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26. 문인 편집국장 이광수(李光洙)

Posted by 신이 On 5월 - 31 - 2016

  촉탁기자 이광수(李光洙)(1892-1950)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선생을 조선의 3대 천재라고 합니다.

   언제, 누가, 어디서 그런 말을 처음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少年’에 세 사람의 글이 실리면서 ‘조선 삼재(三才)’ 즉 조선의 세 천재라는 칭호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평전’, 사계절, 2004년, 71쪽)

   최남선이 발행한 ‘少年’지 ‘편집실 통기’에 “홍명희와 이광수가 앞으로 잡지 발행에 참여하게 되어 ‘少年’의 앞길은 광명”이라고 한 것이 1910년 3월호이니 이때 홍명희 22세, 최남선은 20세, 이광수 18세였습니다. 

   류시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에 따르면 “양건식(梁建植)은 홍명희를 ‘동경 유학생 중 3재자(三才子)의 1인’ (1924. 2, ‘文人印象互記’, ‘개벽’ 44, 103면)이라고 했으며, 신형철(申瑩澈)은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를 ‘동경 3재(東京 三才)’라고 불렀으며(1928. 2, ‘명사제씨(名士諸氏) 만나기 전 생각과 만난 후의 인상’, ‘별건곤’ 11, 64면), 현상윤은 이들을 ‘조선 3재(朝鮮 三才)’ (1941. 8, ‘홍명희 – 현기당 대담’, ‘조광’ 7~8, 104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東京 三才를 통해본 한말 일제 초 조선의 지성계’, 한국인물사연구 10호, 2008년 9월호)

   이 조선의 ‘세 천재’가 모두 동아일보에 한때 몸담았습니다. 

   제일 먼저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그는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로 발령받아 12월 1일자로 ‘임(任) 기자’가 됐고 1926년과 29년 두 차례에 걸쳐 4년 6개월 여를 편집국장으로 재임했습니다.  그리고 13편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고 1926년 동아일보의 옛 사가(社歌)도 그가 지었으며 그의 두번째 부인이자 조선 최초의 여의사 허영숙(許英肅)은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1년 3개월간(1925년 12월~1927년 3월) 그와 함께 근무하는 진기록을 남겼습니다. 

   “내가 상해에서 돌아와서 나 스스로 작정한 3년 칩거를 치르고 나서 나는 동아일보 기자로 들어갔다. 맡은 것은 논설과 소설이었다. 동아일보 입사 전 나는 경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또는 불교학원, 보성전문, 종학원 등에서 철학 심리학 같은 것을 강의하여서 밥을 벌었었다. 동아일보에 들어가서부터는 일정한 수입도 생기는 내 뜻에 맞는 일자리도 생겼으나…” (이광수, ‘나의 고백’, 이광수 전집 13, 삼중당, 1963, 253쪽) 

   그의 입사는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과 인촌 선생의 권유로 이뤄졌습니다. 

   “‘개벽’에서도 내 글이 실리지 못하게 되어서 나는 완전히 문필권에서 축출을 당한 셈이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틈틈이 쓴 것이 ‘가실(嘉實)’이라는 단편소설이다. 이것은 삼국사를 읽다가 얻은 감흥을 제재로 한 것이어서 ‘하나님 전 상서, 아버님 전 상서’(수필 ‘감사와 사죄’, ‘백조’ 제2호 게재 – 인용자 주)와 함께 어디 발표할 가망도 없으면서 쓴 것들 중에 하나다. 이때 아마 송 고하(宋 古下)라고 기억되는데 소설 쓴 것이 있거든 동아일보에 하나 게재하라는 말을 하였다. 고하는 물론 동아일보 사장이었다. 이 말은 언론계에서 완전히 축출된 나에게는 비할 데 없이 고마운 말이었다. 그래서 ‘가실’을 동아일보에 보냈더니, 그것이 며칠 동안 연재가 되었다. 이것은 아마 고하가 나를 세상에 다시 끌어내어주려는 호의에서 오래 생각한 끝에 나온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동아일보에 글을 쓰게 된 시초다. 그리고는 얼마 아니 하여 하루는 인촌 김성수 씨와 함께 고하가 내 집을 찾아서 입사를 권하게 되었다. 나도 오직 감격으로 이에 응하였다. 그들은 매장된 나를 무덤 속에서 끌어내는 것이요. 그 밖에 아무 요구도 없는 것이었다.” (이광수, ‘다난한 반생의 도정’, ‘조광’ 1936년 6월호, 120~121쪽. 이광수 전집 14, 삼중당, 1962, 403쪽) 

   동아일보 입사 경위가 위와 같은데 어떤 사람들은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광수는 1922년 총독부의 주선으로 수당만도 한 달에 300엔의 엄청난 돈을 받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들어갔다(저자 주 –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제6권, 1921년 5월 16일 귀국, 李光洙가 총독과 처음 만난 것은 1922년 9월 30일 밤이었다. 재등실일기, 9월 30일 대목). 1922년 가을 쯤의 300엔이라는 돈의 가치를 설명한다면 대충 이렇다. 찬거리로 5전(錢)을 내면 푸줏간에서 150g 정도의 작은 쇠고기 덩이를 주었다니까 600g 1근에 20전 정도. 지금의 쇠고기 값을 600g에 3천원으로 잡으면 300엔=450만원이라는 숫치가 나온다. 한편 1929년 쯤 보통 기자 봉급이 30엔=위의 계산대로 하면 45만원, 좀 나은 데가 50엔=75만원, 파격적인 대우의 부장 급이 100엔=150만원이었다니까 옛날에는 없던 지금의 보너스제도를 참작하면 300엔=450만원이라는 돈의 가치 대비는 거의 걸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姜東鎭, ‘日帝의 韓國侵略政策史 –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길사, 1980, 394~395쪽)  

   “이광수는 1922년 총독부 주선으로 월 300엔의 월급을 받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들어가고…” (김민철, ‘기억을 둘러싼 투쟁 – 친일 문제와 과거 청산 운동’, 서울, 아세아문화사, 2006, 122쪽)

   이들 글의 근거는 김정명이 펴낸 ‘명치백년사총서-조선독립운동’ 제2권입니다. 

