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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 김준연은 1927년 5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조사부장과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28년 5월 제3차 공산당사건(세칭 ML당 사건)에 관련돼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34년 10월 재입사해 주필로 재직하던 중 1936년 8월 손기정의 일장기말소사건에 관련돼 사임했다. 해방 후에는 1947년 2월부터 1964년 7월까지 취체역으로 있었다.

 

“▲ 1927. 5 조사부장, 편집국장, 1928. 5 퇴사. ▲ 1934.10 재입사, 편집국촉탁. 주필. 1936. 8 퇴사. ▲ 1947. 2 취체역,

▲ 폐간전 주필. ▲ 47. 2 취체역, 64. 7 사임.〔민의원 의원, 법무부장관〕”

(동아일보사사 1,2권, 인물록)

 

 

“전라남도 영암(靈岩)사람이다.
한문을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을 졸업하였다. 유학 중에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의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에 주동적으로 참가하였다.
1919년 11월 여운형(呂運亨)의 도일(渡日) 때에는 신인회(新人會)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환영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선전하였다. 귀국하여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6년 12월에 안광천(安光泉)·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세칭 ML당이라고 부르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재조직하였다.

 (…)

 1928년 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이른바 ML당사건이라고 부르는 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징역 7년형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 8월에 베르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주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실은「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게되자 주필이던 그는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사임하였다.”

(독립기념관 사이트)

 

“김준연이 이 나라 보수정당의 모체였던 한민당 창당에 크게 기여하였고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공헌하였으며 민주당 주진으로서 반독재투쟁에 앞장을 섰던 것을 우리 정치사는 잘 기억하고 있다. 더우기 반공의 선명한 기치를 누구 못지않게 흔들어댄 그의 정치사상과 정치노선은 응분의 평가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김준연을 가리켜서 `민족진영 중의 대표적 극우정객`이라고 하는 것은 우직할 이만큼 철저했던 그의 반공노선을 평가하는 말이었으며, 반공을 국시로 해서 역사를 만들던 한 시대에 그는 촉광 높은 警告燈이었음이 분명하다.

(…)

김준연의 인적 사항은 그가 생전에 기록했던 自敍小傳에 따르면 이러하다.

그는 1895년 음력 3월 14일 전남 영암에서 아버지 김해김씨 상경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3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

자서소전에서 밝혔듯이 그는 공산주의사상을 신봉해서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투쟁의 한 방편으로 공산당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어디까지나 `사이비 공산당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속까지 빨간 `토마토 공산당원`이 아니라 겉만 붉을 뿐인 `능금 공산당원` -.

그런데 이 겉다르고 속다른 사이비당원 김준연이 가장 전투적 지하 비밀조직인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었다. 제3차 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였던 김철수가 국외로 나간 다음 2대 책임비서를 맡았던 안광천이 `우리 당 조직이 항간에 유포되어 경찰의 주시를 받고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몸을 사리고 김준연에게 책임비서 자리를 떠맡겼다는 것이다. 1927년 9월 20일의 이이며, 김준연이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옮겨 편집국장에 취임하기 한달쯤 전이 된다.

 

식민지 탄압이 극심하던 일제 치하에서 민족언론의 대들보인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라는 어엿한 신분과 가장 은밀한 지하조직인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라는 극비의 신분 – 얼핏 보아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민족해방투쟁이라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그럴 듯한 1인2역의 곡예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긋난 톱니바퀴건, 곡예 같은 처신이건 간에 김준연은 그 이상한 존립관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급전직하, 두자리를 모두 잃으면서 긴 옥중생활로 돌아간다.

 

< 송진우씨가 동아일보사장이 되면서 나를 편집국장으로 앉힌 후 불과 며칠이 안되어 총독부에서 송지우씨에게 `왜 김준연을 편집국장에 앉혔느냐`고 항의를 해 왔다. 송진우씨한테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그들이 나의 공산당 관계를 눈치챈 줄 짐작했다. 그래서 11월3일에 동지들을 데리고 남산쪽 어느 중국요리집 2층에 올라가 긴급 모임을 가졌다. >

 

이 자리에서 김준연은 당 간부진의 해체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 총독부에서 눈치를 챈 모양이다. 내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된 데 대하여 총독부측에서 사장에게 항의를 해 왔으니 우리 형편이 마치 가마솥의 물고기와 같다. 그런고로 표면에 드러난 사람들은 전부 손을 떼야 되겠다 >

 

이리하여 김준연은 공산당 책임비서를 맡은지 40일만에 손을 들어 버렸고, 다른 간부진도 사임토록 하여 소위 당중앙을 해체해 버린 것이다.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3개월 후인 1928년 2월2일에는 김준연을 포함한 20여명의 공산당 간부들이 일제히 검거되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것을 `ML당사건`이라고 보도했다.

