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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봉천지국장 나경석(羅景錫)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의 저자 나영균(이대 명예교수)의 아버지 나경석(나혜석의 오빠)도 동아일보 특파원과 지국장을 지냈습니다.

 

(128쪽) 그는 만주에 이주하면서도 동아일보 봉천지국장을 맡아 계속 기사를 썼다.

 

(64쪽~65쪽) 3.1운동이 비밀리에 기획될 때 교장 송진우, 교사 현상윤(玄相允), 교주 김성수는 그들이 사는 학교 구내 사택을 아지트로 사용하며 밤마다 모의를 했다. 당연히 아버지도 그들의 밀의에 가담했다. 아버지가 맡은 일은 2월 28일 인쇄된 독립선언서 1000장을 만주 지린(吉林)으로 가지고 가서 그곳에 있는 손정도(孫貞道) 목사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동지들에게 부탁하여 총기 10정을 구입했다. 총독부 신상조서에서 살인강도 미수 운운한 것은 이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77쪽) 아버지는 1919년 3.1운동 때 옥고를 치른 뒤 요감시인물이 되어 행동의 자유가 몹시 제한되었다. 때마침 전에 중앙학교 교장을 하다가 동아일보 사장이 된 송진우가 그에게 시베리아와 연해주 지방에서 객원기자로 일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80쪽~81쪽) 그는 동아일보 ‘로령견문기(露領見聞記)’에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조선 사람인 내가 아라사(亞羅斯)의 해삼위(海參威), 즉 조선으로 치면 회령(會寧)이나 경성(鏡城)같은 곳에 갔었는데 왕왕 나를 향하여 묻는 사람은 “그 아라사 형편이 어떠한가.” 하니 모른다면 나의 아라사 구경한 자랑을 할 수 없고 안다 하면 염치없는 일이외다. 그러므로 나의 대답은 항상 “우리 해삼위는 알지만도 아라사 일은 잘 알 수 없소.” 합니다.

 

(99쪽) 아버지는 1922년 10월 21일부터 27일까지 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시베리아 동포의 살아갈 길’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이 글은 공산혁명이 이뤄진 러시아령 시베리아의 한국 거류민 처지를 걱정하며 장차 취할 길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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