   김정명 편, ‘명치백년사 총서 – 조선독립운동’ 제2권(원서방, 동경, 1967 – 번역 2020위)

   (1쪽) 머리말 중

  부록 ‘조선민족운동연감 1919년~1932년’은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 제2과가 1932년 4월 30일에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던 대한교민단 사무소에서 압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동 교민단이 보관하고 있던 문헌에 의해 작성한 것으로써 이것에 의해 임시정부의 관계단체와 운동 경과를 알 수 있다. 

   (181쪽) 부록 조선민족운동연감

  일러두기 

  본 연감은 소화7년(1932년) 4월 29일 천장절 당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참칭(僭稱·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 이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의 지휘에 의해 야기된 불상사건(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말함 – 인용자 주) 다음날 수사를 위해 상해 프랑스 조계 당국과 협력하여 동 조계 내용의 장소 수 곳을 급습했을 때 동 조계 마랑로 보경리 제4호 대한교민단 사무소에서 압수한 참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동 교민단이 보관하고 있던 많은 문서를 건건마다 편집자의 주관을 일절 가미하지 않고 요점을 적출해 아래와 같은 방법에 의해 편집한 것이다. 

   1. 발생사항을 연도별로 분류하고 또한 발생월일 순으로 기술함

  1. 위 기술에 해당되지 않는 사항은 연도별로 그 외로 부기함

  1. 참조한 증거물건번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동 교민단 압수목록의 번호로서 말미에  본 압수목록 그림을 첨부함 

  (273쪽) 5.15 鮮內 이광수가 총독부의 알선에 의해 동아일보에 입사하다. 수당 월 3백원이라고(李光洙は總督府の斡旋により東亞日報へ入社す手當月三百圓なりと). 3년도 제7호 

   국사편찬위원회 편,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제6권’(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71) 183쪽은 김정명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새로운 자료거나 또다른 자료는 아닙니다.

   (1921년 5월) 15일

  이광수가 조선총독부 알선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하다. 월수당 300원을 받다.(조선독립운동 제2권 민족주의 운동편)

   그러나 이는 부정확한 자료입니다.

  우선 입사 연도가 ‘민국 3년도’(1921년)나 1922년이 아니라 1923년 5월 16일이며

  급여는 ‘수당만도 한 달에 300엔의 엄청난 돈’이 아니라 ‘본봉 120엔, 수당 30엔’이었습니다.

  본사가 보관하고 있는 ‘일정시대 퇴사직원록(日政時代 退社職員錄)’ 중 ‘이광수’의 인사기록에

  대정 12년(1923년) 5월 16일 취임(就任) 촉탁(囑託)기자

                                       12월   1일 임(任) 기자 본봉 120엔 수당 30엔이라고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

 

  강동진은 “1929년 쯤 보통 기자 봉급이 30엔=위의 계산대로 하면 45만원, 좀 나은 데가 50엔=75만원, 파격적인 대우의 부장 급이 100엔=150만원이었다니까 옛날에는 없던 지금의 보너스제도를 참작하면 300엔=450만원이라는 돈의 가치 대비는 거의 걸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으나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 당시 처우가 아래 표와 같았다는 점, 그리고 이미 문명(文名)을 날리던 이광수가 31살의 나이로 뒤늦게 입사한 것을 고려할 때 월급 120엔과 수당 30엔은 그렇게 파격적인 대우도 아니었습니다.

 

  이광수는 그 후 1926년 11월 8일 편집국장이 됐을 때도 월급이 150엔이었습니다. 

 

직 책 보 수(원) 비 고
주 간 120 외 수당 30원
국 장 100 편집국장 수당 30원
사진반 100  
부 장 80~70  
논설반 80~70  
기 자 8060 전속화가 80원
기자 70~60원
서 기 70~30  
과 장 60 외 수당 10원
공무사원 60~16  
평사원 50~30  
신사(信使)·소제부(掃除夫) 25~20  
급 사 일급 50전  

 

  또 ‘총독부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는 강동진과 김민철의 기술 역시 ‘수당 30엔’을 ‘수당 300엔’이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는 자료를 검증 없이 잘못 인용한 것처럼 잘못된 것입니다.  

   동아일보가 이들의 주장처럼 ‘총독부의 주선을 받아들여’ 그를 입사시켰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동아일보는 아마 그때 더 이상 ‘민족지’이기를 포기한 것으로 그 증세는 지면 곳곳에 나타나 이미 그 시대에 동아일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달라졌을 것이고 비판의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위 자료는 날짜별로 있었던 상해임시정부의 일, 예를 들면

  (273쪽) 5.7 (上海) 任國務院秘書長

                  (外務總長代理次長) 申翼熙

                  任交通總長 孫貞道

  와 같은 기록과

   (273쪽) 5.15 鮮內 이광수가 총독부의 알선에 의해 동아일보에 입사하다. 수당 월 3백원이라고. 3년도 제7호

  와 같은 조선 내 사건, 보고, 동정, 이런 저런 이야기 등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5.15 선내(鮮內) 이광수가 총독부의 알선에 의해 동아일보에 입사하다’는 기록은 이 문서의 단 한줄 외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임정 측의 자료가 위와 같이 잘못 기록되게 된 경위를 알 수는 없으나 동경유학생들의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이광수가 이를 세계 각국에 알리기 위해 2·8 독립선언 전 상해로 가 그곳에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獨立新聞’을 창간, 발행하다 갑자기 귀국하면서 온갖 비난, 오해, 억측이 생겼는데 그때 나온 헛소문 중 하나를 출처 없이 그냥 적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광수가 입사 후 쓴 글 ‘민족적 경륜’(1924년 1월 2일자부터 6일자까지 5회 연재)이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을 때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獨立新聞’ (1924년 4월 26일자 사설) 에서 이를 뒤늦게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위 문서의 내용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상해임시정부 스스로도 그 기록이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여집니다.  

