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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학자 기자 정인보(鄭寅普)

Posted by 신이 On 5월 - 31 - 2016

 촉탁기자 정인보(鄭寅普)(1893-1950)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3·1절 노래)

‘이 날은 대한민국 억만 년의 터다’ (제헌절 노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광복절 노래)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개천절 노래)

 대한민국 4대 국경일 노래를 모두 작사한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5.6~1950).

조선의 3대 천재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에 버금하는 위당 정인보 선생도 1924년 5월 15일 공식적으로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일정시대 퇴사직원록

 

이후 정인보 선생은 동아일보에서 수많은 논설과 기사, 논문 등을 썼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김을한 선생에 따르면 위당은 ‘아무래도 기자 같지는 않았다’ 고 합니다.

“내가 위당 선생을 알기는 1927년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선생의 사회장 때인데 당시 나는 수행기자로서 한산 장지까지 갔었다. 갈 때에는 몰랐으나 돌아올 때 2등 찻간에서 보니까 베 두루마기에 패랭이를 쓰고 미투리를 신은 흡사히 상엿군 같은 사람이 하나 앉아 있는데 구자옥 씨(당시 청년회 총무)의 소개로 그가 연전 강사 정인보 선생임을 알았다. 바로 그 때에 열차 전무가 들어와서 검표를 하는데 위당 선생은 어디서 얻었는지 2등 패스(무임승차권)를 내어보이므로 차장은 암만해도 납득이 안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이리기웃 저리기웃하였다. 때가 꾀죄죄 묻은 베 두루마기에 집신 감발을 한 주제가 2등 패스가 아랑곳이 무엇이냐는 눈치였다. 거기다가 위당 선생은 일어는 한 마디도 못하였으므로 차장은 더욱 의심을 품고 위당 선생의 등을 밀어서 3등 찻간으로 내몰려는 시늉을 하였다. 자세히 보니 2등 패스는 동아일보사의 기자 패스였다. 신문사에서 잠시 그것을 빌린 모양인데 위당 선생은 어디로 보나 신문기자 같지는 않았으므로 차장이 말썽을 부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여러 사람이 나서서 ‘이 분은 유명한 학자이며 신문사에 자주 기고를 하므로, 신문기자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역설해서 겨우 쫓겨나는 것만은 면하였다.” (‘그리운 사람들’, 삼중당, 1961, 71~72쪽)

동아일보는 그가 연희전문 강단에도 섰기 때문에 촉탁기자로 겸임 발령 냈으나 위당 정인보 선생은 역시 기자라기보다 당대의 대학자요, 강골 선비였습니다. 그런 점을 높이 사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강제폐간될 때가지 그의 학문적 열정을 쏟아내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고 이승만대통령은 삼고초려해 그를 초대 감사원장으로 모셔 갔습니다.

그가 동아일보에 남긴 글들은 중후하면서도 품위가 있습니다. 사설은 무기명이지만 문체 등으로 미뤄 후학들이 그의 글로 판정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황제 순종 서거(1926년 4월 25일) 사실이 전해지자 동아일보는 1926년 4월 27일자 호외를 발행했고 그 날자 본지 1면 사설 ‘대행애사(大行哀辭)’를 그가 썼습니다.

 

1926년 4월 27일자 1면

“그러나 바랄 때 느꺼울망정 계시거니 하는 생각이 느낌 속에 섞이어 그래도 위안이 있고 그래도 의의(依倚·의지함)가 있다가 이제 벌써 멀으신 용어(龍馭·임금의 죽음)를 향하여 2천만의 눈물을 마지막 뿌리게 되니 슬프다 인간의 비애가 이에서 지나는 것이 있을까? 생각이 깊을수록 설움이 깊고 설움이 깊을수록 언어가 그치이니 차라리 붓대를 꺾고 종이를 찢어 마음껏 쓰지 못할 비애를 그대로 감추고자 하나, 조금이라도 드러냄이 없고는 우리의 애정이 더욱 견디지 못함에야 어이랴?”

이어 위당 선생은 ‘재궁(梓宮·순종의 관) 마저 가신다’ (1926년 6월 10일자 1면 사설)와 ‘유릉지문(裕陵誌問)’ (1926년 6월 10일자 1면)을 동아일보에 썼습니다.

