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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대표주주 김성수(金性洙)(5)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공산주의도 안 되고 독재도 안 된다

 

연천에서 해방을 맞은 인촌은 부인 이아주李娥珠 여사에게 “정치는 고하古下 같은 사람이 하겠지. 나는 교육자여, 학교나 하겠어. 아니지. 학교도 이제 학자에게 맡기고 나는 박물관장이나 돼서 나라의 보물을 지키는 일을 하면 꼭 좋겠소.”라고 했습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빛과 함께 먹구름도 몰고 왔습니다. 좌우가 충돌하며 해방정국解放政局은 어수선했습니다. 총독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고 ‘건국준비위원회’建準를 결성했던 여운형呂運亨은 1945년 9월 4일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 정백鄭栢 등과 경성의전병원 허헌의 병실에서 ‘인민공화국’人共 창건과 구성인물선정문제 등을 협의, 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인촌을 인공의 문교부장과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출했습니다.
본인의 의사를 물어본 사실도 없고 본인이 승낙한 적도 없었습니다.
여운형, 박헌영 등과 입장을 달리하던 송진우宋鎭禹, 서상일徐相日 등은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조병옥趙炳玉, 이인李仁 등은 ‘중경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우익진영은 1945년 9월 4일 서울 종로국민학교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했습니다. 우익의 한민당이 결성되자 좌익은 한민당을 최대의 적으로 삼고 반동정당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혼미를 거듭하던 해방 정국은 모스크바 3상三相회의가 조선을 신탁통치하에 두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소용돌이쳤습니다.
‘반탁反託’과 ‘찬탁贊託’의 전쟁이 시작됐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1945년 12월 30일 고하 송진우 선생이 흉탄에 쓰러졌습니다.
고하의 죽음으로 인촌은 1946년 1월 한민당의 수석총무를 맡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인촌은 김구 선생과 이동휘李東輝 선생의 대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이유로 공산주의를 반대했습니다.

 

“(이동휘) 대저 혁명이란 유혈사업으로 어느 민족에게나 대사인데, 현재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오. 따라서 이대로 독립을 한 후 또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되니, 두 번 유혈은 우리 민족에게도 큰 불행이오. 그러니 적은이(아우)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나(김구 선생)는 반문하였다.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 제3국제당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씨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불가능하오.’
나는 강경한 어조로 다시 말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弟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그러자, 이 씨는 불만스러운 낯빛으로 나와 헤어졌다.”(<백범일지>)

 

한민당 수석총무로서 인촌은 ‘조선의 장래, 순고純固 원만한 국가를 성成하자’는 (상)(중)(하) 3편의 글을 동아일보에 실었습니다. 그 글에는 인촌 김성수의 나라에 대한 생각과 신념이 잘 담겨 있습니다.

 

.자립자강하여야 한다. 연합국의 부조扶助에 의의倚依하지 않고 세계에 홀연히 자립하여야겠다. 자기 의사로 자기 행동을 결정하여 자기의 생존과 위지位地를 보전하고 자기 의사를 발휘하여 건설을 도모하여야한다. 그런 연후에 우리는 세계에 향하여 자유평등을 구하여야겠다.

.우리의 이익만을 위하여 타他와 협동을 거부하거나 또는 타他를시의猜疑하고 희생함으로써 자기의 지위를 보유 향상하려 하려는 심지心志는 호말毫末(털 끝)이라도 가지고자 하지 않으나 우리가 역사의 광영을 계승하여 독립 자주의 인격을 확립하는 성업을 달성하려는 마당에 외부의 세력이 각자의 입장에서 정략적으로 그 유약한 화초의 싹을 주물러 고사시키려는 번롱飜弄이 있다면 자기 보존의 권리에 의거하여
힘차게 항거치 않고 어떻게 하리오.

.이 땅을 떠나서 이 겨레가 있을 수 없고, 이 겨레 없이 이 땅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 땅, 이 겨레의 자유는 우리의 정열과 의무로 방위하고 발양할지며 이 땅, 이 겨레의 이익은 우리의 의지와 권리로 옹호하고 확충할지니라.