   “귀국한 춘원은 두 가지 면에서 오해를 받아 비난을 받았다. 애인 허영숙이 상해에 올 때 가지고 있던 여권은 총독부 고등계의 악명 높던 미와(三輪) 경부(警部)의 신원보증으로 발급이 됐다는 것과 도산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모두 만류를 했는데도 아무도 모르게 기차를 타고 북경을 거쳐 신의주로 들어 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신의주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압송되어 투옥된 게 아니라 형사들에 의해 임의동행 형식으로 서울로 들어 왔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자인 춘원은 진위를 밝히지 않고 허영숙과 결혼했다. 민족 배반자라는 매도의 소리가 높았다. 그런 중에 춘원은 다시 필화사건에 휩쓸리게 되었다. 당시의 종합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주지는 우리는 열등민족이기 때문에 개조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씌어져 그렇잖아도 나빠져 있던 독자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었다. 허영숙을 통해 총독부에 매수되어 돌아오더니 민족성까지 모독하며 일제에게 동조한다 하여 물의가 일어나 개벽사는 부서지고 숭삼동(崇三洞) 춘원 집은 돌팔매질을 당하여 유리창이 박살났다. 이 사건으로 춘원은 피신하여 두문불출하게 되었고 문필 권에서도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189~191쪽)

   문필권에서 조차 외면한  조선의 인재(人材) 이광수를  동아일보가 안은 것입니다.

   이광수의 기술처럼 “이는 나를 세상에 다시 끌어내어주려는 호의에서 오래 생각한 끝에 나온 것… 나도 오직 감격으로 이에 응하였다. 그들은 매장된 나를 무덤 속에서 끌어내는 것이요. 그 밖에 아무 요구도 없는 것” 이었습니다. (이광수, ‘다난한 반생의 도정’, ‘조광’ 1936년 6월호. 이광수 전집 14, 삼중당, 1962, 403~404쪽) 

   다음은 이광수의 입사 관련 기록(‘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189~190쪽, 동아일보사, 1985)

  그 후 춘원이 곤경에 빠져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어 거의 버려진 상태에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뻗혀 다시 재기를 하도록 만들어 준 은인도 인촌이었다. 춘원은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인 1917년 매일신보에 우리 신문학 사상 최초의 장편소설인 ‘無情’을 발표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작가가 되었다. 文名을 얻은 그는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영문으로 번역된 선언서를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에 들어간 그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 그의 사상에 크게 공명하고 도산을 도와 임정의 일을 보았다. 그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연인이던 허영숙이 상해를 찾아와 설득하여 허영숙을 따라 본국으로 돌아 왔다…(중략)…이 사건으로 춘원은 피신하여 두문불출하게 되었고 문필권에서도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보고 제일 딱하게 여긴 이는 인촌이었다. 일년 쯤 지나서 인촌은 고하에게 춘원 문제를 상의했다.

  “어떻게 구출해 줄 방도가 없을까?”
  “안 돼, 개벽사에 돌멩이가 날아간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그 사람이 또 나서보게 이번엔 우리 신문이 돌팔매 당할걸세.”
  “전후 과실이야 어떻든 그 재능이 아까운 사람이란 말여. 어찌 사람이 실수 않고 사는가? 그 실수, 다시 되풀이하지 않고 나라 위해 헌신하면 되는 거 아녀? 과(過)없는 사람 어딨는가? 과보다 공(功)이 많으면 되는 거지? 다시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어 보세. 좋은 방도가 없을까?”

  처음에는 고개를 흔들던 고하도 인촌의 진지한 제의에 마침내 동감을 표시했다. 춘원을 동아일보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그의 글을 발표하여 여론의 추세를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춘원은 ‘가실(嘉實)’이란 단편을 Y생(生)이란 익명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그리하여 춘원은 동아일보의 객원기자가 되었고 미구에는 편집국장이 되어 그의 회상대로 그의 생애 중 가장 바쁘고 보람 있는 기간을 보내게 됐다.

   위 책 187~189쪽은 이광수와 인촌 선생과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춘원(이광수)은 인촌보다 한 살이 아래였다…(중략)…인촌이 춘원을 알게 된 것은 동경 유학시절이 아니고 인촌이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학교 인수를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민세(民世) 안재홍과 권덕규(權悳奎)가 인촌에게 소개했던 것이다…(중략)…평북 정주가 고향인 춘원은 소년시절에 조실부모하고 고아나 다름없이 되어 서울에 온 다음 14세에 일진회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유학을 갔지만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학비가 끊겨 대성중학교를 다니다가 귀국, 얼마 후에 다시 도일(渡日)하여 명치학원 중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향리에 돌아와 이승훈 밑에서 오산학교 교원을 했다. 그 후 상해 시베리아 등을 방랑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최남선의 신문관을 자주 들리곤 했는데 동료들 사이에서는 수재로 평판이 나 있었다. 춘원을 계동 댁에서 만난 인촌은 대뜸 학업을 계속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다.

  “글쎄요”
  “동경 있을 적에 벽초(홍명희) 형으로부터 형의 말씀은 많이 들었소. 대단한 수재라고 말이요.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올바로 배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형 같은 분이 더 배워서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 헙니다.”
  “말씀은 고맙고 십분 이해하겠습니다만”
  “학비 염려는 마시요. 학교를 해 보겠다고 해서 요즘 궁색하기는 하지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공부를 계속해 보시오.”

  ‘이광수전집 별권 화보, 평전, 연보’ (삼중당, 1976년 중판, 103쪽, 동경유학시절-2차 중)의 기록.

 “‘명계관’은 발끈 뒤집혔다. 영숙이 조금만 늦게 왔던들 춘원은 이미 저승의 사람이 됐을런지도 모른다. 응급치료로 겨우 의식을 회복한 춘원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나는 이대로 죽소. 김성수씨에게 연락해 주오’하더라는 것이다. 영숙은 즉시 우체국으로 달려가 인촌 김성수에게 지급전보를 쳤다. 인촌은 춘원에게 매달 3십원씩의 학비를 보내 준 후원자였고 죽음을 목전에 둔 춘원이 연락할 데란 그곳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인촌으로부터 녹용대보탕(鹿茸大補湯) 백첩과 입원비 5십원이 온 것은 그로부터 삼일 뒤였다.”(‘춘원 이광수’ 박계주 곽학송 공저)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광수가 11개월 여 만에 동아일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민족적 경륜(民族的 經綸)’이란 글 때문이었습니다. ‘민족적 경륜’은 1924년 1월 2일자부터 6일자까지 5회에 걸쳐 게재된 본지의 사설입니다.

