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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중국 펑톈 특파원 조동호(趙東祜)

Posted by 신이 On 6월 - 1 - 2016

  ‘아- 우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제(諸)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영자(英姿, 늠름한 모습)를 한성(漢城)에 나타낼까.’ 

  동아일보 1924년 12월 7일자 1면에 조동호(趙東祜) 기자가 쓴 ‘손중산을 환영’의 기사 중 마지막 구절입니다. 

  “손문(孫文) 선생이 민국원년(民國元年)에 북경에 다녀간 후 13년 간을 해외로 표류하다가 북경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서 ‘아- 우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여러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모습을 한성(漢城)에 나타낼까, 손 선생의 이번 행동이 남의 일 같이 보이지 아니한다.’ 고 동아일보 1924년 12월 7일자에 실려 있다. 당시 동아일보가 이런 기사를 1면에 썼다는 것은 용감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네이버 사전-조동호) 

 동아일보 1924년 12월 7일자 1면, 제20신 ‘손중산을 환영’

 

  “손중산의 금번 북경입(北京入)은 중국혁명사상의 일대 기록이다. 적어도 떼벨레라(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인용자 주) 씨의 연전(年前) 더블린 입시(入市)와 동일한 의의를 가질 것이다. 떼 선생은 그동안 석방되었다는 지난 28일 런던 발 전보가 있다. 이 소식이 조선에도 갔는지. 이것이 중국 혁명의 진보의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랴. 아- 우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제(諸)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영자(英姿)를 한성(漢城)에 나타낼까. 손 선생의 차행(此行, 이번 길)이 남의 일 같이 보이지 아니 한다.”

  조동호 기자는 제2차 봉·직(奉·直)전쟁으로 불리는 중국 내전이 발생하자 현지 취재에 나서 ‘전지행(戰地行)’을 그 해 10월 15일자부터 20회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1924년 10월 15일자 1면, ‘전지행(戰地行)’

본사특파원 조동호(趙東祜) 제1신 

10월 12일 조(朝) 10시 압록강을 건넜다. 내가 이 강을 건너기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 즉 1914년 12월 하순 백설이 온통 뒤덮이고 검은 구름이 꽉 낀 겨울 중에서도 가장 음침한 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날씨가 화창하고 가을볕이 아주 따갑고, 십년동안 압록강 동서양국의 변천과 또 나 개인의 전후경력은 고사하고 다만 이 무심한 경치로도 실로 오늘과 어제의 확연한 차이를 새참 느낀다. 하물며 그때에는 여운형 군과 같은 좋은 반려자가 있었음에야. 여군의 생각이 새로이 간절하다. 차가 철교를 통과할 때에 눈을 들어 하류를 바라보니 노들이 즐비한데 저 많은 선척 중에는 상해 통항자도 적지 않겠고, 상해 통항선 중에는 기절처절한 혁명적 사화가 무수했었지하는 생각이 번쩍 들며, 다시 둘러 상류를 바라보니 멀리 강 건너 호북 등지의 소위 국경 쪽 상황이 생각난다. 우리 싸움 제쳐놓고 남의 전쟁 구경 감은 이 무슨 실없는 짓인가. 양으로는 물론, 이것이 저것만 못하지만은 질로야 저것이 어찌 이를 당하리오…일부러 정차장에 나가보거나 좀 더 감히 중국인 상점이 있는 곳에 가보아도 도무지 전쟁의 기분을 볼 수 없다. 이 지방은 어찌 이리 편안한가. 싸움도 집안싸움도 좋은 듯 하다. 일본의 정치가 미기행웅(尾崎行雄) 군이 얼마 전에 경성에서 조선 문제를 강연할 때에 “조선이 독립을 하면 중국과 같이 될 터이라”고 걱정을 하였다니 이곳에 한번만 와보았으면 그 우려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중국이 어떻단 말이냐? 조선이 중국같이 될까 하지 말고 중국을 조선 같게 하지 마라. 이렇게 생각하자…사람이 많은 3등실로 건너가서 한방에 다다르니 와글와글 떠들어대는데 참 굉장들 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전쟁이야기는 조금도 들을 수 없다. 아까 말하던 평화는 이곳에도 충만하다.…(후략)

