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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대표주주 김성수(金性洙)(1)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젊은 위대’

 

“우리 젊은 사람 가운데 조선의 사회장을 시비 없이 받을 사람은 김 군일까 한다. 그이에게 동상이나 하나 세워 주었으면 한다. 중앙학교 교정 가운데 같은 곳에.”
황석우黃錫禹 시인이 79년 전, 1932년 4월에 쓴 글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41세의 인촌 김성수 선생을 “기미己未 이후 새로운 조선을 세워 논 젊은 위대”라고 했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김성수는 장래의 인人이다. 아직도 41세가 아니냐.
그러나 현재의 김성수도 조선의 최대한 인물의 하나이란 것에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벌써 거인이다. 그가 조선의 교육, 실업, 언론기관에 한 공헌은 실로 지대하다.”고 평했습니다.
인촌이 하는 일들을 당시 사람들은 ‘김성수 콘체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씨와 같이 고맙고 충성스럽고 희생적인 인물도 다시없을 것이다.
씨는 일신의 이익이나 행복이나 향락은 생각한 때가 없고 자기 일생을 조선을 위하여 바치자는 장지壯志를 가졌으니 실로 조선에 있어서 씨와 같은 인물을 가진 것은 우리로서 기쁨인 동시에 자랑이라 하여 그리 과언이 아니다. 씨가 돌아가시는 날에는 조선 민족은 씨에게
사회장을 거행함에 1인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망운산인望雲山人, <신인문학新人文學>, 1935년 4월호)

 

“김성수 씨, 그는 우리 사회 문화의 큰 건축사다.”
(서도학인西道學人, <삼천리三千里>, 1938년 11월호)

 

그에 대한 평가가 이러하던 시절, 인촌은 ‘남보다 배나 더 노력하자’고 합니다.

 

“남의 것만 못하다고 내 것을 내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또 조금이라도 낙심할 필요가 절대로 없다. 낙심은 대 금물이오. 자멸이다. 남만 못한 우리는 남보다 배나 더 노력해야할 일이다. 속담에 ‘귀먹은 중 마 캐듯 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거저 그와 같이 꾸준히 노력할 일이요, 이론을 논할 것이 아니다. 사회의 환경만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사회성원의 일분자인 우리가 우리 사회를 잘 되도록 남보다 배나 더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동방평론東方評論>, 1932년 5월호)

 

‘더 노력하자’고 했던 인촌은 ‘귀먹은 중 마 캐듯’ 노력하여 오늘의 동아일보와 중앙학교, 고려대학을 일궈 놓았습니다. ‘젊은 위대’가 만든 작품입니다.
동아일보는 2011년 10월 현재 2만8천여 호를 발간하게 됐고 중앙학교와 고려대학의 졸업생은 30만여 명에 이릅니다. 일제하 동아일보는 나라 없는 백성의 정부와 같았고 그가 키운 학교에서 배운 졸업생들은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사회 곳곳의 동량棟樑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천연하고, 친절하고, 겸허하고, 충성된’ 인촌

 

“누구든지 김성수를 직접으로 사귀어 본 사람은 그의 천연하고, 친절하고, 겸허하고, 충성된 성격을 허許할 것이다. 그는 체면을 짓지 아니하고 조그마한 몸똥이와 아지자지한 용모가 소꼽장난하는 아이들에게서 보는 듯한 꾸미지 않고 천연스러움으로 찼다. 그러한 중에 그의
말과 행동에는 결코 탈선됨이 없다. 얼빠짐이 없다. 이것은 그의 이지력의 명민함과 감정의 건전 됨을 보이는 것이다”(춘원 이광수)

 

김진섭金鎭燮 전 동아일보 기자는 그를 시골 박 서방 같았다고 합니다.