1924년 1월 2일자 1면 사설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로 동아일보에 들어와 5개월여의 수습(?)기간을 거쳐 12월 1일자로 정식 기자가 된 이광수가 정식 기자가 된 지 1개월여 지나 쓴 이 사설은 당시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도 그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광수는 민족적 경륜 (2)에서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一大)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고 했는데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말은 곧 ‘일제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타협적 자세’라는 공격이었습니다.

1924년 1월 3일자 1면 사설

문제가 된 ‘민족적 경륜(2) 정치적 결사와 운동’ (1924년 1월 3일자 1면) 제하의 사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라’함은 너무 진부한 격언이다. 그러나 20세기의 금일에도 역시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사(人事)의 모든 현상 중에 지금도 가장 인생의 흥미를 끄는 것이 정치인 것은 신문을 보면 알 것이오, 또 가장 높은 명성을 가진 자가 정치가인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 자유의 사상이 보급될수록 정치는 민중화하여 농민이나 노동자까지도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이리하여 사람은 더욱 더욱 정치적 동물이 되는 것이다.

 

2. 그런데 조선 민족은 지금 정치적 생활이 없다. 아마 2천만에 달하는 민족으로서 전혀 정치적 생활을 결한 자는 현재 세계 어느 구석을 찾아도 없을 것이요, 또 유사 이래의 모든 사기(史記)에도 없는 일이다. 실로 기괴한 일이다 할 것이다. 그런데 만근(輓近) 수십 년 래(來)로 조선 민족에게는 정치적 자유사상이 무서운 세력으로 침륜(浸淪)되어서 정치생활의 욕망이 옛날 독립한 국가 생활을 하던 때보다 치열하게 되었다. 이것은 가장 당연한 일이다.

 

3. 그런데 왜 지금에 조선 민족에게는 정치적 생활이 없나. 그 대답은 가장 단순하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 것이 제1 인(因)이오 병합 이래로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밑에서 하는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 자치권의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대수(對手)로 하는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節介)의식이 있었던 것이 제2 인(因)이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지금까지 하여온 정치적 운동은 전혀 일본을 적국시하는 운동 뿐 이었었다. 그럼으로 이런 종류의 정치운동은 해외에서나 (가능하지) 만일 국내에서 한다하면 비밀결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4. 그러나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나 조선 내에서 전 민족적인 정치운동을 하도록 신생면(新生面)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두 가지를 들려고 한다.

 

(1) 우리 당면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2)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단결하여 민족의 정치적 중심 세력을 작(作)하여서 장래 구원(久遠)한 정치운동의 기초를 성(成)하기 위하여

 

5. 그러면 그 정치적 결사의 최고 또는 최후의 목적이 무엇인가. 다만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그 정치적 결사가 생장(生長)하기를 기다려 그 결사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케 할 것이라고.

 

6. 우리는 정치적 결사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을 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것은 이러한 결사를 몸소 경륜하는 실제 정치가의 두뇌와 수완에 일임할 수밖에 없으려니와 민족적 백년대계의 제1조로 정치적 대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 역설하고 아울러 그것이 속히 실현되기를 시(視)하려한다.

 

 

 

