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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당대의 화백(1)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

Posted by 신이 On 11월 - 4 - 2016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선생을 비롯, 근현대 미술의 대가(大家)들이 일제하 동아일보에 있었습니다.

 

노수현(盧壽鉉, 1899~1978) 1923. 6 .입사 1924.9 퇴사, 1937.10 재입사 1940. 8 폐간
안석주(安碩柱, 1901~1950) 1924.11. 입사 1925. 5. 퇴사
이상범(李象範, 1897~1972) 1927.10. 입사 1937. 5 .퇴사
최영수(崔永秀, 1909~1950 납북) 1933. 6. 입사 1935.12. 퇴사
이마동(李馬銅, 1906~1980) 1934. 8 . 입사 1936. 3. 퇴사
정현웅(鄭玄雄, 1911~1976) 1935. 9 . 입사 1936. 퇴사

 

동양화 6대가의 한 사람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에 축화를 게재한 심산 노수현은 창간 동인(同人) 고희동 선생의 추천으로 1923년 6월 입사했습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7면

 

  “이것이 맨처음 그린 삽화는 아니엇다. 처음 것은 동아일보에 연재되는 우보(민태원) 번역의 ‘무쇠탈’ 삽화엿다. 그때 이 무쇠탈은 안렉산 듀마의 삼총사를 흑암누향(黑暗淚香)이 ‘철가면’이라고 제목을 고처 동아일보에 연재하엿다. 그린 것을 우보는 그 누향의 역본(譯本)을 가지고 번안하여 낸 것인데 많은 인기를 끄으든 초기의 연재소설이엇다. 이 소설에 삽화 그리는 스승되는 춘곡 고희동 화백이엇는데 그 어른이 불시에 동경 여행할 일이 잇서 약 한 달 가량 날더러 그리라 하엿다. 그래서 30여 매를 그려 보앗는데, 그때 그림은 유치하엿다. 동양화도 아니요, 서양화도 아닌 분칠도 군데군데하여 펜키화 가튼 두루뭉수리 그림이엇다. 이러한 인연 우로 동아일보에 입사하게 되엇는데…” (노수현, ‘신문소설과 삽화가’, 삼천리 1934년 8월호, 160쪽)

 

 당시 노수현은 촉망받는 신진화가였습니다.

 

 “일죽이 서화미술회를 졸업을 한 자로 족히 자긔의 주먹 안에 들뜻한 다섯사람(이상범 김은호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을 모화 놋코 말하기를 리왕직에서 윤필료로는 단지 오백원밖에 받지를 못하였으니 이 돈을 난호아 쓰고” (‘창덕궁 내전벽화 윤필료(潤筆料)의 거처(去處)?’, 1920년 6월 24일자 3면)

   “신진화가(新進畵家)중 노수현(盧壽鉉) 이상범(李象範) 변관식(卞寬植) 이용우(李用雨) 제씨의 발긔로” (‘신진화가 제씨가 신구화(新舊畵)를 연구코자 동연사를 조직’, 1923년 3월 9일자 3면)

  “동양화에는 신진화가 노수현(盧壽鉉) 씨가 삼등의 영예를 어덧스며”(‘개막된 미술전람회’, 1923년 5월 11일자 3면)

  “신진화가로 일홈이 잇는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 청뎐 이상범(靑田 李象範) 양씨와 기타 제씨가 중심이 되야 조직된 동연사에서는 그동안 작품전시회를 하려고” (‘심산, 청전 양씨 개인전’, 1923년 10월 23일자 3면)

  “초기에 일어난 몇 가지 동양화 관계의 사실을 들어본다면 1920년 8월 6일 오일영 김은호 이상범 등이  창덕궁 내전 벽화를 제작한 것을 비롯하여 1922년 9월 24일 허백련 개인전(보성학교), 1923년 3월 9일에는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이용우 등이 신구화도의 연구를 목적으로 동연사동인회를 조직 발족하였고…” (미술평론가 이경성, 한국근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75년, 97쪽)

  황해도 곡산(谷山) 출신의 심산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인 할아버지 헌용(憲容) 밑에서 자랐습니다. 1914년에 보성중학교에 진학하였다가 중퇴하고 서화미술회강습소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과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의 지도 아래 전통화법을 익혔습니다. 특히 심산은 심전(心田)으로부터 아호(雅號) 중의 ‘심(心)’자를 쪼개 받고 심전의 화실 경묵당(耕墨堂)에서 문하생을 겸한 조수로서 화법을 닦았습니다. 심전의 ‘전(田)’자는 동기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이 물려받았습니다.

