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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인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Posted by 신이 On 6월 - 1 - 2016

 일제시대 동아일보 사원록

 

앞줄 왼쪽부터 현진건, 김일엽, 한사람 건너 최정희 뒷줄 왼쪽 두번째 김동인, 다음이 최학송, 김동환.

 

  소설 ‘빈처’ ‘운수 좋은 날’의 작가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도 동아일보 기자였습니다.

  1900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그는 일본에서 중학을, 중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귀국해 언론사에 입사했습니다.

  1921년 조선일보에 들어갔다 ‘동명’의 편집 동인, 시대일보 기자를 거쳐 시대일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1927년 10월 동아일보에 입사했습니다.

  현진건은 두주(斗酒 ) 불사의 주호(酒豪)였습니다. 

  “이 무렵의 신문기자들은 대부분 독립투쟁을 위한 지사(志士)적인 지식인이든가 아니면 명문이면서도 부잣집 출신의 한량들이었다. 그래서 어느쪽이 됐건간에 신문기자라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기생들이 더 신문기자들을 좋아했다. 의기(義氣)가 있고 술도 잘 마시며 팁도 덥석 많이 준대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빙허는 더욱 인기를 끌었다. 미남 소설가인데다 신문기자-양수 겸장인 그가 요정에 나타나기만 하면 기생들이 서로 그 방에 들어가려고 앞을 다투었다고 한다. 그러나 빙하는 그런 꽃밭에서도 외도는 아니했다는 것. 놀기 좋아하고 술 잘 먹기로 유명했지만 허튼짓 않기로도 또한 유명했다는 것이다.”(김천수, ‘한국언론인물사화(下)’, 대한언론인회, 1992년, 188쪽)

 

  “현진건은 창의문 밖에 살았다. 지금은 끝없이 뻗친 시가지가 되었지만 30여년 전이던 그때에는 인연(人烟)이 희박하고 그 일대가 능금밭이던 촌락이요 그의 집은 어느 산 밑에 있었다. 술이 취하여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창의문 고개를 넘어오면 그곳의 촌민들은 ‘또 동아일보의 현 선생이 술이 취하여 돌아오는군’하고 이불속에 든 부부들이 대견해하면서 마주 웃었다고 전하였다.”(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기자협회보 1968년 4월호 2면)

 

  그가 괜히 요정출입을 자주 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현진건은 사회부 외근시절 주로 경기도청과 경찰서 출입을 많이 했는데, 그 때문에 늘 요시찰 대상이었습니다. 도청의 행정비밀을 염탐할 수 있다는 것과, 사상범으로 종로서에 잡혀온 이들과 출입기자들이 대개의 경우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취재하는 척 가까이 접근해 외부와의 연락을 위한 밀어나 쪽지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빙허는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예 ‘밤에는 요정에서 사는 사람’으로 스스로 낙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놓고 취재원들이나 중간 연락책들을 요정에 먼저 자리잡고 술 마시라 해두고 자기는 딴방에서 술마시다가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 잔을 주고 받으며 취재도 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잘 생긴 얼굴과, 그와 대비되는 요란한 술버릇은 잡지 등에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살결 희고 눈빛이 맑고 몸만 좀 뚱뚱하게 가로 퍼지지 말았으면 선풍도골(仙風道骨) 가음인데 아차 그만 탈이야. 그래도 아마 누구누구해도 동아일보 축에선 스타일 좋기로 일당백일걸. 술이 각금 모주 되어 탈이지만.”(‘장안 신사 숙녀 스타일 만평’, ‘삼천리’ 1937년 1월호, 105~106쪽) 

 

  “경성의 3대 미남은 현진건, 이상화, 한기악이라는 설이 유포된 때가 있었는 것만큼, 현진건 군은 명모옥안(明眸玉顔)이오 총명정려(聰明精麗)한 전형적 문사(文士)이다. 군은 춘원(春園), 상섭(想涉), 동인(東仁) 제씨와 함께 동렬에 있는 소설계의 노대가(老大家)이오 원훈(元勳)인 만큼 소개의 필요는 없다.”(白基萬, ‘文學風土記’, 인문평론 1940년 4월호, 82쪽) 

  현진건이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의 일입니다.