  조 특파원은 이 글에서  “일본의 정치가 미기행웅(尾崎行雄) 군이 얼마 전에 경성에서 조선 문제를 강연할 때에 ‘조선이 독립을 하면 중국과 같이 될 터이라’고 걱정을 하였다니 이곳에 한번만 와보았으면 그 우려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중국이 어떻단 말이냐? 조선이 중국같이 될까 하지 말고 중국을 조선 같게 하지 마라. 이렇게 생각하자.” 고 합니다.

 

 1924년 10월 19일자 1면 제3신, ‘전쟁과 조선인’

  “이렇게 큰 제목을 내 붙였지만 실상은 봉직전쟁에 대한 재 만주동포의 활동을 말하려 함이다.…(중략)…뒤 꼭대기에서 떠드는, 더구나 말이 중국 내란이지 실상은 세계열강의 원동 각축전인 이 전쟁을 어찌 한가히 볼 수 있으랴.…(중략)…이곳에서 들리는 소문에는 중국 본부에 있는 우리 형제들 다수가 오패부를 원조하여 지금 직군 전선 중에 5백 명 이상의 조선인이 있다 한다. 내 생각에도 5백 명이라는 숫자가 못 맞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 줄로 생각된다. 만주에 있는 조선인 단체는 많다면 썩 많다. 대한통의부, 대한독립군 또 독립군단 등을 비롯하여 굵직굵직한 것이 10여개나 되고 그리고 또 여간 자잘한 것으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무엇이든지 많으면 좋은 듯하나 이 종류의 이것은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아니, 덜도 말고 꼭 하나면 되는 것이다. 년래 해외에 있는 조선인들이 시종 각 단체의 통일에 많은 노력을 쓰지 아니함도 아니지만은 아직 그 성립을 보지 못하게 됨은 실로 유감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혹은 봉천파를 원조하기로 하고 혹은 직예파를 원조하기로 하여 장작림의 배후를 습격하자라고 하며 또 혹은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엄정중립을 주장한다 하여 거의 단체마다 주장이 다 다른 모양이나(아는 것이라도 아직 발표할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다) 우리들이 이때껏 일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만한 돌발적 기회를 만나서도 그만 모순이 겹겹이 생기고 당착이 속출하여 일정한 주장이 없어서다. 각각 자유행동으로 하게 된다. 지금 영미는 직파를 원조한다 하면 조선인은 결국 누구를 원조할 것이다. 만리장성 저편 조선인의 머리 위에 떨어지지 말란 법이 없으니 아직 남의 내란을 간섭하지 말고 내부 정돈부터 하는 것이 어떠할까. 지금 시대는 모두가 국제적으로 거의 너, 나의 분간이 없고 또 지금 뿐만 아니라 진리는 항상 일관된 것으로 오직 정의를 위하여 분투하는 것이 인류의 당연한 일이다. 이즈음 타인의 화재를 기회로 보아 도둑질을 하는 자가 많으니까 소극적으로 불간섭을 부르짖지마는 사실은 이 불을 소화하는데 공동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 조선인의 처지는 기타 제국과는 특이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타인을 원조하고 다시 타인의 원조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불간섭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요 간섭을 하더라도 첫째, 각 단체의 연락을 완성하고 다음의 세계 대세의 추향과 중국민의 소재와 또 조선과의 이해를 잘 살펴 일치하게 행동하여 조금이라도 간섭하는 보람이 있게 하라 함이다.” 

 1923년 12월 24일자, 상해에서 돌아온 조동우 씨 백방(白放, 죄가 없어 풀려남) 취조를 마치고
  
   조동우는 이듬해(1924년) 5월 17일 동아일보에 입사, 그가  입사 전 활동했던 상해임시정부와 중국 관련 논설과 기사를 주로 썼습니다.

