공(海公 申翼熙)의 표현 그대로 ‘洛陽紙貴’의 파문을 일군 정론의 심벌이었다.

 

□ 괜찮은 직업일 듯 싶어…言論에 投身

 

  운산 백광하(雲山 白光河)는 1921년 12월, 6.25당시 온정리(溫井里)전투로 유명했던 평북 정주(定州) 근천의 운산(雲山)에서 백학주(白學柱)와 부인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변 농업(寧邊 農業)을 마치고 곧바로 평양 대동공전(大同工專) 광산과로 진학, 43년 봄 졸업과 함께 기술자로 징발되어 중석의 산지로 유명한 희천(熙川)광산에서 일하게 됐으나 그곳에서 독학으로 한학과 화학 등을 익힌 끝에 총독부 검정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서울로 올라와 총독부 광무국의 철도측량부문에서 근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그 길로 총독부 생활을 청산한 운산은 한동안 쉬다가 “그래도 신문기자란 직업이 괜찮을 것 같아서…” 조선신문학원(원장 郭福山)1기생으로 다시 늦공부를 시작했다. 반년동안의 단기코스였으나 4개월에 걸친 수강과정을 마치고 나니 각 신문통신사에 현장실습을 나가라는 것이었다.

  운산은 동아일보로 배치되어 한증막 같은 광화문 사옥 편집국에서 한여름을 정신없이 보냈다. 이런저런 기사정리와 선배기자 수행취재 같은 일이 주된 일과였으나 때마침 편집국장으로 있던 심강(心崗 高在旭)이 그의 수준높은 한문실력을 놓칠리 없었다. 그래서 47년 9월 운산은 신문학원 졸업과 동시에 동아일보 취재부기자로 눌러 앉게 된다.

  그가 기자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의 국내는 몽양(夢陽 呂運亨) 암살사건(47.7.19)에 이어 설산(雪山 張德秀) 암살사건(47.12.1)이 터지고 다시 제주도에서 대규모의 폭동(48.4.3)이 발생하는 등 말할수 없이 어지러웠다.

  그런 와중에서도 48년에는 5.10총선에 이어 제헌국회(48.5.31)가 열리고 그해 광복절에는 정부수립이 선포되는 등 나라의 기틀이 차곡차곡 다져져가고 있었다.

  운산은 제헌국회를 출입하면서 주로 의회소식과 정가동향을 치밀하고 생동감 있게 알리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부수립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산세력의 준동은 더욱 노골화, 여순반란사건(48.10.19)에 이어 전후 3차례에 걸친 대구폭동(48.11.2)과 남로당에 의한 국회프락치사건(49.5.18) 등을 연발한 끝에 마침내는 5.30총선에 의해 구성된 제2대 국회개원(50.6.19) 직후의 대대적인 6.25가 남침으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27일 저녁 서울도심에 까지 적기가 날고 포성이 들리는 가운데 절망적인 전황으로 더 이상의 취재활동이 어렵게 되자 운산은 다른 외근기자들과 함께 귀사, ‘적, 서울근교에 접근’이라는 제하의 마지막 호회를 수동기로 찍어내어 약 3백장가량을 광화문, 시청 앞 일원에 뿌렸다.

  호외를 뿌리고난 기자들은 무교동 실비옥(實費屋)에 모여 이별의 술잔을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 자리에는 이언진(李彦鎭) 장인갑(張仁甲) 이동욱(李東旭) 조인상(趙寅相) 변영권(邊永權) 김성열(金聖悅) 권오철(權五哲) 최경덕(崔慶德) 김준철(金俊喆) 김상흠(金相欽) 최흥조(崔興朝) 김호진(金浩鎭)  정인영(鄭仁永) 김진섭(金鎭燮) 백광하(白光河) 등 모두 15명이 참석했다.

 

□ 이나라 議政史의 산 證人

 

  부산 피난시절 동아일보는 ‘민주신보’의 시설을 빌어 주로 가판 중심의 보급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그 같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국민방위군사건을 비롯한 정부비정을 보도 비판하는데 서슴지 않아 민주신보에 대한 정부측 압력이 가중되자 51년 9월부터는 ‘부산일보’와 ‘자유민보’공장을 전전하면서 찍어내야 하는 딱한 형편이 됐다.

  그래도 운산은 방위군사건에 현직 국회의원들이 관련된 사실을 최초로 특종보도하는 한편 연일 그 속보를 내어 사회의 이목을 끌었으며 그것은 결국 피난 동아일보의 필화사건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그러나 52년 들어 필화사건도 매듭이 지어지고 2월2일에는 남선전기(南電)의 빈터를 임대해서 지은 토성동(土城洞) 임시사옥도 준공되어 동아일보는 피난후 처음으로 자립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운산도 엄성윤(嚴聖允) 여인과의 혼담이 무르익어 백두진(白斗鎭) 당시 국무총리서리의 주례아래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30이 넘은 노총각 신세를 면하면서 비로소 자립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결국 발췌개헌안 통과로 매듭지어진 부산정치파동과 대통령저격미수 및 중석불하사건, 그리고 첫 번째 정부통령직선(8월5일) 등으로 어지러웠던 52년은 그러나 운산에게는 큰 행운이 찾아든 잊지 못할 해이기도 했다.