 

“제스처가 없다. 시골 박 서방이다. 조금도 구김이 없는 분이고, 젊은 사람과 농담도 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서태원徐泰源 고일회高一會(고려대 1회 졸업생 모임) 회장은 “중앙고보 졸업 후 1943년 보전에 입학했다. 그해 보전은 신설하다시피 운동장도 새로 닦고 건물도 새로 짓곤 했다. 그때 인촌은 교장이지만 운동장에 가면 만날 수 있었다. 사무실에는 없고 시간만 나면 운동장에 나와 잔디밭에서 풀을 뽑았다. 촌로와 같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보전普專 입학원서를 받으러 가니까 그 때만 하더라도 보성학교 다니다가 보전을 가니까 어마어마했다. 석조건물에 운동장도 넓고 굉장하더라구. 원서를 어디서 주나 알 수가 없어. 풀밭에서 잡초를 뽑는 늙은이가 있더라구. 내가 ‘영감님, 이거 원서 받으려면 어디서 받아야합니까’하니까, 그 사람이 ‘아, 예’ 하고 일어서더니 ‘이렇게 들어가서, 저렇게 가면 원서 주는 데가 있습니다.’라고 하더라고. 나는 ‘어이, 고맙습니다.’ 하고 갔다가 원서 받고 나오니까 아직도 그 사람이 풀을 뜯고 있어요. 그래서 ‘영감님, 하루 종일 그것 뽑으면 얼마나 뽑습니까’하고 놀림 반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가 씩 웃고 가만 있더라구요.
그런데 입학식 때 말이야, 교단에 나와서 ‘학교 잘 왔다, 고맙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 영감이야. 인촌이란 사람이 첫인상부터 그랬어요.”(이중재李重載 전 국회 부의장, 보전 제자)

 

이중재는 “학생들이 담배 피우다가 아무데나 버리고 하지. 인촌 선생이 매일 아침 담배꽁초를 주워서 담고, 휴지를 주워서 담고 하시더라구. 교장 선생님 할 때 말이야.”라고도 했습니다.

 

정성태鄭成太 전 국회부의장 역시 인촌 선생에 대한 인상을 이웃의 촌로村老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운동장을 삥 둘러 나무가 서 있었는데 무척 좋았다. 큰 운동장을 돌아서 교실에 들어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가운데로 질러가기를 좋아해 나무들이 자빠졌다. 그럴 때면 시골 영감 같은 분이 한복을 입고 자빠진 나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손질을 했다. 버려진 휴지, 쓰레기들도 줍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인촌 선생이었다. 나는 지금도 고대에 가면 그 모습이 선연하게 보인다.”

 

“얼른 보면 체격은 그리 위장부偉丈夫가 아니요 또는 그리 늠름하지도 못하다. 그러나 어딘지 침범할 수 없는 매서운 맛과 날카로운 점이 있다. 씨의 전체를 보아 한곳도 허술한 데가 없고 강철같이 조화된 날카로운 맛을 갖고 있다. 키는 작고 조금 뚱뚱한 형편이나 작은 얼굴에 빛나는 눈과 감우스러운 팔八자의 수염은 씨의 굳고 아름다운 정신을 말하는 것 같다. 좀 실례지만 씨는 후추알 같이 매운 사람, 표범같이 날카로운 사람 그리고 별과 같이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라고 하여 그리 과오가 없을 것이다.”(주요한朱耀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유광렬柳光烈 동아일보 창간기자는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 비서실장 시절 “인촌 선생이 신익희 선생하고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인사를 하고 나가더군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다시 돌아오셨어요. ‘내가 아까 와서 얘기를 하고 나갈 때 신익희에게는 잘 있으라는 얘기를 하고 인사를 했는데 그대에게는 인사 잘못한 것 같아 도로 왔다’고 하십디다.
내가 ‘무슨 말입니까. 저에게 인사를 안했다고 이렇게 오실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인사를 하고 가셨거나 안 하고 가셨거나 관계없습니다.’고 했더니 어찌 ‘신익희에게는 인사하고 유광렬에게는 인사 안 하고 가라는 법이 있느냐. 그렇게 해 가지고는 민주주의고 무엇이고 창달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자꾸 인사를 받으라고 해요. 그 만큼 인촌 선생은 겸손했다.”고 했습니다.
“저보다 15세나 연상인데도 평소에 반드시 경어를 쓰셨습니다. ‘유 군’ 이런 말, 혹 한 두 번 있었을지 모르지만 으레 ‘유 선생’, 언제든지 경어였습니다.”(유진오兪鎭午 전 고려대 총장)