 1925년 1월 1일자 신년호 기6(其六) 손중산(孫中山) 문병기(천진에서 조동호)

 

 

 동아일보 1925년 1월 28일자 1면  ‘귀도(歸途)에 임하야’ (상해에서 조동우)

 

  “내가 상하이에 온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원래 예정한 노정(路程)도 (동아일보로 부터) 상하이까지 오기로 하였거니와 톈진, 베이징까지 와서 내가 있었던 임시정부의 선후배 동지를 찾아보고 싶어 상하이에 아니 오고 못 견디겠고, 절강의 손전방(孫傳芳)이 무슨 딴 뜻이 있어서였겠지만 상하이 부근에 다시 전쟁이 일어 날 듯도 하다고 하여 부지런히 쫓아 왔더니 원래 잘 싸우는 중국 군인들이라 내가 배 안에서 며칠간 세상 일을 모르는 하루 동안에 그만 다 싸우고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패장인 진약산(陳藥山) 군은 다시 조계 안으로 들어가서 화천주지(花天酒地)로 새해를 맞아하는데 나는 어떻게 어이없어서 종군기자라는 말은 조금도 아니하고 어찌 왔느냐는 인사에 그저 아무 말도 아니하고 지나가는 소리로 구경하려고 왔다고 하였다. 중국 일도 중국 일이지만 우리 임시정부에서도 그 동안 일신한 변동이 있어서 박은식의 통령 하에 이유필, 이규홍 등 유능한 인물이 보필의 임무를 당해서 이상적인 새 국면을 포설하려고 노력을 하며, 또 다대한 희망이 비치는데 박은식까지 절대한 자부심으로 여러 가지로 진력하심에는 무지한 이 사람도 기쁨을 못 이기겠다. 또 예의 민정식(閔庭植)을 중심하여 그동안 별별 활동사진이 많았던 모양이었는데 나 같은 불문(不文)으로는 도저히 그 만한 일을 형용할 수 없고 항상 이런 일을 당할 때 마다 소설가로 있는 나의 친구 몇몇 분이 생각날 뿐이다. 기왕에 민정식 군의 말이 났으니 나의 친신(親信)할 만한 우인의 말에 의하면 민 군은 세인이 비평함과 같은 아주 바보는 아니라고 한다. 상하이에서 통신할 만한 재료가 몇 가지 더 있을 듯도 한데 춘정(春艇)군이 왜 자꾸 남의 구역을 침범하느냐 하며 손전방이라는 별명을 지었다. 손전방이란 말은 손이 절강관군으로 강소성의 관하인 상하이를 제가 간섭하려 하는데 내가 베이징 특파원으로 상하이 일을 간섭한다 함이라는 것이다. 나는 중국특파원으로 상하이가 조계지로 외국이니까 간섭 말라하면 몰라도 상하이를 그래도 중국지방이라면 확실히 내 관하로 손전방 운운에는 불복이라고 할 수 있다. 상하이가 우리나라 기통선(其通船)이 아직까지 없음은 실로 막대한 유감으로 나는 전날 이곳에서 귀국하는 친구를 보낼 때마다 목포, 군산, 인천까지 일직선을 그려놓고 이렇게 될 것 같으면 1일 혹은 2일 내에 바로 가게 된 것을 장기간 주변을 뺑뺑 돌아가는 것이 못 생긴 짓인고 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상하이-인천 직통의 항선이 있으니 누구의 손으로 되었던지 하도 그리워하던 것이라 이번 길은 꼭 이 항로를 취하려 한다.”

 

  조동호 기자는 상해에서 돌아온 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돼 5월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교섭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며 1925년 5월 22일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모스크바로 갔다 상해로 돌아가 1928년 2월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1928년 2월 3일자 동아일보

조선공산당 간부 조동호 피착(被捉), 불일간 경성으로 압송할 터 

 

 동아일보 1928년 2월 9일자 1면.  종로서로 압송된 조동호

 

 

 1928년 6월 9일자 4면

 

 

 1928년 6월 20일자 5면, 징역 4년 언도

 
 

  1931년 12월 출옥한 조동우는 1934년 또다시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 4개월을 복역합니다.