일련의 이광수의 행적, 즉 상해임시정부에서의 귀국(1921년 봄)→‘유랑조선청년 구제선도 건의(1921년 4월)→‘민족개조론’ 발표(천도교가 운영하는 잡지 ‘개벽’, 1922년 5월호)→‘민족적 경륜’ 연재가 이광수를 비롯한 점진적, 개량적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총독부의 회유와 원모(遠謀)에 의한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반면 ‘이광수를 위한 변명’(중앙M&B, 2000년)을 쓴 이중오는 결론 부분(292쪽)에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너의 제언은 결국 또 다른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아니냐고. 나는 애써 부인하지 않겠다. 결국은 점진적 개량주의요 실력양성론임을. 아직도 이러한 제안이 사대주의 혹은 제국주의에 물든 조야한 논리요 발상이라고만 생각하겠는가”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구속됐다 4월 병보석으로 풀려나 쓴 ‘나의 告白’(1950년, 춘추사/이광수 전집 제13권, 삼중당, 1962, 175~287쪽 재수록)에서 이광수는 이와 관련, 귀국 이유와 자신의 입장을 세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 결론은 해외에서의 독립투쟁 보다 조선 내에서 조선의 힘을 기르는 민족운동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흥사단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첫해(1919년) 가을인가 한다. 흥사단의 이론은 도산의 실천과 아울러서 깊이 내 마음을 끌었다. 흥사단의 주지를 들은 내 인상으로는 민족의 독립은 독립을 운동함으로 될 것이 아니요, 민족이 독립의 실력을 갖춤으로만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길은 민족 각 개인의 실력을 기르고, 이러한 개인들이 단결함으로 독립의 힘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힘이 없고는 독립이 오게 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남의 힘으로 또는 요행으로 독립이 오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래 지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깨닫고 보니 나는 동포들이 많이 사는 속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 주권이 있는 나라의 혁명 운동은 국외에서 하는 것이 편하고, 제 주권이 없이 남의 식민지가 된 나라의 독립 운동은 국내에서 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중략)… 인도의 독립 운동을 보면 간디를 비롯하여 모두 국내에서 하고 있었고, 국내에서 하므로 대부분을 합법적으로 하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동지의 결속을 많이 하면 기회를 얻어서 각지에서 일제히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자들은 대개 해외로 나왔다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자들은 대개 해외로 나왔다. 이것은 마치 민족을 일본의 손에 내어 맡겨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중략)… 해외에서만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첫째로는 서·북간도와 아령의 교민 동포로 독립군을 조직하여서 국내로 들이치는 것, 둘째로는 국제 정세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실상 독립운동 지도자의 다수는 이것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것이 독립을 얻는 한 길은 될지언정 원 길이요, 바른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요행을 바라고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민족 독립 운동의 정로(正路)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 자체의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서 나는 ‘국민개업, 국민개학, 국민개병(國民皆業, 國民皆學, 國民皆兵)’이라는 긴 글 한 편을 지어 독립신문에 실리고는 그 신문사에서 손을 떼고, 국내로 뛰어 들어오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이 뜻을 안 도산에게 고하였으나 그는 반대하고 나더러 미국으로 가라고 하였다. 도산은 내가 국내에 들어가는 것이 민족 운동자로서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명성을 돌아 볼 것이 아니나 명성이 떨어지면 민중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일을 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명성은 아낄 것이라고 도산은 간곡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 명성이라는 것을 그다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였고, 조그마한 내 명성을 아낀다는 것도 한 사특한 생각이라고 결론하고, 도산 모르게 귀국할 결심을 하였다 …(중략)… 나는 상해에서도 3년이나 4년 징역을 각오하였고 징역 하는 동안에 그 세월을 어떻게 이용할 것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두었었기 때문에 인제 신지에 도달하였다는 안심도 생겨서 좀 편안히 누워서 자고 싶었다 …(중략)… 징역을 각오한 나로도 제 발로 서울까지 가라는 것이 기뻤다. 나는 그날 밤차로 서울에 왔다. 나는 그 후에도 종로서에 하루, 정주서에 하루 붙들려 갔으나 다 무사히 나왔다. 그때는 소위 재등 총독의 문화 정책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자가 들어오면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다행하게 생각하는 대신 무섭게 생각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나는 필시 세상의 비난을 받기 쉽겠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에서 내가 귀순하고 돌아 왔다는 기사를 내인 것을 시초로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에서 나를 독립 운동을 배반한 자라고 공격하였다. 내가 왜장 터 ‘마루야마’의 집에 와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동경서는 이광수 매장 연설회가 열렸다고 보도되었다. 김성수·송진우·장덕수·최남선·홍명희·김기전 같은 친구들은 그래도 나를 찾아 주었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내 장래의 계획을 생각하고, 또 글을 쓰고 있었다. 이때에 내 나이 서른 이었다 …(중략)… 동아일보가 그 강령으로 2000만 조선 민족의 표현기관이라는 것을 내세울 정도의 언론 자유가 용인된 것이었다. 민족 운동은, 국내에서는 독립 운동에서 일보 후퇴하여 민족의 단위성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실제의 전선을 삼았다. 다시 말하면 민족 독립을 싸서 감추고 조선 민족은 조선 민족이요,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즉 조선 민족은 일본 통치하에 있는 국민일지언정, 일본에 화할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한계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합법적 민족 운동의 한계선이었다. 언론이 이 한계를 자칫 넘어 서면 곧 탄압이 왔다. 이러한 미온적인 민족 운동의 원리는 3·1운동으로 흥분된 강렬한 민족의식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은 물론이었다. 가능한 최대한도라는 것은 노성한 사람이 이해할 것이요, 청년층이 알아듣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이때에 공산주의가 등장하였다. 혁명 초의 레닌 러시아는 약소민족의 친구라고 알려졌다. ‘나는 민족 해방의 방편으로 공산당에 참가하였다’ 한 김준연의 고백은 당시 좌익에 들어 간 다수 사람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실망하고 우리 민족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우리로서는 새로 일어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제 공산당에 민족 해방의 희망을 붙이기가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한형권(韓馨權)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름으로 레닌 정부에서 얻어 온 돈 중의 수 십 만원이 서울에 들어 왔기 때문에 군자금이 풍부하였다. 그래서 청년총동맹·노동 총동맹 같은 좌익적인 단체들이 생기고 그 세력은 날로 늘었으며, 또 이러한 단체들은 정면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지는 아니하고 민족주의자와 합작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 민족의식이 강한 남녀들을 흡수하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조선의 사상과 언론은 좌우로 갈려 버렸다. 화요회, 북풍회 등의 공산주의 단체가 나서고 신생활 같은 공산주의 잡지도 나왔다. 이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대표적인 민족주의 언론 기관으로 기치가 선명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쓴 것이 민족개조론이요, 상쟁의 세계에서 상애의 세계에, 조선의 과거와 현재, 미래 등이었다 …(중략)… 이 글들은 많은 반향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중에도 민족개조론이 민족을 모욕한 것이라 하여 일부 독자의 분격을 산 모양이어서 칼을 가진 5, 6인 청년의 일단이 밤중에 내 처소를 찾아 와서 내가 상해에서 돌아 온 것과 민족개조론에서 민족을 모욕한 죄를 묻고, 나를 죽인다고 위협하였으나 폭행은 없었고 그 길로 개벽사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였다. 그러고는 나를 종학원(宗學院)의 교수로 고빙하였다 하여 최린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 글들 때문에 이광수 매장론은 글로, 말로 여러 곳에 나타났다. (‘나의 고백’ 중 발췌, 이광수전집 13권, 삼중당, 1962년, 247~252쪽)

 

 

 