“다만 우리의 앞길을 우리가 열어서 민복을 바라시던 성심(聖心)을 만일이라도 위로하여 드리려할 뿐이다. 슬프다. 우리의 눈물은 곧 대행의 눈물이시라. 이 눈물을 가져 방불(눈에 삼삼함)하온 의모(依慕)를 부칠 수 있다. 어찌 눈물에만이랴? 우리의 기쁨도 곧 대행(大行)의 기쁨이시니 눈물에 의모를 붙이던 것을 기쁨에 옮길 때가 언제일까?”

‘유릉지문’은 제술관(製述官) 윤용구를 대신해 지었으나 다른 의견이 있어 돌에 새기지는 않았으며 한의사인 홍승초 선생이 항아리에 담아 땅속 깊이 묻어두었다가 광복 후에 꺼냈습니다. 이 글과 관련해 위당 선생의 셋째딸 정양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버지의 글은 어느 하나 데면데면 설렁설렁 쓴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유릉지문’ – 망국의 황제의 지문을 쓸 때, 아버지의 느꺼움은 어떠하였을까?…(중략)…타고난 어짊과 슬기, 능력을 가지고도 때를 못만나 그 포부와 사랑을 펴지 못하는 임금의 쓰라린 사랑, 그를 오히려 측은해하는 온 백성의 사랑이 한바탕 통곡 속에 몸부림치게 하는 글이다.” (‘담원문록 하’, 태학사, 2006년, 537~538쪽)

‘유릉지문(裕陵誌問)’ 과 ‘교수 기자’ 위당의 모습에 대해 제자 민영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짙은 회색의 무명 두루마기가 철을 따라서 옥색빛깔의 모시천으로 바뀌는 수는 있다. 검은 펠트 모자와 검은 천의 두툼한 신발, 도수가 짙은 검은 테 안경, 그리고 한 발 먼저 들려서 선생을 앞서 가던 지팡이, 이들은 모두 변하지 않는 부분들이다. 볼품없이 꼬여진 옷고름은 아무렇게나 고쳐 매곤 하시던 습관 때문이었다. 선생이 앉아 계시던 곳이면 교수실에서나 어디에서나 신문사 원고 용지가 눈에 띄었다. 그날그날의 송고에 쫓기시던 선생의 모습이었다.…(중략)…농암(조선후기의 문신 김창협의 호)을 강독하시면서 들려주시던 말씀 중에, 농암이 글을 초할 때면 문고리를 안으로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는 것인데, 선생 자신, 순종 인산 때 유릉지문(裕陵誌文·순종의 묘지문) 제술(製述)의 대역을 맡고 (이때 선생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거실 문고리를 안에서 걸어 잠근 채 나흘이 되도록 열어주지 않아, 가족은 물론 난곡장을 당황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난곡 이건방은 하곡 이하 강화소전(江華所傳)을 갓초갓초 선생께 전수하신 분이다. 삼십 유여 년의 사사추정(師事趨庭·스승의 가르침을 받음)이었다.” (담원 정인보전집 1권, 위당문존<文存>후서<後序>)

“선생의 경학은 민중적 경학이라. 어떠한 특수 문호의 고거(考據·자세히 살펴 증거로 삼음)하던 학문이 아니요 경학이면서 정법이라. 이로써 민국의 실익을 자(資)할만큼 실구실해하려는 공부이다.” (1934년 9월 14일자 1면,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

“‘얼’이 없으면 곧 사람이 아니다. 내 이제 삼가 고하노니 제가 남이 제가 아닌 것을 아는가? 이것이 곧 ‘얼’이다. 무엇을 한다하면 저로서 하고 무엇을 아니한다하면 저로서 아니하고…(중략)…‘저는 저로서’가 이른바 ‘얼’이니 여기 무슨 심오함이 있으며 무슨 미묘함이 있으랴?” (1935년 1월 3일자 석간 1면, 5천년간 조선의 얼)

위당은 입사 전인 1924년 2월 13일자 1면 사설 ‘영원(永遠)의 내홍(內訌)’을 통해 민족의식을 나타냅니다. 위당은 이 사설에서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물이나 단체가 있으면 그들을 내세우고 후원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형제적 우애로 돌아가자’는 부제가 붙은 이 사설은 제1절이 일제에 의해 삭제된 채 나갑니다.

