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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문사(文士)기자 민태원(閔泰瑗)

Posted by 신이 On 11월 - 2 - 2016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 정인보, 염상섭, 이서구, 주요한, 현진건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에 기록된 당대의 문인, 지식인들이 일제하 동아일보에 몸담았습니다.

 

민태원(閔泰瑗, 1894~1935) 1923. 5. 동아일보 사회부장, 정치부장, 1924. 5. 퇴사
김억(金億, 1893~1950 납북) 1924. 5.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월요란 주임), 1925. 8. 퇴사
김동환(金東煥, 1901~1950 납북) 1924.10. 동아일보 기자, 1925. 5. 퇴사
심훈(沈薰, 1901~1936) 1924.10. 동아일보 기자, 1925. 5. 퇴사.
채만식(蔡萬植, 1904~1950) 1925. 7.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1926.10. 퇴사
서항석(徐恒錫, 1900~1985) 1929. 4. 정치부, 학예부 기자, 학예부장, 1938. 9. 퇴사
주요섭(朱耀燮, 1902~1972) 1931.10. 신동아 기자, 잡지부장, 1934. 8. 퇴사
이은상(李殷相, 1903~1982) 1932.10 .신동아 기자, 1935. 4. 퇴사
고형곤(高亨坤, 1906~2004) 1933. 5. 신동아 기자, 1935. 2. 퇴사
변영로(卞榮魯, 1898~1961) 1933. 9. 정치부, 잡지부 기자, 1938. 1. 퇴사
이무영(李無影, 1908~1960) 1935. 5. 학예부 기자, 1939. 7. 퇴사
이하윤(異河潤, 1906~1974) 1939. 9. 학예부 기자, 1940. 8. 폐간
서정주(徐廷柱, 1915~2000) 1936. 1. 신춘문예 시 ‘벽’ 당선. 1948. 사회부 기자, 문화부장, 1953. 퇴사           

 

한국 문장사에 길이 남을 ‘청춘예찬’의 우보 민태원(牛步 閔泰瑗)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중략)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람의 풀이 돋고,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중략)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으므로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釋迦)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광야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孔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撤還)하였는가?
보라, 청춘을!
(중략)
그것은 웅대한 관현악이며, 미묘한 교향악이다. 뼈끝에 스며들어가는 열락의 소리다.(1929년 ‘별건곤<別乾坤,별세계>’ 6월호) 

 

 1917년 매일신보 사회부 초년병  민태원 기자.

 선린상업 졸업식 취재를 나가 마감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데스크에서 졸업식순을 보고 기사를 만들어 넣었다.
 12시 마감시간을 지나 오후 1시 가까이 신문이 나올 무렵 민태원 기자가 나타났다.
 편집국장 겸 사회부장 이상협은 “ 마감시간에도 안 들어오고 어디서 무얼하고 이제사 나타나는 거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뻘건 민태원. “식이 끝나고 나오려는데 교장이 하도 붙들기에 축하술 한 잔 마시다보니…”
 “아니 손님으로 갔던가? 신문은 언제 만들꺼야. 그 참 정말 지지우보(遲遲牛步)로군…” 

 

  그로부터 민태원은 ‘우보(牛步)’가 됐습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며 초대 편집국장을 맡은 이상협은 ‘우보(牛步) 민태원’을 동아일보 창간작업에 합류시켰습니다.
  민태원은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부터 ‘민우보(閔牛步)’라는 필명으로 엑토르 말로의 ‘집 없는 아이’의 일본 번역서 ‘오노가쓰미’(己が罪, 내가 죄)를 번안, ‘부평초(浮萍草)’라는 제목으로 그 해 9월 4일까지 113회 연재했습니다.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4면 연재소설 ‘부평초(浮萍草)’ 1회  

 

민태원은 이어 ‘무쇠탈’을 1922년 1월 1일부터 8월 20일자까지 165회 또다시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무쇠탈’ 은 프랑스 소설 ‘아이언 마스크’를 일본 작가가 ‘철가면’으로 일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번안소설입니다. 

 

1922년 1월 1일자 8면 연재소설 ‘무쇠탈’ 1회

 

  민태원은 동아일보가 창간된지 얼마 안돼 동경통신원으로 동경에 있으며 이들 소설을 썼습니다.