 취재를 나갔던 현진건은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며 대낮에 돌아 왔다. 마침 복도를 나오던 사장과 부딪혔다.
“이게 누구여?”
갈짓자 걸음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자 사장은 어처구니가 없어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꽥 소리치는 것이었다.
“네가 누군데 내 앞을 가로막는 거야? 에?”
“어허, 이런.”
사장도 몰라볼 만큼 취했구나 싶으니 기가 찰 일이었다.
“음, 뭘 쳐다 봐? 사장이구나?”
사장을 알아보는 것으로 보면 인사불성은 아닌 듯 했다.
“많이 취했구먼?”
“그래 좀 취했다. 언제 네놈이 사장이라고 나 술 한 잔 사줘 봤냐? 있으면 있다고 말해 봐 이놈아!”
“허!”
느닷없이 그는 사장의 뺨을 쳤다.
“어허, 이 사람 보통 취한 게 아니로구먼? 혀가 반발이나 빠져 가지고 위아래도 모르고 사장 뺨을 치다니?”
그러자 이 소동을 알고 동료기자들이 몰려와 현진건을 나무라며 송구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그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사장은 서무부장을 불렀다.
“예”
“이 사람 날더러 술 안 받아 준다고 행패를 부렸네. 이봐, 나가서 인력거 불러다가 집까지 태워다 주고 푹 자도록 하게.”
“아무리 술 취하면 개라지만 사장 뺨을 치는 놈이 어딨나?”
“주사(酒邪)도 그 정도면 특등급일세. 죽을려면 무슨 짓을 못하나? 집에 가서 푸욱 자란 말은 푹 쉬란 말이고 푹 쉬란 말은 신문사 그만 두란 말일세.”
“아까운 인재 하나 없어지는군?”
해직은 받아 놓은 밥상이니 안 됐다고 모두들 동정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술이 깬 현진건은 평소처럼 의젓하게 출근하여 오히려 큰소리치는 것이었다.
“술 취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그게 큰일이라고 그러나? 술꾼이면 그런 실수쯤 있는 법이야.”
“이거 봐. 큰 소리 탕탕 치지 말고 어서 사장실로 들어가 용서를 빌어. 내가 사장이라도 용서는 않겠지만 그래도 비는 도리밖엔 없어.”
부장, 동료들이 설득했지만 내가 왜 비느냐며 버티는 것이었다. 그러자 인촌이 그 소식을 듣고 사장실로 불렀다.
“자네 그 기백 한 번 쓸만하네. 동아일보 사회부가 왜 그렇게 당당한가 했더니만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랬구먼? 날더러 술 한 잔 안 산다고 화를 냈지? 오늘 퇴근할 때 좀 만나자고. 술이라면 나도 사양하지 않는 사람이지. 한 잔 받아줄게 함께 하자고?”
껄껄 웃으면서 말하자 현진건은 그제야 진심으로 잘못 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날 저녁 사장의 술을 얻어 마신 현진건은 또 인력거를 타고 집에 갔다.

 

  이무영은 ‘인촌과 빙허 현진건’(‘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년, 184~187쪽)에서 당시 사장이 인촌 김성수라고 기술해 놓았으나 우승규 전 편집국장은 1982년 9월 30일 인터뷰에서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던 현진건이 하루는 술에 취해서 대낮에 사장실 옆 복도에서 송진우 사장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고하가 허~ 웃으면서 ‘이사람 취했구먼, 혀가 만발이나 빠질 친구야. 백주 대낮에 술을 먹고 사장 뺨을 치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고서는 인력거를 태워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현진건은 기고만장해서 회사로 출근했는데 송 사장은 그러한 기백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동아일보의 인화, 포용성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어쨌던 동아일보에서 ‘현진건에게 뺨 맞은 사장’이 있었던 건 사실인 모양입니다.

  현진건은 뛰어난 문장력에 기사 제목 잘 붙이기로 유명했습니다. 총독부 관리들의 폐부를 찌르는 제목, 반일(反日)을 자극하는 유형의 제목을 곧잘 짜냈습니다. 신문지에 붓으로 빨간 잉크를 찍어 낙서하듯 내갈려놓는 식으로 쓰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의미심장한 제목이 되곤 했습니다.

 

  “기자 중에도 외근 취재에 우수한 이와 편집에 우수한 이가 있는데 빙허는 명 편집기자였다. 그는 하루의 지면을 편집하여 나온 신문을 들고 앉으면 그 크고 작은 기사의 풍기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듯 하다고 하였다. 자기가 편집한 지면에서는 교향악의 황홀한 선율이 들리는듯 하다고 하였다. 신문 지면에서 음악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때 우리 동료 기자들 사이에도 그가 있었을 뿐이다.”(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기자협회보, 1968년 4월호 2면) 

 

  동아일보 입사 전인 1926년 신년호에도 그의 글이 실렸습니다.

