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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운동기자 이길용(李吉用)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이 길 용(李吉用)  기자 (1899-?)

 

“일제하의 기자들 가운데 운동기자단은 전문기자들의 모임이었다. 운동기자단은 1927년 8월 27일 고영한(매신) 마춘식(중외) 진번(조선) 이길용(동아) 네 기자가 결성한 것이다…… 가장 이름을 날린 기자는 이길용이었다”● 

<정진석 교수/인물 한국언론사 p416-417>

 

 

옥고(獄苦) 치른 최초의 체육기자(體育記者)   

창간기자 유광열 선생(1898∼1981)은 자신의 저서에서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 이길용 기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이길용(李吉用) 씨는 6·25 때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된 기자로서 우수한 기자다. 특히 체육기자로서는 이 나라 체육기사에 개척기를 담당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지난친 말은 아니다. 그의 가계는 필자가 자세히 모르나 1899년 8월15일 경남 마산에서 출생했고 소학교는 인천 영화학교를 마쳤다 하니 선교소학교인 듯하다. 1916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했고 그 해 일본에 건너가 동지사대학에 적을 두었다 하니 예수교인 계통의 집안인 듯하다. 그 학교를 마쳤는지는 자세치 못하나 1919년에 대전에서 철도국 종업원으로 있었다니 중퇴인 듯하다.

그때에 우리나라 청년으로 조금 뛰어난 이로는 거족적인 3·1운동에 참가 아니한 사람이 드물 듯이 그도 상해임시정부에서 오는 비밀문서를 철도국원인 직무를 이용하여 전달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3년이라는 장기징역을 살았으니 상당히 일본 관헌의 미움을 받았던 듯하다.

1922년에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그때 민족지(民族誌)인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얼맛동안 있었다. 이 동안 그의 수완이 인정되어 서울 본사로 와서 주로 체육(그때는 운동기사라 하였다)에 관한 기사를 맡아보는 동시에 다른 기사도 겸하여 쓰고 있었다. 50여년 전에 필자와 만났었으므로 그때의 인상은 희미하나 문재가 있는 것도 아니오, 또 기자로서 기민하지도 않았던 듯하나 직무에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였었다.

그때는 온 세상이 항일운동에 열중하였으므로 체육기사는 비교적 관심이 적은 때에 체육기사를 개척하였다. 그에 앞서 동아일보의 체육기사를 담당한 이는 평북사람 변봉현(邊鳳現) 씨였다. 그는 우리나라 마라톤 기사를 쓰는데 국제기록과 비교를 하면서 체육기사를 감명깊게 쓰던 사람이었다. 이길용 씨는 변봉현 씨의 뒤를 이어 그 기사를 담당한 사람이다. 그는 변 씨와 같이 문장에 능란하지는 못하나 성실히 상황을 보도하기에 힘써서 꾸준히 이 방면 기사를 쓰면서 그때의 우리 체육용어 대부분이 일본 것을 그대로 인용하였으므로 그는 민족적 견지에서 우리의 독특한 체육용어를 제정하기를 주장하여 자기가 앞장서서 체육용어를 만들어 쓰기에 고심하였고, 또 체육기사를 가로 쓰는 것을 주장하여 그것을 신문지면에 실천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1924년에 동아일보의 우수한 기자들이 그때 기자계의 보스격인 이상협 씨와 함께 조선일보사로 옮길 때에 그도 전직하였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재정난으로 여러 달 동안 사원의 봉급지불이 못되자 그는 그때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전직하는 김준연(金俊淵) 씨와 함께 다시 동아일보로 갔다. 동아일보에 있으면서 그동안 연마된 수완으로 체육기사의 특색을 내고 ‘동아’의 간부를 움직여 1929년에 그 신문이 처음으로 운동부를 신설하였다. 이것이 종래 사회부의 한 귀퉁이에 붙어있던 운동부(체육부)를 우리 신문계에서 처음으로 독립시킨 것이다.

1922년부터 1936년, 그가 유명한 백림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孫基禎)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퇴사하기까지 14년 동안을 체육기사에 힘써왔다. 손기정 사건 때에 그는 운동부장이었다. 처음으로 손 선수가 1착으로 세계를 제패하였으나 그의 가슴에 달린 국기는 우리 국기가 아닌 것을 그는 흥분하여 사진에서 일장기를 흰칠로 말살하고 지면에 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 기자 10수 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에도 이길용 씨는 그 일을 직접 지휘 실천한 사람으로 일본경찰에게 제일 미움을 받고 몇 번인가 일본형사에게 심한 고문과 함께 시멘트바닥에 메다꽃혀서 까무러친 일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신문을 하직하게 되고 오랜 옥고를 겪은 끝에 나왔다. 출옥 후에도 여전히 조선체육회의 간부로 있다가 8·15를 맞이한 것이다. 해방 후 동아일보 속간과 함께 그 사의 사업국 차장, 서울시 고문, 한국민주당 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널리 활동하였다.

1950년 6·25 직전까지 ‘대한체육사(大韓體育史)’를 집필하던 중 6·25전란으로 공산군에게 납치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키가 작고 보기에는 약한 듯하나 그런 중에는 대담하고 실천력이 있었으니 이것은 3·1운동 이래 민족운동에 여러 번 옥고를 겪은 연유일 것이다.●

「기자반세기(記者半世紀)」 (서울, 서문당, 1969, 330∼332쪽),  유광열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김진섭 전 동아일보 기자 의 이길용 회고

해방 후 동아일보가 복간될 때 함께 기자로 활약했던 김진섭 선생(1918~)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이길용 체육부장은 지사형 언론인입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승리하자 사진부장 백운선씨와 손선수 위 셔츠의 일장기를 지우고 태극기로 바꾸어 신문에 게재해 옥고를 치를 정도의 기백있는 분이지요. 6·25 이틀전 월탄 박종화씨와 용금옥에서 각자 한말씩 “막걸리를 해치웠으니 작은 몸에 어디 저장했는지…웃울 수도 없고…”

특히 신문 호외가 발행되면 직접 머리에 수건을 둘러 매고 당시 왜말로 ‘다스기’(신문사 이름이 대문자로 적힌 반코트)에 세 개가 달린 방울을 울리며 종로를 누벼 ‘동아 이길용’ 하면 모르이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 했지요” ●

<김진섭 선생이 보낸 e메일 내용-  2016.10.15. 김진경 부장 수신>

 

독립유공자 공훈록 : 이길용 

관리번호 : 6292 / 성명 : 이길용 / 한자 : 李吉用 / 생년월일 : 1899-08-15 /사망년월일 : 미상 / 본적 : 서울 서울 鍾路 明倫 208 / 주소 : 京畿 京城 鍾路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포상년도 : 1990
훈격 : 애국장

공훈록 : 

서울 사람이다.
1919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南滿洲鐵道株式會社 京城管理局)에 근무하며 철도수송업무를 맡아 보는 것을 이용하여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인쇄되어 온 반일(反日) 격문을 수송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근무하던 1936년 8월 25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孫其禎) 선수의 사진을 동아일보에 게재함에 있어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보도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일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1개월여의 조사를 받고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1936년 9월 25일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韓國日報(1988. 4. 14)
記者協會報(1968. 8. 12)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168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679面
東亞日報(1956. 8. 9, 8. 17∼8. 22, 1972. 9. 11, 1976. 1. 24, 1. 26, 1984. 8. 16)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왜정시대인물사료

이 름 이길용(李吉用)
민 족 한국인
나이 23세(1922년 현재)
출신지 京畿道 富川郡 富川面 馬賁里 新村(원적)
현주소 京城府 平洞 75번지
가족관계 부 李致祥
기타 남동생, 종제 李平旭

학력 사립 仁川永化學校 졸업
京城 培材學堂 2년 수업
龍山鐵道講習所 6개월 강습

경력및활동 철도강습소를 나온 후 대전역 驛夫로 종사함
1920년 4월 불온문서를 배부하여 처벌받음( 制令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
1921년 6월 출옥후 동아일보 통신원이 됨
1922년 大田鐵友會 설립과 함께 동회 총무가 됨
1923년 6월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가 됨
仁川濟物浦靑年會長, 以友俱樂部 評議員, 仁川永化學友會 간사가 됨
그 사이 항상 배일적 언동을 자행했던 자인데, 그후 경성으로 移居함.

