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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문사(文士)기자 김동환(金東煥)

Posted by 신이 On 11월 - 2 - 2016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豆滿江)을 탈 없이 건넜을까?”

 서사시 ‘국경의 밤’을 쓴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 1901~1950 납북)
 192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 1925년 5월 퇴사.

 

 

  일본 동양대학 문학과를 수료하고 소오 설의식(小梧 薛義植)의 소개로 1924년 10월 동아일보에 입사, 사회부 기자가 돼 1925년 봄 함경북도 일원을 돌며 일본인들이 이 지역 토지와 어장을 탈취하는 참상을 파헤치는 사회면 머리기사를 연이어 썼습니다.   

 

1925년 2월 27일자 2면

 

제2회 지방순회
금일 오후 11시 출발
함북 일원 김동환

가장 의미있고 가장 곤란이 많은 본사 기자의 지방순회는 여러가지 방면으로 적지 아니한 희생을 들여가면서 단행한지 월여에 다행히 다방 인사의 많은 원조와 다름없는 애호를 힘입어 예기 이상의 성적으로써 일반 동포의 기대를 크게 저버리지 않게 되었음은 실로 본사의 자랑인 동시에 영광이외다. 한달 동안의 예정으로 출발하였던 제1회의 남북대순회기자는 황해와 경북의 일부를 마치고 수일전 귀사하여 이제 다시 제2회로 함경북도 일원을 순회할 예정인데 예정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성진(城津)—길주(吉州)—명천(明川)—진성(鎭城)—부령(富寧)—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주(慶州)—경흥(慶興)
제1회에 마치지못한 곳은 추후하여 계속할 예정이며 한 도내(道內)중에서도 빠지게 된 곳은 달리 계획하는 바가 있사오니 미리 양해하시고 이르는 곳마다 다름없는 원조를 아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동아일보사

 

1925년 4월 2일자 2면

 

일인 독점의 북국(北國) 보고(寶庫) (一)
임야는 주우(住友, 일본인 남작)에게
임야의 태반은 주우 일개인의 독점
지원(地元) 주민의 원한은 그야말로 창천
경성(鏡城)에서 순회기자 김동환

◇ 함북 임야 총면적 일백육십일만팔천 정보(町步)

경성에서 팔천 정보
경성 전체의 6할2분을 차지

부령에서 삼분지(三分之) 일
삼천팔백십 정보가 주우 소유

독점경로(獨占經路)
이렇게 저렇게
금권 관권의 전횡(專橫)

 

1925년 4월 3일자 2면

 

일인 독점의 북국(北國) 보고(寶庫) (二)
어장은 오전(奧田, 귀족원의원)에게
육지에 주우와 같이 바다에는 오전
해마다 줄어드는 조선인측 수산업
경성(鏡城)에서 순회기자 김동환

자본과 세력의 폭위하에
어장을 매년 방매(放賣)
자본과 세력에 눌리는 조선인
경영난으로 해마다 헐가 방매

수십만원 가격의 어장 19개소를 독점
기타 수십개소도 일인의 경영
공장등 모든 설비를 점점 늘여
조직적 이권 점령 계획

 

1925년 4월 4일자 2면

 

일인 독점의 북국(北國) 보고(寶庫) (三)
토지는 우근(右近)에게
임야를 뺏기고 어장을 뺏기고 토지까지
간신히 남은 밑천은 또다시 저당에 제공
경성(鏡城)에서 순회기자 김동환

시가지 일인 소유
면적=약 4배
가격=약 10배
그다음 집 짓고 농사하여 먹는 땅덩어리는 어찌되었는가함을 보건대 도내에 가장 상공업지로 유명한 청진 라남 성진 회녕 웅기 등 시가지는 거의다 전부가 우근좌우위문(右近左右衛門) 등 일본사람에게 가있는데 이제 그 면적을 기록하건대(하략)

 

1925년 4월 10일자 2면

 

6백여 만 평〓15구
광산 전부가 일인 소유
조선인 측 소유는 한 평도 남지 않아
일인 세력에 죽어가는 조선인 현장
부령에서 순회기자 김동환

부령군 일대는 땅속에 무진장의 부원(富源)이 잠겨있어서 금이나 은 동 철 등 광맥이 도처에 있어 123방리나 되는 부령군 면적 전부가 거의 광맥에 쌓였는데 현재 경영하여나가는 15개소 면적 6백만여 평의 광구 전부가 한 평 남기지않고 모조리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이같이 된 원인은 자본의 세력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관계 당국자들의 불공평한 처치로 조선 사람들이 청원을 하면 대부분은 불허가가 되고 일인이 청원하여야 허가되는 기괴한 상태로 현재 각처의 광구와 소유자를 조사하면 아래와 같다.(하략)

 

