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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주필 편집국장 홍명희(洪命憙)

Posted by 신이 On 5월 - 31 - 2016

 주필 편집국장 홍명희(洪命憙)(1888~1968)

 조선의 3대 천재 중 또 한 사람으로 가장 연장자인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는 ‘민족적 경륜’ 파문으로 이광수가 동아일보를 떠날 때 동아일보에 들어왔다.

‘민족적 경륜’ 파문에 이은 ‘박춘금사건’으로 1924년 4월 25일 열린 임시 중역회의에서 사장 송진우, 전무 신구범, 상무 겸 편집국장 이상협, 취체역 김성수, 장두현이 물러나고 그 다음날 이광수가 떠난 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자이자 민족지도자인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 1864~1930) 을 사장으로 영입할 때 당시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홍명희도 취체역 주필, 편집국장, 사회부장까지 맡아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는다.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그러나 홍명희가 동아일보 지면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21년 6월 28일자 1면이다.

1921년 6월 28일자 1면

가인 홍명희 형님(1) 

– 옛일을 생각하면 모두 다 꿈같소 – 

동경에서 진순성(秦瞬星)

“가인(可人) 형님! 그것이 언제던가? 참 세월 가는 것이 빠르기는 하오. 그것이 벌써 8년 전 옛 일이로구려!

한 푼 없는 내가 한 푼 없는 형님과 역시 한 푼 없는 소앙(편집자 주- 조소앙<趙素昻>) 형님을 바라고 명덕리(明德里, 편집자 주- 상해 소재) 그 구석 집을 찾아갔을 때 참 그때 일을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꿈속 같기도 하오.

그때 우리의 생활, 형님의 꼴 누르스름한 데 줄이 죽죽 진 겨울 양복(겨울이나 여름이나, 낮이나 밤이나,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통거리로 입는 단 한 벌의 그 양복)을 자리 속에서 툭툭 털고 ‘담배가 먹고 싶은데 어제 밤에 누가 먹다 남은 끄트메기도 없나! 어디 마룻바닥을 좀 찾아보아’하는 말이 그때 형님의 자고 일어난 첫 인사이었소.

그러면 소앙 형님은 담배 안 먹는 패라 ‘1년 가도 동전 한 푼 만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담배는 무슨 담배야 그만 두오… 어이 추워!’하고 시커먼 벽난로를 들여다보나, 그야말로 1년 가야 불 한번 피워보았어야지! 연통을 지나 찬바람이 휙 불어 내려오면 별안간 모두들 어깨를 으쓱하고 소름질들을 치다가 김탁 군이 어디서 부서진 교의(交椅) 다리 하나 얻어온 것을 둘러싸고 금덩이 은덩이나 얻어온 듯이 ‘어디서 얻었어! 어디서 얻었어!’하고 별안간 활기들이 나서, 그것을 쪼인다, 불을 지핀다 해가지고 겨우 불이 붙어 오를까 말까 하는 교의 다리 하나를 바라다보며 사람이 없으면 곧 집어삼킬 듯이 박달학원(博達學院, 편집자 주- 상해 명덕리의 조선인학교. 박은식 신채호 문일평 정인보 홍명희 등이 교사) 식구들이 제각기 손을 내밀고 앉았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에 눈물이 돌고, 또다시 꿈같이 생각나오.”

창간기자였던 순성 진학문(秦瞬 秦學文)이 5회에 걸쳐 기고한 신변 잡문(雜文)같은 상해 시절의 어려웠던 이야기, 특히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의 상징적 인물 중 한 사람인 홍명희를 내세운 글을 동아일보가 이례적으로 1면에 실은 것은 상해임시정부의 존재를 은연중에 조선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숨은 뜻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창간 4주년(1924년 4월 1일)을 전후한 그 무렵 동아일보는 광화문 네거리에 새 사옥부지 4백여 평을 사들이고 새 윤전기 도입을 서두르는가 하면 지방판 발행을 단행하는 등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의욕에 차있었다. 그러나 창간 이후 3년 동안 연평균 15회이던 압수건수가 1924년 한 해에만 무려 56회로 늘어나 ‘의욕’과 ‘감시 탄압’이 맞부딪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된 홍명희는 바로 그 다음날인 5월 17일자 사설 ‘독자 제위에게 고하노라’를 통해 간부진의 교체로 동아의 주의나 정신에 변동이 없을 것임을 선언했다.

1924년 5월 17일자 1면

독자 제위에게 고하노라.

一. 회고하면 본보의 창간이 근(僅)히 4주년이오 또한 일개월 반쯤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지내온 경로를 추억하면 파란이 중첩하였고 험준이 계속하였습니다. 혹은 신구(新舊)의 충돌로 평지의 풍파를 야기하던 때도 있었으며 혹은 고신척영(孤身隻影 · 외로운 신세)으로 수역동포(殊域同胞 · 멀리 떨어진 동포)의 화란(禍亂)을 부급(赴急 · 급히 전함)코저 하다가 검두(劍頭)의 원혼을 작(作)한 동지(편집자 주- 만주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훈춘사건’을 취재하러갔다 1920년 11월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을 말함)도 있었으며 혹은 정간(停刊)의 화를 피하여 위기일발의 경영난이 도래한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본보의 신조가 확호(確乎)할수록 그만큼 시련의 충돌이 불절(不絶)하였으며 본보의 지반이 뇌호(牢乎)할수록 그만큼 물의(物議)의 비등(沸騰)이 불휴(不休)하였습니다. 과거를 회억(回憶)하고 현재를 응시하매 오인(吾人)의 감개가 어찌 제애(際涯 · 끝)가 있겠습니까.

二.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추억하는 것보다 능히 성찰의 념(念)을 절실히 할 것이며 또한 갱신의 책(策)을 강구할 것이며 이에 본보는 구(舊) 간부의 인책 퇴사를 기회로 하여 새로이 여러 간부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본보의 주의를 더욱 간명(簡明)케 하며 또한 만천하 독자의 기대를 고부(孤負 · 어긋남)치 아니하려하는 것이 본사의 미충(微衷 · 작은 속뜻)인 것을 양찰(諒察 · 헤아려서 살핌)할 것이로다. 본보의 주의와 정신은 결코 문장에만 있지 아니하며 또한 기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생명력이 항상 사라지지 아니하고 움직이는 것이 이곳 만천하 독자에게 굳센 믿음과 넓은 사랑을 받아온 까닭이라 합니다.

三. 물론 본사는 주식회사라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영리를 주안(主眼)으로 하는 회사조직과는 특수한 차이가 있는 것은 본사 창립의 동기와 역대 간부의 교체와 주주 각위(各位)의 고의(高義)가 이것을 증(證)하야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민족의 생명력을 발전하기 위하야 본보 창간의 필요가 생(生)하였으며 또한 본보의 유지 발전을 위하야 자본 모집의 방편으로 주식제도의 조직에 의하였을 뿐입니다. 그럼으로 만일 본사로 하여금 영업상 소득이 있고 양적(良績)이 있다하면 이곳 본보 유지의 소득이며 본보 발전의 양적이라 할 것입니다. 환언하면 본보의 유지는 조선 문화의 촉진을 의미하는 것이며 본보의 발전은 사회사업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본사의 존재는 결코 한두 개인의 영리욕을 만족키 위하여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사회의 공리공복(公利公福)을 위하여 존재한 것이며 따라서 본사의 간부도 우리 사회의 공복으로서 활동하여왔으며 이로부터서도 활동하여 갈 것을 확신합니다.