 “서화미술회라는 것이 잇엇는데 나뿐이 아니라 오늘날 동양화가들은 대개 이 서화미술회를 거처 나왓지요. 심산 노수현 씨라든가 안종원 씨 등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지요. 다만 심산 선생과 나는 한 반년 서회미술회에 다니다가 직접 선생의 댁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어 말하자면 보통 사제간보다는 인인이 깊게 된 셈이지요.” (이상범, ‘나의 스승을 말함(1) 자유주의자 안심전(安心田) 선생’, 1938년 1월 25일자 4면)

  심산이 동아일보에 입사해 그린 첫 작품은 이희철의 소설 ‘읍혈조(泣血鳥)’(1923년 6월 2일~10월 28일, 140회)의 삽화였습니다. 심산은 ‘읍혈조’에 이어 유운인의 번역소설 ‘미인의 한’(1924년 8월 28일~11월 8일,73회)의 삽화를 그리다 1924년 9월 15일자를 마지막으로 중단합니다.

 

1923년 6월 2일자 4면, 읍혈조(泣血鳥)

 

 1924년 8월 28일자 3면, 미인의 한

 

  “편집국장인 하몽, 정치부장인 우보(민태원) 그 밧게 여러 선배가 갑작히 조선일보에 자리를 옴기면서 날더러 오라 하여 결국 조선일보에 입사하엿는데 아마 그때는 지금은 고인이 된 낭운의 무에라 하는 번역 탐정소설에 삽화를 그렷든 듯 창작소설이 아니요, 또 외국의 인물과 풍경을 삽사하여 내노아야 하는 삽화엇스니 성의잇게 그려젓슬 리가 업다. 그저 직업적으로 붓을 놀녓슬 뿐. 그러다가 중외일보를 거처 현재 중앙일보에까지 이르럿다.” (노수현,  ‘신문소설과 삽화가’, 삼천리 1934년 8월호, 160쪽)

  “연속 사설 ‘민족적 경륜’과 식도원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명성은 상당히 훼손되었다. 한편 사내에서도 편집국장 이상협을 중심으로 한 사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아일보를 떠나 조선일보로 옮겨가게 되었다. 사장인 송진우가 박춘금의 협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동아일보를 떠난 사람들은 1차로 5월에 전무 신구범(愼九範)을 비롯해서 홍증식(영업국장), 김동성(金東成, 조사부장), 김형원(金炯元, 지방부장), 민태원(閔泰瑗, 정치부장), 김량수(金良洙, 논설반장) 등이었고 9월에 2차로 최익진(崔益進, 공장장), 최영목(崔榮穆, 정리부장), 유광열(柳光烈, 사회부장), 그리고 기자로는 이서구(李瑞求), 박팔양(朴八陽), 서승효(徐承孝), 노수현(盧壽鉉), 하나와 요시유키(山蒿芳潔)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상협을 따라 조선일보로 가서 이른바 ‘혁신 조선일보’를 만들었다.” (정진석,역사와 언론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년, 247쪽)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 심산은 한국 최초의 신문연재 세로 4칸 만화인 ‘멍텅구리 헛물켜기’시리즈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심산의 삽화가 다시 동아일보에 등장한 것은 장편소설 ‘황원행(荒原行)’ 연작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심산 노수현 씨-특색 잇는 씨의 화풍은 나날이 진경(進境)을 보일 뿐 아니라 삽화에 치밀한 관찰과 대담한 생략은 보는 사람으로 아니 놀라게 할 수 없다.” (소설 예고 사고 ‘연작장편 황원행’, 1929년 5월 31일자 3면)

  당시 다섯 중진 작가와 다섯 화백이 동원된 이 소설 연작에 심산은 성해 이익상과 함께 101~131회(1929년 9월 17일~10월 21일)분을 맡습니다. 