  김동환은 통계 숫자를 토대로 현지의 실태를 분석하면서 알기 쉽도록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본사에서는 이 기사들의 제목 옆에 2호 활자로 ‘순회기자 김동환’이라고 병기해 눈에 띄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해 5월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의 급료 인상 투쟁에 가담했다가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철필구락부는 1924년 11월 사회부 기자들이 결성한 단체였다. 당시 사회부 기자들은 ‘기자중의 기자’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그들만의 독자적인 단체를 결성했던 것이다. 총독부의 강압적인 통치로 정치가 실종되었던 당시로서는 정치, 경제부 기자보다 사건을 쫓는 사회부 기자가 더 활기있고 기자로서의 사명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필구락부는 이듬해 5월 임시총회를 열고 회원들의 급료 인상을 각 신문사에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우리나라 언론 사상 최초로 기자 단체가 급료 인상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김동환이 순회기자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첫 시집 ‘국경의 밤’을 출간한 직후의 일이었다…(중략)…이 일로 동아일보 사회부 소속 기자 5명이 집단 해임되고 말았다. 해임된 기자는 김동환, 임원근, 유완희, 안석주, 심대섭(심훈)이었다.”(정진석 교수, ‘역사와 언론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년, 429~431쪽)

동아일보 1927년 5월 19일자 3면
애국문학에 대하여(8)
국민문학과의 이동(異同)과 그 임무
김동환(金東煥) 

“이렇게 망국의 시인들은 정치상 해방운동이 자국에 일어날 때에 같은 전선에 나서서 애국문예를 높이 치켜들고 도전과 선동과 항쟁으로써 완전한 지익(支翼)의 임무를 다하였다. 즉 무기를 든 정치행동이 지역적, 주권적 국가를 전취(戰取)할 때에 문예 행동으로는 정신상, 문화상 조국을 완전히 탈환한 것이다.…(중략)…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앞에는 ‘조국의 ××’이라는 명제가 무엇보다도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걸려있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이 무산대중의 손에 이루어질 ○○○○운동을 애국주의라 명명하자. 이 애국주의적 사상을 배경으로 한 문예행동을 애국문학운동이라 부르자는 것이다.” 

  “사회부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철필구락부 회원 중 좌익계 동아일보 기자들이 봉급인상을 걸고 스트라이크를 했다. 파인도 여기에 끼었던 것이다. 그때 동아, 조선, 중외의 3대 민간신문사 기자들의 봉급은 60원에서 70원 사이였다. 학교 교원 월급이 35원에서 40원 밖에 안 되는 판에 이 정도였으니 사회에서 역시 신문기자는 무관의 제왕이라 월급도 많이 받는다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자들의 욕구는 그것이 아니다. 월급을 평균 80원으로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동아일보는 주주들이 영호남의 대지주들로 재력이 풍부하니 동아에서 먼저 임금인상 투쟁을 벌여라, 동아에서 관철되면 그것을 도화선으로 하여 조선, 중외에서 잇따라 봉급투쟁을 할 터이라고 협의하고 시작한 봉급인상 투쟁이었다. 그러나 동아가 창간한지 5년 밖에 안 돼 흑자도 못낸 형편에 그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태업이 시작되고 스트라익이 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주동자와 가세한 기자들은 숙청당했다. 이에 연좌된 파인도 사표를 내야 했다. 이때 그를 아껴주고 지도해줬던 소오(설의식)와 종석(유광렬)이 사석으로 데리고 가 ‘왜 그런 명분이 안서는 짓을 했는가’ 라고 나무래자 ‘내가 철이 없이 순진한 탓이다. 선동하는 선배기자들이 좌익계인줄을 모르고 그런 우를 범했다’고 후회하더라는 것이다.”(곽형근 전 민국일보 기자, ‘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1992년) 

  그가 동아를 떠난 후에도 그의 글은 동아일보 지면을 빛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5월 19일자 3면

 

애국문학에 대하여 (8)
국민문학과의 이동(異同)과 그 임무
김동환(金東煥)

이렇게 망국의 시인들은 정치상 해방운동이 자국에 일어날 때에 같은 전선에 나서서 애국문예를 높이 치켜들고 도전과 선동과 항쟁으로써 완전한 지익(支翼)의 임무를 다하였다. 즉 무기를 든 정치행동이 지역적, 주권적 국가를 전취(戰取)할 때에 문예행동으로는 정신상, 문화상 조국을 완전히 탈환한 것이다…(중략)…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앞에는 ‘조국의 ××’ 이라는 명제가 무엇보다도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걸려있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이 무산대중의 손에 이루어질 ○○○○운동을 애국주의라 명명하자. 이 애국주의적 사상을 배경으로 한 문예행동을 애국문학운동이라 부르자는 것이다.

  잡지 ‘삼천리’를 발행하면서 잡지 편집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김동환은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삼천리’ 잡지 제호를 ‘대동아’로 바꾸는 등의 친일행위가 문제돼 광복 후 반민특위 법정에 섰습니다.

  반민특위 법정에서 김동환은 재일조선인총연맹, 신간회 간부로 민족운동에 투신한 바 있으나 적치(敵治) 소화 16년(1941년)경 변절, 피고가 경영하던 잡지 ‘삼천리(三千里)’를 통해 일제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하였다는 공소 이유에 대해 “삼천리에 게재되었던 전쟁협력에 관한 논문을 쓴 것은 그 당시의 강압적인 주위환경으로 보아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솔직히 과거의 반민족 전쟁 협력 사실을 시인하였다.”고 합니다. 