1926년 1월 1일자 부록 1면

 

 물꽃 돋는대로

 ‘아나톨 프랑스’의 예측에 의지하면 유토피아의 공산사회에서는 만인노동의 원칙에 따라 나마법왕(羅馬法王)도 옷칠장이로 입에 풀칠을 하리라 하였다.
인류갱생의 거룩한 아침을 앞에 두고 회전기의 폭풍우는 예술의 궁전까지 휩쓸어버렸다. 거기서 쫓겨 나온 뮤즈는 어떻게 되었는가. 실안개로 짠 듯한 그의 깁옷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세상에도 귀중하고 진기하다던 그의 노리개는 쟁연(錚然)한 소리도 없이 물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추위와 주림을 견디다 못한 그는 민가의 부엌데기가 되었다. 백옥 같은 손은 구정물에 더러워지고 수정 같이 맑은 눈이 연기에 그을며 속절없는 눈물을 마실 뿐이다.
상아탑이 무너지매 달과 꽃으로 안석 삼아 은피리를 불던 ‘뮤즈’의 신도 또한 십자가두에 거꾸로 떨어졌다. 얼떨떨한 정신을 차리자 그들은 매락행상(賣樂行商)이 되었다. 없는 요술을 있는 듯이 입힘을 부려가며 사람을 모으기는 모았으나 요술 대신 약봉지를 들어내매 모인 사람은 흩어졌다.
희랍시대엔 시인 곧 예술가란 예언자를 이름이러니 현대에 있어서는 예술가란 행차 후에 나팔 부는 곡고수가 되었다.
사회주의란 사상적으로 현대인이 어떤 부분엔 상식이 되고 어떤 부분엔 신앙이 된 지 오래다. 주옥과 같이 무지개 같은 광휘를 발하던 이 위대한 인생의 꿈은 벌써 싸늘한 유리시험관 속에 들고 말았다. 찬연한 그 무지개에 눈이 어린 이들은 시방도 시험관을 두들기며 잠꼬대를 한다.
예술이란 감정의 ‘이즘’이다. 심장의 선율이다. 사상이란 감정의 수증기가 머리에 서리인 구정물일 따름이다.
되다가 만 예술가는 이 구정물에 불을 붙여서 감정의 수증기를 만들려고 헛애를 태운다.
예술이란 좋은 의미로든지 나쁜 의미로든지 절대로 구속을 거절한다.
현대 예술은 사상의 철쇄(鐵鎖)에 얽매여서 질식하려 한다.
문학의 도덕성은 지상지고(至上至高)한 시대양심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문학은 이 시대양심을 사회주의 사상한테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 현대 작가의 고민이 있고 비애가 있는 것이다.(하략)

 

  입사 후 그는 주로 사회면 편집을 했으나, 직접 국토 순례에 나서 이를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경주 순례로, 1929년 7월 8일부터 12일까지 신라 고적과 유물들을 순례하고 그해 7월 18일부터 8월 19일까지 ‘고도순례(古都巡禮) · 경주’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1929년 7월 18일자 5면

 

고도순례
경주【基一】

여행공덕송(旅行功德頌)
7월 8일 아침 경부선에 몸을 실리다. 행리로는 지팡이 하나 손가방 하나. 단출하고 가뿐하기가 훨훨 날아갈 듯, 죽장망혜로 천리강산을 들어간다는 옛 노래의 풍정과 심회도 이러하였으리라. 생각하면 여행다운 여행을 해 본지도 정말 오래간만이다. 5년이 되었는가 10년이 되었는가. 헤어나오지 못하던 공무(公務)와 속무(俗務)를 비록 일시나마 다 떨치고 표연히 떠나는 것만 해도 얼마나 시원하고 즐거운지―.
저번 큰물진 뒤로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던 일기조차 오늘만은 훨씬 개이었다. 해맑은 하늘가엔 목단송이 같은 흰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한강물이 잠깐 붉은 기운을 띤 것은 지난번 장마의 흔적인가. 질펀한 뫼와 들은 부신 햇발을 안아 푸른빛이 다시금 새로워 그 싱싱하고 선명한 품이 펄펄 뛰는 듯하다.

장님과 단청(丹靑)
이번 걸음도 단순한 놀이 길은 아니다. 고도순례란 무거운 짐이 두 어깨를 누르지 않음도 아니다. 광채 나던 옛날의 서울, 눈물 묻은 오늘날의 폐허를 찾아들제 그 무궁한 감개와 너와 나를 헤아릴 것이 아니로되 한줌 흙과 한 조각 돌멩이에도 뜻 깊은 지난날의 흔적을 찾아내고 구부러진 고목과 우거지진 쑥대 속에도 옛 자취를 헤쳐 보자면 고고학에 조예가 깊고 역사에 지식이 넉넉한 이라도 오히려 쉬운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하물며 고고학엔 별로 취미도 없었고 더군다나 역사의 지식이란 영에 가까운 기자야 생의조차 못할 노릇이 아니냐.