 

1929년 9월 17일 3면,  황원행(荒原行)  이성해 필,  노수현 화
  

  심산의 서화협회 활동이나 조선일보에 이은 중앙일보에서의 활동은 동아일보와 잡지 등에 소개됐습니다.

 “노수현 씨 ‘관폭(觀瀑)’ 기타-‘관폭’은 화폭이 크기도 하려니와 어웅한 암벽이 회장(會場)을 누르고 있다. 씩씩한 화필은 제일 인상만을 살리기에 다름질 쳤다. 직흥적으로 일수(一水)에 표현되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작자의 자연에 대한 영탄적 시경(詩境)만을 맛보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3)’, 동아일보 1930년 10월 25일자 4면)

  “요즘은 삽화도 볼 수 없게 되엇지만 동아일보의 청전(靑田)과 함께 신문 삽화로 세상이 다 아는 동양화가로 청전, 정재(靜齋), 심향(心香), 묵로(墨鷺), 일주(一洲), 이당(以堂) 제씨와 함께 서화미술회에서 연구한 후에도 특히 청전과 같이 안심전(安心田)에게 사숙(私淑)한 산수대가의 한 분이다. 근자에 듣는 바에 의하면 관북지방에서 휘호(揮毫)중이라니 재미 많기를 바라며, 씨의 산수는 어느 화면에서나 정감(靜鑑)한 정취(情趣)를 소근거려 주든 것이 그리웁게도 생각난다. 아모 것도 없는 구석이거니 하고도 다시 눈이 끌리어 보면 뽀-얀 안개속에 갈매기 하나라도 날어가는 것이 새로 보인다. 그러나 씨는 간혹 물을 그리는데서 더러 방황하는 것 같엇다. 술을 즐기나 덤비지 안코, 새악씨처럼 차견차견한 씨는 아호(雅號)가 심산(心汕)이라고.” (이하관<李下冠>,  ‘조선화가총평-노수현 씨’, 동광 1931년 5월호, 69쪽)

 

동아일보 1933년 4월 30일자 4면, 협전(서화협회전)화첩, 이향(離鄕), 심산 노수현

 

  “그리고 중앙일보 노수현(盧壽鉉)씨의 조부 노헌용(盧憲容)씨의 수염도 다수당(多鬚黨)의 총무 자격은 되고…” (강사 다수당 수령<多鬚黨鬚領> 모박사<毛博士>, ‘털보철학, 인물철학 제2강’, 별건곤 1933년 7월호, 21쪽)

 1935년 서화협회전(협전) 평은 당시 동아일보 미술담당 청구 이마동(靑駒 李馬銅)이 썼습니다.

  “동양화부-춘곡 고희동씨, 심산 노수현씨, 청전 이상범씨 등 건재하여 역작들을 보여주심은 기꺼운 일이며 심산 노수현 씨 작 ‘영춘’과 청전 이상범 씨의 ‘소림’은 동양화부장 중 백미일 것이다. ‘영춘’에서 보는 구도의 웅대함과 필치의 창달, 기분의 명랑함을 맛볼 수 있으며 근래에 쾌작일 것이다.” (‘협전을 보고(중)’, 동아일보 1935년 10월 26일자 3면)

  심산은 1937년 동아일보에 다시 들어오기 한해 전 잡지 ‘삼천리’가 마련한 좌담회에 나가 삽화가로서의 애환을 토로합니다.