 

1949년 5월 7일자 2면
삼천리 사장 김동환(金東煥) 변절 고충을 고백(반민특위)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의 출입처는 종로경찰서였다. 경찰기자로는 베테랑이 출입하는 포지션이었다. 항일운동가나 그들이 말하는 사상범이 많이 잡혀온 곳이 바로 종로서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인사동에 있는 조선극장에서 광주학생들이 부르짖는 독립만세와 ‘전국 학생들이여, 궐기하여 항쟁하자!’는 삐라를 뿌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청년을 왜경이 붙잡아 가는 광경을 목격, 취재하고 돌아온 파인이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개 끌듯 끌고 가는 ×새끼들’ ‘짐승만도 못한 놈들 같으니’ 란 등 편집국이 떠나가게 욕을 하고 있었다. 사회부장 종석(유광렬)이 ‘기사는 안 쓰고 왜 그렇게 소리만 지르고 있어? 기자는 본대로 그대로 기사를 쓰면 되는 거야, 흥분하면 안돼요’하고 나무랬다는 것. 파인은 그렇게 다혈질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바쁜 경찰기자로 뛰면서 그는 시를 써 ‘국경의 밤’이라는 시집을 냈다. 국경지대에 사는 한 청년이 여진족의 후예인 가련한 소녀와의 ‘러브스토리’인 장시(長詩)인데 역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민족 항쟁, 일본의 앞잡이인 밀정의 말로 등 다감한 필치로 그려 이것을 발판으로 문단에 등단했었다. 1935년,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병 25주년이 됐다 하여 그 기념사업으로 경복궁 안에다 산업박람회를 열었다. 파인은 이때 사회부차장으로서 총독부 출입을 맡고 있었다. 산업박람회가 끝나자 총독부 산업국은 박람회 사업선전비 예산이 남았을 뿐만 아니라 수익금도 많았다 하여 출입기자단에다 촌지를 내놨다. 그것이 말이 촌지이지 그 당시로는 거금이었다. 기자 한사람 앞에 2천5백 원씩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총독부의 촌지는 거의 공개적이었는데 파인은 상사인 유광렬에게 이 촌지를 어떻게 썼으면 좋겠는가고 의논했다. 원래 성실하고 근검절약형인 종석 유광렬은 ‘공돈이라 하여 동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값으로 탕진하지는 말라. 뒀다가 유익하게 쓰라’고 충고해주었다. 딴 신문사 몇몇 기자들은 집도 한 채 사고 남은 돈으로 동료들과 매일 밤 요정에 다니면서 탕진했으나 파인은 동료들에게 저녁 한 끼 사고는 은행에 예금해 뒀다. 파인은 이 돈으로 남몰래 삼천리사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그러고서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삼천리’라는 잡지(1935년 여름호)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파인 김동환이 38년 삼천리사 여기자였던 여류작가 최정희를 아내로 맞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동숭동 문화주택에서 단란히 살고 있었는데 6.25가 터졌다. 전 경향신문 문화부장이었고 서울신문 주간국장이었던 김진찬이 쓴 ‘그 사람 그 얘기’ 속에 쓴 파인론에 의하면 6.25때 숨어있던 파인은 공연히 집에 나타나 납북되었다는 것이다. 북쪽 사람들이 집에 와서 부인더러 ‘남편 숨어있는 곳을 대라, 왜 남편에게 연락해서 나오도록 하지 않았느냐’느니 위협하고 못살게 한다는 말을 듣고 은신처에서 나온 것이다. 숨은 곳에서 나가기만하면 북으로 끌려가든가 아니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내와 어린 딸들이 시달림 받는 것이 더 아파서 나타난 것이다. 그때 파인은 49세였고 부인은 38세였다.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 아란은 아홉 살이었고, 그 아래 채원은 다섯 살이었다. 김진찬은 그 단장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런 부부가 헤어지는 마당이었다. 두 사람이 호주머니를 터니 보리쌀 국밥 한 그릇을 살 수 있었다. 그 국밥을 가운데 놓고 서로 먹으라고 권했다. 당신은 끌려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어서 먹으라고 하면, 자기는 끌려가면 주먹밥이라도 얻어먹게 될 게 아니냐며 나보고 먹으래요.’(아내 최정희의 말) 결국 목이 메어 두 사람 다 먹질 못한 채 식은 국밥을 고스란히 두고 파인은 가고 말았다‘고.” (곽형근 전 민국일보 기자, ‘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1992년)

 

  납북뒤 그의 소식은 1962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석간 3면에 전해졌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김억은 평양시외 국영출판사에서 각종 신문, 잡지 정리와 교정을 보았고 합숙소에 기거하면서 잡곡과 날된장만 먹어 몇 달 안에 병이 들었으며 김동환은 평남일보 교정원 및 제본원으로 배치돼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죽음의 세월 납북인사 북한생활기(26), 김억, 김동환 냉혹한 눈초리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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