김준연은 재판에 회부되어 유기징역이 선고되어 7년이라는 무겁고 암담한 영어의 생활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불과 4개월 사이에 김준연의 신변에 불어닥치 돌풍, 즉 공산당 책임비서 책임 -> 동아일보 편집국장 영입 -> 책임비서 사퇴 -> 당조직 해체 -> 대량검거 선풍 -> 유기징역 선고…

이렇게 계기된 사건은 김준연의 그후의 정치궤적에 큰 전환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김준연이라는 인간을 보는 주위의 시선에 미묘한 빛깔을 채색시켰던 것이다.

소위 ML당사건은 일제 관헌과 피검자들 사이의 법정투쟁에 그치지 않고 피검자들 사이에 스파이논쟁을 일으켜 미묘한 여운을 남겼다. 내용인즉 김준연이 그의 전임자인 안광천을 스파이라고 했다. 안광천은 어떤 여자와의 애정행각 때문에 돈이 필요했으며 돈을 얻기 위해 일본 경찰에 김준연당의 비밀을 팔아 넘기고 자신은 교묘하게 검거선풍을 피해 중국 상해로 도피했다는 것이 김준연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김준연이 배신자라고 했다.

좋은 학벌을 가진 그가 송진우· 동아일보측과 손을 잡게 되었으므로 그동안 공산당조직에 관여 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으며, 사상적 전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포함한 당조직을 송두리째 일본 관헌에게 내맡겼다는 것이다.

이 스파이 논란은 중국에 건너간 안광천이 김원봉의 의열단에 들어가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는 사실과, 또한 김준연이 징역 7년이라는 장기복역을 이겨낸 사실 등으로 볼때 두 사람 누구에게도 혐의를 두기에는 의문이 남는다. 더우기 김준연은 총독부 경무국에서 사람을 내세워 `앞으로 공산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만 하면 관대히 처분하겠다`라고 회유해 왔을 때 이를 단호히 뿌리쳤다 한다.

(…)

김준연은 1934년 여름에 출옥하여 곧 동아일보 주필에 취임했다. 왕년의 ML당 당수라는 이미지는 세척되었으며, 그는 오히려 철저한 민족진영 논객이라는 좌표를 굳혔다.

그의 언론계 생활은 1939년에 손기정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정간됨으로써 끝장이 났다. 그러나 그는 송진우,김성수가 중심이 되어 형성해 놓은 동아일보·보성전문 磁場에서 한 발자욱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김성수가 전곡에 마련해놓은 해동농장의 관리인으로 내려가서 은둔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패망직전의 일제가 이 땅의 많은 명사들에게 附日의 올가미를 씌울 때 그는 김성수의 배려와 송진우의 식견에 힘입어 이를 피할 수 있었다. ”

(이경남, 독불장군 김준연의 정치곡예, 정경문화, 1984.9)

 