四. 그러나 양마(良馬 · 좋은 말)도 백락(伯樂)이 불고(不顧)하면 경마(驚馬)에 등(等)하고 보옥(寶玉)도 장석(匠石)이 기지(棄之)하면 벽돌과 다를 것이 없으니 여하(如何)히 본사의 단성(丹誠 · 정성)이 곡진(曲盡 · 간곡함)하고 본보의 주의가 고귀하다 할지라도 만일 만천하 독자 제씨의 철저한 이해와 심후(深厚)한 동정(同情)이 없으면 어찌 현상(現狀)과 같은 발전을 도(到)하였으며 동시에 어찌 장래의 번영을 기(期)하릿가. 그동안 본보의 중요 간부의 퇴사로 인하여 만천하 독자 제씨의 의념(疑念)을 층생(層生)케 한 것은 실로 본사로서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본보의 주의(主義)와 정신(精神)은 간부의 교체로 인하여 소호(小毫 · 아주 조금)도 변동될 것이 아니니 만천하 독자 제씨의 철저한 이해와 심후한 동정을 간구하여 말지 아니합니다.

홍명희가 벌인 첫 사업은 1924년 12월의 ‘2천원 대현상’과 1925년 1월 신춘문예작품 모집이었다. 1925년 1월 홍명희 학예부장 겸 편집국장, 주필이 시작한 ‘신춘문예작품 모집’은 1940년 폐간될 때까지 거의 매년(1926년과 1937년 제외) 이어져 오늘날의 신문, 잡지 등에서 연례행사로 행해 신인 등용문이 되고 있는 신춘문예의 출발점이 됐다.

1924년 12월 17일자 1면

2000원 대 현상

조선 신문계 초유의 대현상

논문, 소설 각제(各題) 천원 대현상

◇ 독자 제씨도 아시는 바와 가치 각종 신문계에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현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종래의 전례로 보면 그 소위 상품이란 몇 십원 몇 백원을 가지고 자가의 선전을 위주하거나 독자의 호기심을 사는 것이 보통이고 조금 체면있는 신문계에서라도 일시의 방편이나 독자에게 사례하는 뜻으로 하였을 뿐이고 그 현상하는 바 목적에 대하여 뜻깊고 보람있게 한 것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외다.

◇ 이제 본사는 심절히 느낀 바가 있고 통절히 깨달은 바가 있어서 논문과 소설 두가지 종류에 한하여 이천원이란 적은 돈을 내어놓고 ‘대현상’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너무도 허풍이 아니냐고 꾸중하시는 독자가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지못한 현상이지마는 이만한 것도 조선 신문계에서는 처음이라 자랑이 아닌 것도 아니외다.

◇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대현상이라 하고 조선 신문계에 처음이라함은 이천원 상금 그것을 가르켜 하는 말이 결코 아니외다. 명일에 별항으로 자세히 발표하려니와 진실로 ‘대현상’의 의미는 모집하는 그것의 내용에 있다는 것이외다. 논문 자체가 진실로 조선민중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논문이며 소설 자체가 진실로 조선 문학계에서 처음으로 시험하는 일이라 이것이 이른바 대현상이라 하여 주저치 않는 바이외다.

이는 실로 ‘조선 신문계 초유의 대 현상’이라는 문구가 어색하지 않은 단연 1920년대 최대 규모의 현상 공모였다. 이어 다음날인 12월 18일 이에 대한 상세한 공모 규정이 발표되었다.

1924년 12월 18일자 2면

현상대모집

소설은 춘향전 개작

논문 내용은 신년호에

◇ 춘향전이란 무엇인지 조선 사람치고는 아마 모를 사람이 드물까 합니다. 아무리 내용이 보잘것 없게 된 것이라 하더라도 근세조선의 국민문학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이것 이외에 별로 없을 것이외다.

◇ 하루밤 언약을 죽음으로 지킨 춘향의 뜻을 단순한 정조관념 이외에 보다 열렬함 보다 심각한 의미로 해석할 수가 없지 않으며 죽어서 사당에 들지 못한다 함을 불고하고 지존한(당시에) 관권의 총아로서 기생의 딸을 정부인으로 삼은 몽룡의 태도는 일시의 풍정으로 인한 부득이의 결과라고만 해석할 수가 없을 것이외다.

◇ 이 두 주인공을 뼈로 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그 시대 그 인물 그 풍속의 정조를 만일 솜씨 있는 현대문사의 손으로 고쳐놓는다 하면 그 소득이 얼마나 크릿가? 이것이 이번 본사가 대담하게 계획한 동기외다.

◇ 투고요령 및 현상규정 ◇

一. 개작범위 : 시대, 인물 등을 일절 수의(隨意)로 개작하되 재래 춘향전의 경위를 손상치 말일

一. 문체장단 : 문체와 장단도 일절 수의로 하되 되도록 장편에 순언문으로 할일

一. 용지 기한 : 용지는 반드시 원고지로 하고 오는 3월 말일까지 본사에 도착하도록 할일

一. 등급 상금 : 1등 1인 5백원

2등 1인 2백원

3등 3인 각 백원

(원고는 당선 여하를 물론하고 일절 반환치 아니하며 출판권도 본사에 있음)

동아일보사

신춘문예 공모 사고는 1925년 1월 2일자에 났다.

1925년 1월 2일자 2면

박사진정(薄謝進呈, 사례로서 얼마 안 되는 돈이나 물품을 준다는 뜻)

신춘문예모집

문예란 · 부인란 · 소년란

◇ 종래의 문예란 부인란 소년란 등으로 힘이 자라는데 까지는 보다 충실하게 하여 조금 조금씩이라도 보람있게 하여보려고 본사 편집국장 홍명희씨의 학예부장 겸임 아래에서

一. 문예란계

二. 부인란계

三. 소년란계

의 세 가지 부문을 따로따로 독립시키고 각계에 책임자를 두어 힘과 정성을 다하려 합니다.

◇ 어떻게 하여 나가는지는 장차 사실로써 보여드리려 하거니와 우선 아래의 규정으로 일반 신진작가의 작품을 모집하오니 우리의 시험을 도와주시려는 유지는 많이 투고하여 이 세 가지란으로 하여금 금상첨화의 꽃밭을 이루게 하여 주시읍.

◇ 문예계 모집작품

一. 단편소설 1등 1인 50원

2등 2인 각 25원

3등 5인 각 10원

二. 신시 1등 1인 10원

2등 2인 각 5원

◇ 부인계 모집작품

一. 가정소설 1등 1인 50원

2등 2인 각 25원

◇ 소년계 모집작품

一. 동화극 1등 1인 50원

2등 2인 각 25원

二. 가극 1등 1인 50원

2등 2인 각 25원

三. 동요 1등 1인 10원

2등 2인 각 5원

입선 5인 각 2원

◇ 이상 각계에 대하여 투고하시되 내용을 모두 각계에 특색이 나도록 부인계 투고는 부인들이 읽기에 알맞은 것으로, 소년계의 투고는 반드시 소년소녀에게 적당한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이밖에 주의하여 주실 것은

▲ 투고기한은 금월 말일까지

▲ 원고의 수는 무제한

▲ 원고는 각계 모집을 별봉하여 문예계면 문예계, 부인계면 부인계로 보내시되 주소 씨명을 분명히 쓰실 일

▲ 원고는 당선 여부를 물론하고 일절 반송치 아니함

“편집국장에 취임한 이후 홍명희는 문예 방면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이듬해 연초부터는 학예부장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동아일보에서는 우수한 문학작품과 훌륭한 신인 발굴에 힘을 기울여, 1924년 12월에는 ‘2천원 대 현상’을 걸고 ‘춘향전’을 현대소설의 수법으로 개작한 작품을 공모했으며, 이듬해 1월에는 한국 신문 사상 최초로 ‘신춘문예’를 공모하였다. 그 중 전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춘문예 제도는 그 뒤 동아일보 뿐 아니라 다른 신문들에서도 채택되어, 그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중요한 통로가 되어왔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9, 161쪽)