 

  “편집국장 하몽(이상협)은 주간 장덕수를 설득, 우보(민태원)를 도쿄통신원으로 보냈다. 말이 통신원이지 그 속셈인즉 우보를 큰 재목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꼭 대학교육을 받게 해야겠다는 것. 그 다음은 대학에 다니는 한편으로 아사히(朝日), 마이니치(每日) 등 일본신문사에서 새로운 신문제작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덧붙여 일본 신문 잡지에 소개된 서구의 국제정세 동향 등도 보내오게 하기 위한 다목적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학비는 통신원 수당으로 충당하려고 했으나 한 달 수당 40원 가지고는 태부족…그래서 그는 도쿄에서 ‘집 없는 아이’를 번역, ‘부평초’로 개제(改題)하여 동아일보에 연재했고 ‘철가면’을 ‘무쇠탈’로 번안, 연재하여 그 원고료로 학비에 충당하기도 했다. 우보는 그렇게 피나는 노력으로 와세다대학 경제과를 졸업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일본의 여러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새 시대의 신문 제작 스타일을 배우기도 했다.” (민규호 전 시사통신 전무 겸 편집국장, ‘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1992년) 

 

  1921년 여름방학 때 귀국한 민태원은 편집국장 이상협의 지시로 동아일보와 함남도청이 주최한 백두산행 탐험대를 동행 취재합니다.

 

  “나는 붓을 싣고 백두산을 향하여 출발한다. 아니 제군(諸君)은 부질없이 웃지를 마라. 여연대필(如椽大筆)을 실으나 일지독필(一枝禿筆)을 실으나 싣는 시점에서는 다 일반이다. 그러므로 문필에 졸(拙)하기 나와 같은 자도 거침없이 붓을 싣고 운운도 쓸 용기가 난다. 고어에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라 한다. 나도 산을 즐긴다. 그러나 내가 인자라고 함은 아니다. 영웅은 호색(好色)도 하지마는, 호색한이 다 영웅이 아닌 것과 같이 인자는 요산하지마는, 산을 즐긴다고 다 인자가 된 것은 아님이로다…”

 

  백두산에 이르는 각 곳의 풍정(風情)을 특유의 유려한 문장으로 동아일보에 소개한 이 르포기사는 간결한 명문(名文)으로 회자됐습니다.(1921년 8월 21일~9월 8일 전 17회)

 

1921년 8월 21일자 1면

 

백두산행
북청(北靑)에서 민태원
소원의 일사(一事) 

 

1921년 8월 21일자 3면

 

백두영봉(白頭靈峰)에 감격한 등산대
청어람정어경(靑於藍靜於鏡)한 성지(聖池)의 비경
개벽(開闢) 후 처음

 

  민태원은 1922년 1월 2일자에서 “우리 사회에서는 소위 신문학(新文學)에 대하여 유희(遊戱) 중에도 가장 무의미한 것으로 보며 경박 소년의 콧노래로만 여긴다. 사서삼경이나 팔대가두륙천선(八大家杜陸千選) 이외에는 다시 글이 없는 줄로 아는 것은… 정말 우습지도 아니한 일이다.” 고 일갈합니다. 

 

1922년 1월 2일자 1면

 

  동아일보 동경통신원으로 일하며 192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민태원은 본사에 복귀, 28세의 젊은 명 사회부장, 정치부장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사회부장으로 임명받은 우보는 사회면 기사의 문장부터 뜯어고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그러하였더라’는 ‘그랬다한다’로, ‘백골난망으로 여기더라’를 ‘송구스러워했다’ 등등. 고문체, 어휘 등을 새로운 말과 문장체로 뜯어 고치는데 전념했다. 그때 나이 28세였으나 젊은 명 사회부장으로 이름났다.” (민규호 전 시사통신 전무 겸 편집국장, ‘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1992년)

 

  민태원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기자였던 김형원은 ‘그는 산문(散文)에 능하고 시운(詩韻)에 또 흥취를 가졌으니 이성의 우보만이 아니라 감정의 우보’였다고 합니다.

 

  “침묵 중후한 인격자로서, 보기에는 그 아호와 같이 둔중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보를 우보로만 아는 피상적 관찰이요, 평면적 평가라 할 것이다. 그는 평소에는 유(柔)하고 완(緩)하되, 한번 일이 있을 때는 몹시 강하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이니 남과 토론할 때에는 상대자의 의견을 존중하나 자기의 의사와 배치되는 경우에는 어디까지든지 자견(自見)을 고집하여 불사(不辭)하였으며, 동아일보 정치부장 시절에 일정관력(日政官力)을 믿고 박모 일파가 그를 죽이겠다고 권총을 가지고 덤비던 일을 생각하면 그의 고집과 성격을 짐작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산문(散文)에 능하고 시운(詩韻)에 또 흥취를 가졌으니 이성의 우보만이 아니라 감정의 우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풍자는 남의 폐부를 찌르지 않는 대신에 두고두고 미소를 자아내게 하였으니 그 기품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화가가 아니면서 능히 만화를 초(草)하였고, 음악가가 아니면서 노래를 불렀다. 다재다예라 하면 실례되는 표현일지도 모르나 원만한 상식인으로서 능문(能文), 능서(能書), 능화(能話), 능창(能唱)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관상(觀相) 수상(手相) 한의(漢醫) 방면에 까지도 입문 정도는 지났었다” (김형원) 

 동아일보 1934년 6월 22일자 2면, 39세를 일기로

 

 

민태원의 장례식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동아일보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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