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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당대의 화백(5) 청구 이마동(靑駒 李馬銅)

Posted by 신이 On 11월 - 7 - 2016

  한국인 최초로 동경미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한 서양화가 청구 이마동(靑駒 李馬銅). 

  청구 이마동이 동아일보에 등장한 것은 휘문학교 재학중입니다.

  “시내 종로경찰서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9시경부터 고등계형사 전부가 시내 각처로 출동하야 휘문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맹휴생의 주모자라고 인뎡되는 리마동(李馬銅) 이하다섯명을 잡어다가 흑소(黑沼)경부보 이하 부댱 수인이 취조중인데 이 구속은 맹휴에 찬성치 아니하나 부득이 폭력에 눌리워…등교치 못한다는 투서 7장을 받고 그 폭행자는 구속함이라더라” (‘경찰에서 방해자검속, 다섯명을, 휘문교 맹휴여파’, 1924년 9월 1일자 2면)

 “그는 중앙, 휘문, 보성, 중동학교에서도 미술을 가르쳤는데 이때 그에게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장발, 이마동, 안석주 등이 있다.” (김영나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교수, ‘고희동, 건국 활동에 앞장선 근대 화단의 거두’, 한국사 시민강좌 43호, 일조각, 2008, 310쪽)

 청구는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등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동경미술학교-(서양화과) 이마동(충남)” (‘금춘(今春)졸업할 일본유학생’, 동아일보 1932년 2월 6일자 7면)

 “그중 조선인 특선은 동양화에 리상범(李象範), 백윤문(白潤文),량씨이오 서양화에는 리마동(李馬銅), 리인성(李仁星), 최연해(崔淵海)의 3씨, 공예품에는 이남이 등 전부 6씨이다.” (‘제11회 미전에 조선인 특선 육명’ 동아일보 1932년 5월 27일자 7면)

 “최근 창립된 미술가단체 목일회에서는 금 5월 16일부터 4일간 종로 화신 누상에서 소전람회를 열고….”(‘목일회 소전’, 동아일보 1934년 5월 16일자 3면)

 “1930년을 전후하여 나날이 많은 화가들이 동경에서 또는 국내에서 서양화를 연구하였는데 1935년에는 미술동인회 목일회를 결성하였고 이에 참가한 사람은 이종우 이병규 이마동 공진형 구본웅 황토수 등 8명으로 이것은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미술평론가 이경성, 한국근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75년, 101쪽)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 청구 이마동의 첫 삽화는 장혁주(張赫宙)의 장편소설 ‘삼곡선(三曲線)’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1934년 9월부터 1935년 3월까지 122회 연재됐습니다.

 “삽화는 청년 양화가로 미전(美展)에 특선은 물론 조선화단에 이채적 존재인 우리의 화가 이마동(李馬銅))씨의 새로운 정취, 아담한 필촉으로 그려질것이니 실로 금상첨화의 애독품이 될 것입니다.” (장편소설 ‘삼곡선’ 예고, 1934년 9월 19일자 2면)

 

1934년 9월 26일자 6면, 삼곡선(三曲線)

 

 “그 뒤를 이어서는 주요섭(朱耀燮)씨의 장편소설 ‘구름을 잡으려고’가 청구 이마동(靑駒 李馬銅) 화백의 삽화와 아울러 지면을 빛내게 되엇습니다.” (연재소설예고, 1935년 2월 16일자 2면)

  주요섭 작, 이마동 화 ‘구름을 잡으려고’는 1935년 2월부터 8월까지 156회 연재됐습니다.

  이무영(李無影)의 장편창작 ‘먼동이 틀 때’는 1935년 8월부터 12월까지 동아일보에 132회 연재됐지만 청구 이마동이 삽화를 담당한 것은 1회부터 44회까지입니다.

  “이무영씨의 장편창작 ‘먼동이 틀 때’는 이마동(李馬銅)씨의 삽화와 아울러 연재되게 되엇습니다.” (장편소설예고, 1935년 7월 27일자 2면)

   김말봉의 장편소설 ‘밀림’의 삽화에도 청구 이마동이 참여했습니다. 청전 이상범의 뒤를 이어 1935년 10월 10일자 13회부터 1936년 4월 14일자 132회까지 삽화를 그렸습니다.

 주요섭의 장편소설 ‘길’은 1939년 9월 6일자부터 1939년 11월 23일자까지 61회 연재됐는데 청구 이마동이 삽화를 맡았습니다.