백지같은 맘
그렇다고 스스로 물러나고 스스로 앙탈할 까닭은 조금도 없었다. 학문적으로 캐어내고 밝혀냄은 저절로 그 길의 적임자를 기다릴 것이어니와, 나는 나대로 보고 나대로 듣는 것도 내 자신에겐 또한 그리 뜻없는 일은 아니리라. 장님도 단청을 구경하려 하지 않느냐, 아니 장님일수록 단청 구경을 더욱 원하며 더욱 바랄 것이 아니냐. 아무런 준비 지식과 선입관념이 없이 온전한 흰 종이 같은 맘으로 옛 서울을 대하자, 속임 없는 산하(山河)의 모양을 보아 우리 조상의 포부를 내 멋대로 상상해보고 뚜렷이 나타난 유적을 어루만지며 내 가슴에 뛰는 피 소리를 고요히 들어보자, 이것이 나의 고도순례에 대한 준비의 전부다.

고추나라로
9일 오전 7시 대구에서 경주행 가솔린 자동차를 집어탔다. 승객 정원 스물 둘. 두 사람씩 앉는 좌석 길이가 두 자가 조금 넘을까 말까. 20세도 채 못된 듯한 어린 차장. 뻬뻬― 아기 보채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까불까불 종종 걸음을 치는 것이며 요 조그마한 물건이 닿을 때마다 금테들이 역장과 조수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와 제법 큰일이나 하는 것처럼 손을 들고 호각을 불고 둥근 테를 주고받고 하는 광경이 아무리 보아도 어린애 장난 같다. 나는 이 괴망스럽고도 살가운 탈 것에 실리어 벗 옛 얘기로 듣던 고추나라에나 가지 않는가 싶었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경북평야가 군데군데 열리기는 하였으되 웅대한 산천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송아지만큼씩한 작은 산들이 올망졸망하게 꼬리를 맞물고 양 가로 뱅뱅 돈다. 지명을 보아도 반야월(半夜月)이니 청천(淸泉)이니 금호(琴湖)이니 자못 꿈결 같은 시흥을 자아낸다.

광활한 대야(大野)
서악(西岳)을 넘어 얼마 아니 되자 문득 눈앞은 훤하게 열린다. 천공지활(天空地闊)이란 문자는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쫄쫄거리는 시냇물을 따라 오다가 별안간 큰 바다를 만날 때의 느낌도 이러할 듯. 하늘 끝과 지평선이 닿으려는 데는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듯이 새파란 산들이 둘레둘레 둘었으되, 이 너머로는 넓고 넓은 평야가 어마어마하게 벌려졌는데 그 복판 여기저기 허연 선이 거침없이 쭉쭉 뻗친 것은 아마 강물의 줄기인 듯. 장남감 기차가 가까워 갈수록 기와집도 언듯언듯 보이고 새파란 잔디를 인 어여쁜 산들(나중에 알고보니 고총)이 떼로 맞이하는 곳은 묻지 않아도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가 분명하다.

1929년 7월 20일자 5면

 

고도순례
경주【基二】

박물관분관(博物館分館)
여관에 들이닥치는 대로 아침밥을 마치자마자 구경길을 나섰다. 길 끄는 인력거에 몸을 맡기매 옛 서울의 서투른 시골뜨기 같아서 스스로 웃었다. 첫걸음은 박물관 경주 분관 먼저 온고각(溫古閣) 본관에서 석기, 토기시대, 동 · 철기시대의 유물을 더듬으며 인류의 발달에 기구가 얼마나 위대한 소임을 맡은 줄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즉 대강대강 거치기로 하고 여기에서 볼 수 있는 특이점만 추려 보자. 기와장이 엄청나게 크고 튼튼하며 연꽃 모양도 뜨고 귀신 형상도 새겨 그 수법이 자못 능란한 것을 보아 그때의 건축이 얼마나 굉장하고 화려했던 것을 얼마쯤 연상할 수 있었고 토자기(土磁器) 같은 것도 통일시대 이후의 것은 그 바탕이 견실하면서도 치밀하여 두들기면 쟁연한 쇠소리가 나고 그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둥근 놈에 기름한 놈, 아가리 넓적한 축에 부리가 뾰족한 축, 다리 높은 것에 낮은 것, 혹은 인형을 그리고 혹은 꽃을 그리고 손잡이 모양에도 진기한 의장(意匠)이 많아 혼란하던 당년의 기술을 상상할 만한 것이 없지 않으되, 그러나 이것들은 나 보기엔 그리 큰 경이는 아니다.

