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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스크바 특파원 이관용(李灌鎔)

Posted by 신이 On 6월 - 7 - 2017

“▲ 1924. 5 기자촉탁, 기자(러시아특파), 1925. 2 퇴사. 〔조선일보 편집고문〕”

(동아일보사사 1권, 인물록)

 

 

이관용은 1891년 7월, 이재곤(1859~1943)의 4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관립한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동경부립 제4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 그는 1913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영국으로 유학, 옥스퍼드대에서 정치사를 전공하고 학사과정을 졸업했다. 1917년 스위스 취리히대에 입학해 1921년 찰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관용과 함께 유학했던 김준연은 1922년 동아일보에 이관용을 소개하면서 그를 동적이며 급진적이라고 평가했다.

사회의 병적 현상(1)

독일에서 철학박사 이관용 기

장형! 이관용 씨를 소개함니다. 언제한번 잠간 말슴하엿섯지오. 동씨(同氏)는 우리 조선에서 매우 보기 드문 양학자올시다. 또 겸해서 한학에도 상당한 소양이 잇습니다. 동씨는 우리 조선 구주유학생의 제2성과올시다. 제 1위는 김중세 씨가 점령하겟슴니다. 하나 량 씨가 각기 특색이 다 잇슴니다. 김씨의 정적임에 반해서 이씨는 동적이올시다. 김씨의 얼마쯤 상고적임에 반해서 이 씨는 넘우도 급진적이라 하겟슴니다. 김 씨의 순학자적임에 반해서 이씨의 정치적 열혈을 도저히 간과치 못하겟슴니다. 이관용 씨는 경성고등보통학교, 동경부립 제4중학을 지내서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9년 전에 구주에 와서 영불독서서국(英佛獨瑞西國)에서 즉금까지 풍요한 천자(天資)를 더욱 탁마하엿슴니다. 서서(瑞西) 추리히 대학에서 철학박사의 학위를 어덧슴니다. 영독(英獨) 양 국어는 그이의 특장이오 또 불어에 능하고 겸하야 일어에 정통함니다. 동씨(同氏)가 우리 동아일보지를 위해서『사회의 병적 현상』이라는론문을 기초하엿슴니다. 동씨는 고국을 떠나서 구주에 체류한 지 근 10년이기 때문에 고국사정에 혹 정통치 못한 점도 잇겟고 또는 우리 언어문장에 어색한 점이 전연이 업슬이라고는 보증하기 어렵슴니다. 하나 그의 풍부한 온축중(蘊蓄中)에서 서리(犀利)한 두뇌를 경과해서 쏘다저 나온 론문 중에는 반다시 주의할만한 점이 만히 잇슬 줄 암니다.

장형!이관용 씨의 논문을 보시고 될 수 잇스면 속히 지상에 발표하야 다년간 외국에 게시던 동씨에게 우리 동포와 접촉할 기회를 제공해 들이기 바라나이다.

7월 21일 김준연

장덕수 인형

 

차는 우리 덕국(德國) 유학생 제 학우에게 강연한 것이며 또한 일부분은 서서국(瑞西國) 쭈리희 시『너이에, 쭈어르혀, 짜이퉁』이라는 신문에 게재되얏섯는대 해지(該紙)의 관대한 승낙을 인하야 우리 동아일보에는 그 초안 전부를 게재하게 되얏나이다. 과학적 연구가 아닌 일시화(一時話)로 예기하시기를 독자 제위에게 청하나이다. 그러나 차론 중에 중대한 문제도 포함된 것이 다유(多有)하니 차에 대하야 열성의 토론이 유하기를 필자는 간절히 희망하나이다.

조선인의 구주유학에 대하야

여러분 진정히 반갑슴내다. 구나파에서 이럿케 여러분 동포를 맛나 뵈일 줄은 예기치 못하얏슴내다. 7, 8년 전에 영국서 방학이 되면 장택상 군은『에듼버러』에서 민규식 군은『켐뿌릿지』에서 이 사람은 『억스포어드』에서 윤단(倫敦)에서 서로 맛나면 친형제를 맛난 듯이 그리 반갑겟삽닛가. 오날도 또 한번 이럿케 반갑슴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구주에 적어도 20명 유학생만 잇셧드면 자미가 조금 잇슬가 하고 이러한 대행복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얏슴니다. 그런대 지금 이처럼 실현되얏슴니다. 영국 법국 덕국 이국 로국 어대 업는대가 업슴니다. 덕국 내에서는 백림『예나』『꾀틩겐』『뷰오쓰부억』『뮨헨』『푸리이부억』 다 각각 저명한 대학에서 경제, 법률, 철학, 물리, 화학, 의학, 음악, 육군, 기계학 등의 다방면으로 연구를 해서 장래에 완전한 공생조직이 성립되겟슴니다. 여러분은 구주문화를 그 근원지에서 연구하시고 우리 국민의게 소개코자하시는 선봉이시며 아리 조선개국(朝鮮開國) 4천 5백여년 이래에 그 중 신책임으로 신생활을 하실 개로자(開路者)들이심을 다시 한번 기억합세다. 위선 여러분이 이 덕국이란데 계신 것이 유사이래로 처음되는 일이지오. 여러분의 생활은 일동일정(一動一靜) 하(何)방면을 보든지 유사이래에 처음임니다. 기차를 타고 어느 산을 넘어 어느 강을 긋네든지 어느 대학 어느 강당에 드러가든지 어느 시가에서 어느 미술관을 방관하든지 하다못해 어느 가로 어느 요리점에서 식사 한번하야도 여러분은 다 유사이래에 처음 되난 생활이심니다. 유사이래라면 우리 국민의 역사만 말하는 것이 안임내다. 여런분이 여긔서 이럿케 이상적 생활하심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후에 일대 변경임니다. 여러분 졸업 후 귀국하야 더욱 중요하고 더욱 신기한 생활을 하심을 인하야 인류의 유사이래로 초유한 대사건을 맨드시지 못한다고 웃더한 예언자가 감히 개구(開口)하겟슴니가. 직접으로 우리 조선국민을 위하야 활동함은 간접으로 전인류를 위하야 활동함인줄 암내다. 그런데 기회가 좃코 활동무대가 준비되얏슴니다. 다만 용감한 인격이 그 책임을 부담함이 아직임니다. 성공은 활동 과실임니다. 할 사업만코 책임만허 활동 그것이 자미잇서요. 우리가 그 실과 맛못보면 우리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 행복을 향락하겟지오. 그러나 우리의 취미는 활동 그것에 잇습니다. 만일 사업이 업섯드면 우리가 읏덧케 생활할 번하얏슴닛가.