 

“부통령 하실 때 부산에서 가끔 차를 타고 모시고 가는 때가 있었다.
장관도 경호차가 따라 다니고 급할 때면 사이렌도 왱왱 불어가면서 달려가던 때인데 유독 선생님만은 경호차도 안 붙고 호위비서인 양환철梁煥喆 경사 하나만 차 앞자리에 앉혀 두고 다니셨다.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덥고 빨리 가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광복동 네거리 쯤 지날라치면 피난민으로 인산인해이니 차라리 내려서 걸어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양 경사! 부통령 차에는 사이렌도 없소?’ ‘있지요?’ ‘있으면 왱왱 하라구. 바빠서 빨리 가야 하는데 뭘 하고 있는가?’ ‘있어도 못 부시게 하십니다’ ‘누가?’ ‘선생님이요’ ‘왜 그러시죠?’ ‘이 사람아,
욕먹어! 부통령이 뭐 대원군인 줄 알았나? 백성들의 머슴이여. 머슴이 가면서 왜 소리는 지르는가?’ ‘거참 너무 하십니다. 더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럼 차 문이라도 열어 놓으십시오.’ ‘걸어 다니는 사람도 좀 생각해, 타고 가는 거 자랑하려고 문 열자고 하는가? 더워도 좀 참게’ 정말로 소박하고 진실하며 겸손하신 분이었다. 요즈음에는 그런 분 찾기 힘들 것이다. 아니 없다.”(이상돈李相敦 전 국회의원)

 

서정주徐廷柱 시인은 “아버지가 인촌 선생이 줄포 댁에 내려 왔으니 가서 인사 여쭈라 하여 줄포로 갔다. 그분은 사랑채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올리자, ‘자네 몇 시 차로 왔능가?’ 하셨다. 그래서 나는, ‘예, 넉 시 차로 왔습니다.’ 했더니 선생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 이런, 넉 시라는 말도 있나? 이 사람아, 넉 점이면 넉 점, 네 시면 네 시지 넉 시가 뭔가? 하하하’ 홍안무색, 아무 말도 안 했으나 무척 창피했다. 그 말이 그 후 내가 시인된 잠재적인 자극이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보전 보고 절한다 생각하세

“보전 서관西館 뒤에 양계장이 있었다. 2백 여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일제 말기 사료가 모자라 닭들이 시들시들 하는 형편이었다. 닭 사료도 총독부 축산과에서 배급을 타오는 때였다. 하루는 인촌께서 양계장을 둘러보시고는 ‘닭 모이가 모자라 큰 일 이구먼’ 하고 걱정하시었다.
나는 축산과 서기에게 가서 절을 여러 번 하고 ‘외교’를 잘 하면 닭 모이를 조금 더 배급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신 선생께서는,
‘그래? 그럼 나도 축산과 서기한테 가서 절을 할란다. 시들시들 맥을 못 추는 닭들을 볼 수가 없구먼’ 하시면서 언제 축산과에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지금 막 가려는 참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럼 가자며 앞서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인촌 선생을 모시고 닭 모이 배급을 받으러 총독부로 가게 되었다. 지금의 종합청사 앞 치안본부 건물 구석진 2층에 축산과가 있었다. 광화문에서 전차를 내려 그 쪽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하니 기가 찼다. ‘선생님, 닭 모이가 급하긴 해도 축산과 서기한테 선생님이 절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제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인촌께서는 나의 말을 들으시더니, 좀 착잡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씀했다. ‘김 선생, 총독부 서기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 말고, 보전 보고 절 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세.’
인촌은 축산과 서기에게 정중하게 절을 했으며, 그리하여 보통 때보다 좀 많은 사료를 배급 받았다.”(김장수金樟洙 전 고려대 교수)

 

‘총독부 서기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 말고, 보전 보고 절 한다고 생각하면 되네.’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의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엄격했습니다.