“본보에서는 일찍부터 현상모집 형식으로 문예작품을 공모하고 있었지만, 홍명희 편집국장이 취임된 뒤로는 특히 이 방면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자신이 후일 ‘임꺽정’ 등 장편소설을 남기기도 했지만, 좋은 문예작품과 훌륭한 신인의 발굴에 힘을 기울여, 1924년 12월에는 ‘2000원대현상’을 걸고 우리의 고전 ‘춘향전을’ 현대소설의 수법으로 개작하는 일과 1925년 1월에 ‘신춘문예’를 공모하였던 것이다. 특히 후자는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 신문사들이 다투어 신인의 등용문으로 매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이 ‘신춘문예’야 말로 본보가 창안한 것으로, 우리 문단에 역량 있는 신인을 보내왔고, 또한 좋은 작품 수확을 거둔 행사의 하나다.” (동아일보 사사 1권, 246~247쪽)

社告

지나간 3월 말일까지 모집한 ‘경제논문’과 ‘춘향전 개작’은 지금껏 고선(考選) 중으로 금월 하순에는 발표되겠사오니, 강호제현(江湖諸賢)은 이리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1925년 7월 3일자 부록 2면

1925년 8월 15일자 1면

현상경제논문발표

논제-경제파멸의 원인 현황 및 대책

◇ 3등 당선 경성 배수성씨

현상논문 모집에는 20편 정도가 들어 왔으나 1, 2등 없이 3등작만 뽑았고 ‘춘향전 개작’에는 당선작이 없자 홍명희는 동아일보를 떠난 이광수에게 의뢰해 1925년 9월 30일부터 소설 연재가 시작됐다. 

1925년 9월 24일자 2면

소설 예고

춘향전 개작

– 춘향 –

춘원 작(春園 作)

춘향전은 심청전과 아울러 조선국민문학의 대표를 이룬 것이다. 심청전은 효도를 중심으로 한것으로, 춘향전은 정절을 중심으로 한것으로 귀족계급으로부터 초동목수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고 이 이야기중에 한두 구절을 부르지않는 사람이 없다. 진실로 우리 조선 사람이 부르는 노래의 대부분이 이 두가지 이야기를 재료로 한것이라고 할수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 춘향전 심청전은 아직도 민요의 시대를 벗지 못하여 부르는 광대를 따라 사설이 다르고 심지어 인물의 성격조차도 다르고 더구나 세속의 낮은 취미에 맞게 하느라고 야비한 재담과 음담패설을 많이 섞어 금보다도 모래가 많아지게 되었다. 춘향전이 더욱 그러하니 이는 춘향전이 심청전보다 더욱 백성의 환영을 받는 것과 또 그것이 연애담인 까닭에 잡담과 음담패설이 더많이 붙게 된 것이다. 언제나 한번 춘향전 심청전은 우리 시인의 손을 거치어 알리고 씻기고 정리되어서 참된 국민문학이 되어야 할 운명을 가진 것이다.

이 때문에 본사에서는 일천원의 상금(그리 만흔 것은 아니나)을 걸고 우선 춘향전의 개작을 모집하였더니 수십 편이나 되는 힘들인 원고를 얻었으나 불행히 국민문학으로 추천할만한 것이 없음으로 응모하신 여러분께는 심히 미안한 일이나 춘원 리광수씨에게 청하여 춘향전을 쓰기로 하였다.

춘원의 춘향전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얼마나 우리 조선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조선 사람의 전통적 정신을 전할까. 우리는 반드시 춘원의 춘향전이 만천하 독자를 만족케 할것을 믿는다. 아직 재래의 춘향전을 못본 이에게는 물론이어니와 재래의 춘향전을 보고 듣고 잘아는 이에게는 더욱 흥미가 깊을 것이오 춘향전을 여러 백번 노래한 명창 광대에게는 더욱 흥미가 깊어 참춘향전을 이제야 보네 그려 하는 탄식을 발하리라고 믿는다. 또 춘원의 춘향전은 남녀학생이 보아도 좋을만치 고상하고 주사청루에서 읊어도 좋을만치 보편성이 있을 것을 믿는다. 우리는 만천하 독자로부터 춘원이 필생의 정력을 다하여 그리는 위대한 우리 문학을 괄목하고 보려한다.

춘향전 개작 현상공모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춘향전을 근대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했던 시도는 시대를 앞선 발상이었고 ‘신춘문예’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약 한달 정도의 응모 기간을 가진 첫 신춘문예는 두달 후인 3월 2일 지면을 통해 당선자를 발표했다.

 

1925년 3월 2일자 부록 1면

당선된 문예 발표

이번 당선된 작품과 씨명은 여하

소설

2등 오빠의 이혼사건(최자영)

3등 방랑의 광인(최풍)

선외(選外) 출교( 黜敎) (이영근)

3등 봄(김창술)

3등 농부(기환)

선외(選外)

바람(유기춘)

거짓말슴(노양근)

동요

1등 소곰쟁이외 4편(한정동)

2등 연꽃(장석전)

3등 가마귀(유택관)

선외(選外) 가작 14편

가정소설

3등 시집살이(이문옥)

선외(選外)가작 의문의 Pㅅ자(字) (유민성)

동화극

선외(選外) 가작

날개없는 비둘기(연은용)

올빼미의 눈(윤석중)

비밀의 열쇠(마태영)

표백소녀(신필희) 

 

1925년 3월 2일자 부록 1면. 응모된 신춘문예 원고 사진에 원고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1925년 신춘문예에서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이 동화 ‘올뺌의 눈’으로 공식 등단했고 황순원(黃順元)은 1933년 시 부분에서 ‘우리의 새 날을 피바다에 떠서’가 가작으로 뽑혔으며 1936년에는 김동리(金東里)가 단편소설 ‘산화(山火)’로 당선작, 정비석(鄭飛石)이 ‘졸곡제(卒哭祭)’로 가작, 서정주(徐廷柱)가 ‘벽(壁)’으로 시부분에 당선, 세 거목이 동아일보를 통해 같이 문단에 나왔다.

 홍명희는 ‘월요만화(月曜漫話)’ ‘학예란’ ‘학창산화(學窓散話)’ 라는 제하의 칼럼들을 연재하며 문필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칼럼을 쓸 때 백옥석(白玉石)이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홍명희의 호인 벽초(碧初)의 벽(碧)자를 세 글자로 파자(破字)한 것이다.

1924년 6월 9일자 4면

수(壽)의 종류

백옥석(白玉石)

수(壽)에는 장수(長壽), 광수(廣壽), 심수(深壽) 세 종류가 있다… ‘Honourable age is not that which standeth in length of time, nor that is measured by number of year. But wisdom is the gray hair onto men, and an unspotted life is old age…’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공자의 논어 이인편<里仁篇>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 이는 다 심수(深壽)가 장수(長壽)보다 귀함을 아는 사람의 말이다. 장수만 원하고 심수를 묻지 아니함은 인지미문(人智未聞)한 때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24년 6월 23일자 4면

사람의 네 종류

서아라비아(西剌比亞) 고언에 이러한 재미있는 것이 있다.