 생활이 공허한 생산업는 기계적 동작이 되얏겟지오. 그러나 할일이 읏지 만코 풍부한지 우리 조선국민갓흔 유복국(有福國)이 어데잇슴니가. 그러면 여러분의 생활을 누가 부러워안하겟슴니가. 류학시기가 최적함니다. 평화가 아모리 조화도 인류의 정신을 수면식힐 때가 잇스며 아모리 곤난하야도 우리 인류의 발전은 난시에 성취되야 평시에는 그 실과를 향락함이 일반경향임니다.

 개인 인격의 발전도 그 고난을 당하난 시기에 성취됨니다. 전무하든 이 난시에 인류사회 생활상 유사이래 처음으로 경험되는 대사건이 매일 부절(不?)하는 이 중심지에서 학리와 실제 경험으로 우리 인류사회생활의 발전경로를 직접으로 연구하실 여러분은 진실로 부럽슴니다. 오날도 우리 현대사회의 난시생활을 연구하야 봅시다. 이 사람은 사회학을 연구하야 본 일이 업슴니다. 다만 견문한 것은 이리저리 뜻어마최여 우리가 생활하는 시대의 일반경향을 우리 의식적으로 관찰코자함이 이 강연의 목적임니다. (동아일보 1922년 10월 4일자 1면)

 

이관용은 1919년 3·1운동 당시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가 대학을 마친 얼마후 파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매듭을 짓기위한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가 열렸다. 그때 우리나라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김규식(金奎植)박사를 수석으로 하는 민족대표단을 파리로 보내‘민족자결원칙에 따른 조선독립문제의 의제상징’을 청원, 국내의 3.1독립만세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김규식 박사를 비롯한 대표단 일행은 무엇보다도 우리대표단의‘청원’이 파리에 모인 열강대표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필요에 쫓긴 나머지 현지 유학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형태의 선전문을 불문으로 써서 파리시내 각 신문에 보내도록 했으나 좀체로 반영이 되지않았다, 그러다가 이관용이 불역해서 보낸 독립청원서만이 신문에 나서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는 것….. 그 한가지만을 보더라도 그의 프랑스어 실력은 보통이상이었음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상원 전 도서잡지 윤리위원회 사무국장, 東亞의 영문란을 궤도에 올려, 한국언론인물사화 5권,1992, 389-393)

 

이관용은 1923년 고국에 돌아와 1924년부터 연희전문에 재직했다.

 

이 박사 환영회 24일 명월관에서

오는 24일 토요(土曜) 오후 6시에 유지의 발긔로 요사이 귀국한 텰학박사 리관용(李灌鎔)씨환영회를 명월관에서 개최한다는대 회비는 이원식 당일 지참이며 참가코자하는 이는 24일전으로 중앙긔독교청년회 구자옥(具滋玉)씨에게로 통지하기를 바란다더라. (동아일보 1923년 2월 22일자 3면)

 

칸트 탄생 이백년, 연희젼문 주최로 성대한 긔념회

명 22일은 근세에 큰텰학자『칸트』의 탄생후 이백년되는 생일임으로 세계각처에는 뎨일히성대한 긔렴식을 거행하는데 경성에서는 연희전문학교문과(延禧專門學校文科)주최로 22일(화요일) 하오 여덜시에 시내 종로 중앙례배당에서 그 긔렴회를 개최하리라하며 그 순서는 아래와 갓더라.

일、바이올린 독주 김흥대 군, 일、임마누엘·칸트 이관용 씨, 일、독창 윤심덕 양, 일、칸트의 지식철학 김정설 씨, 일、바이올린 김영환 씨, 일、칸트와 그의 도덕관 노정일 씨 (동아일보 1924년 4월 21일자 2면)

 

이관용은 연희전문재직 중인 1924년 5월 촉탁으로 기자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입사와 함께 ‘동아’지면의 영문란이 크게 달라지는데 그때까지 영문란은 다른 기자가 썼던 모양이다.

 이관용은 넘어온 원고지가 온통 시뻘겋도록 수정을 가했으며 그중에서도 <본보가 이 영문란을 내게된 것은 영광>이라고 ‘글로리어스’로 적힌 대목을 그는 대뜸‘프라우드’로 고쳐잡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필자에게 “우리 신문이 아무리 빈약하기로 영문란 하나 내는 것이 자랑이라면 몰라도 영광일 것까지야 없지 않겠느냐”며 웃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이관용의 영문란은 서재필박사의 <용기와 협력>(Courage and Co – operation)제하 논문에 이어 <언론과 출판의 자유>(Our Liberty of Speech and press), <과혹한 압박>(Exorbitant Suppression), <언론자유를 위한 분투>(Struggle for Liberty of the Press), <조선의 장래>(The Future of Korea), <국민적 정신생활>(National Spirit Lives), <경찰의 악행>(Another case of police Abuse), <일본의 군국주의>(Japanese Militarism), <검열에 대하여>(Censorship) 등등 제목만 보아도 예리한 논설을 차압을 당해가며 이어나오다가 24년 12월들어 한 외국인(Fred A. Dolph)에 의한 <조선인에세 보내는 공개장>이 말썽이 되어 마침내 총독부에 의해 행정처분까지 받게된다.”(이상원 전 도서잡지 윤리위원회 사무국장, 東亞의 영문란을 궤도에 올려, 한국언론인물사화 5권,1992, 389-393)

 

영문란

일본의 총선거와 기(其) 결과

“Voice of The Twenty Million”

THE DONG-A ILBO.