 

1948년 5월 10일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인촌은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당수黨首가 국회에 의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당 간부들은 극력 출마를 종용했으나 그는 “내가 나가서 당선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가서 당선되는 것이 남북통일을 위해서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될 때에는 내가 물러서야지.”라며 이윤영李允榮 조선민주당 부위원장을 천거했습니다. 월남한 이북동포 4백50만과 조선민주당 위원장 조만식 선생에 대한 우정과 경의敬意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출마를 포기한 인촌은 동아일보에 ‘선거와 국민의 자각’이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총선거와 국민의 자각(상) 한국민주당 위원장 김성수(동아일보 1948년 4월 6일자 1면)
총선거와 국민의 자각(하) 한국민주당 위원장 김성수(동아일보 1948년 4월 7일자 1면)

 

임기 2년의 1대 국회는 헌법을 제정하는 일이 최대 과제였습니다.
헌법 제정과정에서 내각책임제는 이승만의 고집으로 대통령제가 되었고 국회는 당시 상황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 인준을 받도록 된 국무총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승만은 인촌 선생의 양보와 천거로 국회에 들어온 이윤영李允榮 조선민주당 부위원장을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윤영에 대한 국회 인준은 부결됐고 이승만은 다시 이범석李範奭을 지명했습니다. 한민당 간부들은 끝까지 인촌을 국무총리로 추대할 생각이었으나 인촌은 대의大義를 위해 이범석의 총리 인준을 당부했고 국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승만은 인촌에게 재무장관을 제의했으나 인촌은 고사했습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인촌은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인촌은 선거 전 동아일보에 ‘총선거와 국민의 각오’라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총선거와 국민의 각오(상) 동아일보 1950년 5월 26일자 1면
총선거와 국민의 각오(하) 동아일보 1950년 5월 27일자 1면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한 상황에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사건이 생겼습니다. 이시영 부통령은 ‘더 이상 시위尸位에 앉아 소찬素餐을 먹고 있을 수 없다’며 격앙하여 사퇴했습니다.
야당에서 부통령 후보로 인촌을 내세우려 할 때 인촌은 “성재省齋 선생이 물러난 자리에 내가 들어앉아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요.”라며 고사했습니다.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여당 쪽의 이갑성 후보와 3차 투표까지 간 끝에 78:73으로 제2대 부통령에 선출됐으나 “나는 그 자리에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취임할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국회에서 결정된 일을 거부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는 주변의 강권强勸으로 그는 부통령직을 수락했습니다.
1년 남짓 재직 중 이 대통령의 독선과 독주가 계속되자 그는 부통령직을 사임했습니다.
사임서는 부통령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그간의 경위를 소상히 밝히고 “전제 군주적 독재정치화의 위협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항구적인 자유와 평화와 복락을 이 나라, 이 겨레에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 대중과 함께 결사 분투할 것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로 끝을 맺어 반독재, 민주화 투쟁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부통령 사임서는 당시 신문에 보도되지도 못했습니다.
이 선언은 통합 야당(민주당)의 결성을 예고한 것으로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결성된 통합 야당 민주당은 ‘정통야당’의 출발점이 됩니다.
“1947년경이었다. 날씨가 꽤 추웠던 것으로 보아 겨울철 같은데 인촌 선생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서대문 경교장에 가자고 하셨다. 그때는 장미가 귀했던 시절인 데다 겨울 장미라서 정말 귀한 것이었다.
“거긴 왜 가십니까?” “음, 백범 선생을 뵈러 가야지. 감기몸살로 몹시 고생을 하셨다가 일어나신 모양인데 찾아뵙고 인사라도 드려야지”
“정말 정성 이십니다” “여러 소리 말고 어여 가자” 그래서 백범 선생이 계신 경교장으로 갔는데 내가 모시고 들어가는데 건방지게도 경비실에서 부르는 것이었다. 인촌 선생님을 모를 리도 없는데 경비실로 들어오라더니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 왜 만나려느냐 하면서 몸수색까지 하려는 것이었다. “이게 어디서 배워먹은 수작이야? 꼬치꼬치 묻는 것도 불경스러운데 몸수색이라니?” 내가 화가 나서 외치자 경비원들이 무뚝뚝하게 받는 것이었다. “위에서 지시가 있어서 수색을 하는 것이니 협조 좀 하쇼?” 그러자 인촌 선생은 화가 나시어 뭐라 한 마디 하시려다가 꾹 참으시고 꽃다발을 다시 들고 나에게 가자고 하시며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었다. 그때처럼 민망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나도 정치는 아는 것 없지만 때로 선생님과 한 방에서 자게 될 때 간간이 여러 말씀을 드리기 도 했다. “선생님, 그 사람들 위해서 밤낮 없이 애를 써 주시고 욕은 욕대로 얻어먹으니 참 서글픕니다. 선생님, 잘해 줘야 그들에게 나중에는 이용만 당하십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려, 내가 왜 그러나, 왜 그러나, 하고 내가 내 발을 열 번 찍는다. 해외에 나가서 독립운동 했으니 다 위대하게 보았더니 들어와 하는 꼴 보면 정말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온다. 그런 사람들 데리고 독립운동 한 도산이, 백범이 불쌍혀. 양 군!” “예? 선생님” “장차 내가 죽거든 김 아무개는 세상에 나와서 죄 안 지으려고 많이 노력허다가 죽었다고나 전해 다오” 그런 말씀은 뼈 있는 말씀이었다.
그때처럼 선생님이 외로와 보인 적이 없었다.”(양환철梁煥喆, 인촌의 비서)