인물평외모 키 5척 1촌 둥근 얼굴형에 까만 피부. 앞쪽 윗니에 금니가 있음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고취 선전할 우려가 있음
교우관계 梁在根, 金年涉

출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한국근현대인물자료>왜정시대인물사료》

 

 

[신문과 방송 237호/언론 인물탐구]  체육기자 이길용

일장기말소사건의 주역 … 항일 기자정신의 상징
독립운동으로 6차례 투옥,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일제하 항일 기자정신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일장기 말소사건’(1936년)의 주역 이길용 기자에게 지난 8월15일 광복 45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일제 치하에서 온 겨레가 고통 받던 당시 그는 언론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그로부터 5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뒤늦게나마 서훈되어 그의 뜻이 빛을 보게 되었음은 한 개인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의 차원을 뛰어넘어 언론인의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된다.

체육기자의 선구자

이 기자는 세인들에게 알려진 ‘일장기말소사건’ 뿐 아니라 독립운동과 관련해 모두 6차례의 옥고를 치렀는데 국가보훈처는 이번 서훈과정에서 재판기록이 확인된 2건을 인정했다. 특히 이기자는 우리나라에서 스포츠저널리즘을 본격화시킨 장본인으로 체육기자의 선구자로 지칭되며 체육계에 끼친 공로도 지대하다.
우리나라 신문에서 체육기사가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1928년 전후로써 편집국에 운동부를 신설하고 조간 8면, 석간 4면의 지면에서 체육면을 독립시켰다. 체육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은 1932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을 계기로 더욱 고조되는데 당시 YMCA를 중심으로 마라톤, 권투 둥 경기보급과 각종 대회 개최를 통한 체육진홍에 열을 올렸다. 신문에서도 체육을 장려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스포츠 평론, 규칙 및 용어해설, 우수한 선수의 인물스토리와 해외원정기를 싣는 등 체육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신문이 체육기사를 많이 다룬 것은 체육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다는 이유 뿐 아니라 운동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북돋운다는 취지가 강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기자가 중심 이 되어 일으킨 ‘일장기말소사건’의 전말은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충 이러하다.

일장기말소사건 주도

1936년 8월 10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당시 양정고보생이던 손기정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자 감격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고 신문들은 이 소식과 관련된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8월25일자 등아일보 석간(8월24일 발행)에 손선수가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선 사진이 실렸는데 가슴에 단 일장기가 지워져 있었다. 문제의 사진은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스포츠’에 실린 사진을 전재한 것이었는데 1판에는 나와있던 알장기가 2판 일부에서는 지워져나온 것이다. (인촌기념회관,인촌김성수전,1976.)
‘인촌 김성수전’에서는 사건의 경위를 이렇게 적고 있다. “편집국의 운동담당기자 이길용이 미술담당기자 이상범을 구내전화로 불러, ‘손기정의 가슴의 히노마루(日丸 ; 일본국기) 그거 지워버릴 수 없나?’ 했다. 이상범은 ‘알았어. 내가 어떻게 지워보지. ’하고 즉석에서 응답했다. 긴 말도 필요없는 이심전심 이었다. 잠시 후 여 사환이 가져온 사진의 히노마루를 이상범은 화이트로 지워버리고, 사진제판기술원 백운선에게 넘겨 동판이 되어 나왔다.”
보성전문학교 이사실에서 이 사실을 연락받은 인촌은 “히노마루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또한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도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며 이기자를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경영진 모르게 이기자를 중심으로 한 기자들의 독자적 의지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크게 확대되어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로 무기 정간처분(제4차)을 받고 관계자들은 차례로 연행됐다. (정간일자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는데 인촌 김성수전에는 8월 27일자로 기록되어 있고 한국일보 1988년 4월14일자 ‘재발견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신용하 서울대 교수는 8월26일자라고 밝히고 있다. 8월29일은 1975년 동아일보사가 발행한 ‘동아일보사사 권1’의 기록이다.)
동아일보사사에 따르면 결국 발안자 이길용, 직접 가필한 이상범, 사진부 제판기술자 백운선 • 서영호,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을 게재한 편집부기자 장용서, 사회부장 현진건, 잡지부장 최승만 이상 8명이 구속됐다.
또한 주필 김준연 • 편집국장 설의식이 즉시 사임했고(8월 28일), 11월에는 사장 송진우가, 12월에는 조사부장 이여성 • 지방부장 박찬희가 사임했다. 구속된 8명은 연행된지 40일만에 모두 풀려났으나 이길용,현진건, 최승만, 신낙균, 서영호 이상5명은 “언론기관에 일체 참여하지 않는다. 시말서를 쓴다. 만일에 또다른 운동에 참여하면 가중처벌을 각오한다. ”는 서약을 하고서야 겨우 석방됨으로써 모두 9월25일자로 동아일보에서 해직, 언론계를 떠나게 된다. (구속자 및 서약자 명단 후 신용하교수의 글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간처분은 ‘신동아’와 ‘신가정’으로까지 확대됐다. 신동아는 9월호에 문제의 사진 둥판을 그대로 사용, 실었고 신가정은 손선수의 두 다리 만을 클로즈업시켜 화보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발행이 중단됐다. 그 후 동아일보는 9개월이 라는 긴 정간 끝에 1937년 6월3일자부터 속간됐으나 두 잡지는 일제하에서는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한편 일장기말소는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더불어 3대 민간지와 하나이던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曰報)에서 먼저했다. (최민지,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1987, 일월서각. 동아일보사사는 “이 무렵”이 라고만 표현되어 있고 인촌 김성수전은 “동아의 지면을 보고” 일장기를 지웠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는 당시 조선중앙일보 주필이던 이관구 편집인협회 명예회장(92)의 중언,그리고 신용하 교수의 글과 일치하는 최민지씨의 기록을 따랐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운동부기자 유해붕이 역시 경영진과 상의 없이 단독으로 손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8월13일자에 실었다. 이상하게도 총독부의 아무런 제재가 없었는데 검열관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건이 확대되자 9월5일자로 자진휴간하고 유해붕 기자도 구속됐다. 결국 사장 여운형도 사임하고 이듬해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정간처분이 해제됐으나 정간동안의 재정난으로 1937년 11월5일자로 발행권 취소로 폐간하고 만다.