“이처럼 정인보는 형제애와 단결심의 배양을 통한 대내적 화합과 민족의 사상과 문화의 발견을 통한 대외적 자주를 이룩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긍정적 자주적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서 양명학에 입각한 주체적 민족사관의 정립에 초석을 마련한 것이었다.”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경인문화사, 2007년, 378쪽)

위당 선생은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을 일깨우려는 동아일보의 사업에도 앞장 섰습니다.

1931년 5월 충남 아산군 이 충무공 묘소 위토(位土·제사 비용을 대기 위한 토지)의 경매 소식이 알려지자 위당 선생은 5월14일자 1면 사설 ‘민족적 수치’를 통해 “조선인이 조선의 정신을 가지고 왔다면 우리도 외국에서처럼 비각, 동상, 기념관, 도서관 등을 이미 마련했어야 할 터인데, 이제 그의 위토와 묘소마저 채귀(債鬼)의 손에 넘어갈 처지에 이르렀음은 민족적 수치에 그치지 않고 민족적 범죄”라고 규정한 뒤 “이 충무공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일층 민족문화에 대한 숭앙심과 애착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동아일보 사사<社史> 331~332쪽 참조).

위당 선생은 이후에도 이 충무공 유적 보존에 사설과 특집기사를 통해 힘을 보탰고 역사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동아일보를 통해 쏟아냈습니다. 위당 선생이 1931년에 18종의 고서를 해제한 ‘조선고서해제’를 연재할 때 위당 선생 서재의 모습입니다.

조선고서해제를 쓰시는 정인보 씨의 서재는 대체 어떤지 구경할 수 없을까요.(성진 일 독자)

마침 봄날이라 활개를 훨훨 치며 서대문밖 교수의 책을 찾았지요.

컴컴 침침한 뒷방에 뗏장같이 된 오천여권의 누더기 책을 좌우에 성벽처럼 쌓고 별유천지를 이루었겠지요.

구태여 멀리까지 와서 교수의 서재를 구경하실 것은 없으십니다.

으스름 달밤에 옛 성터 밑으로 거닐거나 청태(靑苔)가 우거진 바위틈바구니에 가서 앉으면 그 실감이 있으리이다.

비록 누더기 되고 좀은 먹었으나 그 속에는 고조선에 빛나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온갖 우리의 실물이 들어있는 금광입니다.

이 광 속에서 작업하는 교수는 옛 보물을 찾기에 눈이 붉은 조선의 귀한 광부입니다.

 

위당 선생은 어린 시절 배운 양명학 개론서 ‘양명학연론’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이후 위당 선생은 기행문 ‘남유기신(南遊寄信)’을 1934년에 43회에 걸쳐 연재했고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는 글을 이해부터 집중적으로 발표합니다. 특히 이해 9월 6회 연재한 ‘유일한 정법가(政法家) 정다산 선생 서론’은 실학 연구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알린 효시로 꼽힙니다.

위당 선생의 역작 ‘오천년간의 조선의 얼’은 1935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58회, 1936년 1월 7일부터 8월 27일까지 282회, 2년간 무려 440회에 걸쳐 연재되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중단됩니다.

“정인보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5천년의 얼’은 그것이 난해여서 독자가 문선공과 교정자와 필자의 3인이라는 평은 들었지만 무게 있는 글로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강영수 전 동아일보기자, 항일투쟁과 언론, ‘한국의 언론’, 문화공보부,1968년,112쪽)

“‘조선의 얼’은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왜곡과 일부 국내학자들의 비주체적인 역사연구에 대한 의분심에서 집필된 것이었다. 따라서 ‘양명학연론’과 ‘조선의 얼’을 통한 ‘얼’사관의 정립과 한국고대사 연구는 정인보의 반식민주의적 역사학의 골자를 이루고 있었다.” (오영섭 ,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380쪽)

6·25때 납북된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막내아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회고입니다.

 

“제가 열 살 때인데 아버지가 고하(송진우)나 벽초(홍명희)를 만나러 가면서 ‘같이 가자’고 하면 초롱 들고 따라 나섭니다. 고하 집에 가면 아버지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딸 정양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얘기도 비슷합니다.

 

“고하를 존경해서 우리나라 제일가는 정치가 외교가라고 하셨고요. 벽초를 그렇게 좋아하셨으니 그 아들에게 딸을 시집보냈지요.”