  청구는 당시 유행한 사생화도 동아일보에 그렸습니다.

 동아일보 1934년 10월 4일자부터 10월 20일자까지 총 11회 가을 풍경을 그린 청전 이상범의 ‘추일잡제(秋日雜題)’ 중 제2화 ‘벽공(碧空)’은 청구의 작품입니다.

 

1934년 10월 5일자 3면, 벽공

 

  서울의 곳곳을 돌아보고, 그 풍경을 스케치한 청구 이마동의 ‘서울풍경’ 삽화는 1935년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 총 15회 연재됐습니다. 특히 6월 25일자부터 29일자까지의 삽화는 동아일보사 본사 옥상에서 각각 서울의 동쪽, 남쪽, 서쪽, 북쪽을 바라본 경관을 스케치 한 것입니다.

 “서울은 선미(鮮美)한 풍광 명랑한 하늘로 화인(畵人)의 귀염을 받는 곳. 스케치북을 들고 거리로 나서며 우선 동을 바라보고 한 장.” (‘서울풍경-동을 바라봄’, 1935년 6월 25일자 3면)

 “본사옥상에서 외외(巍巍)한 수봉(秀峯) 북악을 조망할 수 잇음은 한 큰 기쁨이다. 서울은 이 산 아래에서 길리어 낫다. 기쁨과 슬픔이 교지(交至)하는 이 산아래의 사화(史話)에 지금의 사녀(士女)는 한루(恨淚)도 흘린다.” (‘서울풍경-북을 바라봄’, 1935년 6월 29일자 3면)

 

1935년 6월 29일자 3면, 서울풍경

 

  청구는 동아일보와 자매지 신동아, 신가정에 미술기사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신동아’ 편집실은 3층에 있었다. 서향으로 큰 거리가 내다보이며 멀리 무악재 고개가 보인다. 기자로는 고형곤(高亨坤) 씨와 최영수(崔永秀) 씨 두 분이 있었다. 고 씨와 나는 주로 편집일을 보게 되었고 최 씨는 만화를 맡게 되었다. 사진은 신문과 공동으로 쓰게 되었고 삽화는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이마동(李馬銅) 세 분이 담당하게 되었다.” (최승만<崔承萬>, 나의 회고록, 인하대출판부, 1985년 285쪽)

 “춘곡 고희동씨, 심산 노수현씨, 청전 이상범씨 등 건재하여 역작들을 보여주심은 기꺼운 일이며 심산 노수현 씨 작 ‘영춘’과 청전 이상범씨의 ‘소림’은 동양화부장 중 백미일 것이다.” (이마동, ‘협전을 보고<중>’, 동아일보 1935년 10월 26일자 3면)

 “전날에 여류작가로 이름 있던 나혜석 여사의 개인전람회가 10월말에 조선관에서 다수한 작품을 진열하였다. 그러나 여사의 전날의 화려하던 꿈자취는 찾아볼 길 없었고, 오히려 그 작품을 대하지 않았던들 옛날의 기억이 남았었을 것을 하는 이상한 감을 느꼈다.” (이마동, ‘잘가거라 을해년아-을해 1년간 여성화단 회고’, 신가정 1935년 12월호)

 

  청구는 달변가 애주가에 ‘환하게 터진 밝은 성질’(화가 김용준의 평)을 가졌다고 합니다.

 “벌서 여러해 전입니다. 내가 졸업기념 전람회에 출품을 하려고 작품을 제작하던 때 일이니까요. M이라는 동창생과 한집에 있었는데 친분도 자별했고 서로 성격도 맞아서 모든 일을 상의하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졸업작품을 내라는데 돈이 있어야 모델을 구하지요. 할 수 없이 너와 나와 서로 맞그리자고 얼마동안 그리다가 둘이 다 붓을 내던진 일이 있었습니다. (능변가 이마동씨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고 둘이서 손을 맞잡고 우던 터에 그 M군한테는 후원자로부터 대금 3백원이 날러왔습니다. 그래서 모델을 하나 구해가지고 둘이 그리다가…(중략)…그래 내처(그때는 아직 애인시대였겠는데)를 그렸죠. 작품을 완성해서 출품했더니 그게 다행이 특선이 돼서 이왕직에서 샀더군요.” (화가 이마동씨, ‘작품이전과 이후-작가와 모델과의 로만스’, 동아일보 1937년 6월 19일자 6면)