금관의 경이
그러나 한번 신관에 발을 들여놓자 나는 황홀하게 넋을 잃었다. 첫째로 찬란한 황금관이 햇발과 같이 번쩍인다. 전체가 순금으로 된 것만 해도 끔찍한 일이거든 그 치장과 잔손질은 또 얼마나 정교하고 혼란하냐. 관 위엔 반달 모양의 황금조각이 두 갈래로 뿔 같이 뻗쳤는데 올리브 잎사귀 같이 동글동글한 금점이 무수히 발렸고 관시울과 통에는 거의 빈틈없이 푸른 옥을 깎아 57개의 아구장한 낚시 모양의 소위 구옥(勾玉)을 달아놓은 것은 정말 눈이 어찔어찔할 지경이다. 황금 줄기에 송이송이 금꽃이 만발하였고 벽옥의 잎사귀가 파릇파릇이 점친 그 모양은 정말 무어라고 형용할 길이 없다. 그야말로 인공(人工)을 뛰어넘어 신공(神工)이오 진토에 묻힌 것을 파내었다는 이보담 백운청운을 멍에(駕)하고 길을 잘못 들어 하늘에서 이 세상에 떨어진 보물이라 함이 오히려 상상하기에 쉬우리라.(하략)

  1929년 8월 15일자에는 자신의 연재소설 ‘무영탑’의 소재가 된 불국사 석가탑에 얽힌 이야기도 소개합니다.

1929년 8월 15일자 5면

 

고도순례
경주【基九】
(상략)
석가탑
석가탑은 다보탑 서쪽에 있는데 다보탑의 혼란한 잔손질과는 딴판으로 수법이 매우 간결하나마 또한 정중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다보탑을 통라와 주옥으로 꾸밀대로 꾸민 성장미인(盛裝美人)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한 미인이라 할까. 높이 27척, 층은 역시 3층으로 한 층마다 수려한 돌 병풍을 두르고 병풍 네 귀에 병풍과 한데 얼러놓은 기둥이 있는데 설명자의 말을 들으면 이 탑은 한 층마다 돌 하나로 되었다 하니 그 웅장하고 거창한 규모에 놀랄만하다.

무영탑 전설
이 탑의 별명은 무영탑, 곧 그림자가 없다는 것으로 여기에는 사랑과 예술에 얽힌 눈물겨운 로맨스가 숨어있다. 그때의 사람이 얼마나 종교와 예술에 몸을 바쳤고 또는 사랑과 예술을 한 덩어리로 만들은 황홀경에서 살았다는 것이 이 아름답고 슬프고 신비로운 전설에 풍겨있다.
◇ 사진은 석가탑과 다보탑

  빙허의 국토순례 두 번째는 단군사적 순례였습니다.

  1932년 7월 현진건은 단군성적(聖跡) 순례차 특파되어 7월 9일 등정, 탄강지 태백산, 통치수도 평양, 능묘가 있는 강동, 말년의 거주지 구월산, 제천단이 있는 강화 마니산 등지를 순례하고 23일 귀사해 29일부터 순례기를 연재했습니다. 이 순례는 본사의 중점 사업인 이 충무공 유적보존운동, 권율 도원수 사당 중건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얼을 살리기 위해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1932년 7월 9일자 1면

 

단군 성적(聖跡) 순례
◇특파원 본사 사회부장 현진건

 반만년 문화의 창조자시오 2천3백만 조선인의 육과 영의 원천이시며 역대 조선 민족의 숭앙의 대상이신 단군 성조의 유적을 봉심하고 아울러 그 신공성훈을 전 조선 동포와 함께 추모하고 환성하옵기 위하야 본사에서는 사회부장 현진건을 특파하기로 하여 금 8일 태백산(묘향산) 평양 강동 강서 구월산 마니산 등지를 향하여 출발케 합니다.…(중략)…흑룡강의 남, 황하의 북, 동해의 서, 망망한 오천리에 어느 산, 어느 강이 단군의 유적이 아니리이까.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이조를 통하여 상하 오천년에 역대 제왕은 관을 설하여 제(祭)를 치(致)하시었고 민초는 방방(坊坊), 호호(戶戶)에 신위를 설하여  추달(追達)의 성(誠)을 바치었습니다.(후략)

행정 예정(行程 豫定)
8일 야(夜) 경성 발
9일 조(朝) 신안주역착-태백산 입산-보현사 박(泊)
10일 조(朝) 보현사 발-단군굴-만폭동-금강굴
11일 12일 금강굴-곤로봉-금산사
13일 금산사 발 희천 경유 신안주, 평양
14일 평양 발-강동, 대박산릉, 박갈고지-평양
15일 동명왕릉,숭령전 등
16일 대성산
17일 강서, 세무덤이, 을지문덕 묘 용강
18일 용강 발-사리원 경유 구월산 패엽사-장장평
19일 선천봉, 삼중사-패엽사
20일 귀사
21일 강화
22일 마니산-강화착
23일 전등사
동아일보사