대개 사람이 네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모르고 그 모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니 이러한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 것이요. 둘째는 모르고 그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니 이러한 사람은 가르쳐줄 것이요. 셋째는 알고 그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니 이러한 사람은 깨우쳐줄 것이요. 넷째는 알고 그 아는 것을 아는 사람이니 이러한 사람은 스승으로 섬길 것이라고…

그리고 10월에는 ‘학예란’이 신설되었다. 10월 1일자 칼럼에서 홍명희는 지금까지의 신문이 급박한 정치 경제 문제 보도에 치중한 나머지 사회생활의 학예적 방면을 등한히 한 것을 반성하면서 일상생활에 실제적 도움을 주는 ‘과학의 민중화’를 학예란 신설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1924년 10월 1일자 1면

학예란 신설에 대하여

신문은 사회의 명경(明鏡)이랍니다. 사회 발전의 모든 현상이 충실히 반사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의 발전은 다방면으로 진행되어 정계의 변천과 경제계의 파동에 그치지 않고 혹은 자연계의 발견 혹은 과학적 발명 혹은 예술적 창조로 이를 촉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사회생활의 학예적 방면을 등한히 한 것이 비록 변태적 정치생활과 멸망되어가는 경제생활에 골몰함이 그 원인이라 할지라도 어찌 유감되지 않은 사실이겠습니까. 우리는 이에 학예란을 신설하여 신문의 사명을 완전히 실현하여볼까 합니다.

‘지식은 권력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학예란에 실린 칼럼>

1924년 10월 4일자 1면

숫자 유희

◇세포수

프랭크란 사람이 인체를 조직한 세포수를 계산하였는데 그 수가 대개 4백조라 한다. 4백조가 얼마나 되는 수냐. 한말에 4백조라 하면 그렇게 엄청날 것이 없으나 4란 숫자 아래 0이 열넷이니 실상 사람으로 상상하기 쉽지못한 수다. 후랜드포드와 틈손이란 두 사람의 계산을 보면 우리 사람의 뇌수를 구성한 신경세포수 만 대개 92억이라고 하니 4백조보담은 훨씬 적으나 이 역시 호락호락한 수는 아니다.(중략)

◇ 서적총수

세계의 서적 총수가 20억이 넘는다고 한다. 1일 1책 평균으로 독서한다 하고 1년을 365일로 치고 계산하면 8백21만9천2백5년하고 또 반년이 있어야 이 현재한 서적을 모두 독파할 수 있다.

1924년 10월 18일자 1면 

접순(接脣 · 키스)의 유래

구순(口脣)에 구순(口脣) 접하는 것을 접순(接脣)이라 할 것이나 수족(手足)과 안면에 구순을 접하는 것도 보통 접순이라 칭한다. 대개 접순은 구미에 성행하는 일종 관습이니 그 의의를 3종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일(一)은 전래 예법의 표현이니 왕공귀부인 수족에 구순을 접함과 같은 것이요 이(二)는 보통 애정의 표현이니 자녀 우인(友人) 안면에 구순을 접함과 같은 것이요 삼(三)은 성적 애정의 표현이니 탐남열녀(貪男悅女)가 구순을 서로 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의와 표현 형식이 착종 복잡하여 세별하려면 성이 가실 지경이다.

이태리 석학 ‘롬부소’가 어느 잡지에 구순의 유래라는 것을 발표한 것이 있다. 그 연구를 소개하면 대강 아래와 같다.

구순은 미개족(未開族)이나 반개인(半開人, 일본도 여기 산입하였다) 사이에는 발달하지 못한 것이라 뉴질랜드인이나 에스키모인 같은 야만족은 접순이 무엇인 것을 알지 못하고 어느 야만족은 후각으로 남녀간 애정을 표현하여 현금 구미인(歐美人)이 ‘내입 좀 마치구려’하고 눈웃음을 칠만한 경우에 ‘나를 맡아보시오’하고 고개를 든다고 한다…

1924년 10월 9일자 1면

건망증

건망증은 정력이 부족하여 발생하는 일종 병증으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것이 천재의 일종 특징이 된다고 한다. 영국(英吉利)의 위대한 학자 ‘뉴튼’은 자기 질녀의 손가락을 담배로 알고 곰방대에 끌어다가 박은 일이 있고 또 그는 무엇을 찾으러 자기 방에서 바깥을 나가면 나가는 동안에 벌써 찾으려던 것을 잊어버리고 그대로 방으로 돌아오기를 흔히 하였다.

불란서 사람으로 근세 화학의 개조(開祖)라 할 ‘류유’(루이 파스퇴르)는 언제든지 그의 연구를 길게 설명하고 나서는 반드시 끝에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남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이라고 첨부하여 말하였다. 어느 때 학생 하나가 일어서서 그의 방금 말한 것을 되받아서 그의 귀밑에서 말하였다더니 그는 이 학생이 저의 지혜로 자기의 비밀을 발견한 줄로 믿고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청하였다. 그는 자기가 방금 2백여 명 학생에게 대하여 설명한 것을 잊었었다. 어느 날은 화학실험을 하는데 그는 학생에게 향하여 말이 “여러분 지금 여기 솥이 불 위에 걸려 있소. 만일 내가 이것을 젓지 않고 이대로 둘 것 같으면 이 솥이 곧 폭발되어 여러분 앞에 튀어갈 것입니다” 말하고 그는 참으로 젓기를 잊었다. 그래서 그의 예언이 적중하여 그 솥이 깨지는 통에 실험실 유리창이 파쇄되고 실내에 있던 사람이 정원으로 뛰어나가게 한 일이 있었다…

이 칼럼들은 1925년 1월부터는 ‘학창산화(學窓散話)’라는 제하로 바뀌어 동아일보의 인기칼럼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가 1년 가까이 동아일보에 있으며 쓴 칼럼은

– 과학

– 숫자 유희

– 질소량

– 분자체적(分子體積)

– 호열자균 번식력

– 혈구 수

– 서적총수

– 蟻(개미 ‘의’)

– 駱駝(낙타)

– 羊(양)

– 蛇(뱀 ‘사’)

– 虎(호)

– 鼠(쥐 ‘서’)

– 猪(돼지 ‘저’)

– 犬(개 ‘견’)

– 鷄(닭 ‘계’)

– 馬(말)

– 龍(용)

– 猿(원숭이 ‘원’)

– 螢(반딧불 ‘형’)

– 蚤(벼룩 ‘조’)

– 아편

– 연초

– 무선전신

– 무선전화

– 활동사진

– 사진전송

– 비행기 발전사

– 비행술

– 비행기 용도

– 윤전인쇄기

– 금

– 연금술

– 수은으로 금을 제조

– 라듸움

– 라듸움과 과학

– 金剛石(금강석)

– 진주

– 雪(눈 ‘설’)

– 우박

– 筆(붓 ‘필’)

– 서적

– 색각(色覺)과 감정

– 색(色)의 속성

– 색의 상징

– jomes-Lange 이론

– 건망증

– 혼인제도

– 매음기원

– 접순(接脣)의 유래

– Tango 역사

– 매독 역사

– 신성한 질병

– 범죄자의 특질(상)

– 범죄자의 특질(하)

– 멘델(Mendel) 법칙

– 기형아(畸形兒)

– 기형아(畸形兒)의 실례(實例)

– 언어 분류

– 표준어

– 정음(正音)

– 만주어(滿洲語)

– 국제어

– 횡서(橫書) 문제

– 한자 문제

– 어원(語源)과 사실(史實)

– 법률

– 인도(印度) 사회

– 철학

– 심령(心靈) 철학

– 심령(心靈) 현상

– 독갑이(도깨비) 장난

– 도덕

– 역법(曆法)

– 세수종종(歲首種種)

– 고갑자(古甲子)

– 오행설(五行說)

– 의의(意義) 있는 식물

– 식물별의(別義)

– 사화(史話) 3칙(三則)

– 신(新) 말더스 주의

– 인구 원리

– 간단(簡單)

– 가치와 시대

– 차별

– 지자(知者)의 비애

– 무명(無名) 인물

– 위대한 분묘

– 미신

– 항우(項羽)와 미신

– 아나톨프랑스(Anatole France)

– 멘텔리(Mentelli)

등입이다.