 “요우(僚友) 이마동 군이 이번 신작 오십여점을 화신화랑에 진열하고 그의 첫번되는 개인전람회를 개최함에 제하여 20년 동안이나 소위 화도를 같이 걸어오던 나로서는 비록 눌변으로서나마 그의 적지 않은 노력을 칭송하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이군은 그의 이름이 마동(馬銅), 아호가 청구(靑駒)인데다 병오년생까지 겹쳤으니 말과는 끔찍스리도 인연이 깊다느니보다는…(중략)…이군의 성격은 뚫어진 문구녁으로 햇빛이 쏘아오듯 그늘 어두움 따위는 모조리 집어치우는 환하게 터진 밝은 성질이다.…(중략)…이군이 견인한 의지와 가경할 열정으로서 그의 초지를 좌절함이 없이 걸어나오는 것을 우리 화우들의 한가지로 축하하여 마지 않는 바이라하겠다.” (김용준<金瑢俊>, ‘미술평-이마동 개인전’, 동아일보 1938년 6월 4일자 3면)

 

동아일보에 난 청구의 부음기사.

“재미 이마동씨
서양화가 이마동씨가 지난 5일밤(한국시간 6일 오후) 미국의 시카고 교외아파트에서 노환으로 별세, 7일 장례식을 갖고 시카고근교의 한국교포묘원에 안장됐다. 향년 75세.
이 화백은 충남아산 출신으로 선전(鮮展)에 특선한 후 화단에 데뷔, 국전심사위원장 한국미술협회장등을 역임했고 32년 동경(東京)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홍익대학장(69~71년)으로 후진양성에도 힘쓴 미술계원로이다. 그는 얼마전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이주해 살아왔었다.” (1981년 10월 8일자 11면)

 “이달 초 재미(在美)화가 이마동 선생의 부음을 신문에서 접하고는 ‘멋장이 한사람이 또 가는구나’하는 한탄과 함께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내쉬어졌다. 이선생을 처음 뵌 것은 부산피난시절의 일이었지만 워낙 알려진 화가인데다 숙명학교 다닐 때 사모님이 우리학교 미술선생으로 계셔서 일찌기 말씀은 많이 듣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단체로 조선미술전람회 구경을 가곤 했는데 아이들이 ‘저기 윤선생 있다’고 해서 가까이가보면 미인으로 이름났던 우리 미술선생님이 모델로 그림 속에 들어있는 것이었고 그린 이는 다름 아닌 이마동 선생이었다.
숙명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웃집 여학생과 그 오빠와 셋이서 명동에 있던 희락관이라는 영화관에 구경간 일이 있다. 구경도중 아무래도 이상한느낌이 들어 옆을 보니 바로 윤선생이 앉아있질 않는가. 학교에서 가지 말라는 영화관에 들어온 것부터 찔리는 데다 비록 친구오빠일망정 남성까지 동반한 행위는 여학생의 신분으로선 중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다말고 뛰어 나오기는 했으나 놀란 가슴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순진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일 때문에 밤새 고민으로 지새운 나는 이튿날 학교에 가자마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윤 선생을 찾아가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야단을 치기는커녕 의외로 선생자신이 우물쭈물하는 눈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윤선생도 그때 이마동선생과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선생 또한 윤선생 못지않게 인물이 훤했던 분으로 두 사람의 미남미녀는 세상이 떠들썩한 연애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이 벽에 부닥치자 두분은 소설에나 나음직한 도피행각에 뛰어들어 장안의 화제의 촛점이 돼버린 것이다.
부산시절엔 나도 이 선생을 따라 술집깨나 돌아다녔다. 사모님에게는 밤낮 야단맞으면서도 술 없이는 못사는 분이었던 선생은 ‘우리 호랑이 마누라가 알면 또 큰일 날텐데’ 연방 걱정을 하면서도 어느새 술잔을 비워버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술버릇이었다.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하면 입었던 옷을 한가지씩 활활 벗어 던지셨으니 말이다. 저고리 벗고 바지도 벗고 다 벗은 다음 나중엔 달랑 남은 팬츠마저 벗으려는 눈치여서 주위사람들을 당황시키곤 했다.
그렇게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던 분이 남의 땅에 이민 가서 오죽 답답하셨을까. 자식들 따라 미국 들어간 것이 재작년의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삭막한 객지생활이 선생의 명을 재촉한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김정숙<金貞淑>, ‘나의 교유록(交遊錄)-이마동 선생’, 동아일보 1981년 10월 29일자 7면)

 

                                         이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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