 

<토지개혁 찬성한 대지주 인촌>

해방 후 논란이 많았던 현안 중 하나였던 남한의 토지개혁문제에 대해 이동욱李東旭 전 동아일보 회장은 “인촌과 설산이 토지개혁문제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에 있었다. 인촌은 ‘농지개혁은 꼭 해야 한다.’며
‘지주들이 오랫동안 소작료를 받아먹고 살아 온 좋지 못한 전통에 종지부를 찍고 노력해서 먹고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설산은 ‘북한이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해 남북통일은 물 건너갔다’며 탄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전 회장은 “대지주의 한 사람인 인촌이 토지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그의 좌우명인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신념을 읽을 수 있었다.”며 인촌의 설득으로 한민당 내 대지주들도 토지개혁을 받아들였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 회장은 결국 남한에는 ‘3 : 7’ 제(지주3, 소작인 7)가 정착됐지만 무상몰수-무상분배를 한 북한은 1956년 농업 집단화라는 명분으로 농지를 모두 다시 회수해 북한에는 농지를 가진 농민이 없는 현실을 볼 때 남한의 토지개혁이 훨씬 잘 된 것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인촌은 죽산도 포용하자고 했다>

인촌은 반독재투쟁을 위한 단일 통합야당 결성을 논의할 때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도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8인위원회가 처음에 작성한 조직요강에 의하면, 좌익전향자와 독재 또는 부패행위가 현저하여 사회의 지탄을 받는 자는 신당준비위원이 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었다. 우선 조봉암이 여기 해당되었고 부산정치파동 때 민주세력을 탄압한 이범석이 문제되었다. 이범석은 당초부터 신당운동에 참여할 뜻을 보이지 않아 논외였으나 신당운동에 적극 참여하려고 나선 조봉암이 문제였다. 따라서 신당운동 이념문제는 결국 조봉암을 신당에 참여시키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세상에서 이 대립을 보수파와 혁신파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의 대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조봉암의 신당참여를 주장하는 민주대동파에는 신당조직 간사인 곽상훈郭尙勳을 비롯하여 장택상과 민국당의 선전부장 신도성愼道晟 등이 있었고, 이를 반대하는 자유민주파에는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장면張勉 등이 있었다.
그러한 대립 속에서 자유민주파에서는 민국당의 지방조직을 통해서 신당운동을 추진하였고, 민주대동파에서는 조봉암의 조직과 과거의 족청族靑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맞서고 있었는데 양파의 대립에는 이념도 이념이려니와 신당의 주도권 쟁탈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
인촌은 민주대동파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대한민국의 국무위원과 국회의원을 지냈을 뿐 아니라 국회의원들의 선거로 국회에서 부의장까지 맡은바 있는 사람을 이제 와서 공산당이라고 정당을 같이 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였다. 조봉암은 과거에 공산당원이었으나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전에 과거를 청산하고 초대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제2대 국회에서는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약 80만 표를 얻어 차점자가 된 사람이었다. 