항일 언론독립투쟁의 상징

신용하 교수는 한국일보 1988년 4월14일자에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의 일장기 말소는 한국민족의 자랑인 세계올림픽 마라톤경기의 우승의 영광을 한국 민족의 것으로 확인하기 위한 용감한 언론독립투쟁이었다. ”고 찬사를 보냈다. 이같이 일제하 우리나라 언론투쟁기의 상징인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기자에 대한 이번 서훈과 관련,이기자의 차남 이태영씨 (49 • 중앙경제신문 국장대우 체육부장)는 “부친 혼자 하신 일은 아니지만 언론투쟁기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되며 상징적 인물로 부각시켜 준 데 대해 가족으로서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샐러리맨화 돼가고 있는 요즘의 후배기자들에게 사명감으로 일한 선각자들의 기자정신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고 말했다.
이태영씨는 1961년 이관구 편협 명예회장(당시 경향신문 주필)의 권고로 경향신문에 입사,부친의 뒤를 이어 30년간 체육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이 태 영씨 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 픽 때 양정모선수가 손기 정 선수에 이어 우리나라 선수로는 두번째로 올림픽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는 순간을 취재기자로서 손기정씨와 함께 지켜보았다. 손기정씨는 “내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할 당시 부친께서 나를 도와주셨는데 40년만에 양정모 선수가 내 뒤를 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감격스런 모습을 그의 아들인 이기자와 함께 지켜보니 감개무량하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기자의 부인 정희선 여사(81)는 “그이는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싸운 기자정신의 화신이었다. 눈감기 전에 그이의 뜻을 확인,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번 서훈을 기뻐했다.
이관구 편협명예회장은 “한평생 우리나라 언론과 체육에 공헌한 그의 업적으로 볼때 당연한 서훈이며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 ”고 평했다.

이길용기자는 1899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인천영화학교를 거쳐 1916년 배제학당을 졸업한 뒤 곧바로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수학했다. 일본 유학 2년만인 1918년 집안 사정으로 귀국, 대전철도국 소속 철도공무원으로 일하게 되는데 이때 이번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인정받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 직전 상해임시정부에서 인쇄한 비밀문서를 수송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됐다. 또 1920년 12월에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처벌령위반으로 징역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기자는 형무소에서 알게 된 송진우씨 등 민족지도자들의 권고로 출옥후 1922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투신했다.
동아일보 사회부에서 체육기사를 담당하던 이 기자는 1924년 조선일보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곧 등아일보로 복귀했다. 이기자는 신문에서 운동부를 신설하는 등 체육중흥 바람이 일던 1920년대 말부터 체육기사의 패턴을 정형화시키며 체육기자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방대한 양의 체육관련 자료 모아

특히 이기자는 기자 생활 동안 기사스크랩을 비롯 방대한 양의 체육관련 자료들을 모았는데 우리나라 근대 체육사는 거의 그 자료를 토대로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8년 연합신문이 펴 낸 ‘체육대감’(體育大鑑)이 바로 이기자가 모은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기자는 기자로서 뿐 아니라 체육단체에 직접 참여하는 둥 체육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용어제정은 물론 전조선여자정구대희,조선스키연맹을 창설하는 등 체육사업에 앞장섰다. 해방 이전 그가 이사로 참여한 체육단체는 조선체육희를 비롯 야구 정구 육상 빙상 권투 등 10여개에 이른다. 특히 고려육상구락부와 백구활빙구락부를 통해 젊은이들을 운동으로 단련시키며 만주, 일본과의 대항전에 내보내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데 힘썼다.
이기자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936년 9월 14년 동안의 기자생활을 마감했으나 이후에도 집회에서 반일가요를 부른 사건 (1939년) , 조기 희 라는 단체를 조직 한 이유로 구속되고 해방직전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고 반일 발언을 함으로써 투옥되는 등 계속 옥고를 치렀다.
사회활동이 제약됐던 해방전까지 이기자의 생활이 어려웠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이태영씨에 따르면 체육인 언론인 문인 등 집안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기자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드문데 1939년 동아일보에 입사 1940년 폐간때까지 기자생 활을 한 이상돈씨 (78 • 전 제헌의회 국회의원)는 “더러 술자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는데 체구도 조그만 분이 상당히 활등적이었으며 우스갯 소리도 잘했다. 민족의식이 강해 ‘일본은 망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고 당시의 이기자를 기억했다.
이기자와 성북동 한동네에 살았던 이관구 편협 명예회장은 “해질 무렵이면 으레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석양배’(夕陽杯)롤 기울이던”당시를 회상하며 “잔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코를 무척이나 곯았던게 인상에 남는다. ”고 전하고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회장이 이기자의 부인 정여사에게 “저토록 심하게 코를 고는 사람과 어떻게 같이 사느냐.”고 짖궂게 물었다. 그러자 정여사는 “처음에는 도저히 잠을 못 이룰 만큼 괴로웠지만 살다보니 익숙해져서 이제는 자장가처럼 들려 오히려 코고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다.”고 대답,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이기자는 계속되는 옥고와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져 해방직전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며 해방되자 곧바로 등아일보사에 사업국 차장으로 복직했다. 그러나 1948년 정부수립에 즈음하여 언론계를 떠나 김성수,김준연, 조병옥씨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 하는 등 정치계에 몸담게 되는데 6.25이전까지 그의 정당활등을 보면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주국민당 중앙상임위원 둥을 지냈다. 체육관계로는 조선체육동지회 평의원,대한체육회 상임이사,야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체육사 집필 중 6 . 25때 납북

이길용 기자는 기자시절부터 모아온 체육관련 자료를 정리,한국체육사를 집필하던 중 6.25룰 맞아 납북됐다. 6.25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7일 북한 내무서원에게 연행됐다 곧 풀려났는데 피신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계속 성북동 자택에 머물고 있던 중 결국 7월10일 다시 연행된 후 납북되어 현재까지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생존해 있다면 91세가 되는데 나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타협 할줄 모르는 그의 성격으로 보아 북한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일찍이 작고했을 것으로 가족들은 추정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희선 여사와 이태영씨 등 4남1녀가 있다.

한편 이길용기자의 기자정신을 기려 한국체육기자연맹(회장 박갑철)은 지난해부터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 매년 한명씩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또한 이태영 씨와 체육기자연맹은 이 기자에 관한 자료를 모아 그의 발자취를 곧 책으로 엮어낼 예정이다. (근) ●

《신문과 방송 237호_1990. 09》

 

 

波荷 李吉用

▲1899년 8월 15일 경남 馬山에서 출생
▲1950년 6ㆍ25때 拉北
▲1915년 培材學堂 졸업
▲日本同志社대학 수학
▲19년 大田철도국 근무때 上海臨政 기밀문서를 전달하다가 피검, 3년간 옥고
▲22년 동아일보 大田지국 기자
▲27년 7월 동아일보 본사 사회부에 근무하면서 체육기사를 써서 체육기자의 선구자가 됨
▲27년 8월 27일 운동기자단 결성
▲36년 日章旗말소사건으로 東亞日報 퇴사
▲45년 12월 東亞日報 사업부장 복직.

