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로 아동물에 삽화를 그리다 6.25 때 월북한 화가 정현웅(鄭玄雄).
독학으로 미술계에 진출한 정현웅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서화협회전람회(협전)에서 입선과 특선에 오르며 동아일보 기사에 나왔습니다.
“정현중(鄭玄雄) 씨-하(夏)의 온실내.”
(‘제8회 미전평(美展評)’(5), 동아일보 1929년 9월 7일자 3면)
“제2부 서양화=악기, 김공화. 교회당, 정현웅.”
(‘서협(書協)전람회, 6인을 특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1일자 2면)
“정현웅씨 ‘빙좌’ 곱게 묵업게 성공한 그림이다.”
(‘제10회 조미전평(朝美展評)’(5), 동아일보 1931년 6월 7일자 4면)
“입선자중 특히 알에의 네 사람의 입상자를 선정하게 되엇다. 서양화부 ‘부립도서관(府立圖書?)’ 정현웅.”
(‘제11회 협전 입상자’, 동아일보 1931년 10월 18일자 4면)
“좌상(座像) 경성 정현웅(京城 鄭玄雄).”
(‘미전(美展),주옥의 입선-이백구십륙점!’, 동아일보 1935년 5월 14일자 2면)
“정현웅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1935년 선전(鮮展) 특선작 ‘좌상(坐像)’은 자신의 여동생 명은(75,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씨를 모델도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명은씨는 ‘35년 선전을 6개월 앞두고 수차례에 걸쳐 오라버니의 모델이 됐으며 다행히 그 작품이 특선으로 뽑혔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해금(解禁)…밝혀지는 월북화가 정현웅’, 동아일보 1988년 11월 2일자 8면)
정현웅이 동아일보에 그린 연재소설 첫 삽화는 이무영(李無影)의 장편소설 ‘먼동이 틀 때’ (1935년 8월~12월, 133회 연재) 45회분입니다. 정현웅은 청구 이마동의 뒤를 이어 1935년 9월 20일자 13면에 삽화를 그렸습니다.
1935년 9월 20일자 13면, 먼동이 틀 때(45)
“이번 소설은 숨은 삽화가로 헤성같이 돌현하여 삽화게의 폭탄적 경이를 나타내인 정현웅(鄭玄雄)씨의 삽화로써 독자앞에 나타나게 되엇으니 새해 첫날에 이에서 더 큰 선물이 어디있겠습니까.” (장편소설예고 ‘여명기(黎明期)’, 1935년 12월 24일자 2면)
장혁주(張赫宙)작 정현웅(鄭玄雄) 화 ‘여명기’는 1936년 1월부터 8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되기 전까지 모두 208회 연재됐습니다.
정현웅은 청구의 뒤를 이어 김말봉(金末峯)의 장편소설 ‘밀림’에 1936년 4월 15일자 133회부터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정간되기 직전 8월 27일자 233회까지 삽화를 그렸습니다.
정현웅은 만화도 그렸습니다.
“동아일보 신년특집(1936.1.1~4)
당시 신문은 신년특집을 위해 만화를 가지고 다양한 코너를 마련하였다. 옆 그림은 1936년 특집의 하나로써 루즈벨트, 히틀러, 장개석 등 국제적 유명인물을 캐리커처로 보여준 것이다. 이 외에 이상범, 최영수, 정현웅 등 당시 만화계 대표주자들이 공동으로 ‘세상 삼태집’이라는 제목으로 신년, 발전, 생활, 과음, 연애에 관한 만화를 2~3면에 걸쳐 그렸으며, 나흘 동안 만화만문 형식으로 문단의 동태와 문인들의 에피소드를 코믹 하게 그렸다.” (신문박물관 홈페이지)
그러나 정현웅의 ‘아룽다룽한 솜씨’는 아동물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또 자랑삼아 말씀하올 것은 삼화예술의 최고수준을 보이는 정현웅 씨의 아룽다룽한 솜씨로 그림에 굶주린 가엾은 우리 아기들의 새해선물로 곱게 채색 올린 아동화보를 특별부록으로 내여 놓게 된 것입니다.” (변영로 신가정 편집장, 편집후기, 신가정 1936년 1월호, 198쪽)
“이무영(李無影) 씨의 재미잇는 이야기에 정현웅 씨의 그림을 넛케된 것은 그야말로 꽃우에 또 꽃을 언진것과 같이 여러 어린 동무들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정씨는 애기네 그림에 있어서 단연히 따를 사람이 없을만치 잘 그리는 분인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똘똘이를 가운데 노코 여러 어린이들이 얼마나 씩씩하게 자라가고 잇나하는 것이 정현웅씨의 그림을 통하여 단번에 알 수 있도록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소년소설 ‘똘똘이’ 예고, 동아일보 1936년 2월 8일자 5면)
1936년 2월 9일자 5면, 똘똘이
이무영 작 정현웅 화 ‘똘똘이’는 1936년 2월부터 5월까지 72회 연재됐습니다. 정현웅은 이어 노양근(盧良根)의 소년소설 ‘열세동무’에 1936년 7월 2일자부터 8월 5일자 28회까지 삽화를 그렸습니다.