  좌담 ‘화가가 미인(美人)을 말함’, 삼천리 1936년 8월호, 116~126쪽 

“조선에서 미인을 구할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기생 가운데서야 참말 미인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건 그럿습데다. 비단 여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조선 사람의 얼골은 다른 곳 사람들에게 비하면 혈색이 업고 윤택이 업서 보이는 것은 생활 문제로 할 수 업는 일이지요. 그러치만는 그 대신 한 가지 다른 곳 여학생보다는 빼난 것은 각선미가 풍부한 점이지요”
“참 그래요. 시대물을 그리자면 위선 상식을 엇기 위해서는 늙은 노인들한데 가서 직접 그 시대의 상식을 무러보는 수박게야 업지요. 그러나 어떤 분은 그것도 잘 알여 줄야고도 하지 안흐니까요. 그러니까 시대물을 그리랴는 삽화가는 그 화가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는 전문적으로 고대물에 대한 모든 상식을 연구해야 하겟서요.”
“이조시대는 문제 안되지마는 고려 이전으로 올나가면 역사가들에게 물어보아도 어름 어름하니 이게 되겟서요.”“그것도 그럿치마는 사실 삽화가의 존재를 신문사나 일반 사회에서는 넘우나 무시하는 듯 합데다 삽화가라고 하면 삽화만 그리는 것이 아니고 으레히 기자로서 활동해야 하고 또 무슨 통계표니 무슨 스켓취니 해서 눈코 뜰 사이조차 업시 부담이 넘우나 만치요. 그래노니 신문 소설의 생명인 삽화를 자신잇게 그려 볼 수가 잇나요. 좀 더 삽화가에 대한 우대가 절실히 필요한 줄 압니다.”
“제일 삽화가로서 기맥히는 때는 그림이 잘 되엇슬 때 공교로히도 인쇄 직공의 잘못으로 빠저 버린다든가 편집 관계로 지면이 모자라서 부득이 빼여 버릴 때는 참으로 기맥힙데다.”

  심산이 동아일보에 재입사한 것은 청전 이상범이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아일보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3일자 7면, 사고
 
 

화단 중진에 위탁 삽화진(揷畵陣)의 강화

종래 연재물 일체 중지-동아일보사 편집국

 

재입사 후 첫 삽화는 이규희 소설 ‘피안(彼岸)의 태양’(1937년 6월~10월, 122회)입니다.

 

1937년 6월 3일자 4면, 피안(彼岸)의 태양

 

  복면자 작(作) 노수현 화(畵) ‘만향(晩香)’은 1937년 12월부터 1938년 7월까지 210회 연재됐습니다.

 

동아일보 1938년 1월 3일자 9면, 심산 노수현 씨 시호(試毫)

 

  이근영(李根榮)의 중편소설 ‘제3노예(第三奴隷)’는 심산의 삽화와 함께 1938년 2월부터 1938년 6월까지 96회 연재됐습니다.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를 떠났던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無影塔)’은 1938년 7월부터 1939년 2월까지 심산의 그림과 함께 164회 연재됐습니다.

  “일천사오백년 후에 난 우리가 신라시대에 살아서 그 시대를 호흡하고 그 시대에서 생활할 수 잇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작자에게 감사해야 하지 안흘까 합니다. 삽화는 여러분이 항상 정을 부쳐온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씨. 그리고 20일부 조간부터 연재될 터입니다.” (소설 ‘무영탑’ 연재 사고, 1938년 7월 19일자 2면)

 

 1938년 7월 20일자 조간 4면, 무영탑(無影塔)

 

  청전 이상범의 그림과 함께 1935년 9월부터 연재되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당하는 바람에 중단됐던 김말봉(金末峯) 여사의 장편소설 ‘밀림(密林)’ 후편(1938년 7월~12월, 96회)의 삽화도 심산이 맡았습니다.

  “여러분의 애독을 받아오던 이근영(李根榮)씨의 중편소설 ‘제삼노예’가 끝나는 뒤를 이어 7월 1일부터 심산 노수현씨의 삽화와 아울러 실리겟습니다.”(장편소설 ‘밀림’ 후편 연재 사고, 1938년 6월 28일자 2면)

 

1938년 7월 1일 조간 3면, 밀림(密林) 후편

 

 심산은 서항석(徐恒錫) 기자와 함께 1938년 8월 황해도 장수산(長壽山)을 찾아 ‘비경탐승(秘境探勝)’이란 제목으로 그림을 연재합니다.

