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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여기자(1) 허정숙(許貞淑)

Posted by 신이 On 11월 - 7 - 2016

허헌의 딸, 허정숙(許貞淑, 1902~1991)

1925년 1월 동아일보 기자, 1925년 5월 퇴사

 

 

두 번째로 평양을 갔을 때였다. 환영파티에서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웬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60세가 훨씬 넘어보이는 그 여인이 은근히 나에게 “소감이 어떻소” 하길래 나는 “평양도 많이 발전했고 서울도 발전했는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6.25전쟁을 우리가 한 겁니까. 외세에 의해서 한 거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옆에 앉아있던 동아일보 주필 송건호(宋建鎬) 씨가 자기를 상대하고 있던 북쪽 대표에게 저 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허정숙(許貞淑) 여사라고 했다. 남한에서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을 한 허헌(許憲)의 딸로 북에서 고위직을 두루 거친 그 거물이었다. 그러자 송 씨가 큰 소리로 “나는 동아일보 송건호라고 하는데 선생님 동생을 잘 알고 친합니다.”라고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허 여사는 “그래요”라고 한마디 하더니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이 되었다. 송 씨의 실수였다. 그의 이복 여동생 허근욱 씨는 북한 체제가 싫다고 애인하고 남쪽으로 넘어온 사람이었다. 한번은 김일성의 외당숙인 강양욱(康良煜)의 초청 만찬에서 그와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북한의 기독교인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니 “미군이 6·25때 교회를 다 폭격해서 교인이 별로 없다”고 했다.  (서영훈, ‘나의 이력서-평양에 가보니’, 한국일보 2004년 4월 15일자 22면)   

  일제시기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사회주의자로 해방 후 북한에서 문화선전상, 법무상 등을 지낸 허정숙은 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였습니다.

  허정숙은 변호사 허헌의 딸로 1925년 1월부터 5월까지 4개월간 본사 학예부 기자로 있었습니다.  입사 전인 1924년 여름,  본사 사회부 기자 임원근과 결혼,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부가 한 신문사에서 근무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박헌영과 같이 ‘철필구락부’의 임금인상투쟁에 가담해 1925년 5월 두 사람 모두 퇴사했습니다.

  상해 유학시절부터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가진 허정숙은 귀국하여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는 등 본격적인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24년 5월 11일자 2면

 

여성동우(女性同友) 창립
집행위원 세사람

본보에 누차 보도한바 무산(無産)여성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고자 새로이 나온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의 창립총회는 작 10일 오후 1시 반부터 시내 간동(諫洞) 23번지 능인강습소 안에서 열었는데 임시의장 김필애 씨의 사회 아래 강령과 규약을 통과하고 “우리 조선의 무산여성은 현재의 이중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의 장문의 선언을 발표하고 집행위원으로 아래의 3씨를 선거하였으며 기타 사항을 토의한 후에 폐회하였는데 회집한 여성이 30여 명이었으며 소관 종로서에서 4명의 형사가 회의진행을 감시하였더라.
집행위원
허정숙 박원희 주세죽 

 

  이어 허정숙은 1924년 11월 ‘수가이((秀嘉伊)’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여성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이란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글에서 그녀는 여성이 억압받는 이유가 지금까지 기생충 같이 남성에게 의존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진정한 독립은 경제적 독립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1924년 11월 3일자 4면

 

여자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
수가이(秀嘉伊)

우리는 남의 아내와 남의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한갓 그 집안 시부모와 그 남편 한사람만을 지극히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개성을 살리우고 우리의 인권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급박한 큰 문제이다. 만일에 우리가 사람에게 의뢰하여 사는 기생충이 아니고 완전한 사람이며 한 세상의 인간살이가 남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나를 위함이라 하면 우리는 먼저 남과 같이 완전히 자유롭게 살 것을 요구할 것이며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이 선각자인 신여성들의 맹렬히 부르짖음이 있고 굳세게 싸움이 있다.(하략)

 

  허정숙은 다음해인 1925년에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습니다.