SEOUL, KOREA, SUNDAY, MAY. 18. 1924.

THE RESULTS OF THE JAPANESE ELECTION.

BY DR. KWAN-YONG LEF,

The returns of the Japanse Ceneral Election throw some light upon the comingstage of the political drama in Japan. The total number of members elected amounts, according to the latest report to 462,ofwhich 286 seats are occupied by the threeoppostion Parties, led by the Kenseikai orthe Constitutionalist Party with 152 seats.The Seiyu Honto,supporting the Govern-ment,has secured only 114 seats so thatthe defeat of the autocratic element inJapan,including the notorious Genros,iscomplete.This is the first crushing defeatof the Government in the history of theJapanese election,most of the electionshaving been conducted under the arbitraryinterference of the government.Will thegovernment dissolve Parliament,as Dr.Mizuno,the Home Minister,and two othermembers of the present ministry are saidto be resolved on doing?That would amountto an absolute autocracy and would causegeneral disapproval,if not universal pro-tests.well it remain in power as if nothinghad happened,as it is reported?In thatcase there will be constant obstruction inthe way of the administration,and thatwould be unbearable for the cabinet,acabinet that is confronted with such difficultand important political problems as theinternal reconstruction necessiated by theearthquake disaster and a finding a safecourse out of the present complicated dip-lomatic relations which need not onlywisdom and tact but also the unitedsupport of the whole nation.Resignationwould naturally be the only course leftunder such circumstances,but things inJapan are different from those of othernations. (To be continued.) (동아일보 1924년 5월 18일자 3면)

 

이관용은 1925년 2월, 동아일보의 러시아특파원으로 임명돼 모스크바를 향해 떠났다.

 

◇적로(赤露)특파◇ =동아일보 기자=

철학박사 이관용 23일 오후 7시 경성역 출발

아직도 세계의 비밀나라가 되여 잇는 적색로국(赤露)에 본사로부터 특파원을 보내게 된 것은 임의발포한 바와 갓거니와 구주 대전쟁이후 급격한 혁명으로 인하야 새로운 조직을 세우게된 이 나라에는 전에 업든 희비극이 연출됨을 따라 그디방 각처에 흐터저잇는 우리 백만동포의 소식도 실로 묘연하엿섯다. 그러나 모든 긔관과 시설이 업는 우리는 다만 북쪽하늘을 바라보고 그들의 행복을 빌 따름이엿섯다. 다행히 로시아의 내정이 점차로 정돈됨을 따라서 세계렬강의 승인을 밧게되고 특히 일로조약 후 교통도 편리하게된 이때에 동포의 사랑에 주리든 우리는 뎨일착으로 그디방 형뎨들의 간운보월의 회포를 위로하고 아울러 형명을지낸 후 온세계의 의문이 되고 전인류의 경이가 되여 오랫동안 세계렬강의 위혁과 봉쇄 중에서 경텬동디의 대사업을 완성하며 새제도를 세우고 새문화를 건설하야 욱일승텬의 긔세로  국제뎍 디반을 엇게된 로시아의 새제도 새문화가 엇더한 것인가를 만텬하 독자 여러분과 갓치 알고저하는 뜻으로 다년간 구주에 류학하야 구주사정에 정통하고 특히 로국에 대한 연구가 만흔 본사긔자 철학박사 리관용 군을 특파하게 된 것이다 (사진은 리관용군 것) (동아일보 1925년 2월 24일자 2면)

 

이관용의 행적을 살펴보면 1925년 3월 26일 오전 11시 55분 하얼빈을 출발해 4월 4일 오전 9시 모스크바에 도착하게 된다.

 

소식  ▲ 본사 적로특파원 이관용 박사는 26일 합이빈 발 로국에  (동아일보 1925년 3월 24일자 1면)

 

적로행(赤露行)-막사과(莫斯科) 가는 길에  (동아일보 1925년 5월 6일자 1면)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향하면서 이관용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주목할만한 부분은 그가 자신을 신문기자로서 자리매김하기보다, 연구자로서 보다 심도있는 분석기사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한 점이다.” (이현희, 이관용의 사상 발전과 현실 인식, 東方學志 제174집, 2016년 3월, 163-199쪽)

 

붉은나라 노서아를 향하면서

특파원 철학박사 리관용

봉천 에서 제일신

나다려 로서아에 가서 정치와 사회사정을 시찰하고 오라하엿슴으로 내 목적은 하로라도 밧비 가서 듯고보는대로 충실히 보고할 것임니다. 그럼으로 보고의 성질을 일치안코 모든 것을 순전히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과학자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하야 모든 주관적 감상을 제외할 것임니다. 그러나 기차가 경성을 떠난 후에 나는 다시한번 생각하엿슴니다. 향자(向者)에 일로협약(日露協約)이 성립되든 날 신문사에서 로국에 특파원을 보내겟다할 때도 생각하엿거니와 대저 무슨 이유로 내가 로국으로 혹한을 무릅쓰고 만흔 비용과 앗가운 시간을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게 되엿는지 다시한번 무러보앗슴니다. 노국의 정치적 활동과 사회적 조직과 문화적 건설을 시찰하고 연구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정가 모든 실업가 모든 학자가 다하고자하는 바이니 이것이 무슨 이유인지 알고 십슴니다. 그 리유를 한마듸로 말하자면 로국이『붉을적』 자로 스스로 형용하는 까닭임니다. 그러면 이『赤』자에 무슨 뜻이 잇슴닛가. 로국 혁명의 성공 여부 또는 그 목적의 호부(好否)를 불문하고 이『赤)』자 속에 인류생활의 발전에 대하야 유사이래 초유의 의의가 포함된 것이 사실임니다. 우리가 역사를 읽을 때 종교개혁시대나 불난서혁명시대 가튼 인류의 발전적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에 한번나서 활동하고 십흔 감상이 남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로국혁명을 인하야 인류유사이내 초유한 대사건의 색채를 발휘하는 시대임니다.  (동아일보 1925년 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이 기사에서 이관용은 자신이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스위스에서 목격한 상황을 언급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유학경험이 동아일보사측에서 그를 특파원으로 선정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이현희, 이관용의 사상 발전과 현실 인식, 東方學志 제174집, 2016년 3월, 163-199쪽)

 

이관용은 1925년 6월 13일자부터 동아일보에 모스크바에 대한 르뽀를 싣고 있다.