동아일보 사사 1권(229~232쪽)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안창호는 ‘나가자 나가자 하기를 20년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하건마는 20년 후의 오늘날까지 나갈 힘이 없지 아니하냐. 나갈 준비를 하기를 20년을 하였으면, 지금은 나갈 힘이 생겼으리라. 지금부터 나갈 준비를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나간다 하기만 하면 금후 20년에도 여전히 나갈 힘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지금은 나갈 때가 아니요, 나갈 준비를 할 때다’고 하여 거족적인 실력 배양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물산장려와 민립대학설립운동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됐다. 직접적인 원인은 총독부의 방해에 있었으나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민족운동 자체의 취약성에 있었다. 민족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기 위하여서는 지도층의 단합이 필요했으나 공산주의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는데 비하여 민족주의자들은 위축되어 있었다. 조만식 송진우 최원순 신석우 안재홍 최린 이종린 이승훈 박승빈 서상오 김성수 등 16~17명이 모여 가칭 ‘연정회(硏政會)’를 만들었으나 사회주의 계열의 비판으로 좌절됐다. 사설 ‘민족적 경륜’이 나가자 사회주의 계열은 ‘조선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문구를 문제 삼아 공세를 폈다. 첫 반응을 보인 것은 도쿄유학생 학우회의 좌경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2월 20일 10여 개 단체의 대표들을 규합해 동아일보 배척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성토문을 작성해 본국으로 발송했다. 1월 29일 본보는 ‘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해명 사설을 실어 본지(本旨)는 결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며, 이런 논란을 초래한 것은 그 표현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논란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4월 20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임시대회는 ‘반동세력 급(及) 방해자에 대한 건’에서 반동세력으로 각파유지연맹을 지목하며 ‘박멸하기를 기(期)하자’는 결의를 하는 한편 방해자로는 동아일보를 들어 공격하며 ‘성토강연’에 나서기로 했다. 본보는 4월 23일자 사설 ‘노농총동맹 결의 중 본사에 관한 것에 대하여’와 동일자 기사 ‘양 문제의 진상’을 게재하여 해명하였다. ‘노농임시대회에서 논의된 본사의 사설 문제와 명월관 사건’이란 부제의 기사에서 ‘우리는 그 후 1월 29일에 다시 사설로써 석명(釋明)함과 같이 이것은 결코 문구의 모호함이요 결코 우리의 의사가 변함이 아니다. 언론이 극단으로 부자유한 이 세상에 우리의 이론을 철저하고 해박하게 발표할 수 없음은 천하가 모두 인정한 바요, 또한 우리의 석명이란 것도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가슴에 담은 것을 그대로 표명치 못해 유감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고 하여 언론의 부자유에서 오는 표현상의 문제로 본지(本旨)가 문구와는 다름을 거듭 해명하였다. 노농총동맹이 이 문제를 공격한 배후에는, 이 사설과 관련시켜 ‘연정회’라는 정치단체가 동아일보의 비호 아래 발기되었다는 억측이 제기된 데 큰 원인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기사에서 ‘연정회’와 본보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연정회라는 것도 실상은 평소 친분이 있는 몇몇 사람이 송년회를 겸하여 모인 자리에서 조선 사람의 살길이 위급하다며 충심으로 우려한 나머지 의견을 교환한 데 불과하였고,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음을 보도하였다. 보도내용은 ‘세상에 전하는 허다한 풍설은 허황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식도원에 모여서 총독부 당국자의 양해를 구하였다는 등은 전연 허설’이라고 밝혔다. 또 ‘개인의 일로 베이징에 왕복한 이광수 씨에 대하여 안창호 씨와 연락을 취하려는 계획이 있었느니 하며 이와 같이 맹랑한 일을 가지고 소위 사설 문제와 연결하여 무슨 조직적인 계획이나 진행하는 것처럼 전하는 자가 있음은 실로 기괴한 일이라 우리는 노농총동맹의 조사위원이 조금 더 사실의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사실무근이나 오해에서 나온 일을 그릇 믿고 그와 같은 모임에서 발표한 것은 유감 된 일’이라고 끝을 맺고 있다.”

 

 

 

<‘민족적 경륜’ (1)~(5)의 전문>

 

민족적 경륜(1) 민족 백년대계의 요(要) (1924년 1월 2일자 1면 사설)

 

1. 한 회사의 사업에 일종의 계획이 필요하다하면 한 민족의 사업에도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상업이나 공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회사를 조직할 때에 명세한 계획서를 작성하지 아니하고 한다하면 누구나 이를 치자(痴者)의 일이라고 조소할 것이니 이 조소는 가장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선 민족은 지금 이 조소받을 무계획 상태에 있는 것이다.

 

2. ‘조선 민족의 장래에 대한 계획이 무엇이냐’ 하고 누가 우리에게 물을 때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랴. 가령 교육과 상업의 진흥으로써 목적을 삼노라고 대답한다하고 다시 아까 묻던 사람이 ‘그러면 너희는 교육은 어떤 방법으로 상업은 어떤 계획으로 진흥 하려느냐’ 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갑(甲)의 조선인은 갑(甲)의 의견대로 대답하고, 을(乙)의 조선인은을(乙)의 의견대로 대답하려니와 비록 그 갑(甲)이나 을(乙)이 조선인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네의 대답이 우리 조선 민족의 대답은 아니요, 오직 그네 개인의 대답이다. 대개 개인의 의견은 그대로는 결코 민족적 행위로 표현되지 못하고 오직 그 의견이 민족적 의견 즉, 그 민족의 중심, 단결의 의견이 된 뒤에야 비로소 민족적 행위 또는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래(論來)하면 아직까지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적 계획이 없다 할 것이다. 각인(各人)의 의식 속에 산재한 목적과 계획은 있으려니와 그것이 아직 응집치를 못한 것이다. 운무(雲霧)요 체(體)를 성(成)치 못한 것이다.

 

3. 그러면 그것이 응집하여 체(體)를 성(成)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작일 신년호에서도 주장한 바와 같이 오직 단결의 일로(一路)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가장 낡은 진리이거니와 진리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단결의 필요를 십 수 년래(來)로 논(論)하였고 또 단결하자는 의견도 그만큼 많이 역설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도 추상적 이론이었고 실행 즉 구체화의 시기에 달(達)하지 못하였었다. 이 모양으로 가는 동안에 우리의 민심은 날로 환산(渙散)하고 우리의 민력(民力)은 날로 쇠미하여 갔다. 우리는 이러고 있을 수 없는 절박한 시기를 당(當)하였다. 더욱이 신년을 당(當)하여 과거를 회고하고 장래를 전망할 때에 위급의 감(感)과 시급히 무슨 운동을 해야겠다는 전율할 만한 내적 요구가 치열함을 자각한다. 진실로 이대로 갈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전 정력을 경주하여 차제에 민족 백년의 대계를 확립하고 그것이 확립되는 날부터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전 민족적 대 분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 민족의 처지는 한 민족적 일생에 한번이나 조우(遭遇)할 것이요 두 번도 조우하지 못할 그러한 위기다.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나 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민족적 일생이 결정될 최대 시련이라 할 것이다.