“이러한 칼럼들을 묶어 출간한『학창산화』에서 내용상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연과학에 대한 항목들이다. 홍명희는 자신이 도쿄 유학시절 자연과학에 매료되어 한때 이를 전공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은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반영하여『학창산화』에서는「무선전화」「라디움」「멘델법칙」등 많은 항목을 할애해서 자연과학의 각 분야에 대해 평이하면서도 흥미로운 설명을 베풀고 있다. 또한『학창산화』는「비행기발달사」「윤전인쇄기」「연금술」등 과학사에 속하는 항목이라든가,「혼인제도」「매음 기원」「접순(接脣, 키스)의 유래」등 풍속사에 속하는 항목을 다수 포함하고 있어, 역사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과 조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언어 분류」「표준어」「국제어」「어원과 사실(史實)」등의 항목을 보면, 홍명희는 언어학과 언어사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과 지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홍명희는『학창산화』에서 광범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구사하면서도 결코 박식을 자랑하는 지적 교만에 젖어 있지 않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지식의 출처를 명시하여 자신의 글이 소개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예컨대「지자(知者)의 비애」라는 항목에서 그는 ‘자기의 지식을 대(大) 해변의 사소한 패각(貝殼)으로 비교하고 위연(?然) 탄식한’ 뉴턴을 예찬하면서, ‘약간 지식이 있다고 서로 비교하여 넓으니 좁으니 얕으니 깊으니 하는 것이 서글픈 일이며 우스운 일이다’라고 하여, 진정한 지자(知者)라면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하지 않을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접순의 유래」에서 ‘이태리 석학 롬브(로)소가 어느 잡지에 접순의 유래라는 것을 발표한 것이 있다. 그 연구를 소개하면 대강 아래와 같다’라고 한다든가,「인구 원리」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소개한 뒤, ‘맬서스 이론의 결함을 대개라도 지적할 여유가 없음은 유감이나 이만 것이라도 소개함에는 일본 하상(河上) 박사에게 진 것이 많음을 말하여두고 그만 그친다’고 하여 전거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학창산화』는 이처럼 계몽적인 성격의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기는 하지만, 당시 홍명희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을 적잖이 포함하고 있다. 우선 여기에서 그는 양반 출신으로 한학을 수학한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근대 이후 눈부시게 발달한 자연과학의 성과에 대해 도처에서 신뢰와 기대를 표명하고 있으며,「신(新) 맬서스주의」「차별」등에서는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피임을 옹호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남녀의 차별이 엄연한 줄로만 아는 통념에 대해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물을 양성(兩性)혼합체로 보는 학설을 들어 반박하면서, ‘그러므로 남녀 차별도 구경(究境) 절대적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니 이로써 남녀가 근본적 지위에서 평등인 것도 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한 그는「한자문제」「횡서(橫書)문제」등에서는 한글 전용과 횡서 및 한글 자모 풀어쓰기를 주장하고,「국제어」에서는 에스페란토를 포함한 국제어의 역사와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법률」에서는 ‘대개 법률은 필요한 것이요 권위 있는 것이나 그 권위는 민중이 인정함으로써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민중의 힘을 강조하고 있으며,「신 맬서스주의」에서는 ‘현재 사회제도와 현재 경제조직 아래서는 빈궁선(貧窮線)이 소멸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여,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암암리에 비판하고 있다. 또한『학창산화』에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뼈아픈 자성을 보여주는 대목도 적잖이 발견된다. 예컨대「윤전인쇄기」에서 그는 ‘활자를 창조함에는 우리 조선이 세계의 제일 선진’이었으나, 현재 조선의 인쇄술은 이토록 낙후되었으니 ‘세계 제일 선진으로서 이 무슨 모양인가. 우리는 활자를 만지면서 세계에 제일 선진이라는 우리의 자랑을 잊지 못하고 윤전기 소리를 들으면서 남에게 뒤진 우리의 부끄러움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하고 있으며,「정음(正音)」에서는 ‘세계에 완전한 문자가 있다 하면 그 곧 우리의 정음을 이름이며 세계에 기묘한 문자가 있다 하면 그 역 우리의 정음을 가르침이다. 백 가지 천 가지 모든 것이 남만 못한 우리도 오직 문자 하나는 남에게 자랑하고 남음이 있다’고 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학창산화』에는 홍명희의 진보적이고 주체적인 의식과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식견, 특히 풍속사와 어원에 대한 깊은 조예, 그리고 온갖 사물의 디테일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드러나 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정신적 특질은 후일『임꺽정』과 같은 탁월한 사실주의적 역사소설을 낳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과학과 정보가 놀랍게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의 안목으로는『학창산화』가 대부분 상식적이고 낡은 지식을 나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신문에 장기간 연재되었을 뿐더러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독자들에게 상당히 흥미를 끌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해방 후 홍명희에 대한 인물평에서 ‘『학창산화』같은 작은 책자라도 더 많이 이 세상에 남겨 놓았으면 이 얼마나 후생들에게 유익할는지 모르는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학창산화』는 세인들에게 홍명희의 대표적 저술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171~177쪽)

칼럼을 통해 보여 지는 홍명희의 광범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은 실로 놀랍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박학다식’으로 이름난 그는 자연과학, 과학사, 풍속사, 역사, 철학, 언어학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학자, 문인의 두 가지 특징을 겸해 가졌다니 말이지 용모로도 그러하거니와 오늘날 조선문단의 다독가(多讀家)로 말을 하면 아마 홍군(洪君)으로 첫 손구락을 꼽아야 할 것이다. 종래 군의 독서의 범위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던지 나의 본 바로 하던지 좀 보태는 말 같지만은 동서(東西)에 긍(亘)하고 고금(古今)에 통하며 또 그 부지런도 놀랠만하다.” (백화<白華> 양건식, ‘문인인상호기<文人印象互記>’, 개벽 1924년 2월호 103~104쪽)

홍명희가 동아일보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동아일보에 실린 논설들, 그 중 특히 압수처분을 당한 논설들 중에는 그 내용과 표현으로 보아 홍명희의 것으로 보이는 글들이 상당수 있으나, 이들은 무기명으로 게재되어 집필자를 확인할 수는 없다. 

   “홍명희가 동아일보사에 재직하고 있던 동안의 일로서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당시 중국에 망명 중이던 신채호의 조선사 관계 논문들이 그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사실이다…(중략)…신채호의 각별한 부탁을 받고 홍명희는 ‘이두문 명사 해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 패수고’ 등 신채호가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조선고대사 관계 논문들을 동아일보에 게재하도록 주선하였다…(중략)…뿐만 아니라 이 논문들에 앞서 1925년 1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신채호의 유명한 평론 ‘낭객(浪客)의 신년 만필(漫筆)’이 실렸는데, 이 글은 민족해방운동에 부정적인 기능을 하는 신문예의 해독을 통렬히 비판하여 당시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9, 164~165쪽)

   홍명희가 왜 10개월 여 만에 동아일보를 떠났는지에 대한 분명한 자료는 없으나 이때부터 민족주의 좌파와 우파의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추측된다.