 

1934년 4월 20일자 7면, 국제조공(朝共)사건 정태희( 鄭泰熙) 조동호 복역(신의주)

 

  춘원 이광수는 조동호와의 만남과 그의 상해시절을 ‘나의 고백’ (이광수 전집 13, 삼중당, 1963년)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230쪽) 2월 8일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어떤 날, 최팔용이 내 하숙에 와서 나더러 상해에 가라고 권하였다. 이것은 자기 개인의 뜻이 아니라 동지 일동의 의사라는 것을 붙여 말하고 돈 얼마(200 몇 십원이든가 분명치 않다)를 내어 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동경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다 잡혀가면 우리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하고 말 것이니 내가 상해로 가서 동경 유학생이 한국을 일본이 통치하는 것은 이천만 대한민족의 의사가 아니라 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뜻을 널리 세계에 선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튿날 새벽 6시 시즈오까 가는 차를 타고 동경을 떠났다.…(중략)…내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기미년 1월 말이었다. 나는 대관절 상해에서 누구를 찾아야 할 것인지도 몰랐다. 4년 전에 상해에 있던 사람들 중에 누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고, 도 어디를 가야 그들을 찾을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남대문입납이 아니라 상해입납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부두에서 장덕수(張德秀)를 만났다.
“웬 일이야?”
“아, 춘원이야말로 웬 일이야?”
하고 우리는 서로 놀랐다. 나는 이러이러한 일로 일본서 오는 길이라고 한즉 그러한 운동을 일으키려 동경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고 손을 내밀면서,
“돈 남았거든 내.”
하였다. 나는 주머니를 털어서 20원을 주었다. 그는 겨우 배표만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었다. 장덕수를 배웅 나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조동호(趙東祜)였다. 장은 나더러 조동호를 따라 가라고 하고 배에 올라 버렸다. 조동호는 나를 법조계 어떤 구석진, 더러운 중국집으로 끌고 갔다. 뒷문을 두드리니 더러운 중국 노파가 나왔다. 주인 마누라였다.

(231쪽) 조동호의 방은 2층이었다. 남향이어서 볕은 드나 방안에는 허술한 침대 둘 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중에 한 침대가 장덕수가 비우고 나간 것인 모양이었다. 조동호는 내 주머니에 남은 잔돈을 떨어서 소주를 사다가 그날 밤 취토록 먹고 방바닥에 오줌을 싸서 아래층에 새어 내려갔기 때문에 주인마누라가 뛰어 올라와서 잔소리를 하였다. 이 모양으로 조동호는 소탈한 선비였다. 상해에는 그때에 김철(金澈)·한송계(韓松溪)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당원이었다. 김철이 본국에 들어 와서 천도교에서 돈 3만원을 얻어 가지고 와서 수일 전에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리로 보내고 그리고는 독립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여운형을 아령으로, 선우혁(鮮于赫)을 본국으로, 그리고 장덕수를 일본으로 보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그들은 나더러 상해에서 신문을 내는 일을 맡으라고 하였다. 조동호는 국문 활자의 자모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중략)…나는 정치면에서 물러 나와서 조동호와 둘이서 ‘독립신문(獨立新聞)’ 창간호를 준비하였다.…(중략)…‘독립신문(獨立新聞)’은 처음에는 조동호와 둘이서 창간하였으나 조동호는 곧 그만두고 주요한(朱耀翰)과 나와 둘이서 하게 되었다.

 

   유정(榴亭) 조동호(趙東祜, 1892~1954)  
   (네이버 사전 발췌)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혁명가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299번지에서 출생.
가세는 선산과 전답이 많아 대체로 부유한 편에 속했다. 소년 시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자라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1908년 경성측량학교에 입학, 1910년 수료했다.