 

1938년 8월 9일자 3면, 비경탐승(秘境探勝) 2, 황해 금강 장수산(1)
 

 

  그러든 것이, 기회는 우연을 조하하는지, 뜻하지 안흔 황해(黃海)금강(金剛) 장수산행(長壽山行)의 길이 내 앞에 트엿다. 동행은 심산 노수현 화백이다. 종일 안두(案頭)에 남의 원고나 훌터 보는 것이 일이오 가끔 먼길을 간대야 고향을 다녀오는 것이 고작인 내가 3일 예정의 산행을 나선 것은 장도라면 장도다.

 

1938년 8월 31일자 3면, 비경탐승(秘境探勝) 2, 황해 금강 장수산행(완)

 

(그림은 상은 옥녀탐금대, 하는 녹족정)

 

1939년 1월 3일자 13면, 심산 노수현씨 필

 

  “독견(獨鵑, 최상덕-인용자 주)의 작품은 참 쉬운 편이드군요. 요즈음 실니는 ‘연애비상선(戀愛非常線)’이 이 분의 작품으로서는 처음 대하는 것인데도 다른 작가의 것처럼 어럽지 안허요. 그러나 자주 그려 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태준씨의 작품이 내가 삽화 그리든 중에서는 가장 조트군요. 이 분의 작품은 선이 부드럽고 등장하는 인물이 적어서 간결한 맛이 나는 작품임으로 아주 쉽지요. 이 분의 작품은 여러번 대하여 보앗지마는 거개가 그래요.” (노수현, 좌담 ‘화가가 미인(美人)을 말함’, 삼천리 1936년 8월호, 120쪽)

  “여기에 삽화(揷畵)는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씨. 씨를 여기에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장편소설 ‘딸 삼형제’ 연재예고 사고, 1939년 1월 30일자 2면)

 이태준의 소설 ‘딸 삼형제’(1939년 2월~7월, 133회)의 삽화도 심산이 맡았습니다.

  “삽화는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씨로 이 삽화를 맡은 후로 당시의 의복을 고증적으로…펴 보려하는 바이다.”(소설 ‘석영홍(夕陽虹)’ 연재 예고 사고, 1939년 2월 19일자 2면)

  “한설야(韓雪野) 작 노수현(盧壽鉉)화-삽화는 역시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씨로 점점 화려해 가는 씨의 필치를 또 대할 수 잇는 것도 기쁜 일이다.” (신 연재 장편소설 ‘마음의 향촌(鄕村)’ 예고, 1939년 7월 12일자 2면) 

  윤승한의 ‘석양홍’(1939년 2월~10월, 215회)과 한설야의 ‘마음의 향촌’(1939년 7월~12월 ,140회) 삽화도 심산의 작품입니다.

   심산은 ‘무영탑’에 이은 현진건의 역사소설 ‘흑치상지’(1939년 10월~1940년 1월, 52회)에도 삽화를 그렸으나 이 소설은 일제의 탄압으로 게재가 중지됐습니다.

“현진건(玄鎭健) 작 노수현(盧壽鉉) 화-삽화는 노수현(盧壽鉉)화백이 여필로 짝을 하게 되엇으니 만천하 독자의 애독을 바라는 바입니다.” (신 연재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사고, 1939년 10월 24일자 2면)

 

1939년 10월 25일자 4면, 흑치상지(黑齒常之)

 

 “그의 마지막 소설은 40년 동아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흑치상지’. 멸망한 백제의 유장(遺將)이 의병을 일으켜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과 싸우는 역사물로 일제에 대한 노골적인 반항의도 때문에 52회로 강제중단 당했다(이 유고는 월탄(月灘)이 소장중).”(‘문단반세기-빙허(憑虛)와 상화(尙火)’, 동아일보 1973년 5월 3일자 5면)

  유진오가 쓰고 심산이 삽화를 그린 장편소설 ‘화상보(華想譜)’ (1939년 12월~1940년 5월)는 140회 연재됐습니다.