“그가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중용된 것은 고하 송진우 선생이 그의 성격과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고하 선생은 낭산의 정치적 견지와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을 평가하여 그를 아주 귀여워했다. 해방이 되자 총독부에서는 고하 선생에게 일본 항복 후의치안문제를 비롯해서 수습하는 일을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고하 선생은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가 귀국하려던 참이라 사사로운 입장에서 그런 국가적 일을 맡을 수 없다 하여 이를 거절했다. 고하 선생에게 거절당하자 총독부에서는 그렇다면 낭산에게 그 일을 맡기면 어떠냐고 물었으나 고하 선생은’그 사람도 그 일은 맡지 않을 것이다’라고 거절했다. 나는 이 비화를 그 후 얼마 안 돼 들었지만 낭산이 고하에게 그 만큼 신망 )이 두터웠음을 얘기해주는 일화라 하겠다. 낭산은 8,15 때 며칠 전부터 일본이 망할 것을 알았는지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 왔었다. 그는 그 시대에도 그 만큼 장래를 보는 눈이 있었다. 낭산은 고하 선생 뿐 아니라 인촌 김성수 선생으로 부터도 크게 사랑을 받았다. 낭산은 세칭 ML당사건으로 동아일보를 그만 두게 됐는데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인촌 선생은 주필의 중책을 맡겼다. 당시 경기도 연천군 전곡에 보성전문을위해서 쓸 해동농장이라는 농장이 하나 있었다. 낭산이 ML당사건으로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 인촌 선생은 그에게 이 농장의 관리 책임을 맡겨 전곡에 가 있게 했다. 말하자면 인촌 선생은 그를 위해 일자리를 하나 마련해준 셈이었다. 그만큼 낭산은 인촌 선생으로 부터도 신임을 받은 것이다. 마침 그 당시 보성전문의 일을 맡고 있던 나는 해동농장의 대표자로 돼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해방될 때까지 5ㅡ 6년간 기회가 나는 대로 해동농장으로 내려가 농장의 관리와 개간 이야기를 낭산과 나눈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낭산이 돌연 작고함에 새삼스럽게 그의 애국정신과 반공정신이 추모된다. 그의 명복을 충심으로 비는 바이다. ”

(최두선 대한적십자사총재,  애국 반공의 한평생 낭산 김준연 씨의 부음을 듣고,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자 2면)

 

“낭산은 27년 10월 23일 이광수(李光洙)의 후임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발탁되는데 그 무렵 보성전문에도 출강했었다. 이듬해인 28년 2월에 제3차 조선공산당 즉ML당(마르크스.레닌당)사건이 터지게되어 투옥된다. 그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소련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지하당 조직을 재정비 강화하는데 주력했지만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취재를 다녀온 것을 인연삼아 그를 적극 포섭했던 것 같다. 그는 ML당의 총책임비서(당수)로서 체포되어 악명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전기고문, 물고문, 비행기고문, 손톱에 못박기등 인간으로서는 감히 감내하기 어려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그런중에서도 회유의 손길이 뻗쳐와 회개서(悔改書)만 내면 가출옥이 될것이라는 유혹에 언제나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7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도 독일민법 2천여조를 전부 독일어로 읽었고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1천2백페이지를 8개월간에 걸쳐 원서로 독파했고 7백 페이지나 되는 육법전서(六法全書) 그리고 성서, 불교서적등 방대한 양의 독서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34년 7월 만기출감을 하게된 낭산을 김성수는 동아일보 주필로 맞아들였다. 그러자 만2년 남짓후인 36년 8월에 그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선우의 가슴에 단 일장기 말소사건의 책임을 지고 송진우(宋鎭禹)사장과 함께 물러났으며 동아일보는 11개월동안 정간되는 비운을 겪었다.

(…)

언론계를 떠난 낭산은 그후에도 수난의 연속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때에도 옥고를 치렀고 신흥우(申興雨), 유억겸(兪億兼), 최두선(崔斗善), 윤치영(尹致暎)등과 함께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후 김성수가 마련해준 경기도 전곡(全谷)의 해동농장에서 관리인이라는 보신용 직함으로 은거생활을 보내다가 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정계에 투신하여 눈부신 활약을 펴나가게 된다.

특히 낭산은 김성수와 송진우 두사람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두사람의 한팔 역할을 했다. 더욱이 송진우와는 각별하여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서로 의논 협조하며 한달이면 근20여일은 숙식을 같이 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하가 흉탄에 쓰러지던 45년 12월 30일 전야만해도 두사람은 경교장(京橋莊)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결정을 놓고 밤새도록 김 구(金 九)주석과 숙의를 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고하댁으로 같이 가던중 낭산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의사인 따님집으로 직행되었다. 이때 만일 두사람이 같이 동행했더라면 과연 낭산도 어찌 되었을는지 모를 일이었다. ”

(정연권 동아일보 이사, 화려한 학력 최초의 모스크바 특파원, 한국언론인물사화 1권, 1992)

 

 

김 준 연

 

1956년 7월 27일. 8월 지방의원선거에 극심한 관권개입 규탄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를 결성, 항의 데모를 벌이기 위해 국회 정문을 나서는 야당의원들.(좌로부터 김두한, 조병옥, 장택상, 그 뒤 김준연 한 사람 건너 김도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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