‘단군성적순례’ 주요 순서

발정제일야(發程第一夜)
백겁산하밀성(百劫山河密城)
백상루(百祥樓)
오도탄(誤渡灘) · 골적도(骨積島)
을지공(乙支公) 석상(石像)
곡(哭)! 을지장군
충우이백리(衝雨二百里)
묘향산의 윤곽
국진굴과 천주석
가단군굴(假檀君窟)
열철(熱鐵)에 냉수
을묘년대홍수
어허! 단군굴
단군천신지위(檀君天神之位)
만폭동(萬瀑洞)
곰틀을 보고
산삼과 석용(石茸)
금강굴의 일야(一夜)
수충사 · 안심사
금강폭 · 인호대
산주폭 · 용연폭
천심폭 · 상원암
사리탑 비문
보현사 일순(一巡)
반시간의 짠발짠
동룡굴의 유래
돌이 자라난다
생동(生動)의 석세계(石世界)
대박산단군릉
대성산
동명성왕릉
을지장군묘
강서삼고분
약수와 온천
구월산 입산
구월산과 패엽사
단군대(檀君臺)
삼성사
당장경 · 사황봉
강화도
전등사 · 삼랑성
마니산 · 제천단

 

  빙허는 단군성적순례를 통하여 우리 5천년 역사를 조망하면서 평범한 기행문을 뛰어넘어, 역사적 사실을 그만의 문학적 안목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932년 7월 29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 (1)
발정제일야(發程第一夜)

단기 4265년 7월 8일 단군성적순례의 길에 오르다.
경의선에 몸을 실으니 밤 10시 40분.
묘막(渺邈)한 상하 반만년 동방문화의 연원이시며, 생생화육(生生化育), 이천삼백만, 단족(檀族)의 영과 육의 모태이시며, 흑룡강의 남, 황하의 북, 동해의 서, 망망한 오천여리에 개지척지(開之拓之)하신 신공성적(神功聖跡)을 남겼었으니, 이 광범한 문화권을 호고(湖考)하고 이 방대한 지역원을 봉심(奉審)하자면, 정말 까마득한 노릇이다. 일년은 커녕, 십년은 커녕, 일생을 두고 성과 열과 력을 경주하더라도 이 원념의 만분지일이나 아니 만만지일이나 달할까 말까.
그러하거늘, 공무와 속루의 틈을 비기 수주의 시일로, 분망한 여정에 몰려 할 수 있는 준비조차 갖추지 못하고, 덮어놓고 발정(發程)하고 말았으니, 대담하다면 대담도 하려니와 경솔하고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 믿는 바 있으니, 그것은 성조께 대한 단성(丹誠)과 신념이다. 한배님이 두호하시거니 단애에 수(手)를 철할 대용도 기치 말란 법 없으며, 왕검님이 받드시리니 절벽에 족(足)을 인할 영능인들 생치 않으랴. 반체와 둔족을 의구할 필요도 없거니와 불학과 무지에 주저할 연유도 없다.
현식과 사념을 버리자,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억측과 모색을 함부로 말자, 해심(孩心)으로 돌아가리라, 백지 같은 적자의 마음으로 님의 앞에 서리라, 끼치신 일괴석(一塊石)과 일배토(一杯土)를 뵈올 적마다, 고동하는 내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경건과 감격으로 묵시와 수교를 터득해보리라, 촌민야로(村岷野老)의 구비심서로 옮겨 내려오는 소박하고 홍몽(鴻蒙)한 전설이나마 그대로 새겨 유칙(遺則)과 성훈(聖訓)과 또는 신앙심과 의지성의 편린을 찾아보리라.
이렇게 맘을 정하매,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며 새벽녘에야 어느 결엔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태양은 높이 솟아 우의(雨意) 실은 멍울멍울한 구름 사이에 숨바꼭질하면서 뜨거운 광선을 이따금 차창으로 들이친다. 좌우에 푸른 벌판이 훤하게 열림은 벌써 안주평야에 들어선 모양이다.
이 백겁산하(百劫山河)에 감회를 돋을 겨를도 없이 기차는 벌써 신안주에 닿고 말았다. 9일 오전 8시.