 

 

 

 

 

“아버지가 못내 좋아한 분은 벽초장(벽초 홍명희)을 비롯하여 일창 유치웅, 동산 심재찬, 재관 이무승,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현상윤, 범산 김법린, 가인 김병로, 근촌 백관수, 추강 김용무, 상선 허유, 송포 정낙훈, 현산 이현규, 민세 안재홍, 호암 문일평, 김용승과 그 서랑 최태영, 석주명, 양주동 여러 선생님이다.” (담원문록 발문, ‘담원문록 하’, 태학사, 2006, 529쪽)

 

 

 

 

 

위당 선생은 동아일보 사람들과 납북될 때까지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먼저 고하 송진우. 1946년 12월 1일 동아일보 중간(重刊) 1주년 기념일에 위당 정인보는 11개월 전 죽은 고하 송진우 사장을 추모하는 시조를 싣습니다.

 

 

 

1946년 12월 1일자 3면

 

 

 

 

 

중간 1주년 기념일에

 

숙초(宿草) 밋헤 누은 고우(故友) 송고하(宋古下)를 우노라

 

 

 

1

 

어젯밤 “두굿”차니 마틔느니 간해이때

 

겨울은 또겨울이 벗님고만 꿈이라니

 

스무해 유난턴“사이” 알리업서 하노라

 

 

 

2

 

“화개동” 어느 “아츰” 인사라고 한둥만둥

 

그냥 그랫던들 하마아니 덜 “슬브”리

 

“정”이야 잇는다 할손 “의초”어의 하리오

 

 

 

3

 

흰갓흰옷으로 마즈막들 “울”구“불”제

 

그누구 어느친고 님의말을 전햇것다

 

“한”일에 “시여질” 마음 둘업슨줄 아노라

 

 

 

4

 

신문사 집을짓고 “키”고길러 몃몃해오

 

하면서 아니매어 “부세” “의”면 한“방치”로

 

그“호외” 나도랏던들 빈터아니 됏스리

 

 

 

 

 

1948년 2월 ‘담원시조집’(을유문화사)에 위당 선생이 제3연에 단 주(註)를 보면 순종이 승하했을 때 ‘제2차 독립운동을 대규모로 일으키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고하가 당시 위당에게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알리는 고종의 유칙을 위작해 달라고 맡겼고, 4연의 ‘호외’는 그 유칙을 담은, 배포되지 못한 신문호외를 말합니다.

 

“이렇게 고하는 위당에게 고종의 유칙의 위작을 의뢰했다. 그리고 고하는 유진태로 하여금 윤모에게 계획안건을 전하여 협력을 구하게 하는 한편, 접촉할 수 있는 각 단체, 각 교육기관 간부들에게도 유칙발표와 동시에 시위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고, 또한 학생들에게는 6월 10일 국장에 처할 애국 감정의 앙양책을 다짐했다.” (‘독립을 향한 집념 – 고하 송진우 전기’, 동아일보사, 1990, 285쪽)

 

 

 

5

 

이다음 뜻잇는이 “계산골”을 이질것가

 

막바지 종치는대 어듸찜이 “숙직실”터

 

십삼도 “만세” 아우성 “그뉘”예서 터친고

 

 

 

위당이 고하와 친하게 된 것은 순종 승하 때이지만 동아일보와 동아일보 사람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알았습니다. 5연의 “계산골” “숙직실” 터는 3·1운동의 발원지 중앙학교 숙직실을 말합니다. 위당은 1946년 10월 세운 고하의 비문에도 비슷하게 적어 넣었습니다.

 

“이때 남북으로 연락하는 비용은 대개 김성수 군이 대었고, 여러 교파와의 연락은 현상윤군이 맡았고, 상해 동경 북미와 연락하는 일, 학생들의 부서를 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송 군이 총책임을 졌다.”

 

 

 

“어려서부터 난리를 겪고 중간에는 세상 일이 비뚤어지고 잘못 되었으나 항상 낙관을 갖고, ‘적의 망하는 것은 서서도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언젠가 김성수 군이 나에게, ‘고하의 말을 믿지 마시오. 서서 기다릴 수 있다 하더니 지금 이 꼴이 무엇이오’하고, 농담을 한 일도 있었지만, 군이 신문에 중국의 현상과 세계의 전도를 논한 것이 20년을 지나서도 맞지 않는 것이 없은즉, 그 식견의 탁월함이 이와 같았다.” (고하의 비문, ‘독립을 향한 집념 – 고하 송진우 전기’, 21쪽, 24쪽)