 

1925년 3월 5일자 2면

 

무산부인(無産婦人) 기념
기념강연 개최
8일 천도교당서

오는 8일은 전 세계 무산부인들의 국제무산부인데이(國際無産婦人紀念日)인 까닭에 부내에 있는 3개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경성여자청년회 등의 연합주최로 이날 오후 7시부터 시내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기념관 내에서 기념대강연회를 개최한다는데 연사는 다음과 같으며 당일에 입장한 여러 사람에게는 붉은 꽃 한 개씩을 나눠준다 하며 그 꽃값은 10전씩이라더라.

이 날을 당하여                                 김조이
조선무산부녀의 상황                     박희자
부인해방의 원동력                         주세죽
국제무산부인데이                           박원희
국제부인데이의 의의와 여성운동   허정숙
현사회와 부인의 지위                   김수준

 

  허정숙은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 시절에도 역시 ‘수가이’란 필명으로 ‘국제부인(國際婦人)데이에–3월 8일은 무산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인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1925년 3월 9일자 부록 1면

 

국제부인데이에
수가이

3월 8일은 무산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인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오래인 성상(星霜)동안에 여러가지로 미명(美名)의 마수제(魔睡劑)를 가지고 횡포와 우월권을 마음껏 행사하는 부르조아 계급에게 굴종을 인종(忍從)하며 살아오던 부녀의 무리가 전제정치와 자본계급에 반항하여 맹연히 분기한 날이다. 이리하야 부녀들은 규율있는 조직하에서 자아의 진용을 정제하고 여성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며 일반 부녀들에게 계급적 각성과 해방적 의식을 갖게 하야써 인간으로서의 부인의 지위와 인권을 찾게 하는 날이다.(하략)

 

1925년 12월 1일자 2면

 

허헌 씨 가택을 수색
임씨 부부 검속(檢束)
동시에 관계자 4, 5명도 검거
사건은 비밀에 부치고 취조중
종로서 대활동 개시

시내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30일 새벽부터 돌연히 활동을 개시해 시내 관철동 변호사 허헌 씨 사무소에 이르러서 영양(令孃) 허정숙 씨와 그의 남편 임원근 씨를 동서에 인치하고 가택 수색을 한 후 다시 시내 모처로부터 주의자(공산주의자-인용자 주) 4, 5명을 동에 데려다가 검속하고 방금 취조 중이라는데 사건의 내용은 극히 비밀히 하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평북 모 지방 경찰로부터 촉탁을 받아 가지고 그와 같이 검속 취조 중이라 하며 모 주의 선전에 관한 범죄사실이 발각된 것인 듯하다는데 관계된 여러 명은 달아났으므로 계속 활동 중이라더라.

 허정숙과 임원근이 검거된 이후 약 100명이 추가로 검거되면서 이 사건은 사상 최대 규모의 사건으로 커져 갔습니다.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입니다. 연행된 후 허정숙은 풀려났지만  남편 임원근은 구속수감됐습니다.

 허정숙과 임원근을 ‘원앙 기자’라 부르며 부러워들 했지만 이 사건으로 임원근이 옥살이를 하자 허정숙은 북풍회의 송봉우와 동거하는 등 당시 흔치 않은 자유연애,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동지애에 뿌리를 둔 ‘붉은 연애’로 화제를 모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허헌은 1926년 5월 허정숙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1926년 5월 30일자 3면

 

허정숙 여사
아버지를 따라 서양만류

여류 사회운동가로 신망이 많던 허정숙 여사는 금번에 부친 허헌 씨를 따라 서양만류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데 그동안 세상에 여론이 많고 여러가지 변동이 많았던 여사는 모든 것을 다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분연히 30일에 경성역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길에 조선의 어머니와 딸들을 위하여 굳센 일군이 될만한 힘과 길을 찾고 돌아오기를 우리 일반은 믿고 바라는 바이오. 따라 여사의 빛난 장래를 위하여 깊이 축복하는 바이올시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들을 뒤에 두고 떠나는 여사의 마음이야 과연 어떠할까! 그러나 희망 많은 장래를 위하여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으로 건너갔던 허정숙은 1927년 11월 귀국,  동아일보에 ‘부인운동과 부인문제 연구’(1928년 1월 3~5일 전 3회)를 발표하며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1928년 1월 3일자 5면. 부인운동과 부인간 문제연구(一) 조선여성 지위는 특수