1932년 8월 2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 (5)
곡(哭)! 을지장군

석양은 기운다. 위인의 최후 모양으로 태양은 거룩한 숨을 모으며 뉘엿뉘엿 서천으로 그 광명체를 숨기고 만다. 시의(屍衣)처럼 떠돌던 몇 조각 백운은 해 떨어진 자리로 슬금슬금 모여들어 생채를 잃어버리고 암연히 눈물을 지우는 듯. 문득 숭엄한 후광이 일어나며 그 붉은 광파가 용용히 흘러 일순간에 왼 우주를 적신다. 구름이란 구름은 모조리 산호처럼 타오르며 산하도 혈색이요, 초목도 혈색이다.
우리 을지장군의 석상도 혈루에 젖은 듯!
나는 세 동강이로 무참하게 부서진 석상을 또 다시 어루만지며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열화와 같은 적기가 가슴에 치밀어 오르다가 비애와 참괴에 지질린다. 웃어도 시원찮고 울어도 시원찮다함은 이런 감정을 두고 이름이리라.
당시 수(隋) 양제(煬帝)는 욱일승천의 세로 남정북벌에 소향무적으로 지나 전토를 철완하에 집어넣고 대 고구려국과 자웅을 결하고저 천하의 병마를 모아 에누리 없는 백만대병을 들어 입구(入寇)하지 않았느냐. 승승장구한 그 맹장과 정병은 파죽의 세로 요동을 발하고 물 밀듯 지쳐들어오매, 압수와 향산이 벌써 여국(麗國)의 유(有)가 아니었으며, 국도 평양의 위(危)함이 누란(累卵)과 같았으니 만이 을지장군이 없었던들 당년 대 고구려국이 멸망했을 것은 물론이어니와 우리 조선 민족이 그때 벌써 어육(魚肉)이 되고 도탄에 빠져 이 지구상에서 형(形)을 절(絶)하고 영(影)을 잠(潛)하였을지는 모르리라. 사멸에서 흥융(興隆)으로 치욕에서 광영으로! 역사의 추축을 전환시킨 민족적 대 은인이 그 누구이뇨! (중략)
나는 호통(號慟)하는 마음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석양속으로 발을 옮겼다.

1932년 8월 23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 (14)
단군천신지위(檀君天神之位)

화톳불에 얼마쯤 몸을 녹인 우리는 다시 굴안으로 순력하다가 서편 그윽한 석벼래 위에 정면 남향으로 세 분 위패를 모신 것을 발견하였다.
좌편 조금 작은 위패는 ‘나무환웅천왕지위(南無桓雄天王之位)’라 썼고 중앙은 ‘나무단군천신지위(南無檀君天神之位)’라 하였고 우편은 또다시 ‘나무환웅천왕지위(南無桓雄天王之位)’라 씌어 있다.
중앙과 우편은 위패의 크기와 솜씨가 같고 좌편의 것은 조금 작을 뿐만 아니라 수법이 졸렬한 것으로 보아 덧붙이기로 뒤에 모신 것으로 짐작하겠다.
우리는 의논이나 한 듯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나추나추 고개를 숙이었다.
나는 만감이 전신에 소용돌이를 치며 고개를 다시 쳐들 수가 없었다.
약자(弱子)로 잔손(殘孫)으로 어버이 앞에 엎드린 것이다. 무안하고, 얼없고, 부끄럽고, 무섭고…해서, 숙인 고개를 감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물적 유산은 그만 두자.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고구려와 신라에 와서 찬란한 탈목(奪目)의 색(色)과 복욱(馥郁)한 경세(驚世)의 향(香)을 발하던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이 막상 인천(人天)을 흔동할 대과(大果)를 맞으려 할 중대시기에 지니지 못하고 조잔(凋殘)과 영락(零落)에 맡기었으니 얼마나 황공한 일이냐. 이런 잔손은 대(大) 천세계(千世界)를 샅샅이 둘러보아도 그 유례와 비주를 찾을 수 없으리라.
지옥겁(地獄劫)과 도탄고(塗炭苦)를 열 만 번 더 치르고 더 겪어도 이 죄를 다 싹 치지 못하리라.
참회의 화편(火鞭)이 양심을 후려갈기매,
“이제는 다시, 이제는 다시!”
열 번, 스무 번, 골백 번, 잘천 번 줄항복을 하고, 맹서 맹서하였다.
무슨 낯으로, 무슨 염의로, 무슨 주제로, 여기 올고, 올 생의(生意)라도 하였던고? 하도 기막히고 답답하기에 집안 어른을 뵈오러 온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지니신 한배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 뼈가 내 뼈여든 뼈인들 아니 저리시며, 그 피가 내 피어든 핏줄인들 아니 당기시랴. 역정도 나시지만 그래도 눌러 보시리라. 괘씸도 하시지만 그래도 거두어 주시리라. 미웁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엇들고 받들고 주시리라.
두 팔을 벌리시고 오라, 오라! 부르신 지 오래인지 모르리라. 마음을 조리시며 왜 안 오나, 왜 아니 오나! 바라신 지 오래인지 모르리라, 억천만겁을 윤회한들 임 주신 뼈와 피야 가실 줄이 있으랴. 아아 염통이 뛴다. 고동하는 이 가슴에 임의 손을 얹어 보소서.(하략)

  1936년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사진의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역사적 사건 당시 현진건은 사회부장이었습니다.

