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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문사(文士)기자 서정주(徐廷柱)

Posted by 신이 On 11월 - 4 - 2016

서정주(徐廷柱, 1915~2000)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벽’ 당선 등단
1948년 사회부 기자, 문화부장, 1953년 퇴사

 

1936년 1월 3일자 2면, 서정주 ‘벽’ 당선 신시(新詩)

 

동아일보 1936년 1월 4일자 1면 신촌문예 당선자 소개(1)

 

신시(新詩) 당선 김혜숙(金惠淑), 서정주, 단편소설(가작) 정비석(鄭飛石)

 

 서정주(1948~1953. 동아일보 기자, 문화부장)
 ‘인촌 김성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사, 1985년, 218~219쪽)

원래 우리 집안은 양반가였지만 조부가 도박을 좋아해 재산 다 날려버리는 바람에 아버지는 재주가 있었지만 나라도 때맞춰 망하여 과거도 보지 못하고 6개월짜리 측량학교 과정을 마치고 고창군 측량기사로 일본인 밑에서 측량을 하다가 인촌 선생의 양부(養父) 되시는 동복영감(祺中公)의 땅을 대게 되었다. 원래 부친은 백일장에서도 장원도 한 문재(文才)도 있어 얼마 안 되어 인촌 선생의 양부님 눈에 들어 비서인 서생(書生)이 되어 편지 대필도 하고 경리도 담당 했으며 소작료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큰 지주 밑에 작은 지주 생긴다고 생활도 점점 나아지고 인촌 댁이 서울로 이사 가자 마름(舍音)을 맡아 관리했다. 내가 인촌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보통학교 5학년 땐가 6학년 땐가 그랬다. 인촌은 아버지보다 대여섯 살 위였다. 그런 데도 아버지를 만나면 언제나 ‘서 선생’ ‘서 선생’ 하던 것이 인상에 남는다. 나는 인촌 선생과의 인연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광주학생사건 때문에 학교에서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시골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름을 그만 두고 고창 읍내로 이사를 나왔다. 그것이 1931년이던가, 그러면서 인촌과 멀어지게 됐는데 아주 소원한 것은 아니었다. 동복영감(祺中公)이 아버지를 매우 신임하여 땅을 살 때나 팔 때는 꼭 아버지를 오라 했다. 고창고보에 편입학 했으나 그 후 다시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총독부의 퇴학 종용을 받고 자퇴한 후 놀고 있는데 아버지가 인촌 선생이 줄포 댁에 내려 왔으니 가서 인사 여쭈라 하여 줄포로 갔다. 그분은 사랑채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올리자, “자네 몇 시 차로 왔능가?” 하셨다. 그래서 나는, “예, 넉 시 차로 왔습니다.” 했더니 선생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 이런, 넉 시라는 말도 있나? 이 사람아, 넉 점이면 넉 점, 네 시면 네 시지 넉 시가 뭔가? 하하하”  홍안무색, 아무 말도 안 했으나 무척 창피했다. 그 말이 그 후 내가 시인된 잠재적인 자극이 된 것 같다. 그 후로는 뵙지 못했는데 1935년 이던가 내가 혜화전문에 다닐 적이었는데 집에서 보내준 학비를 모두 술 마셔 버려 빈 털털이가 된 적이 있었다. 급한 김에 계동으로 인촌 선생을 찾아가서 집에서 학비가 오지 않아 그러니 도와주십사 했다. “얼마나 되는디?”  “삼십 원 올시다” “아 그래? 잠깐만 기다리게” 그러더니 담박 돈을 내주셨다.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하면 생면부지의 학생에게도 언제나 도와주시는 것 같았다. 그분은 교육 제일주의자였다. 일제 말년에는 징용을 안 가려고 시골집에 내려가 면 서기를 했다. 해방이 되어 서울에 올라 왔는데 취직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인촌 선생의 넷째 아드님인 상흠(相欽)에게 동아일보에 들어가게 힘 좀 써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인촌 선생께 내 얘기를 했는지 담박에 허락이 나서 그것도 평기자도 아닌 문화부장이란 감투를 쓰게 되었다. 어느 날 인촌 선생이 오라 신다 기에 계동 집으로 찾아갔더니 반갑게 손을 잡아주시는 것이었다. “자네지 참. 자네 시가 아주 훌륭하다며? 문학이 좋다고들 하데. 나도 자랑스럽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넉시’ 생각이 나서 속으로 웃었다. 그 때문에 내가 시인이 된 것 같다. 훌륭한 이의 영향이란 그렇게 큰 것이다.