□ 半世紀만에 한을 푼 `일장기말소 사건`을 主導

지난 1936년 8월 9일 손기정(孫基禎)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이래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의 황영조(黃永祚)선수가 우승함으로써 마라톤 금메달의한을 풀어주었지만 이는 동시에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서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달렸던 일장기를 말소해 일제하에 고초를 당했던 이길용(李吉用)기자의 피맺힌 한도 속시원하게 풀어준 것이 아닐까.
그의 생사는 아직도 확인된 바 없지만 만약에 고인이 되었다면 북녘땅 어는 유택에 영면하고 있을 그의 영전에 이 회보를 고하고 싶다.
이길용 기자는 1899년 8월 15일 경남 마산(馬山)에서 출생, 인천(仁川)으로 이주해 인천영화학교를 마친 다음 배재학당 본과에 입학, 1915년에 제8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 진학했다. 대학재학중에 모친이 위독해 학업을 부득이 중단하고 귀국해 대전철도국에 근무하게 됐다.
그당시 우리나라 청년으로 좀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족적인 3ㆍ1독립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듯이 그도 상해(上海)임시정부에 인쇄돼서 오는 반일전단의 수송책을 맡아 임무 수행중에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것이 그의 제1차 투옥인데 3년동안의 복역을 끝내고 22년에 출옥한 그는 형무소 생활중에 알게 된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등 민족지도자들의 권고로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처음엔 동아일보 대전국 기자로 일했는데 거기서 그의 능력이 인정되어 본사로 발탁되어 사회부에서 주로 체육기사를 다뤘고 동시에 다른 기사도 겸해서 쓰고 있었다라고, 유광렬(故 柳光烈)의 회상에 의하면 “그때 그에 대한 인상은 좀 희미하긴 하나 별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요, 또 기자로서 특별히 기민한 것 같지도 않았지만 직무에 매우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 당시는 온 세상이 항일운동에 열중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자연 체육기사는 비교적 관심이 적었던 시절에 그는 체육기사를 발굴 개척하였다. 그에 앞서 동아일보의 체육기사를 담당했던 사람은 변봉현(邊鳳現)기자였는데 그는 우리나라 마라톤 기사를 쓰는데 국제기록과 세밀히 비교를 하면서 체육기사를 쓰는 당시로서는 한발 앞선 체육기자였다고 한다.
이길용기자는 그 변뵹현기자의 뒤를 이어 체육기사를 담당한 사람이다. 그는 변기자와 같이 문장에 능란하지는 못했으나 성실히 상황을 보도하는데 노력했고 그때의 우리 체육용어 대부분이 일본 것을 그대로 인용하던 것을 우리의 독특한 체육용어를 제정하기를 주장, 그 스스로가 앞장서서 체육용어을 만들어 쓰기에 주력했다. 또 체육기사를 가로 쓰는 것을 주장하여 그것을 신문지면에 실천한 최초의 기자이기도 했다.

□ 체육기사 `가로쓰기` 창안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우리나라에서 스포츠 저널리즘을 본격화시킨 개척자로 체육기자의 선구자로 지칭되며 체육계에 끼친 공도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신문에서 체육기사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28년 전후로 편집국에 운동부를 신설하고 조간 8면, 석간 4면의 지면에서 체육면을 독립시키게 되었다.
체육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은 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계기로 더욱 고조되는데 당시 YMCA를 중심으로 마라톤, 권투 등 경기보급과 각종 대회개최를 통한 체육진흥에 열을 올리게 됐다.
그래서 신문에서도 체육을 장려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스포츠평론, 규칙 및 용어해설, 우수한 선수의 인물평과 해외원정기를 싣는 등 체육발전을 촉진하는데 신문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신문이 체육기사를 많이 다룬 것은 체육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다는 이유 뿐 아니라 스포츠를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의도가 강했다고 생각된다.
이길용 기자는 운동기사를 다루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체육단체에 직접 참여해서 용어제정은 물론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창설하는 등 스포츠사업활동에도 앞장섰다. 그래서 해방이전에 그가 이사로 참여해 활동한 체육단체는 조선체육회를 비롯 야구, 정구, 육상, 빙상, 권투 등 10여개 체육단체에 이른다.
특히 고려육상구락부와 백구활빙구락부를 통해 젊은 청년들을 운동으로 단련시키며 만주 또는 일본과의 대항전에 내보내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데 힘썼다.
한편 24년에 동아일보의 우수한 기자들이 그 당시 기자들의 보스격인 이상협(李相協)을 따라 조선일보로 옮길 때 그도 따라갔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재정난으로 여러달 동안 사원의 봉급지원을 못하게 되자 그는 조선에서 동아로 전직하는 김준연(金俊淵)과 함께 동아로 돌아갔다.
동아로 돌아가 그 동안의 경험을 살리고 체육기사의 특색을 강조해 29년에 동아에서 처음으로 운동부를 신설하게 되었고 36년 일장기말소사건이 났을 때 그는 운동부장이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전말은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충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은 실상 일제36년 식민통치 항거 언론투쟁사의 최대사건으로 기록될 만큼 큰 파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36년 8월 10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손기정선수가 우승을 차지하자 감격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고 신문들은 이 소식과 관련된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8월 25일자 동아일보 석간(8월 24일 발행)에 손선수가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선 사진이 실렸는데 가슴에 단 일장기가 지워져 있었다. 이 문제의 사진은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스포츠`에 실린 사진을 전재한 것이었는데 1판에는 나와있던 일장기가 2판 일부에서는 지워져 나온 것이다.
사건의 경위는 편집국의 이길용 운동담당기자가 미술담당기자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을 구내전화로 불러 손선수의 일장기를 지워버릴 수 없겠느냐고 하자 이상범은 즉석에서 응답했다고 한다. 잠시 후 여사환이 가져온 사진의 일장기를 이상범은 화이트로 지워버리고 사진제판기술원 백운선(白雲善)에게 주어 동판이 되어 나오게 됐다. 이 사건으로 사진부의 백운선, 서영호(徐永浩) 그리고 사회부편집기자 장용서(張龍瑞), 임병철(林炳哲), 사진과장 식낙균(申樂均) 그리고 조사부 전속화가 이상범 발이자인 체육부의 이길용 또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이 차례로 연행되고 그 후 이 동판을 신동아가 실었다해서 잡지부장 최승만(崔承萬), 사진부장 송덕수(宋德洙)가 추가되어 당시 경찰서 유치장의 여섯방이 모두 동아일보기자들로 만원을 이룬 상태였다. 끝까지 구속이 풀리지 않은 사람은 사진 수정의 발안자 이길용, 수정에 직접 가필한 이상범, 사진부 제판기술자 백운선,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을 게재한 장용서, 사회부장 현진건 그리고 신동아의 잡지부장 최승만 등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발생으로 김준연 주필, 설의식(薛義植)편집국장이 즉시 사임했고 12월에는 이여성(李如星)조사부장, 박찬희(朴瓚熙)지방부장이 또한 사임하게 되었다.
구속된 8명은 40일간에 걸친 가혹한 문초를 당한 끝에 총독부가 작성한 소위 서약서를 제출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직접 책임자로 인정된 이길용, 현진건, 최승만, 신낙균, 서영호 등 5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약서를 서명하고 겨우 석방되었다.

1. 언론기관에 일체 참여안할 것.
1. 시말서(始末書)를 쓸 것.
1.만일에 또 다른 운동이 있을 때에는 이번 사건의 책임에 가중하여 엄벌을 받을 것을 각오할 것>
이래서 이길용을 비롯한 5명의 유능한 기자가 신문계를 물러났고 그밖의 많은 사원들이 사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길용 기자는 이 사건에 앞서 32년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때도 김은배(金恩培)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기술적으로 말소한 일이 있었는데 총독부는 그때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가 손선수의 우승으로 민족의식이 강렬하게 분출하게 되자 어떠한 사태발전을 우려한 듯 강경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그후 큰 문제로 비화돼 동아일보는 37년 6월 3일까지 4번째 무기정간 처분을 받게 됐다.