 

 

 

8

 

“어룸목” 충무산소 님의손에 놉흐섯다

 

그렁성 겨레“얼”을 한번솟궈 올리랴고

 

“온천”서 떠들던밤이 “알풋”“아득”하고녀

 

“고하는 민족 영웅의 묘소 위토가 경매되어, 남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묵과하지 않았다. 고하는 위당 정인보를 찾았다. 삼성사(三聖祠) 안이 실패한 후로 이런 일을 하나 하지 못해서 늘 꺼림칙하던 차에 마침 잘 되었소. 그 산판을 후손들에게 도로 찾아주고, 거기다가 현충사를 짓는 것이 어떨까요. 삼척동자라도, 이 나라 사람으로 임진왜란의 충무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이 일을 하나 하면 동포들도 또 한번 각성하게 될 것이고, 큰 등불을 켜 놓는 거요…글은 위당이 써야겠소마는 은행이나 왜정을 공격해서는 도리어 화를 일으켜 일을 그르치는 결과를 가져올 염려가 있으니, 다만 그 산판 잡혀 먹은 충무공의 후손들을 치는 논조로 쓰도록 하시오. 여하간 죄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니 그래야만 일이 될거요.’ 고하는 이와 같이 말하고, 위당으로 하여금 신문에 충무공의 후손을 공격하는 글을 쓰게 하고 은연 중 사당 중건을 역설케 했다. 침체해가는 민족혼을 이 기회에 일깨우고 또 위토를 찾고, 현충사 건립을 겨냥한 것이었으니 일종의 양동전술이었다. 그러나 처음 그 진의를 모르는 충무공 후손은 동아일보사로 고하를 방문하고 과잉 힐책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위당의 글에 민세 안재홍의 반박문이 조선일보에 실렸다. ‘이런 일이 있으면 마치 잔치 마당의 공론처럼 떠들기는 쉬워도 정신 차려 일이 되도록 하기는 좀체 어렵습네다. 내버려 두시오. 뭐라고들하건. 우리가 하는 일은 될 것이고, 그러면 또 그만이 아니요’하고, 고하는 다시 위당에게 반박문을 쓰게 하니 이것은 자꾸 충무공에 대한 신문기사가 쓰여지게끔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와 같이 비등하는 여론의 뒤에서는 착착 충무공의 사당 중건에 전력을 기울였다.” (‘독립을 향한 집념 – 고하 송진우 전기’, 316~317쪽)

 

 

 

동아일보 1931년 5월 14일자 1면 사설 ‘민족적 수치’ (48회에서 인용)에 이어 5월 15일자 1면 시론 ‘이 충무공 묘산경매문제’에서 위당은 “이 일은 이씨일문의 대변(大變)만이 아니라 조선의 변고이며 수치(羞恥)”라며 “편손(嗣孫·대를 이을 자손)의 이 일은 마땅히 민족적으로 징벌(懲罰)할지며 성죄(聲罪)할지며 또 진(進)하여 이씨의 종문을 무책코자 하노니 편손은 이와 그르쳤다하자,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도록 두었다함은 여하한 사정이 있다 할지라도 전조선을 향하여 변해(辨解·말로 풀어서 밝힘)치 못할 것이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일보 1931년 5월 20일자 1면 사설 ‘이충무공의 위토와 묘지’

 

 

 

 

 

동아일보 1931년 5월 21일자 1면 사설 ‘이 충무공과 우리’

 

 

 

 

 

-동아일보 1931년 5월 25일자 1면 사설 ‘충무공유적보존회창립’

 

-조선일보 1931년 5월 25일자 1면 사설 ‘이 충무공 유적 보존회 유종의 미를 기함’

 

 

 

-동아일보 1931년 6월 15일자 1면 사설 ‘충무공위토 추환’

 

-조선일보 1931년 6월 15일자 1면 사설 ‘이 충무공과 유적 보존, 금후 노력이 긴절’

 

 

 

-동아일보 1931년 6월 17일자 1면 사설 ‘성금 일만원’

 

 

 

“제2단계의 사업으로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 방화산에 현충사 건립공사에 착수하였다. 고하는 몸소 위당과 함께 아산의 건축 현장에서 일주일을 유숙하면서 감독까지 했다. 그해 연말에 현충사는 준공되었다.” (‘독립을 향한 집념 – 고하 송진우 전기’, 318쪽)

 

 

 

 

 

1932년 6월 7일자 7면 이충무공 영정봉안식 화보 중 보존회위원 일동

(전열 좌로부터) 남궁훈, 윤치호, 송진우, 유억겸, 이상범

(후열 좌로부터) 백관수, 정인보, 박승빈, 김병로, 김철중

 

 

 

 

 

1946년 12월 10일자 4면

 

 

 

 

 

다음은 벽초 홍명희 선생에 대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회고.