우리나라를 섬 오랑캐에게 강탈당하고 백성들은 울분에 쌓여 있을 때 조동호는 동대문에 살던 몽양 여운형과 친분을 갖게 되면서 서로 뜻이 맞아서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개성 이만규(李萬珪)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1914년 12월, 하순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여 남경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중문학부(中文學部)에 입학, 3년간 수학하면서 몽양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1917년 졸업, 상해에서 중국인 황자오(黃覺)가 경영하는 구국일보(救國日報) 기자로 채용되면서 언론인의 출발이 시작되었으며 중화신보(中華新報) 기자도 겸직했다. 박은식,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이사(理事)로 참여하면서 섬 오랑캐에게 반만년의 역사와 화려한 금수강산을 강탈당한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치게 된다.
1918년 조동호는 장덕수, 김철, 선우혁, 신석우, 여운형과 6인이 발기인이 되어 조선독립과 청년학생 교양을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했다. 당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할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에게 협조를 얻어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영문으로 작성했다.

임시정부에서는 ‘사료조사편찬부(史料調査編纂部)’를 설치하고 안창호, 이광수 등 10여명과 한일관계사료집 전4권을 편찬하였으며 임시정부 기관지로 이광수, 차이석, 백성욱 등과 같이 상해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성경(聖經)에서 그 자체(字體)를 따서 한글 활자를 고심 끝에 제조하고 철혈(鐵血), 냉열(冷熱), 철묵, 묵망, 첨구자(尖口子) 등의 필명으로 많은 논설을 썼다. 특히 ‘독립완성시기’, ‘임시정부와 국민’, ‘우리의 3.1운동과 5.4운동’, ‘한중제휴의 필요’ 같은 논설은 유명했으며 ‘군소리’와 ‘곡중소(哭中笑)’ 란을 만들어 집필했다.

1922년 10년 후 독립전쟁을 개시한다는 목적으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였다. 1923년 12월 귀국하여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하면서 많은 논설을 썼고 봉천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중국에 봉?직(奉?直) 전쟁을 취재하면서 종군기 전지행(戰地行)을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중국의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 내용으로 썼으며 마지막 회에는 손문(孫文) 씨가 민국원년(民國元年)에 북경(北京)에 다녀간 후 13년간을 해외로 표류하다가 북경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서 ‘아- 우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여러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모습을 한성(漢城)에 나타낼가 손 선생의 이번 행동이 남의 일 같이 보이지 아니한다.’(1924년 11월 30일 북경에서)고 동아일보 1924년 12월 7일자에 실려 있다. 당시 동아일보가 이런 기사를 1면에 썼다는 것은 용감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1928년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으면서 증거서류를 뜨거운 난로 속에 집어넣었으며 서울 경성지법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과 증거인멸죄로 4년간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이에 관한 기사는 당시 동아일보에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어 있다.

1932년 조선중앙일보를 인수, 확장하여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무기명으로 항일 논설을 계속 집필하였으며 다시 2년간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했고, 또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생을 하게 된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제거사건에 배후인물로 결국은 조선중앙일보가 폐간하게 된다.

1945년 8월 10일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 현우현 집에 조동호와 현우현, 황운, 여운형 등이 모여 비밀 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정식으로 창건하여 조국 해방에 준비를 하게 된다.
‘건동(建同)’에는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농민 동맹을 조직했으며 위원장에는 여운형, 조동호는 내무부와 군사 위원회를 담당, 비밀히 활동하다가 관철동 집회소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조동호는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다. 해방과 동시에 건국동맹에서 건국의 모든 준비를 마친 건동 동지들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에는 여운형, 조동호는 선전부장으로 추대되었고 장안파 공산당에서는 책임비서로 추대된다.

당시의 상황을 건동에도 참여하였고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충청북도 청원군 출신이며 일본에서 발행된 통일일보(統一日報) 창립자 이영근(李永根)(1919~1990)(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은 1990년 월간조선 9월호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인공’에서는 인민위원의 한사람으로 각료 명단에는 김구(金九) 내무부장 하에 차장(대리)으로 발표되었으나 다음해 2월 조직된 좌익계의 통일전선체 ‘민전’에서는 집행위원에도 선임되지 않고 공산당 조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라고 되어 있다.

1946년 2월 유정 조동호는 친지의 주선으로 큰 한옥을 빌려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후배와 정치인 지망생들을 위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한다. 위치는 안국동 105번지이며 정치학교 이름은 유정의 정치학교. 즉 유정정치학교(榴亭政治學校)였으며 처음에는 20~30명이었으나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1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조동호는 하루 1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 다른 선생들이 2~3시간 강의를 하였다.