□ 일제하 여섯 번 옥고, `이길용체육상` 남겨…

이길용 기자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36년 9월, 14년동안의 기자생활을 마감했으나 그 이후에도 집회에서 반일가요를 부른 사건(39년)으로 피검되었고 42년엔 조기회(早起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자 일경은 `조선을 일으키려는 음모`라고 판단 네 번째 투옥을 당했다. 그 다음해인 43년엔 `창씨개명`강요에 불응해 다섯 번째의 투옥을 당했고 45년 해방직전에 반일발언을 한 혐의로 여섯 번째의 옥고를 치렀다. 이 기자는 계속되는 옥고와 혹독한 고문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해방직전 병보석으로 출감되었는데 해방이 되자 곧바로 동아일보에 사업국 차장으로 복직했다. 그러나 48년 정부수립에 즈음하여 언론계를 떠나 김성수(金性洙), 김준연, 조병옥(趙炳玉), 백관수(白寬洙)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정계에 몸담게 되어 6ㆍ25이전까지 그의 정당활동을 보면 비상국민회의대의원, 민주국민당중앙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그밖에 이화여대재단 이사, 배재중학동창회부장, 서울시고문, 조선체육회상무이사, 야구협회 부회장 등의 일도 맡았었다.
이 기자는 특히 기자생활동안 기사스크랩을 비롯 방대한 양의 체육관련 자료들을 모았는데 우리나라 근대 체육사는 거의 그의 자료를 토대로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8년 연합신문이 펴낸 체육대감(體育大鑑)은 바로 그가 모은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모아온 체육관련 자료를 정리, 한국체육사를 집필하던 중 6ㆍ25를 맞아 납북됐다. 6ㆍ25발발 직후인 50년 6월 27일 북한 내무서원에게 연행됐다가 곧 풀려났는데 아무래도 피신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계속 성북동 자택에 머물고 있던 중 결국 7월 10일 다시 연행된 후 납북되어 현재까지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생존해있다면 92세가 되는데 나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워낙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기개로 보나 또 납북될 때의 정황등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작고했을 것으로 가족들은 추정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희선여사와 현재 중앙일보 문화센터 국장으로 있는 이태영(李台永) 등 4남1녀가 있다. 이태영은 고 이관구(李寬求) 전 경향신문 주필의 권고로 경향신문에 입사 부친의 뒤를 이어 30년간 체육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76년 몬트리올 올림픽때 양정모선수가 손기정선수에 이어 우리나라 선수로는 두 번째로 올림픽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는 순간을 취재기자로서 손기정과 함께 지켜보았는데 손기정은 “내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할 당시 부친께서 나를 도와주셨는데 40년만에 양정모선수가 내 뒤를 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감격스런 모습을 그의 아들인 이 기자와 함께 지켜보니 정말 감개무량하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일장기 말소사건 등으로 당시 일제하에서 고통을 당하던 우리민족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던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는 그의 장거가 있은지 54년만인 90년 광복절을 맞아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서훈(建國勳章愛國章)을 받게 되었다.
국가보훈처는 88년까지 납북인사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 지정을 해오지 않다가 89년 3ㆍ1절을 기해 조만식 등 작고한 재북애국인사나 또는 납북애국지사에 대해 제한적으로 선정해 국가유공자 지정을 시작해 광복 45주년을 맞은 90년엔 종래 독립유공자와 관련한 연좌제를 폐지하고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납북애국인사들에게까지도 민족화합의 차원에서 폭넓게 독립유공자로 지정 서훈을 하게 되었다.
일장기말소사건이 있은지 54년의 세월이 흐른 후 뒤늦게나마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서훈이 이루어져 그의 뜻이 빛을 보게 되었음은 한 개인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의 차원을 뛰어넘어 언론인의 시대적사명이 무엇인가를 새삼 되새겨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언론을 통해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서의 직분을 개발 수행하고 아울러 민족혼을 고취시키는데 헌신했던 이길용 기자의 훌륭한 정신을 기려 `한국체육기자연맹`은 지난 89년에 `이길용기념체육기자상`을 제정하고 매년 한명씩 선정해 시상해오고 있다.  ●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p.151~158,  필자 鄭然權 동아일보 이사

 

6·25 납북자 명단에서 찾아낸 200여 언론인 공개 / 이길용

李吉用(이길용·52)은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때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말소했다가 일경에 구속되었다가 신문사를 떠났던 체육 전문기자였다. 1916년 배재학당 졸업 후 일본 同志社(동지사) 대학에서 수학했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기밀문서를 전달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3년 징역 후 1922년 출옥하였다. 동아일보 대전지국을 거쳐 본사 기자가 되어 사회부에 근무하면서 체육 취재기자의 선구자가 되었다.

총독부의 강요로 동아일보를 떠났다가 1945년 12월 동아일보에 복직하여 사업부장을 지냈다. 서울시 고문, 한국민주당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는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날 무렵에는 신문사를 떠나 「대한체육사」를 집필하던 중이었다. 7월15일 성북구 성북동 56(3통7반) 자택에서 납북되었다. 한국체육기자연맹은 1989년에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하여 매년 그 해 최고의 활동을 해 온 체육기자에게 시상해 오고 있다●

《월간조선 2002년 6월호》

 

 “대쪽 기자정신 70년 지나도 생생”

“선친의 손때 묻은 유일한 유품인 만큼 제가 보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손기정 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제패 70주년을 맞아 이 자료를 좀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연구할 수 있도록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에 기증하고 싶습니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당시 ‘일장기 말소의거’의 주역이었던 이길용(1899∼?) 전 동아일보 기자의 아들인 이태영(65) 스포츠포럼21 대표가 22일 부친이 남긴 유품을 동아일보사에 기증했다.

이번에 기증된 유품은 1932년과 1936년 동아일보에 실린 스포츠 관련 기사를 이 기자가 모아놓은 두 권의 스크랩북. 70년이 넘어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듯한 스크랩북에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특집으로 실렸던 스포츠 기사가 꼼꼼히 스크랩돼 있고, 이 기자가 직접 쓴 날짜와 메모도 담겨 있다.

이 씨는 “아버님은 10여 권의 스크랩북과 세 상자 분량의 사진 자료를 남기셨는데, 1956년 대한체육회 등이 ‘체육대관’을 발행할 때 자료로 사용한 뒤 많이 유실됐다”며 “되찾은 자료 중 가장 중요한 스크랩북 2권을 기증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아버님은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3·1만세운동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가 옥중에서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만나 언론계에 투신하셨다”며 “아버님은 수해지역에 현장 취재를 가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며 쓴 ‘서울부감기’를 연재하는 등 정열적이고 적극적인 기자 활동을 하셨다”고 소개했다.

이 씨는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의거’ 전후의 베를린 올림픽 기사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회고록에서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지면에서 일장기 말소는 항다반사(恒茶飯事)로 부지기수였다’고 밝히셨듯이 투철한 독립의식을 갖고 계셨다”며 “또한 스크랩북의 스포츠 기사를 보면 질과 양에 있어서 요즘 스포츠저널리스트의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일장기 말소의거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직된 뒤, 1945년 복직됐으나 6·25전쟁 중 납북됐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일보 2006년 8월23일 A11면) 

 

32년 LA올림픽 마라톤 보도도 일장기 지워

■본보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이길용 기자의 스크랩북

“동아일보선 항다반사”수기대로 ‘민족정신 고취’ 항상 준비

‘世界制覇(세계제패)의 凱歌(개가), 人類最高(인류최고)의 勝利(승리), 永遠不滅(영원불멸)의 聖火(성화).’