 “삽화는 갈수록 묘경에 들어가는 심산 노수현(心仙盧壽鉉)씨이고…” (장편소설 ‘화상보’ 연재예고, 1939년 11월 30일자 5면)

  윤승한의 ‘조양홍(朝陽虹)’(1940년 2월~)과 이기영의 ‘봄’(1940년 6월~)의 삽화도 심산이 맡았으나 19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한 동아일보의 폐간으로 각각 160회, 59회까지 연재되다 중단됩니다.

 

1940년 2월 6일자 4면, 조양홍(朝陽虹)

 

 “‘봄’ 민촌 이기영(民村 李箕永)씨 작,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씨 화- 삽화는 거이 독보적 경지를 개척하고 잇는 심산 노수현가…”(‘차회(次回)연재 장편소설 예고=거탄(巨彈)의 농민소설’, 1940년 6월 7일자 2면)

 

1940년 6월 11일자 석간 7면, 봄

 

  “게다가 심산은 본격적인 신문만화를 연재하는 등 현실 속에서의 화업을 영위했다. 심산의 만화작업은 이제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윤범모 경원대 미술대학 교수, ‘심산 노수현의 현실의식과 관념세계’, 조형포럼, 서울대조형연구소, 2000년, 128쪽)

 “비슷한 환경에서 예술의 길을 걸은 청전과 심산을 대비해보면 청전이 문기(文氣) 짙은 산수(山水)라고 한다면 심산은 격식 짙은 산수라고 특정 지을 수 있다. 청전산수의 독자성은 실경을 바탕으로 한 한국 산야의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면 심산 산수의 독자성은 관념 산수의 엄격한 골격에서 정신미를 찾아야 될 것 같다.” (미술평론가 오광수<吳光洙>, ‘고 심산 노수현 화백의 생애와 예술’, 동아일보 1978년 9월 8일자 5면)

 “심산의 회고에 의하면 청전이 타계할 때까지 거의 전생애를 그와 같이 교우하면서 크게 한번 다툰 적이 없이 더불어 그림에 대해 논하고 때때로 술을 들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최연희, ‘심전 노수현에 관한 연구’, 서울대 회화학과 1978년 석사학위 논문, 9쪽)

 “40년대부터는 스승인 심전과 소림의 영향권에서 탈피, 개성적인 화법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가령 20년대까지의 청록산수는 화격이니 준법 등에서 전통회화를 근대적인 감각으로 다룬 것으로 볼 수 있다. 30~40년대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격이 그의 예술세계에서 재창조되어 새로운 회화로 변모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이 무렵 그의 화경(畵境)은 외로운 예술가의 정신이 회화의 원칙을 따라 화폭에 실현되었다. 그가 표현한 산은 실제의 산이라기보다 그의 머릿속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관념의 산이다. 30년대 이후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은 바위의 표현이 의인화(擬人化)되는 경향. 바위를 무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혼이 담겨져 있는 생명체로 느꼈던 것이다. 이 같은 심산의 예술세계는 50년대 이후 그대로 지속되어 왔는데 50년대 후반부터는 암산(岩山)을 주축으로 골격미를 풍부하게 전개시킨 가작을 내놓았다. 그러나 근작에서는 점묘를 구사함으로써 바위의 묘사가 주는 딱딱한 느낌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기도 했다.” (김담구 기자, ‘고 심산 노수현 화백의 생애와 예술’, 동아일보 1978년 9월 8일자 5면) 

  “1974년 회고전 때 전시작품 중 초기의 것으로 채색이 많이 들어간 섬세한 터치의 대작을 보고 초기 작품 가운데서도 그렇게 훌륭한 것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분의 그림은 중국화 냄새가 나지 않아 호감이 간다.” (동양화가 천경자,  ‘고 심산 노수현 화백의 생애와 예술’, 동아일보 1978년 9월 8일자 5면)

 

일정시대 퇴사직원록-노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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