 

 

적로(赤露) 수도 산견편문(散見片聞)

북국정조(北國情調)에 구로식 도회(歐露式都會)

교회당 수효는『사십의 사십곱』

모든 광경이 그야말로『아라사』

 

◇막사과(莫斯科)에서 특파기자 이관용

『모스크바』에 가면 될 수 있는대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고 통신도 자주하자던 것이 지금까지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종일토록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통신재료를 모으느라고 글 쓸 틈이 넉넉지 못합니다.

 

4월 난풍에 6화(花) 분분(紛紛)

◇ 내가『모스크바』시에 도착하였을 때는 사월 초승이건만 일기가 엇지도 음한한지 두터운 털외투가 아니면 밧게 나갈 수가 업섯슴니다. 눈도 쏘다지고 찬바람도 끗치지 안아서 정말 북국에 온 생각이 낫섯슴니다. 그러나 하로 아츰에는 별안간 날이 들더니 눈을 녹이고 찬바람을 재워서 몃칠 사이에 느진 봄 일긔로 변하더이다. 그리고 사월중순에 이르러서는 나무입히 피여 나기 시작하고 수삼일내에 일긔가 엇지 더워젓든지 길거리에는 여름옷 입고 맥고모자 쓴 사람이 보엿슴니다.

 

예상 의외로 번화 도시

◇일긔가 이러케 화창한 까닭인지 길거리의 통행도 매우 번창하야젓슴니다.『모스크바』시는『백림』이나『론돈』처럼 화려하지는 안슴니다마는 아라사혁명을 반대하는 신문지상에 왕왕히 보도되는 것처럼 황무한 곳은 아님니다.『시베리아』긔차가『모스크바』에 점점 갓가워 질때에 나도 생각하기를 십여년동안 외전(外戰)과 내란(內亂)을 격근 도시라 생활상 곤란이 적지 아니하리라고 짐작하엿든 것이 뎡거장에 나라면서 주위를 살펴본 즉 뜻밧게 번창한 대도시에 온 인상을 엇게 되엿슴니다. 그 복잡한 통행을 보든지 굉장한 오륙칭『빌딩』의 즐비한 것을 보든지 화려한 물품을 진렬한 상뎜을 보든지 어대로 보든지 구미 각국 대도시에 비교하야 조곰도 손색이 업는『멧트로폴리쓰』임니다

 

27 방리에 200만 구(口)

 

『모스크바』는 로국 민족의 특색을 가장 잘 발휘하는 도시임니다. 지금부터 근 800여년 전에 건설되야 피득대뎨(彼得大帝)시대까지는 로뎨국(露帝國) 력대뎨왕(歷代帝王)의 도읍으로 로국민족이『어머니』라는 애호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도시임니다.『모스크바』는 강(江)량편이 17 방『마일』을 뎜령하고 이백만여 인구로된 력사뎍 대도시임니다. 그 건축물을 보면 순수한『아라사』식으로 질박하고 거대한 건축과 최근 구주식 벽돌제『삘딩』이 서로 석기여 얼마쯤 구주화(歐洲化)한 색채를 보이는 동시에『아라사』사람의 도시인 것이 분명함니다. 교당만키로도 유명하야『모스크바』스민은 말하기를『교당의 수효가 사십을 사십 갑절한 것 만콤 만타』함니다. 실수는 사백오십임니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13일자 2면)

 

 

 “러시아의 사회주의화와 민족문제에 대해서 이관용은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감상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여성에 대한 서술이다. 그는 여성문제에 대해 여러차례 서술하며 감탄하였는데, 우선 여성 참정권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지방 소비에트 선거가 있을 때 수백의 여자 행렬이 붉은 기를 들고 악대를 내세워 호기있게 지나가서 물어본 즉, 여자들의 선거행렬이라 하는데, 이들도 대표자를 뽑아 정치에 직접 간섭하게 한다’며, 이를 노동에 귀천이 없고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가장 명백하게 말해주는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여성의 독립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보고하였는데, 그는 모스크바의 여성을 자본주의 국가의 여성상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모스크바』에는 미인이 만슴니다. 가죽으로 만든 로동복을 입고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함부로 싸매엇건만 백림(伯林)이나 파리(巴里)에서 최신식 류행복을 입은 숙녀이상으로 미인입니다.『모스크바』에서는 남자의 팔에 장식품(裝飾品)처럼 매여 달리는 녀자는 시대에 뒤떠러진 외국녀자밧게 볼 수 업는 현상임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권연을 피어물고 다니는것은 고사하고 남자에게 권연불을 청하는 것은 조곰도 괴상한 일이 아님니다. ” (이현희, 이관용의 사상 발전과 현실 인식, 東方學志 제174집, 2016년 3월, 163-199쪽)

 

“이관용은 신경제정책(NEP)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는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모든 자본가들이 선전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제도 아래에서의 복구는 표면적 안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서 그는 소련의 신경제정책에 대해 외국은 물론 러시아 내에서도 이에 대해 비난하는 이가 많았으나, 현재 경제전체를 보면 자못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면서, 루불이 파운드나 달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네프만(Nepman)의 모습은 소비에트 대회에서 보고된 바를 거의 그대로 기록한 것이었다. 이관용은 신경제정책의 주요한 요소였던 이들이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으며 누구든지 노동복을 입지않고 부르주아 신사의 복을 입고 나다니면 오히려 업신여김을 받는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를 통해 이 시기의 이관용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상을 깊이 있게 분석하지는 못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현희, 이관용의 사상 발전과 현실 인식, 東方學志 제174집, 2016년 3월, 163-199쪽)