1936년 8월 9일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2시간 29분 19초의 당시 올림픽 최고기록으로 우승한 다음 날 동아일보 석간 1면 기사 제목들이다.

1936년 8월 25일자 본보 석간 2면에 실린 손기정 선수 시상식 사진의 일장기를 지운 이길용 기자는 당시 체육면 기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스크랩했다. 이 기자의 3남 이태영(66) 21세기스포츠포럼 대표가 지난해 8월 동아일보사에 기증한 스크랩북 2권은 당시 이 기자의 ‘투철한 체육기자 정신’을 보여 준다.

총 15권 중 대부분 분실 및 유실되고 남은 이 2권은 이 기자가 1932년과 1936년 기사를 모은 스크랩북 각 1권이다. 스크랩북은 가로 46cm, 세로 25cm 크기로 당시 많이 쓰던 일반 양지를 사용해 고서적을 제책하듯 만들었고 내용은 본보를 주로 했으나 다른 신문사 기사도 종종 포함됐다. 이 스크랩북은 오래된 데다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만지면 부스러져 그동안 보관 방법을 놓고 연구를 해 왔고 내용은 최근 공개됐다.

이 스크랩북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그리고 올림픽 준비과정 및 후속기사가 모두 담겨 있다.

2005년 발견된 이 기자의 수기에서 “일장기 말소는 당시 동아일보에서 항다반사(차 마시고 밥 먹듯 이뤄진 일)”라고 했듯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에서 6위를 한 김은배 관련 후속 박스기사의 사진에서도 일장기는 지워져 있었다.

특히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는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올림픽 예선 및 각종 대회에서 활약한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이 기자가 이렇게 마라톤 관련 기사를 철저하게 모아둔 것은 손기정이나 남승룡 선수가 우승할 경우 민족 정기를 깨우기 위해 또 다른 ‘빅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당시 본보 체육 주임인 이 기자가 청전 이상범 화백, 사진반원, 편집부원 등 여러 직원과 함께 일장기를 지운 것은 이러한 철저한 준비의 결과였던 것이다.

스크랩북에는 일장기를 지우기 전인 8월 22일 기사까지 정리돼 있었고 그 이후엔 없었다. 이 기자가 일장기 말소로 다음 날 종로경찰서에 붙들려가 기사를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기자는 1921년 본보에 입사해 사회부 체육담당으로 일하다 잠시 다른 회사로 옮겼으며 1927년 본보로 복귀해 줄곧 체육부 기자로 일했다. 스크랩북이 당초 15권이었다는 것은 체육부 기자를 하면서 거의 모든 체육 기사를 정리해 뒀다는 얘기가 된다. 1899년생인 이 기자는 6·25전쟁 중 납북돼 아직까지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동아일보 2007년 4월 2일 A17면)

 

[손기정 일장기 말소 80주년] 이길용 3男 “손기정 선생과 함께 지내고 계실 것”

“아버지(이길용 전 동아일보 기자)가 ‘대표 선발전에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일본 대표선수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 대책을 세우라’고 했다고 손기정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셨어요.”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의 3남인 이태영 씨(75·대한언론인회 감사·사진)는 19일 인터뷰에서 손 선생이 아버지를 회고하며 했던 말을 전했다. 이 씨는 아버지와 손 선생의 인연 덕에 손 선생과 가까이 지냈다. 손 선생은 이 씨에게 “이길용 기자는 선수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말을 자주 하셨고, 기자 이전에 애국지사로 존경했다”고 했다.

 이길용 기자는 남만주철도회사 경성관리국에서 근무하던 1920년 반일 격문을 배포하다 발각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뒤에 동아일보 사장이 되는 고하 송진우 선생을 옥중에서 만난 인연으로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일장기 말소로 강제해직됐다가 1945년 동아일보 복간 뒤 재입사했다.

 이 씨는 6·25전쟁 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현 일민미술관)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족과 가던 기억이 선하다고 했다. “제가 삐거덕거리던 동아일보 건물 계단을 올라가면 아버지가 밝게 웃으며 점심 값을 주시곤 하셨죠.”

 그러나 아버지는 1950년 7월 납북됐다. 이 씨는 납북자가족회에서 일하며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보려 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망 경위를 모른다. 당시 함께 납북됐다 도망쳐 나온 황신덕 여사(전 추계학원 이사장)로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북측으로 떠날 때는 같이 있었는데 평양에 도착해 보니 안 보이더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북한군이 평양에서 후퇴할 때 대동강변에서 자행된 집단 처형 와중에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 씨는 1995년 돌아가신 어머니를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통일동산 경모공원에 모셨다. 임진강에서 헤어진 두 분의 영혼이 혹시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자신은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인사들이 전쟁 당시 납북될 때 지나갔던 서울 구파발의 ‘납북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산다.

 이 씨의 소원은 유해가 없어 묘를 쓰지 못한,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옥고를 치렀고 또 납북 전 잠시 감금됐던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 독립공원)에 비석을 세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배재학당을 졸업했으니 서소문의 배재공원도 좋고요. 지금 손 선생과 아버지의 영혼은 함께 계시지 않을까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  2016년 8월 24일 A10면)

 

[손기정 일장기 말소 80주년] 일장기 나온 부분 잘라내고… 다른 사진으로 슬쩍 가려

“세상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가 ‘신문기자 수첩’(1948년 발간)에 실은 글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의분의 충격-소위 일장기 말살 사건’의 일부다. 그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숱하게 있었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방이건 서울이건 신문지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나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나, 얼른 말하자면 지방면으로는 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지우고 실리기는 부지기수다”라고 설명했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80주년을 맞아 취재팀이 살펴본 당시 신문지면의 사진들은 이 기자의 회고와 다르지 않았다. 1936년 6월 25일자부터 일장기 말소 사건 전인 8월 24일자까지 두 달간의 동아일보 지면을 살펴봤다. 그 결과 일장기를 인위적으로 지웠거나 가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여러 장 발견됐다.

 우선 일장기가 나온 부분을 다른 사진으로 가리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36년 7월 29일자 조간 5면에는 강원 통천군 고저읍의 항구 준공식 사진이 실렸다. 이 항구가 총독부의 주요 공사였던 점과 준공식장 중앙의 장식 모양을 고려하면 당연히 일장기가 위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당 부분을 묘향산 동룡굴 탐방단 사진이 덮고 있다. 이 밖에 7월 14일자 사리원시민대회 사진 등도 일장기가 있을 만한 상단이 같은 방식으로 잘려 있다.

 8월 16일자를 보면 일장기가 다른 사진으로 가려진 게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일자 5면에는 선천보성여학교 음악단 안동현 공연 사진이 실렸는데 이 역시 일장기가 있을 만한 단상 상단 중앙을 위쪽 사진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덮고 있다. 위쪽 사진은 진남포 소년육상경기대회 입장식 사진인데 아래쪽의 빈 운동장 바닥을 이례적으로 살려 놓았다.

