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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평양지국장 김성업(金性業)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평양지국장 김성업(金性業, 1886~1965)    

 

 

 “김성업은 평양 출신으로 호를 일석(一石)이라 하였다.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에 진학해 2년 수료로 학업을 중퇴하고 다음 해인 1916년부터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마산동자기회사(馬山洞磁器會社)의 지배인으로 1918년까지 재임했다. 그 뒤로는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안창호의 국내 연락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39세 되던 1924년 5월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이 되었다가 1924년 잠시 평양지국이 본사 직영이 되어 지국장에 주요한이 파견되자 지국 고문이 되었다. 1928년 다시 본사 직영이 풀리자 재차 지국장이 되었다가 1937년 9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됐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 주도의 흥사단과 표리(表裏)를 이룬 단체였다. 이 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이 단체를 말살하려는 총독부의 의도로 조작된 사건이었던 만큼, 193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1940년 경성복심법원에서는 김성업 징역 3년 등 유죄판결이 내려졌다가 1941년 고등법원에서 다시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성업은 수년간의 옥고와 종로경찰서에서의 심한 고문으로 척추신경 마비와 언어장애 등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1965년 1월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동아일보 사사 1권, 49쪽)

 

  “평안남도 대동(大同) 사람이다. 1920년부터 시작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 협조하여 평양시민 궐기대회를 소집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22년 7월에는 평양의 동아일보 평양지국에서 조명식(趙明植)·김병연(金炳淵) 등과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단체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조직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 4월 수양동우회 간부회의에 참석한 그는 조병옥(趙炳玉)·이윤재(李允宰)·정인과(鄭仁果) 등과 함께 서울에서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 동년 5월부터 이를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28년 7월에는 평양과 안악(安岳)에 동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수양동우회 약법(約法) 초안을 작성하여 상해의 안창호(安昌浩)와 협의 확정하기도 하였다. 1930년 1월 민족진영과 사회주의 계열이 합의하여 민족운동의 구심체로서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자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평양지회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서기장(書記長)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수양동우회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백영엽(白永燁)·김항복(金恒福) 등 동지들을 다수 가입시켜 동우회 운동의 활성화를 기하였으며, 1934년 7월에는 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 조직에 관여하여, 평양연맹 부이사장(副理事長)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각 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활동하던 그는 1937년 6월 동우회 운동으로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으나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불구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가 미국에서 보낸 편지와 봉투(1938.3.8)

 

 

병석에 누우신 어른 전 상서

 

병이 그리 침중한 가운데 위로를 받으시겠는지 무슨 말로 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허락하신다면 아무쪼록 병이 나으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병이 속히 나으시기를 믿습니다. 저는 아이들 데리고 다 잘 있사오며 아이들도 다 잘 있사오며 필영(안창호 선생의 3남-인용자 주)도 많이 자랐으며 공부도 잘합니다. 그동안에 필립(안창호 선생의 장남-인용자  주)이가 돈 백 원을 미국 영사에게로 보낸 것을 받으신 줄 알았습니다. 또 정월 십육일에 돈 삼백 원을 전보로 보낸 것을 받으셨는지요. 오늘까지 소식을 듣지 못하여서 궁금하외다. 할 수 있는 대로 병이 속히 나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만 그칩니다.
삼월 초팔일
혜련 상서

 

 

  안창호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 봉투의 주소가 김성업이 지국장인 ‘코리아, 평양, 동아일보 지국’으로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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