 

인촌 선생 생각, 서정주(동아일보 1965년 2월 16일자 5면) 

사기나 유기
밥그릇을 보면
인촌·김성수 선생이 만이 생각나는 것은 묘한 일이다.
미나릿 강이나
쑥 굴헝에서도
또 묘하게 그의 생각은 만이 난다.

우리 중고등 학생들의 모자와 양복 쇠단추
대학생 옷깃의 뺏지에서도 물론
이 분 생각은 만이 난다.

신문지야 신문지야
울멍이는 날이 너무 많은 한국의 신문지야
네 얼굴에서도
역시 김성수 선생 생각은 제일 만이 나고

삼일절 독립만세 날을 생각하면
맨 앞 선봉대의 시발점
그의 댁 대문이 환이 열려 있다.

열일곱살 짜리 소년의 음성 그대로
이승에서 그의 생각은 참 만이 나지만, 또 저승에서도 묘하게는 만이 난다.

 

인촌 어른과 동아일보와 나(서정주시집 ‘안 잊히는 일들’, 1983년 5월) 
1931년 여름에
인촌 김성수 선생이 고향에 오셔서
나도 같은 고을 소년이라 문안을 갔더니,
‘자네 몇 시 차로 왔나?’하시어
엉겁결에 ‘넉시 차로요’ 대답을 했었다.
그랬더니
‘네시면 네시고, 넉점이면 넉점이겠지,
넉시라고 쓰는 말도 조선말에 다 있나?
에이끼 이사람!’
하시는지라, 무안하여 집으로 돌아와서는
우리말 다루기에 무진 애를 써
1936년 1월 1일의 동아일보 신춘현상문예에
‘벽’이란 시로 당선을 했었다.
그 뒤, 1945년의 해방 뒤의 미군군정 때
내가 동아일보의 사회부장으로 뽑히어
인촌과 한 상에서 점심대접을 받았는데.
그는
‘자네가 우리말을 썩 잘 다루는
좋은 시인이 되었다면서? 잘했네 잘했어!
어디, 우리 동아일보 한번 잘 꾸며 보아.’
1931년의 그 ‘넉시’ 사건이 엊그제련 듯
많이 좋아라고 칭찬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내 문학정신 속에는
‘아무리 심한 곰보라도 잘 살펴보면
이쁜 구먹도 하나 둘은 있으리라.
그러니 다난한 동포들 헐뜯지만 말고
장점을 찾아내 격려해 주어라.
그래야만 자랄 만한 게 자랄 것 아니냐?’
하는 동아일보의 사원훈(社員訓)과 함께
인촌의 그림자도 어리어 있는 것이다.

 

1933년 12월 24일자 3면, 그 어머니의 부탁

 

 1934년 5월 8일자 3면, 서울 가는 순이에게

 

 1934년 11월 23일자 3면, 비 나리는 밤

 

 1935년 8월 31일자 3면, 죽방잡초(竹房雜草) 상

 

 1935년 10월 30일자 3면, 필파라수초(畢波羅樹抄), 11월 3일자까지 상중하 연재

 

 1936년 2월 4일자 4면, 고창기(高敞記)

 

1946년 4월 30일자 2면 , 윤봉길의사의 날에

 

 1946년 7월 16일자 4면, 문학자(文學者)의 의무

 

 1955년 8월 14일자 4면, 곡(哭) 영랑(永郞) 선생

 

 1956년 4월 4일자 4면, 학(鶴)의 노래(김환기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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