   1925년 4월 2일자로 홍명희는 동아일보 떠나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으나 그에 대한 기사는 동아일보에 계속 보도됐다. 

   시대일보는 최남선이 간행하던 주간지 ‘동명’의 후신으로 1924년 3월 이름을 바꾸어 일간지로 창간된 신문. 그러나 점차 경영난에 봉착, 보천교로 경영권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이를 반대하는 각계 인사들의 노력으로 새로이 재단을 구성해 새로운 출발을 맞게 되고 그 중심에 홍명희가 있었다.

   재단을 완성한 시대보 –   충실한 재단으로 새로히 활동

  일반사회의 많은 기대와 환영을 가지고 육당 최남선씨의 주간하에 새로 발간되었던 동업 시대일보는 그동안 경영 곤란으로 많은 파란과 적지않은 곡절을 거듭하여 한때는 폐간의 운명에까지 이르렀으나 사회의 공기가 없어짐을 애석히 여기는 당국자들의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유지하다가 드디어 충실한 재단을 얻어 일체 경영을 양도하게되어 이로부터 시대일보는 새로운 활동으로 새로운 면목을 보이게 되었다는데 간부의 씨명은 아래와 같고 재단도 매우 충실하다더라.

  이범세 홍명희 이희종 정희영 윤희중 유진영 홍순필 정인보 한기악 이정희 김익동 신성호

   그러나 홍명희 역시 신문사의 경영난을 타개하지는 못하고, 시대일보는 1926년 8월 중순부터 휴간한 끝에 결국 폐간됐다. 시대일보 폐간 이후 홍명희는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다시 부임하였다가 1927년 항일민족협동전선으로 발족한 신간회에 참여했다. 

   민족주의로 발기된 신간회 강령 발표 –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 –   창립총회는 2월 15일

  조선민족의 정치적 의식이 발달됨을 따라 민족적 중심 단결을 요구하는 시기를 타서 순 민족주의를 표방한 신간회 발기인 28인의 연명으로 작일 다음과 같은 3개조의 강령을 발표하였는데 책임자의 말을 듣건대 신간회의 목표는 모든 우경적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중 좌익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라며 실지 정책과 사업은 2월 15일에 열릴 창립총회에서 결정할 터이라더라.

   ◇강령◇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발기인씨명(가나다순)

  김명동 김준연 김탁 권동진 정재룡 이갑성 이석훈 정태석 이승복 이정 문일평 박동완 백관수 신석우 신채호 안재홍 장지영 조만식 최선익 최원순 발내홍 하재화 한기악 한용운 한위건 홍명희 홍성희  

   신간회 창립대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동아일보도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新幹會 창립대회 –   2백여명 회원이 출석하여 –   대회 창립하고 부서를 제명

  신간회 창립대회는 기보한바와 같이 15일 오후 7시 15분부터 시내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홀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야 출석회원은 약 2백여인 그중에는 여자 회원도 7, 8인이 있었고 2층 방청석에는 방청인으로 대만원을 이루었는데 개회가 되자 즉시 신석우씨를 임시의장으로 추천하고 서기는 김준연 신현익 장지연 삼씨, 사찰은 권태석씨외 11인을 추천한 후 먼저 회원의 ○명(회원 총수 4백여인중 출석회원이 2백 2인)이 있고 곧 의사진행으로 들어가 신간회와 조선민흥회의 합동 경과보고와 회의명칭은 편의상 제3간판을 붙치지않고 신간회라고 하였다는 것과 기타 그동안의 경과 상황보고가 있고 규칙통과에 들어가 규칙심사위원으로 권동진 최익환 박래홍 송내호 리동욱 5씨를 선거하여 규칙을 심사케하여가지고 무수정(無修正)으로 통과를 시킨후 선언에 관한 것은 위원에 일임하기로 가결하였다. 장내의 공기가 더욱 긴장된 중에 임원선거가 있어 무기명투표로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희 양씨를 선거한후 다시 간사는 35인을 선거하기로 한후 전형위원으로 권동진씨외 11인을 선거하여 간사후보자 70인을 선발하여가지고 그중에서 35인을 전형케하기로 전형위원들에 일임하고 간사회에 대하여 회당이 소집하는 외에 정기대회가 있도록 세칙을 만들자는 결의가 있은 후 이튿날 오전 한시경에 폐회하였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전국의 청년 · 사상 · 노동 · 농민단체들 가운데서는 신간회를 지지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여성운동의 단일전선인 근우회(槿友會)도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창립되었다.

   홍명희는 동아일보를 통해 근우회에 대해 각별한 기대를 표명하는 발언을 하였다.

   근우회에 희망 –  홍명희씨 담

  오스트라리아 북방에 사는 어느 식인종은 주린 창자를 채울 것이 없으면 저의 아내를 통우로 구워서 뜯어먹는 일이 있다고 합디다. 소위 문명 한민족들의 사회에서도 여자가 간접으로 남자의 식료품이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일종 자리제구로 알거나 그러치 아니하면 일종 장난감으로 여기는 것은 식료품으로 치는 것보담 무엇 나을 것이 있습니까.

  답지않게 상강을 세웠던 동양 몇나라는 고사하고 여존남비라고 동양 사람이 흉보듯 변보듯 말하는 구미 여러 나라에도 여자의 지위가 아무래도 남자만 못한듯 합니다. 요근래 새로 발견되었다는 몽고지방 여자국은 사실 있다면 예외의 사실이라고 할 것입니다.

  상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남자 혼자만이 사람이 아니고 여자도 사람이다 말합디다. 그러나 과학자의 말은 남녀를 합하여서만 사람이란 뜻이 완전하게 된다 합디다. 남자가 여자에게 첩노릇이나 종노릇한다는 여자국도 불완전한 인류사회라고 하겠지만 여자가 직접 간접식료품이나 자리제구 또는 장난감 노릇하는 사회도 완전한 인류사회는 아니겠지요. 완전한 합리적 인류사회에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정치 문화적으로 활동할 균일한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자더러 아이배게 되리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 조선은 현금 세계 선진국에 비하여 후진이라 모든 것이 남에게 뒤진 중에 여성운동 같은 것은 더욱이 뒤진 것의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에는 크롭스카야(레닌의 부인이자 러시아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가 꾸우지(프랑스 혁명기에 ‘여성권리선언서’를 기초한 여성운동가)나 크라프트(영국의 여성운동가)와 함께 활동하게 된 판입니다. 여권 선언의 꾸우지나 여권 주장의 크라프트가 크롭스카야와 함께 여성운동의 전위분자가 될 것이 현재 조선의 사정입니다. 이 여성운동의 전위분자가 가질 이론은 딴 것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민족운동의 이론이 세계 무산계급운동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우리 여성운동의 이론이 조선민족운동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우리는 새로 탄생할 근우회에 대하여 많은 바람을 가지게 됩니다.

   남녀평등에 대한 이런 발언은 홍명희의 진보적인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그의 문재(文才)는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대하장편 역사소설 ‘임꺽정’을 통해 꽃을 피웠다.

   홍명희의 ‘임꺽정’ 연재와 관련된 일화들은 동아일보에도 소개됐다.

