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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발기인 안희제(安熙濟)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안희제(安熙濟, 1885.8~1943.8), 부산 초량동 659   

 

 

 

“1914년 9월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과 일제 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의 발전을 위해 이유석(李有石)·추한식(秋翰植) 등과 더불어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로 출발한 백산상회는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 원과 총 주수 2만 주, 주주 수 182명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대구·서울·원산·펑톈(奉天)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의 확장에 따라 부산상업회의소 부 회두와 부산상업학교 이사를 역임했으며, 부산 유지들과 더불어 부산진과 영도에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남형우(南亨祐) 등과 국내외 연락을 담당했으며, 의령에서 독립선언서 수만 장을 제작하여 영남 각지에 배포하고 의령지방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이해 11월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회사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전진한(錢鎭漢)·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 등 많은 장학생을 각국에 유학시켰다. 1920년 동아일보사 창립 때 최준(崔浚)·허걸(許傑)·이종화(李鍾和)·윤현태(尹顯泰) 등 백산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4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1년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 회장이자 친일파의 거두인 박춘금(朴春琴)의 도항증명서(渡航證明書) 강매 기도에 맞서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항의·진정 투쟁을 벌여 도항증명제를 폐지하게 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구성하고, 그 교통사무국을 만주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백산회사에 두게 했다. 그러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계속된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부채, 일제의 수색, 장부검열 및 회사간부의 감금·고문 등의 탄압은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 (김형두, ‘독립투사 안희제’, ‘나라사랑 제 19집’, 외솔회, 1975년)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 수백 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 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 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 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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