  즉 그해 10월 22일 동아일보는 1면에 ‘壇上壇下’란 제하의 정치칼럼을 신설, 국회전담기자인 그에게 그 집필을 맡겼던 것…. ‘단상단하’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되자 이듬해 4월부터는 사회면에도 ‘공기총’란을 새로 마련, 최호(崔皓)기자로 하여금 날카로운 사회풍자를 시도하게 했다.

  53년 8월 7.27휴전이 성립되자 동아일보도 3년 동안에 걸친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서울 광화문사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해 12월 운산은 정경부장에 올랐다.

  그때만해도 수복 직후라 국회는 중앙청(현 국립박물관)홀을 본회의장으로 쓰고 있었고 동아일보도 인쇄시설이 모자라 ‘대한공론사’ 시설을 빌어쓰는 형편이었다. 백광하 부장은 엄동설한임에도 국회의사당까지 걸어서 내왕했다.

  곧 이어 정국은 이른바 ‘四捨五入’파동(54.11.27)과 야당의원에 대한 불온문서투입사건(54.12.18) 등 56년 5.15정부통령선거를 앞둔 전초전으로 술렁인 끝에 신익희(申翼熙)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급서(56.5.6)에 이은 장면(張勉) 민주당 부통령당선자에 대한 암살미수사건(56.9.28) 등으로 마침내 태풍권에 접어든다.

  이 무렵 야당의 정부통령후보자 지명을 위한 전국대의원대회(56.3.28) 광경을 전한 ‘단상단하’의 전문을 옮겨보면 “이날 대회장인 시공관에는 대의원도 입장하지 못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막을 열고 무기명 연기식으로 투표한 결과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는 장면 양군이 당선되어 앞으로 신후보는 민의에 굴복하여 재출마를 결정한 이대통령과 축록전(逐鹿戰)을 전개할 판… 道人袖手心如水하니 一点纱灯夜悄然이라, 그저 천기(天機)만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짙은 ‘여운’과 깊은 ‘함축’을 담고 있다.

  그는 제헌당시부터 온갖 정치파동과 4.19 및 5.16에 이르는 이나라 의정사를 지켜온 산 증인이자 스승이었다.

 

□ 12년 투병끝에 쓸쓸하게 他界

 

  그의 ‘단상단하’는 해가 거듭될 수록 더욱 예리해졌고 영향력 또한 막강해갔다. 오죽했으면 가령 조간 ‘동아’에 그가 어떤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날의 국회는 의사일정을 바꿔가면서까지 그의 제의(예컨대 수해복구, 또는 부정사건 등)부터 다루곤 했겠는가…. 그런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운산은 자유당 말기에 들어 이승만정권은 영일을구(迎日乙區) 보선때부터 시작한 선거부정과 이른바 연계자금사건 등으로 보여준 부패, 그리고 관료들의 독선 때문에 스스로 묘혈을 파고 있다고 설파, ‘단상단하’를 통해 특히 ‘선거부정’과 ‘부패’ 및 ‘이거적 관료주의’를 철저하게 공격했다. “사람은 인색하고 고루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는 공자의 말을 자주 인용하던 운산은 필재 못지않게 재담 또한 탁월했다. 말술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술이 거나해 질수로 곧잘 좌중을 웃기곤 했으며 그래서 그는 장안 명기들의 인기남아였다.

  비교적 단신이었으나 남앞에서 술취한 모습이나 넥타이를 풀어헤친 모습, 또는 헝클어진 머리를 보인 일이 없으며 겨울철이면 반드시 오버코트에 목도리를 받쳐 입는 깔끔한 신사였다.

  그는 또 색다를 철학의 소유자로 말년에는 이른바 우주철학을 가르치는 학원을 내어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변화란 결국 정해진 우주원리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으로 그의 저서 ‘태극기’도 그같은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책속에서 현대원자물리학으로부터 미적분학까지 총동원, 자신의 이론을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있다.

  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당시 상산 (常山 金度演) 등이 이끈 자민당 대변인으로 잠시동안 정계에 발을 들여 놓기도 했던 운산은 75년 중풍으로 쓰러져 12년 동안에 걸친 오랜 투병끝에 86년 초가을 백병원에서 65세의 아까운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빈소에는 부인과 2남 6녀의 유족들만이 오열할 뿐 너무나 초라했다. 대기자 백광하의 명성과 업적은 간데없이 그는 매우 초라하고 쓸쓸하게 세상과 작별했던 것이다.”

(김준하 전 강원일보 사장, ‘洛陽紙貴’ 파문일군 壇上壇下,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 1992) 

 

 

백  광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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