“정부라는 기관은 천년만년에 이르기까지 전하고 무궁할 우리 민족의 자유요 생명인 귀중한 것으로 그 임원 되는 사람은 잠시 귀중한 곳에 위탁받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다.”라고 상해 독립신문에 쓴 것이 있다.

주로 정치인은 국민의 어려움을 대신하여 봉사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동서고금의 훌륭한 정치인들의 행적을 가르쳤다고 한다. 유정정치학교는 조동호의 건강 때문에 끝까지 돌보지 못했으므로 지금은 어느 학교의 전신인지 분명치 않다.

당시 ‘실업자동맹’ 위원장을 맡아 국민들의 경제 활동의 많은 힘을 썼다. 회원은 9만5천명이었다. 후배들이 “선생님을 좌익이라고 하는데 그렀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맞는 말이다. 모두들 나를 좌익이라고 하고 좌익에서는 나를 변절자, 배반자라고 한다. 그 말이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우리 조국을 찾는 일이었으며 조국을 찾았으니 나는 승리자이다. 나는 인생의 성공자이며 내가 바라던 독립이 되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제 어떤 일도 할 힘이 없고 할 마음도 없다.”고 하였다.

1947년 4월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 조직되자 정치협의회 위원으로 추대되었으나 여운형이 7월 19일 사좡舅?그 일도 그만 두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선거 전에 김성숙(金星淑), 윤동명(尹東明)(근민당 동지) 등이 수원 누님 댁에 있을 때에 여러 번 찾아와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종용했었다.