확실히 인촌의 견해는 정론이었고, 18인 위원들도 이 문제로 고심하다가 조직 요강에 저촉되는 좌익전향자에 관한 해석을 국무위원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자는 예외로 한다는데 합의하여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장면계가 조봉암과는 당을 같이 할 수 없다고 고집하였고, 보수적인 인사들이 이에 동조하여 대립은 한층 격화되었다. 인촌은 초조한 마음으로 신당운동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1955년 10월 18일 백남훈白南薰 조병옥趙炳玉 김준연金俊淵 송필만宋必滿 등 한민당 이래의 민국당 간부 들을 자택에 불러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말고 조봉암과 합작하여 반독재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에 나서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면계의 반대도 있고 그들 자신의 정치이념도 작용해서 시원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결국 인촌은 신당의 발족을 보지 못하고 1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고, 신당은 그가 별세한 후 조봉암을 제외한 채 그해 9월 19일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하였다.”(<인촌 김성수전>, 675~677쪽)

 

“54년 서울 귀환 이후에 정계에서는 야당 합동 운동이 일어나서 우선 당시의 국민당과 민주당이 합하여 민주국민당이 되었고, 그 다음 차례로는 부산 당시의 원내 자유당 계통과 무소속의 야당 인물을 전부 망라하여 단일 야당 창설운동이 일어났다. 백남훈 선생 등이 흥사단도 이에 가담하라고 권해 왔으나 나는 흥사단이 정치단체가 아니고, 국회의원으로 진출한 사람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행동하는 것이므로, 개인적으로 신당에 들고 안 들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국회의원으로 흥사단 출신은 정일형鄭一亨 이용설李容卨 단 두 사람 뿐 이었는데, 엉뚱한 의원 중에 소위 흥사단 계통이라고 지목되는 사람도 없지 아니했다. 행정부 안에는 김병연金炳淵 이묘묵李卯默 김훈金勳 기타 몇 분이 있었고, 혹은 여당인 자유당에 가까운 이도 있었다. 나는 끈질기게 신당 가입 권유를 받았으나 정치운동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사절했었다. 합당이 거의 무르익어갈 무렵 조봉암 포섭 여부로 문제가 된 일이 있다. 김성수 씨는 전략상 포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일부에서는 조 씨가 비록 공산당 탈퇴선언을 했으나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다. 어느 날 조병옥 박사가 전화로 불러서 ‘충무가’라는 음식점에 갔더니 장면 박사와 두 분이 같이 앉아서 내게 조 씨 포섭의 가부를 물었다. 나는 조 씨가 공산당과 절연 성명을 했지마는 앞으로
그의 전술이 공산당 식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있으니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사사로운 의견을 말하였다. 그 날의 토의가 얼마마한 무게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 씨의 가담은 부결되었다.”
(주요한 문집 <새벽 Ⅰ>, 요한기념사업회, 1982, 83쪽)

 

만약 인촌의 생각처럼 죽산을 민주당에 참여시켰더라면 그 후 죽산이 사법살인 당하는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

 

출처: 동아일보 2020위원회 교열, 자립자강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2011년, 107~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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