 

 

궁학생窮學生이 되어라

영국 유학을 떠나는 장남 김상만金相万에게 인촌은 ‘궁학생窮學生이 되어라’고 엄히 일렀습니다.
“인촌 선생이 걸어가실 때 뒤에서 보면 구두 뒤쪽이 닳아서 천을 대서 기웠더라. 물론 학생들 가운데는 일제 말엽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양말을 기워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천하의 김성수 선생이 신발에 천을 대서 기워 신었다는 것을 보면…”(이중재李重載 보전 제자)

 

“일례를 거擧하면 자기 고향에 내려가서 역에서 하차하여 자택까지 들어가는 거리는 상당히 멀다는데 역전의 대절차貸切車 있을 때에 요금 5원이면 탈 수 있으므로 해該 지방 중산 이상의 인사는 누구나 대개 대절차를 이용하였는데 동씨는 하시何時든지 도보로 내왕하므로 일반 인사를 경복케 하여 일화의 일一이 되었다고 하며…”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 조선정경연구사)

 

“해방 몇 해 후 방학 때 나는 고창 농장에서 마늘, 고추 등을 가지고 계동 집에 가져다 드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절을 하니까 왜 그렇게 땀을 흘리냐고 물으셨다. ‘좀 걸었더니 그래요’, ‘걸어 왔어? 어디서부터?’, ‘서울역에서 짐은 지게꾼에게 지우고 걸었어요’, ‘서울역에서 계동까지 걸었어, 버스라도 탈일이지. 어이구, 용허다.”
(장손자 김병관金炳琯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검소한 건 뭐, 참, 두말 할 것 없이 보통 그 분이 입으시는 옷이 고운 무명, 뭐 모직 두루마기 같은 거 입는 걸 우리가 잘 못 봤으니까. 대개 그 무명옷 그저 그런 옷, 한껏 호사한다는 게 우리나라의 명주옷, 그것이지요. 그 분이 양복 입는 걸 내가 못 봤습니다. 별로. 그저 소위 그때 일본시대 때 임반…이라고 있지요? 그 분이 그거 두르고. 그런 면에서 그 말하자면 인도의 그 간디 옹이라고 그럴까요? 민족주의적인 그런…
근데 그 분이 국수주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그 성격이 말하자면 단박해요. 뭐 사치스럽고 형식 뭐 그런 걸 잘 안보는 친구야. 이런 일이 있습니다. 인촌이 진지를 잡수고 앉았어요. 내가 들어가니까 창랑 밥 같이 먹어. 아, 나 저녁 먹었다고. 마침 그 인촌 옆에 왠 젊은 친구가 하나 서 있어요. 인촌이 진지를 잡수다가 그 젊은 사람 쳐다보니 너 이 어른 전에 못 뵈었니? 이래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신지는 알지만 뵈온 일은 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요. 그런데 아, 인촌이 장죽을 그냥 한 움큼 빼서 들더니 그 젊은 사람을 그대로 칩니다. 이놈! 부형 친구에게 절을 안 하고 처음 뵈옵습니다. 고개를 끄덕? 죽일 놈 같으니라고. 그 분의 법도가 좌우간 보통 상인常人하고는 다릅니다.”
(장택상張澤相 전 국무총리)

 