 

 

 

“아버지의 한문 문집인 ‘담원문록’의 첫 글이 벽초 아버지의 행장일 정도로 아버지는 벽초와는 각별했습니다. 벽초 아버지는 경술국치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병합문서가 내려오자 그것을 변소에 버리고 자결했습니다.”

 

위당의 기행문 ‘남유기신(南遊寄信)’에도 1920년경 이미 벽초와 어울렸음을 나타내는 구절이 있습니다. 벽초 뿐 아니라 근촌 백관수, 석전 박한영의 이름도 보입니다.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민세 안재홍도 꽤 친했나봅니다.

 

 

 

 

 

동아일보 1934년 8월 23일자 8면 ‘남유기신’ 제18신

 

정읍 오니 옛생각 나는 것도 있고 또 새 자랑거리도 있습니다. 14년전에 홍벽초(홍명희의 호)와 같이 대둔산에서 1삭이나 묵다가 내장(內藏)으로 가는 길에 정읍서 하루를 자는데 늦도록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았던지 오늘날 교원 소설가 다 예기하던 바이 아니니 여기서 나는 옛생각은 이것이요, 송계(강학병의 호)의 소개로 정읍 주막에서 황욱 씨를 만났는데 이는 곧 이재 황윤석 선생 종손의 계씨(季氏)입니다. 내 이재를 경모함이 오래라 이번에도 근촌(백관수의 호)과 약속하고 고창서 모여 가지고 이재고택을 같이 찾자하였었는데 뜻밖으로 여기서 그 초손(肖孫)을 만난 것도 반가우려니와 또 황욱 씨의 말을 들으니 형제분 사이에 오래 전부터 ‘이재전집’ 출판할 계획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든지 근속히 해 보겠다 하기에 잔학이나마 편차와 교감(校勘)을 자임하겠다 하였습니다. 새 자랑으로는 이것을 집필하고자 합니다. 그 이튿날 내장사 동구 채 못미쳐 나 석전(박한영의 호) 민세(안재홍의 호)는 자동차에서 나리고 송계는 며칠 뒤 귀암사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대로 순창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은 육당 최남선. 위당 선생과 육당 선생이 함께 1924년부터 논설반 촉탁기자였기 때문에 1925년 11월 5일자 1면 사설 ‘곡(哭) 백암 박부자(朴夫子)’를 누가 썼는지 불분명하게 됐습니다. 위당 선생 측에서는 위당 선생이, 육당 선생 측에서는 육당 선생이 이 글을 썼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 1면 사설 곡(哭) 백암 박부자(朴夫子)

 

 

 

 

 

“저는 아버지가 백암(박은식) 선생을 존경하셔서 그 사설을 아버지가 쓰셨다고 생각했어요. 동아일보의 양명학연론 후기에도 나오잖아요. 박은식 선생에게 글을 질정(質正· 물어 바로 잡음)하지 못함이 유감이라고. 그래서 ‘담원문록’ 의 담원연보에 그렇게 실었어요.” (정양완 전 교수)

 

 

 

동아일보 1933년 12월 17일자 석간 1면

 

양명학연론 후기(3)

 

(전략)…붓을 던짐에 미쳐 내 본사(本師) 이난곡(건방) 선생으로부터 사학(斯學)의 대의를 받음을 정고(正告)하고, 동호(同好) 송고하(진우)의 사학천양(斯學闡揚 학문을 밝혀서 널리 퍼뜨림)에 대한 고심을 심사(深謝 깊이 감사함)하며 또 구원(九原 저승)에 영격(永隔 영원히 이별함)한 박겸곡(은식) 선생께 이 글을 질정하지못함을 한함을 부기한다.