 

(전략) 조선 여성은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가혹한 역사를 가진 인간일 것이다. 시대의 변천이 세계의 여성으로 하여금 경제적 종속과 사회적 종속의 굳은 철쇄에 얽매여 질곡의 생활을 하게 하였고 그중에서도 무산계급 여성에게는 이삼중의 질곡을 준 것과 같이 조선의 여성도 이중삼중의 종속과 압제 하에서 경제적으로 노예요, 사회적으로 생명없는 생활을 거듭한 것은 다시 새삼스러히 논거할 필요가 없는 바이다.(하략)

 

1928년 1월 4일자 5면. 부인운동과 부인간 문제연구(二)

 

(전략) 구미 각국의 여성은 종속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되 문명의 혜택으로 실사회에 대한 견식이 광범하고 또 교육이 고등한 까닭으로 불완전하고 불철저한 의식과 사상에서도 남녀가 대등한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네들의 개성의 각성이나 직업상 대우는 남성과 심한 차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의 여성은 고루한 관습과 제도의 희생으로 전무 교육상태에 있었고…(중략)…현재 조선여성의 대다수가 무교육자인 가정부인이다. 자산가이나 노동장에 나아간 부인이나 다 같이 여성의 대부분은 무식계급이다. 또 경제적 독립을 한 여성이 극소수가 되고 대부분이 경제상으로 무산계급에 속한 여성이다.…(중략)…빈궁과 아사로 협박을 받는 조선의 무산부인은 외국의 노동부인보다 더 하층에 처하여 있다.…(중략)…대체로 보아 조선의 여성은 경제적으로 무산계급에 속하였고 개성으로 보아 노예의 지위에 처하여 있다. 조선여성에게는 개성의 자유나 인격의 대등은 아직 발생되지 아니하였다.(하략)

 

1928년 1월 5일자 7면. 부인운동과 부인간 문제연구(三)

 

무산계급에 속한 전 조선여성은(조선인 전부가 무산화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환경과 처지를 알도록 교양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여성의 과거와 현재의 경제적 조건의 필연적 열세로 조선여성을 무산계급에 처하게 하였고 따라서 조선 현재 환경사정이 부인운동을 무산계급 부인운동화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응하여 부인운동에 대한 방침과 방향을 세워 분투하게 된다.(하략)

  허정숙은 이 글에서 ‘부인문제는 기필코 무산계급문제와 동일한 해결을 요한다’고 하여 여성문제 역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경성에서의 항일동맹휴교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그는 1930년 1월 체포돼 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3월 19일자 2면

 

시내 여생(女生) 만세사건
제1회 공판 개정
전번에 무기연기됐다가 별안간 공판
방청인들로 법정내외는 대혼잡 이뤄
피고 8명 전부 출정

시내 이화여자고보교 생도들을 비롯하여 동덕 배화 근화여자상업 경성보육 정신 실천 태화여자미술 숙명여자고보 등 13교 생도들이 제각기 연락하여 금년 1월 15일 아침에 일제히 만세를 불러 일시 다수의 검거자를 내어 조선여학생들의 운동으로는 처음 보던 시내 여학생 만세사건의 피고
▲최복순 ▲허정숙 ▲최윤숙 ▲김진실 ▲이순옥 ▲임경애 ▲송계월 ▲박계월 등 8명에 대한 보안법 위반사건의 제1회 공판은 금18일 경성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개정되었다.
◇금일에 출정한 여학생 피고
(상단 우로부터) 송계월 최윤숙 박계월
(하단 우로부터) 이순옥 최복순 김진실 (원내) 허정숙

일반 방청은 제한코
특별 방청석 만원

구치감(拘置監) 전에 부형(父兄) 저립(佇立)
여간수 출동도 한 이채

암루에 젖는 법정의 공기
목례조차 교환못한 비애

 

  1932년 출감한 허정숙은 1936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 산하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과에 입학, 그의 길을 갑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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