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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발기인 현준호(玄俊鎬)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현준호(玄俊鎬, 1889~1950), 경성 광화문통 98

 

 

  “수복된 다음 나는 계동 댁으로 인촌 선생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정말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내 손을 잡았다. 적치 하, 피난살이 등 여러 얘기 끝에 나는 광주(光州)에서 들은 얘기를 말씀드렸다. 인촌 선생의 동지 중에 현준호 씨란 분이 있었다. 이 분은 6·25가 나자 광주에서 내무서에 잡혀가 정치보위부에 넘겨졌다. 빨갱이들은 그때 그들의 정치선전을 위해 ‘미 제국주의 8적(賊)’을 조작하고 그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그 8적은 이승만, 신익희, 조병옥, 인촌 등 여덟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준호 씨는 그 8적중에 인촌 선생이 끼어 있다하여 도장 찍기를 거부했다. ‘김성수가 어째서 민족반역자냐? 그야말로 민족 애국자이다. 일제 36년 동안 그는 민족독립을 위해서 인재양성을 했으며 언론기관을 세워 싸웠으며 민족 기업을 일으켜 일제와 맞섰다. 그가 민족반역자라면 초부도 웃는다. 그의 이름이 끼어 있는 한 나는 도장을 찍을 수 없다.’ 그러면서 현준호 씨는 갖은 고문을 다 당했는데도 끝내 도장을 찍지 않고 신의를 지켰으며, 결국 빨갱이의 총에 목숨을 빼앗겼다는 말씀을 전해 주었다.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인촌 선생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양회영 초대 참의원,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7년, 306쪽)

 

  “1954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아내와 함께 계동 댁에 인사를 갔다. 그때 선생님은 병환 중이셨다. ‘니가 영원이냐? 내가 너희 아버지 돌아가고 너를 처음 만나고, 또 너 처의 첫 인사를 받는데 누워서 받을 수야 없지. 부인, 나  좀 일으켜 줘요’ 부축을 받아 겨우 앉으셔서 절을 받으셨다. ‘나 때문에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너 알고 있냐?’ 그러시며 우셨다. 내가 아버님 친구 분들한테 들은 얘긴데 광주에서 아버님과 친구들이 인촌 선생의 생일상을 차리겠다고 했다 한다. 그러자 선생님은 호의는 고맙네만 반찬이 세 가지만 넘어가면 난 안 먹을 테니 그리 알게 하시더란다. 상을 차렸다고 해서 내려 오셨는데 생일상이 너무 호화로운 걸 보자, 이건 약속이 다르다며 친구들이 붙잡아도 그냥 나오셨다고 한다. 그렇게 형식과 사치를 싫어하신 분이다. 선생님과 아버님은 아주 흉허물 없이 가까운 친구였다고 한다. 아버님이 계동 집엘 가면, ‘순민(인촌의 막내딸)아! 네 오래비가 왔다!’ 하시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야 이 사람아 그럼 내가 자네 아들이란 말인가? 농담도 가려서 혀’ 정색을 하고 그러면, ‘야 이 사람아 내가 자네나 만나야 농을 허지. 나처럼 점잖만 빼고 사는 사람이 언제 농을 하는가?’ 하시며 두 분이서 가가대소하곤 했다고 들었다.” (현영원<玄永源, 현준호 선생의 아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아버지>, ‘인촌 김성수 사상과 일화’ 307쪽)

 

  “초창기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국 운영은 단순히 신문의 판매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애국적 유력 인사들이 참여하여 그 지방의 신문 판매와 취재를 아울러 담당하였다. 신문사의 지국은 민족 운동의 지방 조직 같은 인상이 강하였다. 신문사의 지국을 운영하는 사람은 단지 지방의 유력 인사에 그치지 않고 그 지방 민족 운동의 중심적인 인물이었으며, 또 지국과 분국(分局)의 기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지방 민족 운동의 전위분자(前衛分子)였던 것이다. 동아일보의 경우 그 가장 뚜렷한 예가 바로 부산의 안희제, 평양의 이덕환(李德煥), 김성업(金性業), 대구의 서상일(徐相日)이었다. 이덕환은 한말 항일 비밀 단체였던 신민회에 가담하였던 사람으로, 평양 지방 민족 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서상일은 1909년 안희제 등과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하여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3.1운동 후에는 대구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면서 부산에 있는 안희제의 백산상회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1923년 7월부터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을 맡아 동아일보가 폐간되던 1940년까지 17년 간 계속 재임하였다.”(정진석, ‘역사와 언론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년,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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