 무언가로 일장기를 지운 듯한 사진도 발견됐다. 7월 29일자 항구 준공식 사진 아래의 유치원 개원식 사진에는 건물 정면에 일장기가 ‘X’자 모양으로 가로질러 걸려 있다. 적어도 오른쪽 깃발은 일장기의 동그라미 모양이 보일 법한데 윤곽이 뭉개져 보이지 않는다. 또 6월 30일자에 실린 행사 사진은 단상 상단 일장기가 걸려 있을 부분이 마치 잉크를 떨어뜨린 듯 검게 물들어 있다. 고의로 해당 부분을 보이지 않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분석 대상인 두 달 치 동아일보에서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은 약 6장이었다. 하지만 원거리에서 촬영된 해수욕장, 행사장의 일장기로 작심하고 찾아봐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점에 가깝게 나온 것도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시상대에 오른 일본인 선수의 8월 23일자 사진은 비교적 잘 보였고, 한눈에 보이는 일장기는 8월 20일자 하단 광고에 그려진 것뿐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간 8면, 석간 4면(때로 8면)을 발행했고, 각 면별로 여러 장의 사진이 실렸다. 운동경기대회, 음악회, 재봉 자수 강습회, 학교 창립 기념식, 강좌, 시민대회 등을 비롯해 각종 행사 사진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는 상당수 행사 자리에 일장기가 걸려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처럼 일장기 사진이 적게 나타난 것은 사진 촬영 시부터 아예 일장기를 프레임 안에 넣지 않았거나, 트리밍해 보이지 않도록 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원 사진의 화질, 인쇄 시 동판의 상태를 비롯해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어 일장기가 보이지 않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며 “그러나 이길용 기자의 회고와 현진건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비롯한 당시 편집국 인사들의 면면과 분위기로 보아 가능하면 일장기를 지면에서 보이지 않게 했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 2016년 8월 24일 A10면)

 

‘한국인’ 일깨운 두 영웅 81년만의 해후

1936년 손기정 선생 마라톤 제패하고…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 일장기 지우고…

이길용 흉상, 손기정기념관에 건립…
이길용 기자 “혼자한게 아니라 동아일보의 社是-전통 따른 것”…
체육언론인회, 뜻 기려 25일 제막식

 81년 전 오늘 올림픽을 제패했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생(1912∼2002)과 그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웠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 이길용 기자(1899∼?·사진)가 다시 만난다.

 손기정기념관에 이길용 기자의 흉상이 세워지는 것이다. 사단법인 한국체육언론인회(회장 이종세)는 최근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 및 이길용 기자의 스포츠와 시대정신 포럼’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체육언론인회와 한국체육기자연맹(회장 정희돈)이 공동 주최하는 이 행사의 장소는 서울 중구 손기정로에 있는 손기정공원과 손기정기념관이다.

 손기정 선생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스타디움을 가득 메웠던 9만여 관중은 2시간29분19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작은 체구의 동양인임을 알고 놀라워했다. 아시아인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었지만 상의에는 일장기가 선명해 망국의 한을 일깨웠다.

 10일자 호외를 통해 이 소식을 처음 전한 뒤 이튿날부터 ‘조선의 아들 손기정’ 시리즈를 발 빠르게 연재했던 동아일보는 8월 25일자 2면에 손 선생이 시상대에 서 있는 현장 사진을 게재했다. 일본 현지 언론을 통해 구한 사진 속에 뚜렷하게 있던 일장기가 동아일보 지면에는 보이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치하를 살아가던 한민족의 저항정신을 일깨운 이 사건의 중심에는 사회부 체육주임으로 일하던 이길용 기자가 있었다.

 독자들은 크게 반겼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동아일보는 8월 27일부터 무기정간을 당했고 9개월도 더 지난 이듬해 6월 2일에야 복간을 알리는 호외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자신도 해직을 면치 못하고 투옥까지 됐던 이길용 기자는 훗날 이런 글을 남겼다.

 “세상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길용 기자는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한국 기자 최초로 ‘조선야구사’를 연재하고 인천의 야구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대한체육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그를 기리기 위해 체육기자연맹은 1989년부터 매년 체육기자 한 명을 선정해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정부는 그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광복 뒤 복직했던 이길용 기자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납북된 뒤 돌아오지 못했다. 이길용 기자의 3남이자 체육기자로도 일했던 이태영 체육언론인회 자문위원장(76)은 “생사도 알 수 없는 데다 유해가 없어 묘소도 쓰지 못했다.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비석 하나 세우는 게 소원이었는데 흉상이 세워진다니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중견 조각가 이용철 작가(57)가 만들고 있는 청동 흉상은 높이 90cm, 가로 64cm, 세로 35cm로 실제 인물의 1.3∼1.4배 크기다. 손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50)은 “여러분의 노력으로 이길용 기자의 흉상이 건립돼 할아버지와 함께 있게 됐다. 마땅히 계셔야 할 곳에 모시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은 25일 열린다. 손기정 선생 가슴의 일장기를 지웠던 그날이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동아일보 2017년 8월 9일 A2면)

 

마라톤 영웅 옆에 선 ‘영웅 기자’

올림픽 제패 손기정 선수 일장기 지운 이길용 前동아일보 기자 흉상 제막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생(1912∼2002)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없앤 이길용 기자(1899∼?)의 흉상 제막식이 25일 서울 중구 손기정체육공원에서 열렸다. 꼭 81년 전인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일장기를 지워 없앤 손기정 선생의 시상식 사진이 실렸다. 이 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고, 이길용 기자는 옥고를 치렀다. 이길용 기자의 흉상은 공원 내 손기정기념관 제2전시실의 ‘일장기 말소 사건’ 코너에 자리 잡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생(1912∼2002)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없앤 이길용 기자(1899∼?) 흉상이 손기정기념관에 세워졌다.

한국체육언론인회(회장 이종세)와 한국체육기자연맹(회장 정희돈)은 25일 서울 중구 손기정체육공원에서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이날은 동아일보 사회부 체육주임이던 이길용 기자가 주도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 있은 지 81년이 되는 날이었다.

흉상 제막식이 열린 공원 내 손기정기념관 앞에서 50m가량 떨어진 곳에는 손기정 선생의 전신 동상이 늠름하게 서 있다. 양손으로 투구를 들고 서 있는 손기정 선생의 동상 가슴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81년 전 이길용 기자가 일장기를 지워 없앤 자리에 새겨 넣지 못했던 그 태극기다.

손기정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이길용 기자를 할아버지와 함께 모실 수 있게 됐다. 좋은 인연이라는 게 이런 경우를 얘기하는 것 같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이렇게 또 만나고 다시 이어지게 된다. 이길용 기자의 저항정신이 앞으로도 잘 기억될 수 있도록 흉상을 잘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이길용 기자의 흉상은 손기정기념관 1층 제2전시실의 ‘일장기 말소사건’ 코너에 놓일 예정이다. 중견 조각가 이용철 작가가 완성한 이길용 기자의 흉상은 높이 88cm, 가로 65cm, 세로 35cm이다. 이 작가는 “처음 작업 제안을 받은 뒤 조건을 따지지 않고 수락했다. 이길용 기자의 정신을 알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흉상 제막식에 앞서 손기정기념관에서는 ‘이길용 기자의 스포츠와 시대정신’을 주제로 한 포럼이 열렸다. 포럼 발제자로 나선 김광희 한국체육언론인회 고문은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이라는 동아일보 사시(社是)를 관철하기 위해 이길용 기자는 일장기를 말소했고 이를 통해 민족의 울분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며 “그는 단순한 기자가 아니라 독립투사이자 의사(義士)이다”라고 했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동아일보 2017년 8월 26일 X25면) 

 

“독립운동하다 송진우 선생 권유로 동아일보 입사”
3남 이태영 고문이 말하는 이길용

“아버지가 월급을 집에 갖고 오신 적이 없다고 들었어요. 지인과 취재원들 만나 밥과 술을 사시고, 국제대회에 나가는 선수가 있으면 경비도 주시고…. 선수들이 귀국하면 집으로 찾아와 ‘보고’를 했다고 해요. 아버지는 그걸로 생생한 기사를 쓰셨고….”