 

 

 

“‘양명학연론’의 말미에서 ‘왕양명실기’(1910)를 저술한 박은식에게 질정을 받지 못했음을 못내 아쉬워하였다.”(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경인문화사, 2007, 373쪽)

 

 

 

1926년 시조집 ‘백팔번뇌’에 기꺼이 발문을 쓰고 1927년 3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백팔번뇌 비평에 대하여’란 수필을 통해 육당의 시조를 옹호했던 위당 선생은 육당과도 친했다고 합니다.

 

 

 

“최남선과 정인보 양씨는 원래 교분이 자별하다가 최 씨가 편이 앉아 월급을 타게 된 뒤에 절교문가지 보내고 피차상종을 하지 않더니 엇지 된 셈인지 요새는 다시 복교(復校)가 되어 전과 같이 가깝게 상종을 한다. 개인교제도 점차 국제 교제로 화하는 모양.” (다언생<多言生>, ‘비중비화, 백인백화집<秘中秘話, 百人百話集>’, 별건곤 1934년 1월호, 20쪽)

 

 

 

“세상에서 육당과 위당과의 교의가 육당이 중추원의 조선사편수회위원이 된 뒤로 끊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위당은 끊임없이 육당과 왕래하였고, 더구나 육당이 그 뒤에 만주국 건국대학에 갔다 와서 효제동에 들어앉았을 때에는 더욱 왕래가 잦았다. 그때는 1942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우리나라 사람한테 대한 탄압이 심하였고, 뜻있는 사람들은 농촌으로 숨어 버리던 터라, 위당과 벽초는 서울 근교인 창동에 엎디어 있었는데, 육당은 자주 창동으로 가서 두 친구를 만나고, 이곳에서 자신도 서울을 떠나서 우이동에 파묻힐 생각을 하였다. 효제동 집을 팔고 급히 우이동에 집을 마련하여 나간 것은 위당과 벽초의 권고에 의한 것이다. 위당도 육당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아서 대한민국이 성립한 뒤에 반민족행위자처단법이란 것이 생겨서 육당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 때에 발 벗고 나서서 열심히 변명해 준 사람이 당시 대한민국의 첫번째 감찰위원장이던 위당이었다. 6·25사변 중에 위당은 회현동의 집을 뺏기고 종기를 앓으면서 낙원동에 와서 숨어 있었는데, 그때 필자와 자주 만났었다. 위당은 육당의 신상을 항상 염려하고 필자더러 우이동을 한번 다녀오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7월 20일경에 우이동에 나가서 육당을 뵙고, 위당의 말씀을 전하고 돌아와서 위당에게 소식을 전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며칠 있다가 위당은 납치되어 지금까지 소식이 묘연하다. 육당과 위당은 서로 아끼고 도웁고, 서로서로의 뜻을 알았으며, 학문상으로도 공명하는 점이 많았다. 위당이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된 데 있어서 육당의 도움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위당도 솔직히 인정하고 있어 두 분의 친교는 가위 관포지교라고 할 수 있다.” (조용만, ‘육당 최남선’, 삼중당, 1964, 234쪽)

 

 

 

위당 선생은 동아일보 지면 뿐 아니라 ‘기다(幾多)의 글’로 동아일보 사람들에 대한 정을 엮어갔습니다.

 

“위당은 내가 알기에는 가장 정적인 분이다. 그의 감정은 만져지는 그의 손길보다도 더욱 만문하고 다감하다. 이제 집중의 육친과 근척(近戚)을 추모 상념하는 사(辭), 고인과 지우를 회억(回憶) 애상(愛想)하는 기다의 문학을 읽어보라. 그 다감 섬세 은근한 정이 어느 무정을 눈물겹게 하지 않으랴.” (양주동, ‘담원시조-서(序)’, 담원 정인보전집 1권, 382쪽)

 

 

 

“김철중 군은 오래 동아일보에 있으면서 있고 없고 간에 꾸려나가느라 수고도 또한 많았다. 지난해 고하(송진우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한 것은 1936년 11월 11일이었음)가 물러나자 김군도 또한 그만두고 떠났는데, 요즘 들으니 수원에 가서 집을 짓고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어, 말쑥하니 옛 숨어사는 이의 멋이 있다고 하기에 고시 한 편을 보내어 벽에 걸도록 한다.

 

 

 

(전략)…신문사에서는

 

또는 아기 새 깃과 죽지 자라게 하느라

 

어루만지는 어미새랄까?