 

 

적로(赤露) 수도 산견편문(散見片聞)

야소(耶蘇) 대신에 레닌을 구주(救主)로

로동 안는 자는 적극뎍으로 학대

아직도 혁명긔라 경게 매우 엄중

◇막사과에서 특파기자 이관용, 공산당원은 걸인박대

◇그런데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거지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대긔한담니다.『소매치기』도적도 상당히 만어서 엇던 날은 순사와 행인에게 포박당하는 것을 하로에 세번이나 본 일도 잇슴니다. 그리고 일본 신문긔자 한 사람은 일곱 번에 천여원을 일헛다하고 나와 김준연(金俊淵)군도 뎐차 속에서 지갑을 일엇스며 덕국(德國) 신문긔자도 일코 작년에 왓든 영국 로동조합 대표단도 무수히 도적을 마젓다고 보고함니다. 어느 날인지 경찰서에 가 보니『소매치기 도적』만으로 수십여인이 가치어 잇더이다.

 

죄인호송에 육혈포로

◇ 이 모든 현상은 아즉도 로국의 사회사정이 변태뎍(變態的)인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즉도 길에 수십명식 되는 죄인을 군인들이 육혈포를 빼여 들고 통솔하고 다니는 것을 매일 볼 수 잇스며 깁흔밤 세 시나 네 시경에 군경들이 각 려관 객실을 열고 들어와서 려행권(旅行券)을 검사하며 각공무소에 출입할 때마다 려행권을 검사함니다. 특히 공산당에 관계된 공무소에 들어갈 때는 방문하는 사람의 려행권을 검사하고 뎐화도 특허를 어든 후에 인허장(認許狀)을 주면 이것을 감시자(監視者)에게 보인 후 갈 때는 주인의 서명(署名)을 바더문번(門番)에게 보이고 그동안 담보물(擔保物)로 잡혀 두엇든 려행권을 차저 가지고 나오게됨니다.

 

반혁명운동은 허전(虛傳)뿐

◇ 이처름 모든 불편한 것이 만치마는 아즉도 혁명긔(革命期)를 면치 못한 로국이 엄격한 경계를 함도 무리라 할 수 업슴니다. 지금 로국에 반혁명운동이 잇다하면 그것은『뿌두조아』의 선뎐에 지나지 못하겟슴니다. 그러나 아즉도 혁명의 쁘리가 깁히 백히지 못하야 만일의 경우에 대한 대책을 예비함도 무리 아닐가함니다.

 

조선요리와 근사한 갱

◇ 음식은 서부구라파(西部歐羅巴) 사람의 음식과 별로 다를 것이 업스나 아라사 료리의 특색은 국(羹)이라 하겟슴니다. 분량이 만흔 것과 맛이 진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음식에 매우 갓가우며 특히 서부구라파 사람이 조하하지 아니하는 아라사 생선군(쏠량카)은 우리나라의 생선 지지미와 다를 것이 업슴니다. 료리뎜에 드러가면 지금도 외투 들어주고 옷에 솔질하여주는『동무』들 음식 갓다주는 동무들이라도『요차』(행하)를 바라는 것이 통상임니다.

 

비(非) 노동자의 생활불안

◇『모스크바』에 서로 동하지 안코 생활하는 사람 특히『레닌』의 신경제정책 아래서 사사로 영리사업에 종사하는 자, 즉『넵만』(Nepman)에게 대하여는 생활비가 구주 다른 나라에 비교하야 삼사배 이상이나 됨니다. 내(리특파원) 생활비를 게산하여 보면 ▲매일 려관 숙박료가 최하 삼루불반(三留半) ▲아츰밥 칠십『코펙』▲점심 일루불반 ▲저넉 일루불반 ▲뎐차비 약칠십『코펙』▲세탁료 오십『코펙』(매주 삼루불) ▲잡비 삼십『코펙』▲도합이 십팔 루불 매월 총계가 이백오십 루불인데 일본돈으로 삼백십오원임니다.

 

10배 이상의 생활비!

◇ 이것이 넉넉지 못한 생활비일 뿐 아니라 한사람이 지나가는대 업지 못할 비용임으로 가족을 가진『넵만』은 매월 수입이 적어도 오백원이 아니면 살아나갈 수가 업겟고 신경제정책의 여러 가지 조건에 복종하야 다대한 세금을 밧치고도 이러케 만흔 수입을 줄만한 영업이 잇슬는지가 문뎨임니다. 후일 경제조직(經濟組織)에 대하야 보고할 때 자세히 긔록하려니와『넵만』의 생활비는 보통사람의 그것에 비하야 십배 이상이나 된다함니다.

 

참정권도 일체로 불급

◇ 그래도 보통사람과 가치 정부에서나 다른 공무소에서나 혹은 공장에서 로동하지 안코『넵만』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영리될만한 사업을 일러줌니다. 그러나『넵만』의 대부분은 아라사 현금 제도하에 참정권이 업슬 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환영을 밧지 못함으로 할 수 업시 하는 사람들임니다.『넵만』은 사회뎍으로 천대를 바드며 누구든지 로동복을 입지안코『뿌루조아』신사의 복을 입고 나다니면『넵만』이라고 도리혀 업수히 녁임을 밧게 됨니다. 외국사람 특히 외교관과 신문긔자 외에는 사치스런 의복을『모스크바』에서는 볼 수가 업는 현상임니다.