세계일보와 중앙일보의 칼럼에 따르면 1950년 말 시인 이한직李漢稷은 피난지인 부산에서 당시 부통령이던 김성수의 딸과 결혼하지만 이한직이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장인인 김성수는 결혼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는 문필계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김성수 씨와 송진우 씨는 번갈아가며 사장을 몇 번 지냈다. 기사로 말썽이 난다든가 하면 사장이 사표를 내고 바뀐 것이다. 김 씨는 편집에는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비 절감에는 신경을 썼다. 한번은 스팀이 너무 더워 창문을 열어 놓고 있는데 인촌이 들어왔다. 그는 열린 창문을 가리키며 ‘아래서는 불을 때고 위에서는 창문을 열어놓고 있으니 돈이 나간다.’ 며 불을 줄이라고 했다. 때로는 사장실에서 송진우 씨와 싸우는 소리도 들렸는데 대개는 돈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바지저고린 줄 아나.’ 하는 송진우 씨의 언성이 들려온 일도 있다. 한창 싸울 때 보면 당장 원수라도 질 것 같은데 뒤가 없었다.”(주요한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경성의 3대 명물로 어떤 이는 ‘김성수 씨 검소와 윤치호尹致昊 씨의 산보散步와 신흥우申興雨 씨의 하이칼라’를 말하는 이가 있다. 과연 김성수씨는 검소한 사람이다. 씨는 언제든지 값비싼 의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경성 시가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돈 한 푼 없는 건달들은 도리어 일이백 원의 외투를 몸에 걸고 다니지만은 씨는 항상 일이십 원의 수수한 외투를 입고 매우 검소하게 지내시는 것이다.”
(망운산인望雲山人의 인물평, <신인문학新人文學> 1935년 4월호)

 

 

‘생각은 백운대같이 높은 데 있었다’

 

65년 한일협정 비준 때 2년 반(1965년 9월~1968년 2월) 동안 정권에 의해 고대에서 쫓겨났던 김성식金成植 교수.

 

“진해 피난시절, 4월 하순경 한 번 갔더니, ‘김 선생 산보나 갑시다.’ 했다. 이아주 여사와 함께 나갔다. 공원 높은 탑으로 슬슬 걸어가는데, 갑자기 사모님과 이야기하는 동안 인촌 선생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길바닥 엿 가게에서 엿을 사고 있더라. 엿을 사가지고 오더니 ‘김 선생, 이런 데는 엿을 질금질금 먹으면서 산보하는 게 제 격이야’ 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서민적이구나. 양반 티를 내면서 거들먹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분이구나. 시골 농사꾼처럼 소박한 사람이구나. 이 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은 서민과 잘 어울리면서도 생각은 백운대 같은 높은 데 계시는 것 같다.”고 회고했습니다.

 

천관우千寬宇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옛날 글에 ‘앙지왜구仰止畏懼’라는 말이 있다. 마치 우람한 묏부리처럼 우러러보면 우러러 볼수록 점점 높고 마치 금강석처럼 뚫어보면 뚫어볼수록 굳고 단단하다 이런 말이다.
인촌 선생이야 말로 그 분의 평생 행동에 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살펴보는 가운데, 그러면 그럴수록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 분은 큰 태산이다, 큰 산이다, 그 산은 세 개의 봉우리를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언론기관이고, 둘째는 교육기관이고, 셋째는 경방을 위시한 우리나라의 민족 산업이다.” 조기준趙璣濬 전 고려대 교수의 말입니다.

 

“6천석 추수하는 재산 있는 사람이 조선에서 김성수뿐이 아닐 것이다.
양 회사 창립 당시 29세의 방년이었다. 또 너무나 무명하였다.
김성수는 서울 양반은 아니다. 비록 그의 조상 김하서金河西가 문묘 배식은 받는다 하더라도 그는 전라도 개땅쇠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면 어찌하야 주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신의와 성충誠忠으로다.
대전이 끝나고 세계적 대공황이 조선을 습격하게 된 때 동아일보도 문을 닫히게 되고 경방도 면사포 폭락으로 파산할 지두地頭를 당하였다.
이때를 당하야 김성수는 양부 김기중 옹에게 탄원하야 소유 토지 문권 전부를 식산은행에 저당하고 20만원을 빌려 얻어서 두 회사의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 자子도 자子거니와 부父도 부父다. 이 의사적義士的이요 용사적勇士的인 행위는 김성수에게 절대한 신망과 감사를 재래齋來하였다. 여기 감동된 기개幾個 인사가 절대의 신용을 그에게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명문名聞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모든 활동은 민족애의 충정에서 나온 것이요, 그밖에 아무 이기적 동기가 없음을 아마 누구나 승인할 것이다. 이 명문名聞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초월함이 지사의 제일의第一義적 요건이다. 김성수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다.”
(춘원 이광수)

 

 출처: 동아일보 2020위원회 교열, 자립자강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2011년, 48~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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