   서재인(書齋人) 방문기(12) 벽초 홍명희 –  심각한 학자 생활 –  제일 주창이 검박과 겸손 – 부인기자 최의순 –

  시계가 열두시를 바라볼 쯤이었습니다. 항상 복작복작하는 종로 사정목 네거리 근처에서도 더욱이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 틈에 있는 듯 없는 듯이 끼여 있는 좁은 골목 안에서 기자는 홍명희 씨 집을 찾았습니다. 씨가 누구에게든지 ‘군자님’이라는 별호를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자는 문안에 들어서자 눈에 띄우는 모든 것마다에 뜻있는 해석을 아니 부칠 수 없었습니다. 몇 대째 전해 내려온 듯이 보이는 서적만으로 모여진 듯한 마루에 우뚝이 서있는 책탁자, 아주 고물로 보이는 방에 놓은 문갑, 많지 않은 세간 틈틈이 자리를 잔뜩 차지한 후락한 책들, 어느 것치고 값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옛 학자의 살림살이 모형을 고대로 그리지 않고 있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씨의 겸손한 태도와 부드러운 듯 하고도 엄한 기운이 도는 음성에는 옆에 있는 자로서 많은 느낌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서재 사람이 무엇입니까 아무 값없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되는대로 생활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니 어디 사는 의미가 있으며 서재인의 자격이 무엇에 있겠습니까. 이 무서운 추위에 멀리 찾아오신 손의 대접은 아닙니다마는 나는 서재인 방문기 틈에 끼지 마십시요. 과연 부끄럽습니다”하는 씨의 진정에서 우러난 듯한 첫말이 기자에게는 더한층 보배롭게 고상하게 감촉되었습니다. 이때에 기자는 다만 “선생께서 그렇게 사양하신다면 사실 어떤 분을 찾아뵈어야 옳습니까. 한마디 선생님과 이야기 하고 가면 만족하겠습니다” 할 뿐 “글쎄요. 참 망단한 생각만 납니다. 평시에 너무 어지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유행하는 말로 ‘타락’했다고 할런지요. 도무지가 여의치가 못해서 순전히 돈 한 가지에 즉 생활난에 오로지 정신을 뺏기고 있으니 기막힙니다. 전일과 같이 ○를 잇게 독서도 못할 뿐아니라 오랫동안 내 품에 두었던 좋은 책들도 무수히 팔아먹었습니다. 겨우 선조어른들의 필적이나 인(印)배킨 것쯤 남겨두고 앉았지요. 요사이 신문에 기재되는 ‘임꺽정전’도 내 취미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쓴다는 것보다는 먹기 위해서 매일 쓴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과연 한심한 세태를 만났지요. 너나 할 것 없이—”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더한층 푹 숙이는 씨의 감개무량한 표정! 씨는 현 조선인 학자의 설움을 철저히 맛보고 있는 것 같이 살펴졌습니다. “그러나 소위 예술가 즉 문학가 그리고 철학자들의 생활은 예로부터 물질적으로는 궁하지 않습니까”하고 기자는 이야기를 감돌리자 씨는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과 같이 공부하는 자가 물질에 빈궁한 것은 필연적 사실이라 하는 것도 과히 망말은 아니겠지요”하며 다시 침묵상태에 잠기는 듯 여기서 기자는 목소리를 변하고 어조를 바꾸어 “선생님 소설 써나가시는데 대한 감상을…”하고 안타깝게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씨도 저윽이 침울한 기분에서 빠져난 듯 “감상이랄 것은 별로 없습니다마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으면 왜 흔히 연애서찰이 여기저기서 들어 다 혹은 그 소설 모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독자들이 서로 떠든다고 하지요. 그런데 나로 말하면 아름다운 글에 솜씨 익은 젊은 소설가와는 다름으로 그러한 재미는 못 봅니다마는 그 대신 집에서 은근히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에 있습니다. 소시 때에 당해보도 못하던 연애장면을 땀을 빼다시피하고 이리궁리 저리궁리해서 쓰는 것인데 그것이 집안사람들은 물론 일가에서도 일종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려! 아 어느 날인가 내가 이방에서 듣자니까 우리 집 작은 아들놈이 하는 말이 ‘어머니, 아버님이 집에서는 대범하시기 짝이 없으시지만 밖에서는 실없는 일을 많이 하시는 모양이지오!’ 합디다 그려. 그때에 내 아내의 급히 나온다는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 참 그렇더라 얘. 아마 다른 여자와 그렇게 해보신 일이 있어 그럴듯하게 잘 쓰시는 것이지?’하는 것이 매우 의심 쌓인 말투이었어요. 내가 밖에 나간 줄들만 알고 크게 맘 놓고 떠들다가 고만 내 기침 소리에 혼들이 낫지요.”하며 씨가 점잔케 웃을 때 기자 역시 말보다 솟치는 웃음이 먼저 앞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눈물겨웁도록 심각하고 재미있게 어우러져가던 씨와의 대화가 별안간 ‘신문사에서 원고 가질러 왔습니다’하는 거치른 애 녀석 목소리에 무참히 깨어지며 기자는 씨의 공손한 거동과 유한 목소리를 뒤에 남기고 돌아서게 될때 “아-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시는 분! 어디까지 서재인 타입! 참 학자의 집!” 이렇게 가만히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홍명희는 1929년 12월 광주학생사건과 민중대회 사건으로 인해 여러 동지들과 함께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동아일보는 이 모든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신간회를 비롯 각 단체 엄중경계 – 삼륜(三輪) 수사계주임 동분서주 – 종로서 전원 비상출동을 준비, 대표 소환해서 경고

경기도 경찰부 수사계 삼륜 주임은 상오 여덟시경부터 오토바이를 달려 전중(田中) 부장 외에 몇몇 고관을 방문하고 어떤 중대사건에 대한 양해를 구한 것 같았는데 상오 열시경 종로경찰서에 그가 나타나자 동시에 동서의 공기는 돌연 긴장하는 한편 전서원에게 비상출동 준비를 지시하면서 시내 요소와 각 사상단체에는 정사복경찰을 배치하고 엄중 경계하는 한편 낮 열두시경에 이르자 신간회 대표 홍명희(洪命憙)씨와 김항규(金恒奎)씨를 호출하여 시국에 대한 간담적 경고를 했다 한다. (정진석 편,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Ⅰ’, 602~603쪽)

   결의문사건 관계자 금 6일에 최종 訊問 – 여섯사람만 불러 심문중 – 수뇌자 협의로 결정

  사회 각 방면의 중요인물을 망라하여 모종의 결의문을 발표하는 동시에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키려다가 미연에 발각이 된 결의문 사건의 권동진, 허헌, 홍명희, 조병옥, 주요한, 한용운, 이관용, 이원혁, 손재기, 김무삼(이상 구속) 등과 불구속 네명 모두 열다섯명에 대한 사건은 기보한바와 같이 연말연시의 관계로 금 6일에야 기소 불기소 여부가 결정될 터임으로 동일 경성재판소 검사국은 이상한 긴장미를 띠고 사건을 담임한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전문 이등 검사는 동일 아침 10시부터 형무소로부터 사건의 피의자정 허헌, 조병옥, 홍명희, 이관용, 이원혁, 김무삼(一名 김동준) 등의 여섯명을 또다시 검사국으로 소환하여 사건의 최종심문을 하는 한편으로 고등법원 검사장실로 송사 검사장과 구수밀의를 하는 등 어쨌든 동일로 사건의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동시에 사건을 공판으로 넘기든지? 그러치아니하면 예심으로 넘기든지? 양단간 결정될 것으로 이는 사건이 사건인만큼 검사국에서도 신중한 태도를 가지는 모양인데 이에 대하여 고등법원 검사국 송사 검사장의 말을 들으면 당일로 전기 여섯명의 최종 취조가 끝나는 대로 동 검사장을 비롯하여 복심검사장 지방검사 등이 충분한 협의로써 각각 ○하리라더라.