당시 수원시장으로 있던 조용구(趙龍九)(1906~1982)는 조동호의 조카(둘째 형님의 아들)로 수원에서는 유지로 있을 때였으니 조용구도 여러 번 작은 아버지에게 충분히 당선될 수 있다고 권했으나 조동호는 “나는 적임자도 아니며 건강도 좋지 않고 우리나라 독립으로 나는 내 인생에 목표가 달성되었으니 내 할일은 다했다”고 하면서 수원에서 출마하면 충분히 당선될 수도 있었는데 고사하고 말았다. 그때 김성숙은 유정 선생님이 안하면 나도 안한다, 고 하며 김성숙도 출마하지 않았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는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며 조동호,  박일원, 김재복, 김성숙, 장건상, 조봉암 등을 지적하여 ‘미제국의 유급 간첩’이라고 중상모략하고 이들은 ‘동요분자들’, ‘비겁자들’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러시아를 등에 업고 남침을 했을 때 조동호는 “김일성은 나이가 어려 철이 안 난 아해이다. 백성을 다 죽이고 어쩌자는 건가 이제 서로 원수가 됐으니 우리(남과 북)가 합(合)치려면(남북통일)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라고 예견하면서 한탄을 했다.
6.25 전란이 일어난 지도 이미 반세기가 지났건만 통일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그때 어찌 그렇게 예견했을까. 조동호는 그 후부터 수원 누님 댁과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을 오가면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4년 8월 15일(음) 한 많은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사로, 올곧은 성품을 보여준 선비로, 정론을 추구하는 언론인으로, 세상을 먼저 내다보는 예견자로 자신의 삶을 바쳤던 유정 조동호.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고인(故人)의 공훈 논란이 있던 시기, 동아일보 2004년 9월 7일자 A6면 전진우 칼럼은 그의 공훈을 기려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유정 조동호 선생은 ‘좌파 항일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다. 그는 현재 국가보훈처의 ‘관리번호 6503’으로 독립유공자 결정이 보류되어 있다. 주된 이유는 ‘광복 이후 사회주의 활동의 평가문제’라고 한다. 광복 후 좌파 활동이 걸림돌인 셈이다. 이는 ‘좌파 독립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최근 논란의 핵심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좌파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지금 우리 체제 속에서 과거 독립운동 시기 선열들이 가졌던 이념과 사상이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역사는 역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史實)과 평가는 또 다른 문제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일제(日帝)강점-분단-전쟁으로 이어진 우리 현대사에서 좌파의 항일 독립운동만을 따로 떼어내 평가하고 포상하는 것은 자칫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다. ‘좌파 항일운동가’의 대다수는 광복 후 북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1910년. 19세의 유정은 7세 연상의 몽양 여운형과 조우한다. 유정의 일생을 결정짓는 운명적 만남이었다. 1914년 12월 몽양과 유정은 중국 난징(南京)으로 가 진룽(金陵)대학에서 3년간 수학한다. 1918년 두 사람은 상하이에서 장덕수 이광수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한다. ‘조선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청년학생을 교양하고 그 당원을 독립운동에 이용할 목적’이었다.
이듬해인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 등 29인의 임시의정원이 구성됐는데 몽양과 유정도 그 일원이었다. 유정은 그해 안창호,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판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1923년 귀국한 유정은 이듬해 1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홍명희, 정인보 등과 논설반에 있다가 중국 펑톈(奉天, 지금의 선양) 특파원으로 파견돼 ‘전지행(戰地行)’이라는 종군기를 연재한다. 유정은 1924년 11월 30일자에서 쑨원(孫文)의 베이징 방문 소식을 전하면서 기사 말미에 “아∼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여러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모습을 한성에 나타낼까”라고 쓰고 있다. 1925년 1월 28일자에서는 “중국 일도 중국 일이거니와 우리 임시정부에서도 그동안 일신한 변동이 있어서…”라며 임정 소식을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924년 10월 23일 정기주주총회를 열고 사장 김성수, 부사장 장덕수, 편집국장 홍명희 체제가 되는데 이들이 유정의 ‘항일 기사’를 그대로 실은 것도 그렇지만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롭다.
이때까지 민족계열의 항일운동에 헌신하던 유정은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립에 가담하며 좌파 사회주의계열로 변신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 통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첫째 목표로 삼았다. 훗날 김일성은 이때의 조선공산당에 대해 “창건 후 현실에 부합되는 지도사상이 없고 대열이 통일되지 못하고…” 운운하며 폄훼했다.(김일성 저작집 45권 132∼133쪽)
조선공산당 상하이지부에서 활동하던 유정은 1928년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른다. 출옥한 뒤 몽양과 함께 ‘조선중앙일보’를 운영하던 유정은 1944년 몽양이 주도한 조선건국동맹을 거쳐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제1차 조직)을 맡았다. 박헌영 측에 건준 선전부장 자리를 물려준 이후, 유정의 활동은 사실상 종료된다. 1949년 12월 28일자 ‘한성일보’는 몽양이 이끌던 근로인민당의 간부들이 ‘북한괴뢰집단’을 비난하고 전향성명서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는데 유정의 이름이 중앙위원으로 올라 있다.
유정은 1954년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사망했다고 하나 6.25전쟁 중 서울 신당동에서 객사했다고도 전해진다. 이제 그의 영혼이나마 안식(安息)토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 기념촬영
1열 김구, 2열 신익희,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손정도,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4열 조동호 선생 등의 얼굴이 보인다.

 

1921년 5월 상해반송공원 한중호조사모임.
유정 조동호(위에서 두번째줄 맨 오른쪽), 몽양 여운형, 이유필, 최창식, 김규식, 노백린 등.  

 

 1932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 후 촬영한 가족 사진

 

 1936년 3월 20일 서울 근교에서의 결혼식 사진.

 

 1937년 3월 30일 가족과 함께

 

1944년 서울 종로 경운동 현우현의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 모임. 맨 좌측이 조동호 선생, 네번째가 여운형 선생.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서 조동호 선생이 ‘한국의 경제, 농민, 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자, 농민대중의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고 작성한 참석자표.

 

 1925년 유정 선생의 영문 사인

 

조동호 선생이 근전 김재봉(槿田 金在鳳) 선생에게 보낸 안부편지(1931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마에 시달리다 출감해 쓴 것으로 추정 됨.

 

 일정시대 퇴사 직원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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