 

서산 낙일(落日)의 기독교도

◇ 이로써 미루어 보면 공산주의 로국에 계급이 아조 업는 것은 아님니다. 한편에 독재하는 로동계급이 잇고 한편에 멸망되여가는『뿌루조아』『넵만』계급이 잇슴니다. 이『넵만』계급에는 교당의 목사도 들어감니다. 유산계급의 노례노릇을 하여 왓다는 벌로 아라사교회는  심히 곤란한 상태에 잇슴니다. 그 전에는 막대한 재산으로 경영하든 수만 교당이 전혀 신자의 공급하는 것으로만 유지하게 되엿슴니다. 요전에『모스크바』에서 가장 크다는 독죄당(贖罪堂)에 가본즉 신자의 대개는 로파요 청년 로동계급의 사람은 하나도 볼 수 업섯슴니다. 아즉도 여자 중에는 십자를 그리며 예수초상에『키쓰』하는 풍속이 남어잇슴니다.

 

방방곡곡에 레닌 석상

◇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간에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에 야소교반대 풍조를 선뎐장려하야 아라사의 야소교는 불과 몃십년에 업서질 것갓슴니다. 그러나 아라사민족의 풍부한 종교성(宗敎性)은 졸연히 변경할 수 업는 모양입니다. 그전 하나님과『예수』에게 대한 신앙심이 지금은『맑스』와『레닌』에게로 옴긴 것 갓슴니다. 어느 공장이나 학교상뎜 공무소 심지어 어느 려관에 가보든지『레닌』방이 따로 잇서서 붉은 헌겁으로 신당처럼 장식하고『례닌』의 초상이 안니면 석상 하나식을 노코 숭배함을 보면 아라사 사람은 무엇이든지 승배치 안코는 만족치 못해하는 것을 가장 명백히 설명함니다.『레닌』능에 각 디방에서 참배하려고 온 농부들은『레닌』시톄 압헤서 십자를 그리엿다함니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17일자 2면)

 

 

혁명 후의 모스크바

계급차 심하고·레닌을 우상화·거지사태

1925년 2월「동아일보」는 혁명후의 소련실정을 보도키 위해 이관용을「모스크바」로 특파했다. 그는 북경에서 당시「조선일보」특파원으로「모스크바」로 향하던 김준연과 함께 소련으로 들어갔다.「스위스 쥬리히」대학을 졸업한 이 특파원(철학박사)은 봉천에서의 제1신에 이어 소련의 실정을 샅샅이 보도했다. 계급이 없다는 소련의 사회가 노동자의 독재가 있고 계급차이가 심하며 거지와 소매치기가 득실거리고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가하면「레닌」이 우상화되어가고 있는 등 그들의 말들과는 다른 어처구니없는 실정을 자세히 전해왔다。(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1면)

 

 

이관용은 1927년 2월 신간회 간사로 선출되고 1929년 초까지 조선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몇차례 중국을 드나들었고, 1933년 8월 13일 함북 청진해수욕장에서 불의의 익사사고로 타계할 때 그의 직함은 조선일보 편집고문이었다.

 

청진서 불행한 이관용 박사, 민중대회 사건에도 관게, 피서 수영 중 횡사

『천만 의외 아직 소식 없다』 , 조보 주요한씨 담

『서울집에는 소식이 없다』, 박사 집 사람 담

◇씨의 약력◇

(청진지국전화) 시내 종로(鍾路) 6정목에 주소를 둔 철학박사 이관용 씨는 13일 정오경 청진항 해수욕장에서 목욕을 하다가 빠저 죽엇다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시체는 발견치 못하얏으므로 그곳 지우들은 시체를 수사중이라 한다. 그리고 씨의 유족으로는 1남 2녀가 잇다.

별항 이관용 박사의 서거에 관한 정보를 값이고 조선일보사 편즙국장 주요한 씨에게 전하니 씨는 매우 놀래는 표정으로 『글세요 아직 아모소식도 없음니다. 수일 전에 웅기(雄基)에서기행문까지 보낸 일이 잇는데 참으로 천만뜻밖에 일입니다. 박사는 현재 조선일보사의 편집고문으로 잇을 뿐 아니라 나 개인으로도 매우 친한 사람입니다 만일 사실이라면 진실로 앗가운 일입니다.

이에 대하야 시내 종로 6정목 12번지 자택에 소식을 알아본 바 맞짐 씨의 동서인 이원조 씨는 창황한 어조로

『집에는 아직도 아모 통지가 없읍니다。 이가치 속히 알려주시오니 너무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엿다。

경성 출생으로 43세

경성고등보통학교와 전수학교 필업 동경 청산학원 필업 도영 옥스퍼드대학 졸업, 서서 주리히 대학에서 박사의 학위를 받엇다

귀국하야 연전교수、동아일보 조선일보、시대일보 기자역임. 신간회의 간부로서 민중운동대회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출옥. 현재 조선일보 편집고문

(동아일보 1933년 8월 14일자 2면)

 

 

이관용-조선일보사람들, 나의천년

1925년 2월 모스크바 특파원 이관용

조선일보사람들(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지음,2004년 랜덤하우스중앙) 124~129쪽

 

나의 천년(표정훈, 2004년 푸른역사) 162~165쪽

우리나라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은?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관용이다. ‘개벽’ 33호(1923년3월1일)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소식:10년의 형설을 영서독제국에 수하고 철학박사의 학위까지 득한 이관용 씨 입경.’ 이관용은 연희전문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와 조선일보 편집고문을 지낸 인물로, 1925년 9월15일 결성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성향의 ‘조선사정조사연구회’에 참여했고,1927년 출범한 신간회에서 조선일보 계열 및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 멤버였으며, 문일평 홍명희와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8년 11월 8일자 조선일보 기사 (중략)

그밖에 ‘개벽’ 4호(1924년2월)에는 그가 쓴 ‘신이상주의로 도라가려는 최근의 덕국문단’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글에서 이관용은 신이상주의가 발생한 역사적 철학적 배경을 설명하고, 니체의 ‘생활인식 철학’이 독일 문단에 미친 영향으로 이상주의 문학이 대두되는 과정을 언급한다.