 

깃과 죽지 차츰 자라

 

정말로 사랑스런데

 

어쩌자고 이걸 버리고

 

산택으로 간단 말이오?…(후략)” (‘담원문록 중’, 192~193쪽)

 

 

 

 

 

“김 인촌(성수)이 붉은 나무책상을 사 보냈기에 고마워서

 

반평생 경서를 가로놓을

 

책상이 아쉬워

 

좀 먹은 책 펴놓으려면

 

마련도 많았었네.

 

차마 잊으리오

 

소중한 친구의 마음

 

청옥안인들 어찌 자단향만큼이야 향기로우리오.” (‘담원문록 중’, 403쪽)

 

 

 

 

 

“창동에는 벽초 홍명희,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등이 은둔하고 있었다. 동일은행 시절 일민(일민 김상만)은 아버지(인촌 김성수) 심부름으로 자주 이곳을 찾았다. 아마도 인촌이 그들에게 보내는 생활비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중략)… 어느 날 위당은 인촌의 심부름으로 자신의 집을 찾은 일민에게 물었다. ‘자네 호가 있는가?’…(중략)… 훗날 위당은 친필의 붓글씨로 당시의 대화를 정겹게 적어 일민에게 보냈다. 귀한 글을 받은 일민은 크게 기뻐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은 그 글의 전문이다.

나는 변변치 못하여 친구가 적은데, 유독 인촌 · 송암(松庵-고하 송진우)과는 서로 왕래하기를 좋아하여 격의가 없었다. 인촌에게 현명한 아들이 있다고 송암이 말했다. 만나보니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이 같았다. 방금 해외에서 돌아왔으나, 착하고 공손하며 가정의 법도를 지키는 데 더욱 마음을 쏟았다. 나에게 말하기를 ‘저는 이 땅의 한 국민(一民)이니 이것으로 호(號)를 삼으면 어떻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이 호에 값하기 위해서는 단지 ‘나는 일개 국민이다’라고만 말하지 말고, 나 자신이 국민과 일체가 됨으로써 나와 천지만물이 일체가 되는 인화(仁和)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그 호의 뜻을 채울 수 있으니 힘쓰기 바란다.…(후략)’ ”(‘일민 김상만 전기’, 동아일보사, 2003, 71~72쪽)

 

 

 

 

 

위당 선생이 납북된 뒤 1956년 대한적십자사에 실향사민신고서(失鄕私民申告書)를 냈던 부인 조경희 여사는 1979년 10월 13일 8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용재(백낙준의 호) 선생 발의로 조씨 부인이 고이고이 간직하시던 담원문록 고본(藁本)이 영인되어 나오고, 그것을 기념하여 작은 자축회를 가졌었다 아드님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 올라앉으신 부인의 양 어깨는 유독 가냘퍼 보였고, 상기하신 듯한 얼굴에서는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고마울 수 없고 그렇게 아름다울 수도 없는 선생의 분신이 거기에 계신 것을 나는 보았다.” (민영규, 위당문존<文存>후서<後序>, 담원 정인보전집 1권)

 

“돌아가신 것도 나중에 신문(동아일보) 보고 1962년이니까. 그때는 안믿었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절에도 가시고 점 치러도 가시고. 평생 그러다 가신 거야. 다녀오시면 아버지 분명이 살아계신다면서 봄 가을이면 옷을 풀 해서 걸어놓으시고. 그리고 몇 년 동안을 진지를 솜 보자기에 싸서 아랫목에 넣어두시고. 그러면 아버지가 맑고 명랑한 소리로 멀리서 ‘문 열어라’하시며 오신다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렇게 믿고 계셨어요.”

 

“물론 지금 우리가 충주에 가묘를 모셨는데 어머니 돌아가신 데 옆에서 가묘를 했는데 죄송스런 얘기죠. 만일 기회가 닿으면 이 사람들이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유해를 모셔 합장하는 것.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 눕고 싶은 그 소원을 들어드리는 일을 해야 되겠죠.”(정양모 증언, ‘한국전쟁납북사건사료집 1’,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2006, 358~359쪽) 

실향사민신고서-정인보

“직업: 국문학자 사학가

납치상황: 4283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 서울에 들어오자 남산동 1가 16의 4를 소위 역산(逆産)으로 몰수당하여 낙원동 한양병원 박계양 씨 댁에 피신중 동 7월 31일 북한공산집단 내무서원에게 강제 납치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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