1936년 8월 25일자 2면

  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현진건을 비롯 이길용(운동부 주임), 최승만(잡지부장), 신낙균(사진과장), 서영호(사진부원) 등은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되어 40여 일간 문초를 받았으며, 동아일보는 네 번째 무기정간을 당하였습니다.

  동아일보 사사(社史)의 기록.

 이 사건의 발생으로 김준연 주필, 석왕사에 체류 중이던 설의식 편집국장이 즉시 사임하였고, 12월에는 이여성 조사부장, 박찬희 지방부장이 또한 사임하게 되었다. 구속된 8명은 40일간에 걸친 준열한 문초를 받은 끝에, 총독부가 문안을 작성한 소위 서약서를 제출하는 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으나, 이 서약으로 이 사건의 직접 책임자로 인정된 이길용, 현진건(사회부장), 최승만(잡지부장), 신낙균(사진과장), 서영호(사진부) 등 5명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 포함된 내용의 서약에 서명, 겨우 석방되었던 것이다.

 1. 언론기관에 일체 참여 안할 것
 1. 시말서를 쓸 것
 1. 만일에 또 다른 운동이 있을 때에는 이번 사건의 책임에 가중하여 엄벌 받을 것을 각오할 것 등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전기(前記) 유능한 5명의 기자가 신문계에서 물러났고, 그 밖의 많은 사원이 사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총독부의 요구로 본사에서 제출한 사직자에 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報告書
本社 社員 中 辭職願을 提出한 者에 對하여 左記와 如히 受理하였으므로 玆에 보고함
昭和 12년(1937년) 5월18일 동아일보사 대표 梁源模

 <김준연 주필과 설의식 편집국장은 8월 28일자로, 현진건 사회부장, 최승만 잡지부장, 이길용 기자, 장용서 편집자, 신낙균 사진과장, 同(동) 雇員(고원) 서영호는 9월 25일자, 사장 송진우는 11월 11일자, 박찬희 지방부장은 12월 3일, 이여성 조사부장은 12월 10일, 부사장 장덕수, 영업국장 양원모는 12월 20일자로 사직원 수리> (동아일보 사사 1권 365~366쪽)

  이 일로 현진건을 비롯, 많은 사원들이 사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침묵을 지키며 병마와 가난에 시달리던 현진건은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 역사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민족의 혼을 되살려보자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역사 속에 살아있는 보통 사람들의 거룩한 혼을 찾아 작품으로 형상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아일보에 연재한 ‘무영탑’입니다. ‘무영탑’은 1938년 7월 20일자부터 1939년 2월 7일까지 164회 연재됐습니다.

1938년 7월 20일자 4면

 

 ‘무영탑’은 불국사 석가탑을 만든 아사달이 주인공으로, 역사소설 하면 왕이나 귀족들의 이야기만 하던 시절, 그는 장인(匠人)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무영탑’에 이은 역사소설 ‘흑치상지’(1939년 10월 25일~1940년 1월 6일)는 일제의 탄압으로 52회로 게재가 중지됐습니다.

  멋쟁이 기자, 명 사회부장 현진건은 서울 제기동 자택에서 1943년 4월, 4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 Comments »

  1. 저는 브라질 쌍빠울로에 사는 1942년 생 안경자입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다가 1981년에 이민 왔고 현재는 영국계 국제학교인 St.Nicholas School의 한국문학담당 교사입니다. 이곳의 국제학교 (고등학교)필수 코스이기도 한 대입 수능코스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를 14년 간 맡아오고 있습니다. 주재원, 외교관 자제들에게 한국문학, 번역문학을 공부시키며 논문쓰기 구두발표하기, 작품 분석하기, 시 소설 쓰기……를 지도해오는 동안 현진건의 , 김유정의 , 황순원의 , 강신재의 , 김승옥의 , 황석영의 , 양귀자의 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가르치는 일은 문학을 읽히는 일임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현진건과 황석영의 사실주의를, 또 다른 학생에게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식소재를, 그리고 한국인의 의 모습이 문학작품에 어떻게 나타나있는지 어떻게 변모되어 가고 있는지 ……논문을 통해 연구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분석 과정과 작업을 위해 저는 저대로 지도안을 작성해야 하는데 우선 PPT 제작에 많은 자료가 필요하였지요. 마침 귀사의 이 기사가 참으로 유효적절하게 제 지도안을 풍성하게 해주었습니다. 너무 고맙고 재미도 있어서 이렇게 안하던 일을 합니다. 현진건과 빈처, 운수 좋은 날 PPT를 살찌원준 것에 고마움을 전하며

    Comment by 안경자 — 2014/10/31 @ 3: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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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문인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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