이관용은 1919년 파리강화화의를 계기로 파견된 임시정부 대표단에서도 활동했다. 김규식을 대표로 조소앙, 여운홍(여운형의 동생) 등이 1919년 4월 사무실을 갖추고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지만, 열강의 냉대와 일본의 방해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결국 김규식을 비롯한 대표단은 1919년8월8일 미국으로 떠났고, 김규식의 뜻에 따라 이관용이 위원장 대리를 맡아 1921년까지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925년2월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으로,하루 먼저 떠난 조선일보의 김연준과 북경에서 합류하여 모스크바에 특파되기도 했다. 1925년 1월15일 트로츠키의 실각과 스탈린의 집권으로,소련이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조선에서도 소련 사정에 대한 관심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이후 이관용은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1929년 갑산 화전민촌 방화사건의 조사를 위해 김병로와 함께 갑산에 특파되기도 했다.

(중략)

이육사의 동생으로 조선일보 기자와 학예부장을 지낸 이원조(1909~1955,월북후 사망)의 부인이 바로 이관용의 딸이기 때문이다. 이원조가 1931년 일본 호세이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이관용의 딸과 혼인했던 것이다. 당시 주례는 조병옥이 섞으며, 국혼 그러니까 왕실과의 혼인이라 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관용의 부친 이재곤은 왕실 종친으로서 을사족약 이후 학부대신에 임명되고 일본으로부터 작위(자작)를 내려받은 인물이다. 이재곤은 전주 덕진시민공원 건지산 줄기에 자리한 대한조경단 건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광무 3년(1899) 1월 고종의 명을 받고 당시 특진관으로 있던 이재곤이 3월에 전주로 가서 조경단의 위치와 구획 등을 정한 것이다. 조경단은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며 전주 이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이한을 모시는 곳이다.

각각의 집안 배경을 감안하면 이관용의 딸과 이원조가 혼인했다는 게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롭기 못한 부친과 달리 이관용 본인은 나름의 소신을 갖고 학계, 언론계, 민족운동계 등에서 활동하기는 했다.이관용의 생몰연대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1933)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중략)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의 조선사람들이 지닌 전반적인 의식 속에 친일이나 항일이 어떤 모양새로 자리잡고 있었는지. 이관용의 사례는 나에게 궁금증을 안겨준다.

 

(2008.2.12 표정훈 전화인터뷰)

아버지 이재곤과 달리 이관용은 끝까지 민족주의자였다. 이재곤은 친일재산환수위원회의 심의대상이다.  내가 유족이라면 이관용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겠다.

 

이관용의 사상 발전과 현실 인식 / 이현희 東方學志 제174집 (2016년 3월) pp.163-199

165쪽

이관용은 1891년 7월, 이재곤(1859~1943)의 4남으로 태어나 1907년 관립한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부립 제4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하였다. 1910년 귀국한 그는 1913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영국으로 유학,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사를 전공하고 학사과정을 졸업하였다. 1917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에 입학하여 1921년 찰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조선에 돌아온 이관용은 유럽유학생 출신의 엘리트인 동시에 1919년 3·1운동 당시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에서 활동하기도 한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하였다.

이관용은 연희전문학교 재직중인 1925년 동아일보 특파원을 맡아 소련과 유럽을 다녀왔다.

 

 

“▲1891년 서울서 출생 ▲1934년 여름 함경북도 청진에서 별세 ▲1915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 졸업, 철학박사 ▲23년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24년 5월 동아일보 논설기자로 입사, 英文欄담당 ▲25년 4월 時代日報 부사장 ▲27년 2월 新幹會 발기인 및 간사.

 

□東亞의 영문란을 궤도에 올려…..

 

이관용(李灌鎔)은 구한국 황실의 가까운 인척으로 구한말 때 대신을 지낸 서울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중국 상해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에딘버러 대학에서 수학한 후, 스위스의 취리히 대학을 마쳤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하고 두나라 글도 누구보다 잘 쓰던 그는 그 무렵의 언론인으로서는 보기드문 ‘외국통’이었다.

  그가 대학을 마친 얼마후 파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매듭을 짓기위한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가 열렸다. 그때 우리나라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김규식(金奎植)박사를 수석으로 하는 민족대표단을 파리로 보내‘민족자결원칙에 따른 조선독립문제의 의제상징’을 청원, 국내의 3.1독립만세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김규식 박사를 비롯한 대표단 일행은 무엇보다도 우리대표단의‘청원’이 파리에 모인 열강대표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필요에 쫓긴 나머지 현지 유학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형태의 선전문을 불문으로 써서 파리시내 각 신문에 보내도록 했으나 좀체로 반영이 되지않았다, 그러다가 이관용이 불역해서 보낸 독립청원서만이 신문에 나서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는 것….. 그 한가지만을 보더라도 그의 프랑스어 실력은 보통이상이었음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의 부교장으로 있다가 1924년 5월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그의 입사와 함께 ‘동아’지면의 영문란이 크게 달라지는데 그때까지 영문란은 다른 기자가 썼던 모양이다.

  이관용은 넘어온 원고지가 온통 시뻘겋도록 수정을 가했으며 그중에서도 <본보가 이 영문란을 내게된 것은 영광>이라고 ‘글로리어스’로 적힌 대목을 그는 대뜸‘프라우드’로 고쳐잡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필자에게 “우리 신문이 아무리 빈약하기로 영문란 하나 내는 것이 자랑이라면 몰라도 영광일 것까지야 없지 않겠느냐”며 웃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이관용의 영문란은 서재필박사의 <용기와 협력>(Courage and Co – operation)제하 논문에 이어 <언론과 출판의 자유>(Our Liberty of Speech and press), <과혹한 압박>(Exorbitant Suppression), <언론자유를 위한 분투>(Struggle for Liberty of the Press), <조선의 장래>(The Future of Korea), <국민적 정신생활>(National Spirit Lives), <경찰의 악행>(Another case of police Abuse), <일본의 군국주의>(Japanese Militarism), <검열에 대하여>(Censorship) 등등 제목만 보아도 예리한 논설을 차압을 당해가며 이어나오다가 24년 12월들어 한 외국인(Fred A. Dolph)에 의한 <조선인에세 보내는 공개장>이 말썽이 되어 마침내 총독부에 의해 행정처분까지 받게된다.