 

4. 노숙한 인사들은 말하리라. 어디 무슨 일이 꼭 계획대로 되느냐고. 아무리 계획을 확립한다하더라도 어디 그대로 실현이 되느냐고. 또 과학적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인사, 그 중에도 유물론자들은 말하리라. 사회현상도 물리현상과 같이 필연적인 자연의 철칙에게 정명론(定命論)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요 결코 미신적인 자유의지론자가 말하는 모양으로 인격적 의지로 좌우할 것이 아니라고. 이 양설이 다 과학적 인 듯하여 현대인의 신뢰를 끄는 유혹성(誘惑性)이 있거니와 이것은 역사를 관념의 발전만으로 예상할 수 있다는 헤켈파의 유심론과 같이 미신적이요 독단적이다. 다소간 사학과 사회학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있는 자면 심적 원인이 사회진화에 큰 요인임을 인식할 것이다. 더구나 사회진화의 정도가 유고(愈高:뛰어나고 높음)할수록 인격적 이상의 세력이 사회의 진화의 도정(途程)을 결정하는 힘이 유대(愈大)한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제 민족적 백년대계를 획립(劃立)하여야 할 것은 모든 조건으로 보아 가장 합리하고 적절한 일이다. 이하 우리의 의견을 술(述)하자.

 

 

 

민족적 경륜(2) 정치적 결사와 운동 (1924년 1월 3일자 1면 사설) 위에서 인용.

 

민족적 경륜(3) 산업적 결사와 운동 (1924년 1월 4일자 1면 사설)

 

1. ‘먹어야 산다’ 이것은 극히 평범한 말이어니와 동시에 극히 엄준(嚴峻)한 자연의 법칙이다. 유물론자는 위(胃)의 문제가 인생 문제의 전체라고 까지 말하거니와 비록 그것은 유심론적 경향에 대한 극단의 반동론이라 하더라도 또한 전통적으로 ‘먹을 것’을 무시하는 조선인에게는 정문(頂門:정수리)의 일침이 될 만한 자격제(刺激劑)다. ‘먹어야 살겠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다’ 이것이 연래(年來)로 점점 격렬의 도(度)를 가(加)하는 우리의 절망적 절규다.

 

2. 그러면 어쩌나?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가장 많은 것 같다.

 

첫째는 맨체스터 씨 자유주의니 산업의 발달은 오직 각 개인의 자유 경쟁에 일임할 것이오, 결코 국가 혹은 단체가 간섭하고 좌우할 바가 아니라함과 둘째는 보호주의라 할 만한 것이니 이것은 총독부의 정치가가 비 보호적이기 때문에 조선의 산업은 진흥될 수 없다는 의견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두 편이 다 ‘어찌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는 일치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어찌할 수 없다’ 만으로 단념하고 있을 수 있을까?

 

3. 한 경제적 단위를 성(成)한 지방이 산업이 유치한 시대에 있을 때는 보호정책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함은 이론과 사실(史實)이 같이 설명하는 바다. 그런데 금일의 조선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산업의 유치(幼稚)시대, 유치시대라는 것보다도 발아(發芽)시대에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강한 보호정책을 써야할 것은 자명한 리(理)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변은 일본과 조선간의 중요 관세가 이미 철폐되어 조선에서도 제조할 수 있는 조선인의 일용품이 제방을 결한 모양으로 조선으로 유주(流注)하고 타 일변으로는 조선인의 부력(富力)이 날로 고갈하여 대규모의 산업을 기획할 능력이 갈수록 쇠약하여간다. 이러한 경우를 당(當)하여 우리가 만일 적당한 대책을 립(立)하지 아니하면 불원(不遠)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파멸할 것은 명약관화다.

 

4. ‘그러나 이 제도 밑에서야 어찌할 수가 있나?’ 이러한 말은 도저히 허(許)할 수 없는 말이다. 용서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제도 밑에서 가능한 무슨 방책을 세우지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에 대한 의무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우리는 물산장려의 낡은 진리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소극적으로 보호관세의 대용 효력을 얻기 위하여 조선 물품사용 동맹자를 얻을 것.

 

(2) 적극적으로 조선인의 일용품이요 또 조선에서 제조하기 가능한 산업기관을 일으킬 자금의 출자자를 얻기 위하여 일대 산업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5. 조선의 산업은 이상에서 말한 산업적 대 결사의 힘이 아니고는 결단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이것이 완만한 듯하더라도 그것이 유일한 길인 이상에는 그것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 결사의 성공한 예를 영국의 길드에서 보았거니와 조선은 특수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조선인이 크게 분발만하면 전 민족적 대 산업 결사를 조성하기가 곤란할지언정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산장려운동이 진실로 이 정신으로 일어난 것이니 비록 무슨 사정으로 하여 아직 심히 위축 부진한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언제든지 이 운동이 최초의 목적을 관철치 아니코는 말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되나? 이론만이지’ 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듣는 비평이어니와 그것은 마땅히 이렇게 말 할 것이다. ‘그것이 쉽게야 되나, 조금 조금씩 생장(生長)함으로 되는 것이라’고.

 

6. 이에 말하는 산업적 결사와 작일(昨日) 본란에 말한 정치적 결사와는 비록 그 공업의 성질이 상이하다하더라도 또한 그 사업을 할 자는 지도자 측으로 보기나 일반 민중으로 보기나 동일한 자(者)일 것이다. 그럼으로 이 두 가지 운동에 선후(先後) 완급(緩急)이 있을 것이 아니요 동시에 함으로 서로 기세(氣勢)를 보익(補益)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장차 말하려는 교육적 대 결사도 또한 민족적 경륜의 하나이니 정치적 결사, 산업적 결사, 교육적 결사, 이 3종의 대 결사는 조선민족의 구활로(救活路)이오 백년대계의 삼위일체라 할 것이다.

 

 

 

민족적 경륜(4) 교육적 결사와 운동 (1924년 1월 5일자 1면 사설)

 

1. 교육이란 말은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또 교육’하고 다 아는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다 아는 것 중에 정말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교육은 그 중에 가장 큰 하나이다. 사람들은 교육을 구두선(口頭禪) 모양으로 부르건만 그 진의의(眞意義)를 아는 이가 의외로 희소하고 그것을 위하여 전력을 다할 정성은 더욱 적은 것이다.