   보안법이 제령위반으로 – 문제되는 적용법률 – 석방된 사람은 기소 불기소 미정, 결의문사건 관계자

  학해(學海)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 광주 학생사건의 발발을 전후한 결의문사건의 허헌 홍명희 조병옥 리원혁 김무삼 리관용 등의 여섯명은 6일 경성고등법원 이등 검사의 손에서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동 법원 제1예심으로 회부하는 동시에 그밖에 불구속자 네명은 물론,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권동진 주요한 한룡운 김항규 손재기 등은 당일로 석방하였다함은 작보와 같거니와 경찰부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송국한 것을 동 검사국에서는 제령위반으로 죄명을 고치어 예심에 회부한 그이유는 전기 6명에 대한 법률 적용문제가 일반 법조계에까지 말썽거리가 되어 장차 종결될 예심결정이 자못 주목거리가 되는바 6일 석방된 5명과 불구속 4명에 대한 불기소 혹은 기소유예의 확실한 결정은 없다고 하여 동 사건을 담임한 이등검사의 금후 태도는 더욱 주목된다.

   결의문사건 –  예심에 착수 –  협예심판사의 손으로 – 감옥에 출장취조중

  경성지방법원 사상전문 제2예심협(脇) 예심판사는 수일전에 동 예심으로 회부된 결의문 사건의 ▲허헌 ▲조병옥 ▲홍명희 ▲이관용 ▲이원혁 ▲김동준(일명 김무삼) 등 6명에 대한 대정 8년 제령 제7호위반사건의 예심취조를 하기 위하여 동예심괘형(邢)서기를 대동하고 10일 서대문형무소에 출장하여 이미 심문에 착수하였는데 사건이 워낙 경찰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국에서는 죄명을 달리하여 제령위반으로 예심에 회부하여 일반법 조계에서는 매우 주목하는터인데 예심은 의외로 속히 진행될듯 하다.

   허헌등사건 금명간 종료 –  방금 조서정리에 분망 중 – 주목되는 기소여부

  작년 학생 만세사건을 전후하여 신간회 경성중앙간부가 중심이 되어 모종의 중대사항을 질의하는 동시에 민중대회를 개최코자 하다가 미연에 경찰에 발각된 허헌 변호사 이하 조병옥 홍명희 이관용 이원혁 김무삼 등 6명에 대한 사건은 그동안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를 하여오던 중 작금에 심리가 끝나 금명일 중에 사건의 예심종결이 되리라 하는바 유죄냐 혹은 면소결정이냐 주목을 끌고 있다.
 

  허헌 등 사건 예심종결 –  6인 전부 유죄결정 – 반년을 끌다가 금일 결정 – 죄명은 보안법 위반

  작년 11월 광주학생사건 발생을 전후하여 경성시내에서 각단체 중요간부들의 검거를 보게 되었던 소위 민중대회 결의 사건 관계자 허헌 이관용 홍명희 이원혁 조병옥 김동준(일명 김무삼) 등 6명에 대한 대정8년 제령7호위반 피고사건은 루보한 바와 같이 금년 1월 사건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사상전문 이등(伊藤)검사의 손을 거쳐 예심으로 회부된 이래 팔구개월동안 제일심 협(脇)예심판사의 담임으로 심리를 진행하여오던 중 작6일부로서 피고 6명이 검사의 기소한 죄명과는 달리 모두 보안법위반으로써 유죄결정이 되어 동법원 형사합의부 공판에 부치게 되었다.

   민중대회 계획 중 – 미연에 발각 – 광주학생사건에 대하여 – 허헌 가(家)에서 수차 회합

  사건의 경위는 학생사건 당시 신간회의 중앙상무집행위원장이던 허헌 변호사와 당시 신간회 경성지회 상무집행위원장이던 조병옥 등은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역시 신간회 간부로 있던 피고 홍명희 이관용 등으로부터 모의한 결과 조선의 각 단체가 서로 연합하여 광주학생사건대책강구민중대회를 하기로 결의한 후 작년 12월 9일 이래 연일 피고 허헌의 집에서 중요회의를 거듭하여오던 중 사건은 경찰에 발각되어 13일 새벽부터 경찰부고등과의 활동으로 그와 같이 검거된 것이다.

   판결에 보면 대부분 무죄

  그같이 사건이 보안법으로 예심결정이 되고 그에 대한 관계검사도 이의가 없으나 동사건을 담임한 변호사측에서는 동사건의 성질이 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할만한 것이 없다는 해석을 가지고 벌써부터 사건변론에 대한 준비를 급히 하는 중인데 변호측에서는 무엇보다 대정 8년 6월 9일 경성고등법원의 판결례를 가지고 무죄를 주장하는 중인데 동판결례는 다음과 같다.

    ◇판결례◇

  보안법 제7조에 규정한 치안방해의 죄가 있다고 하는데 정치에 관하여 불온의 언론동작을 위하였는가 또는 타인으로서 불온의 언론동작을 위한 事를 선동교사한 것인가 또는 불온의 언론동작을 하기때문에 타인을 사용하였는가 또 타인의 행위에 關涉한 행위가 있는 事를 요하는 것은 물론 차등의 행위가 一地方의 정밀을 해할 정도에 달한 것을 요하는 고로 가령 多衆과 공히 차등의 행위를 위한 事를 기획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또는 준비적 행위를 위하여 그 일이 불온의 언론동작기타에 해당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 행위로서 비밀리에 행하여 일지방의 정밀을 해할 정도에 달치 않을 때에는 동건에 문의하여 처벌할 事를 부득함(대정 8년 6월 9일 판례)

   1931년 4월 선고공판에서 홍명희는 허헌, 이관용 등과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여 옥살이를 한 뒤 ‘임꺽정’ 집필에 전념했다.

   해방 후 그는 정치일선에 나서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제(諸)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가 차 북으로 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자진 월북한 홍명희와 북으로 끌려간 이광수, 두 조선의 천재 사이에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2006년 제작 증언 중)

   “홍명희 선생 그분은 일본에서 중국에서 서울에서 친한 형님사이니까 편지 쓰면서 이 이상 걷지 못하니 도와주세요 하니 홍명희 씨가 아버님을 자기 집에 모셔 가셔서 병구완을 해주시고 병이 악화되니까 인민군 병원으로 보내시고 거기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광수의 차녀 이정화)

   “53년인가 홍명희 선생 방에서 얘기하는데 홍명희 선생이 그런 얘길 해요. 춘원 선생을 자기가 한번 모신 바 있다고 얘기해요. 어떻게 모셨는가 하니까 그때 납북인사들을 전부 자동차도 아니고 걸어서 강계로 끄집어 가는데, 홍명희 선생이 김일성 수상하고 얘기해서 앓는 사람이 있는데 한번 자기 집에 와서 조금 휴식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서 허가해서 춘원 선생을 보름동안 15일간 자기 집에서 치료하고 의사 치료하고 보냈다. 이런 말씀이세요.” (정상진 전 북한 문화성 부상 1953~1956)

   홍명희는 월북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의 둘째 사위였다.   다음  위당 선생의 자제분인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

   “아버님과 벽초 선생이 절친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둘째 매형(홍기무)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당시 아버님은 감찰위원장이었다. 6·25가 나자 형무소를 탈출,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 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 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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