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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발기인 최준(崔浚 )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최준(崔浚 1884~1970)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면 교리 69  

 

 “최준이 의욕을 잃고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서울에서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인촌 김성수였다. 1918년 봄에 경주를 찾아온 김성수는 박상진, 안희제와 더불어 최준의 인생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박상진이 혁명가이고 안희제가 창업가라면 김성수는 절묘하게 조화한 실천가라 할 수 있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인사를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다녀간 지 1년 후인 1919년 10월에 계획대로 경성방직주식회사(경방)가 창립되었고 최준도 창립발기인이 되었다. 당시 우국지사들의 공통된 생각은 해방을 위해 교육사업과 물산장려사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준이 교육 사업이야말로 필생의 사업이라 믿고 꾸준히 때를 기다리며 다짐을 하게 된 데는 안희제나 김성수와 교유하면서 함께 느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진문 전 대구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황금가지, 2007년)

 

  “최 부자 집에서 전해오는 전통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고 했다. 또한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100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했다. 최부자 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이 집으로 피신하였고 최익현 선생이 여러 날을 머물러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사랑채에서 엿새 동안 머물면서 최준(1884~1970)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를 맞게 되었고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게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최준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 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전 재산은 교육사업에 뜻을 둔 최준의 뜻에 따라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최준 선생(오른쪽)과 동생 최윤(왼쪽), 신동아 2001년 1월호  ‘한국의 명가 4’ 최 부자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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