1936년 7월 2일자 3면, 열세동무
정현웅은 납량풍물기인 ‘납량풍물첩’ 삽화를 1936년 7월 2일자 ‘쇼윈도우’부터 16일자 ‘해수욕’까지 이운곡 글과 함께 연재했습니다.
정현웅은 전조선철도예정선 답사에 제 1대로 나서 1936년 7월 29일자부터 ‘백두성봉 밑을 감도는 혜선(惠山) 백무준령선(白茂峻嶺線)’이란 제목으로 임병철 기자의 기사와 함께 그림을 연재했습니다.
정현웅은 6.25 때 월북해 그의 작품은 1988년이 되어서야 해금됐습니다.
“고난의 90일 괴뢰군 철제 밑에서도 수절하고 예술과 인간의 본령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또한 은신하다가 마침내 그들 속에 피체(被逮)되어 북한으로 납치되어 간 우리 애국문화인도 많거니와, 그에 못지 않게 민족문화의 말살과 괴뢰선전의 앞잡이로서 욕된 그 혀와 그 부를 둘다 북한으로 도주한 반역문화인들도 상당수에 달한다.<반역월북한 자 명부> 미술:정현웅 박래현 김□영 이쾌대.” (‘납북 예술인과 월북 예술인’, 민주신보 1951년 1월 1일자)
“지난달 27일 정부의 납월북 미술 음악인 작품의 해금이 발표된 후 그들에 관한 새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서양화가 정현웅.
1910년생인 그는 월북 후 고구려 고분벽화의 재현과 어린이를 위한 동화그리기 인물화 등에 전념하다가 지난 76년 작고했는데 남쪽에 두고 간 부인과 4남매를 그리워하여 한때심한 우울증에 빠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으로 이민간 그의 가족이 미국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측에 확인, 북에서 재혼한 부인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의 서신을 받아 알려진 것이다. 정현웅은 월북(50년9월)후 두고 간 부인 남궁요안나 씨(73,재미)와 같은 성(姓)의 여인을 찾아 지난 54년 재혼, 1남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자신의 가업을 잇도록 그림수업을, 딸은 피아니스트였던 첫부인 요안나씨를 그리며 음악을 가르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0월27일자(일부지방 28일자) 동아일보의 납월북예술인 해금기사를 보고 동아일보사를 찾아온 정현웅의 차남 지석씨(47, 한미약품전무)는 “수년전미국에 사는 어머니와 형이현지 적십자사를 통해 아버지의 월북후 족적을 알게됐다”면서 “아버지가 평소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며 우울증에 빠졌다는 내용으로 보아 비록 가치관이 달라 월북했겠지만 혼란하던 전쟁중 순간적으로 선택했던 자신의 길을 후회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중략)
정현웅은 193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기자를 거쳐 45년부터 48년까지 월간지 ‘신천지’의 주간을 맡았다. 48년 이후에는 동화작가들과 더불어 동화그리기 어린이잡지 장정 등을 맡았는데 지금도 일부동화집에 그의 그림이 남아있다. 한편 그의 첫부인 남궁요안나 씨는 구한말의 유명한 언론인 남궁억의 손녀로 이화녀전 기악과를 졸업했다.(중략)
차남 지석 씨는 북에서 보낸 서신을 토대로 “아버지의 작품은 현재 북한의 박물관 미술관에 다수 보관되어 있으며 이충무공 강감찬 장군 전봉준 장군 등의 인물상을 비롯, 주로 인물그림에 주력했던 것 같다”고 말하고 “남북의 교류가 제대로 이뤄져 아버지의 일생이 재조명되기를 바랄뿐”이라고 말했다.” (‘해금(解禁)…밝혀지는 월북화가 정현웅’, 동아일보 1988년 11월 2일자 8면)
정현웅
동아일보에 실린 정현웅의 작품사진을 보며 그를 회고하는 여동생 명은씨와 차남 지석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