파하(波荷) 이길용 기자(1899∼?)의 3남 이태영 대한체육회 고문(76)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25일 서울 손기정기념관에서 열린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에 가족 대표로 나온 그는 “1950년 7월에 납북돼 생사조차 모르는 아버지의 비석이라도 만드는 게 소원이었는데 감격스럽다. 아버님이 손기정 선생의 영혼과 함께 오래 안식하시기를 빈다”고 말했다.

이 기자가 동아일보에 몸담게 된 데는 고하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과의 인연이 있었다. 배재학당을 마치고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돌아온 그는 철도국에서 일하던 1919년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운송하다가 적발돼 수감됐다. 고하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옥고를 치를 때였다. 1921년 고하의 권유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 기자는 1936년 8월 25일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옥고를 치렀고 광복 때까지 복귀하지 못했다. 이태영 고문은 “형무소를 몇 차례 오가며 모진 고문을 받으셨다. 어머니가 받아 오신 옷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체육기자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손기정 선생과 함께 출전했던 ‘한국 농구의 아버지’ 이성구 선생은 생전에 “선수를 영웅으로 만드는 실력이 출중했고 체육계 전반을 좌지우지했던 분이었다.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정기를 진작한 분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인물은 안 계실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고문은 이날 부친의 유품인 동아일보 사기(社旗)를 본사에 기증했다. 그는 “어머니께서 임종 전에 제 아내를 불러 ‘동아일보 창간(1920년) 때 만든 것’이라며 ‘아버지가 가져오신 것이다. 소중히 보관하라’고 당부하신 유품이다. 아버지께서 모으신 방대한 자료를 전란에 많이 잃어버렸는데 이 사기가 남아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고문도 아버지처럼 체육기자의 길을 걸었다. 1961년 경향신문에 입사했던 이 고문은 “원래 문화 쪽을 취재하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당연히 스포츠 기자를 해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다른 길은 엄두도 못 냈다”며 웃었다. 이후 한국일보, 중앙일보에 가서도 스포츠 기자의 길을 이어갔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 온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흉상 건립은 ‘누군가를 기억하는 한 그는 살아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동아일보 2017년 8월 26일 X25면) 

 

 

“일장기 말소사건 보도 이길용 기자는 마산 아닌 인천 출신이었다”

인천대 이희환 교수 ‘이길용의 생애와 저널리즘’ 논문 발표
강제 퇴직前 10여년 활동 기간 중 절반 이상이 탐사-르포 기사 집중
출옥후에는 동아일보 통신원 활동… 인천지국에서 태풍피해 등 보도

 일제강점기 당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1899∼1950년 납북)는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새겨진 일장기 말소사건 보도로 유명하다. 이 기자는 1991년 8월 15일 광복 45주년을 맞아 건국애국장 추서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한국체육기자연맹은 1989년부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그는 스포츠 분야 기자로 알려져 있지만 재난이나 사건 현장에서 기획과 르포, 특종기사를 많이 썼다. 또 인천과 대전에서 민족독립을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그는 155cm의 작은 키였지만 배재학당 시절 육상과 축구 선수였다. 인천대 산하 인천학연구원의 이희환 학술연구교수(55)가 인천문화재단 지역연구 지원사업으로 진행한 자료조사 연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심층적으로 밝혔다.
 이 교수의 연구 결과는 ‘한국민족문화’ 78호(2021년 3월 발간)에 ‘기자 이길용의 생애와 저널리즘의 지향’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됐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이 기자의 출생지가 기존에 알려진 경남 마산이 아니라 인천이고, 그가 강제 퇴직당하기 전 10여 년의 기자 활동 기간에 쓴 기사의 50% 이상이 사건 기사, 기획 연재, 르포, 탐사보도 기사였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이 기자에 대한 기존 연구물로 한국체육기자연맹이 1993년 출간한 ‘일장기 말소 의거기자 이길용’이 단행본으로 유일하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역사적 의미 등을 짚어보는 논문은 상당수에 달한다. 이들 자료에서 이 기자의 출생과 관련해 ‘1899년 8월 15일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가 인천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인천에서 성장하면서 영화학교를 마치고 서울 배재학당에 진학했다.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공부하다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 귀국했다’고 전하고 있다.
 기존 기록물은 또 그의 투옥과 동아일보 입사 과정에 대해 ‘이길용이 일본에서 귀국 직후 철도국에 취업해 근무하던 중 3·1운동을 맞아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를 잇는 연락책 역할을 맡았다. 비밀문건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다 검거돼 3년간 복역하고 1922년 출옥한 뒤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의 권고에 따라 체육기자로 언론사에 발을 디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 기자가 가담했던 ‘3·1운동 1주년 선언문 배포 사건’에 대한 1920년 3월 30일의 검찰 신문조서와 1920년대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기사 등을 통해 기존 기록물의 오류나 모순을 확인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추적했다.
 이런 조사 결과 이 기자는 1921년 6월 1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뒤 철도국 대전지사에 근무하면서 동아일보 통신원 활동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조선인학생모임인 선우회 창립모임에서 ‘장래조선’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는 등 사회활동도 벌이다 1921년 9월 21일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채용(사고로 알림)됐다. 통신원에서 정식 기자로 채용됐는데, 송진우 사장의 권유로 언론인이 됐다는 기존 기록물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1923년 6월 24일자로 동아일보 대전지국에서 고향인 인천지국 기자로 소속을 바꿨다. 고향에서 왕성한 기사 작성에 나섰다. 1923년 8월 12일 황금 민어 어장이었던 인천 옹진군 굴업도에 거대한 폭풍우가 몰려와 항구와 민가가 아비규환과 같은 지옥으로 변했다. 이 기자는 즉각 현장으로 파견돼 8월 16일자 동아일보에 ‘태풍으로 인해 선박 200여 척 파괴, 해일과 폭풍으로 130호 가옥 파괴, 민어잡이 어선 200척 조난’ 등의 피해 상황을 알렸다. 그는 기사 서두에 “전보나 전화는 그만두고 인편까지 끊어진 무변대해의 고독한 섬”이라고 참상을 보도했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6년까지 전국을 누비며 현장 르포, 기획 연재물 기사를 수없이 출고했다. 비행기와 철도를 탄 시승기와 전국 도서를 순례하며 국토 현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기사는 △‘함흥 수조공사장 감독의 주민살상사건 진상’(1929년 11월 24일) △‘해저의 정취’(1929년 7월 3일) △‘장호원 총검 범인 혈상결사대 김선학’(1930년 12월 16, 17일 2회 연재) △‘기적(汽笛) 들린 지 삼십년’(1930년 11월 13일∼12월 6일 12회) △‘홍수 지옥에서 본 눈물과 사랑’(1933년 8월 3일) 등이다.
 이 기자는 1920년대 중반 인천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에 나섰다. 진보적 청년단체였던 ‘제물포청년회’ 초대회장, 인천 최초 빙상경기대회 개최 준비위원장, 인천영화학우회 간사, 조선청년총동맹 인천지역 집행위원(조봉암과 함께 2인 대표)을 맡았다.
 이 교수는 “스포츠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토 순례로 나라의 실상을 알리려는 이길용 기자의 저널리즘 정신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동아일보 2021년 4월 28 일 A16면 인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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