  그것이 원인이었던 것일까. 이관용은 이듬해 4월초‘동아’에서 함께 일했던 홍명희(洪命熹 주필 겸 편집국장), 한기악(韓基岳 편집국장 대리), 정인보(鄭寅普 논설위원)등과 함께 ‘동아’를 나와 재건‘시대일보’의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게 된다.

 

□시대일보의 경영난

 

  24년 3월 31일 <조선민족아 일치합시다. 민족적 자조(自助)에 일치합시다>라는 기치아래 육당(六堂 催南善)이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전적으로 개편, 창간한 <시대일보(時代日報)>는 초기에 2만부를 발행하여‘조선’과‘동아’ 양대민족지를 능가하는 인상을 풍기면서 세 민족지의 정립시대를 예고하는 듯했으나 창간 넉달만에 이른바 보천교(普天敎)문제로 인한 분규에 휘말려 출범초기부터 경영난에 시달려야했다.

  내용인즉 민병덕(閔丙德)의 1만원 출자로 발족했던‘시대’는 시설비를 비롯한 제작비와 인건비등의 증가 때문에 경영이 어렵게되자 보천교(교주  車京石)측으로부터 전도금 3만원의 투자를 받은 것이 화근이 되어 발행권을 에워싼 분쟁이 일게된 것…..

  돈을 건네준 보천교측은 경영 및 인사문제에 차츰 간섭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발행인을 보천교측의 이성영(李成英)으로 바꿔치운다. 그리고 ‘시대’의 사원들이 이에 반기를 들자 보천교측은 분쟁수습을 이유로 7월10일, 10일간의 자진휴간을 경찰당국에 신청, 불에 기름을 부운 꼴이 되고 말았다.

  사회공기인 신문이 특정종교집단의 기관지로 넘겨질 수는 없다는 반대의 목소리는‘시대’사내로부터 범사회적으로 확산돼 나갔던 것이다.

  이같은 맹렬한 반대운동으로 결국 발행인 명의만은 이성영을 그대로 둔채 육당을 비롯한 실무진들이 나서 3개월 가까이 휴간중이던 ‘시대’는 9월 1일자로 겨우 속간은 됐으나 한번 기울어진 사세를 돌이키기는 매우 어려웠다.

  속간 이후에도 계속 ‘시대’를 괴롭히는 재정난을 보다못한 홍명희등 유지들(洪命憙, 梨範世, 李喜鍾, 鄭喜永, 尹希重, 兪鎭英, 洪淳泌, 鄭寅普, 韓基岳, 李庭熙, 金益東, 申星浩, 趙?鎬)은 25년 4월초 재단을 구성, 보천교 부채를 청산하고 같은해 4월 30일부터 지면을 쇄신, 새출발을 하게된다.

  이때 진용을 보면 사장에 홍명의, 부사장에 이관용, 편집국장에 한기악, 영업국장 김익동 등으로 자본금 20만원 규모의 합자회사 형태였다.

  그러나 ‘재건시대일보’ 역시 1년 남짓만에 근본적인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한채 26년 8월들어 휴간을 거듭, 서너부 정도를 두들겨 찍어서 겨우 납본만 하는 비운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해 11월 15일에는 백인기(白寅基)의 출자를 얻은 이상협(李相協)이 이미 발행권이 취소된‘시대’의 판권을 인수, 중외일보(中外日報)로 개제하여 발행허가(26.9.18)를 받아 창간하게 되자 이관용은‘시대’를 나와 잠시동안 조선일보의 중국특파원을 지내기조 했다.

  영불어로 말도 잘하고 쓰기도 잘했지만 그는 우리말 연설에서도 일급 웅변가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27년 2월 15일 서울YMCA회관에서 닻을 올린 신간회(新幹會)의 핵심멤버로 등장, 여러지방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는 일에 늘 앞장을 섰다.

  사회주의 단체와 민족진영간의 반목을 해소하고 항일민족단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월남(月南 李商在)을 구심점으로 조직된 신간회는 전국 2백여군데에 지부 및 분회를 거느리고 4만회원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반일 민중단체였다.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이 신간회 발기인 28명중의 한사람이 된 이관용은 곧 김준연(金俊淵), 조병옥(趙炳玉), 김활란(金活蘭), 문일평(文一平)등과 함께 신간회 간사로 뽑힌다.

 

□신간회 지방유세도중 변사

 

  그 당시 신간회의 3대강령은 정치, 경제적 각성의 촉진과 단결, 그리고 기회주의 부정이었다.

  이관용은 가는곳마다 이같은 신간회의 기본정신을 설득하고 많은 청중들에게 정치, 경제적으로 각성할 때 비로소 민족이 살수 있다고 역설했다.

  34년 한여름의 일이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강연회를 마친 이관용은 같이 간 일행과 함께 얕은 바닷물에 몸을 적시며 “만일에 내가 여기서 물에 빠져 죽게되면 답동해이사(踏東海而死)했다고들 하겠지…..”하면서 크게 웃었다.

  그 이야기는 중국의 지사 노중련(魯仲連)이 망국의 한을 비관한 나머지 동해바다를 계속 걸어가면서 빠져 죽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그말을 들은 일행은 농담이겠거니…..하고 따라 웃었다.

  하지만 이관용은 그런 말을 남기고 바로 그 바닷가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마흔을 갓 넘긴 아까운 재목의 의문섞인 죽음이었다. ”

 

※ 참고자료 : 한국의 기자상(柳光烈), 언론연표(관훈클럽), 한국신문백년(한국신문연구소), 신문백년인물사전(한국편집인협회)

(이상원 전 도서잡지 윤리위원회 사무국장, 東亞의 영문란을 궤도에 올려….., 한국언론인물사화-제5권, 1992)

 

 

 이 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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