 

2. 새들이 새끼에게 나는 법과 적을 피하는 법과 餌(이:먹이)를 포(捕)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 가르침이 얼마나 열심인지는 우리가 상도(想到)치 못할만한 정도라 한다. 짐승도 그러하다. 교육의 본의가 여기 있는 것이다. 적을 피하고 이(餌)를 포(捕)하는 법의 교육과 연습에. 그런데 조선 고대의 교육은 첫째 전 민중도 아니었거니와 둘째 피적포이(避敵捕餌:적을 피하고 먹이를 잡음))의 이용후생적도 아니었었고 다(多)부분 장식적이었으며 근년(近年)의 교육도 아직 이 구투(舊套)를 탈(脫)하지 못하였다. 대개 일반 민중이 아직도 구식적인 교육의 목적의 잘못됨과 교육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3. 교육이란 첫째 인(人)이 다 받아야 할 것이고 어떤 선택된 일소(一小) 계급만이 받으면 족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는 것이란 만인이 다할 것이오 어떤 사람만이 남까지 대신하여 살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런데 현재의 조선에서는 학령 아동만으로 취학률이 100분의 5, 6에 불과하고 일반 인민, 그 중에도 전 인구의 거의 100분에 90(약 1,900백만)을 점한 농민은 대부분 전혀 교육을 못 받은 형편이다. 환언하면 피적포이(避敵捕餌)의 술(術)을 겨우 견습할 뿐이고 과학적으로 배워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대(大) 문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여타 문제-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문제 등 모든 문제는 영영 해결이 안 될 것이다. 대개 이런 문제의 당사자는 저 민중인 까닭이다.

 

4. 둘째 교육이란 피적포이술(避敵捕餌術)을 주로 할 것이다. 이 말이 구식 귀에는 심히 야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인생생활의 중심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따라서 교육의 중심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영국의 스펜서도 그의 교육론에 역설하였다. 그러면 어떤 것이 피적술(避敵術)이고 어떤 것이 포이술(捕餌術)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적이 무엇인지 이(餌)가 무엇인지를 말하면 될 것이다. 인생의 적은 (1)기후 (2)수토(水土) (3)질병의 원인 (4)타(他) 동물이오, 인생의 이(餌)는 (1)음식물 (2)공기 (3)약품이다. 우리는 기후의 적을 막기 위하여 가옥과 난실법(暖室法) 급(及) 양실법(凉室法)을 시설하고 의복을 제조하며 수토(水土)의 적을 정복하기 위하여 상하수도며 식림(植林)의 설비를 하며 질병의 원인이 되는 제(諸)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위생 의료의 제(諸) 설비를 하며 그와 반대로 음식물을 얻기 위하여 착경(鑿耕: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음)과 어렵(漁獵) 등의 업(業)을 하며 또 타 지방의 산물을 구입할 자금을 얻기 위하여 제종(諸種)의 공업 광업을 하는 것이며 또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화학적으로 약품을 제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에 말한 적을 피하고 이(餌)를 포(捕)하는 법이 어느 것이나 물리학, 화학, 동식물학, 천문학, 지질학 등 과학적 지식으로 안 되는 것이 없으니 구주 선진국이 우리보다 우월한 것은 이 과학적 지식이 그네만 못한 까닭이다.

 

5. 이상에 말한 것은 이미 결정된 사실로 결코 실험의 증(證)을 기다리는 이론이 아니다. 그러면 어찌할까.

 

6. 우리의 진로는 이상의 소론(所論)으로 이미 결정되었을 것이다. 즉 전 민중에게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는 대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민중 독물(讀物)의 간행과 민중(특히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강습소의 설치로 얻을 것이요, 또 이 일을 하려면 거기 필요한 자금과 인물을 얻기 위한 민중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대 결사를 조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 때다. 이러한 운동에 대한 자세한 계획은 여기서 말할 것도 아니거니와 이 결사를 전도(傳道)회사에 비기면 가장 상상하기 용이할 것이다. 전도회사가 만든 자금을 가지고 각 지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모양으로 이 결사에서는 각 농촌에 어문과 과학의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근사(近似)할 것이다. 위에도 이 삼종(三鐘)의 결사와 운동이 조선민족 구제의 삼위일체적 방책인 것을 말하였거니와 이 교육운동은 어떤 의미로 보아 타 이종(二鐘)의 운동의 근저가 될 것이다. 이제 그 관계를 다시 고찰해 보자.

 

 

 

민족적 경륜(5) 교육산업 정치의 관계 (1924년 1월 6일자 1면 사설)

 

1. ‘어쩌나?’할 때도 아니요 ‘할 수 없다’ 할 때도 아니다. 더구나 ‘그저 어찌 되겠지’ 하고 우두커니 수수방관할 때도 아니고 더더구나 ‘어떤 영웅이 나올 테지’ 하고 정도령(鄭道令)을 고대하는 듯한 어리석음을 가질 때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큰 소리로 ‘옳다, 이렇게 해야 한다. 하면 된다, 누구를 기다릴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 각자가 일어나 해야 한다’ 하고 일어날 때다. 금년도 작년처럼 보내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우리는 큰 사업과 깊은 의미로 충만한 금년을 만들어야 한다.

 

2. 우리는 이상 4회에 긍하여 정치적 결사와 산업적 결사와 교육적 결사가 조선 민족을 구제하는 삼위일체의 방책인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관계가 어떠한지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는 따로 따로 시기를 떼어서 할 것인가, 또는 동시에 할 것인가, 각각 전연(全然)히 독립적으로 할 것인가, 또는 밀접한 관계가 있도록 할 것인가, 이것은 실제에는 심히 중대한 문제다.

 

3. 정치적 결사는 전 조선 민족의 중심 세력이 되기를 기약하여야 할 것이니 이 결사의 의견이 곧 조선 민족의 의견이요, 이 결사의 행동이 곧 조선 민족의 행동이 되기를 기약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 되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전 조선 각지에서 다수의 회원을 얻을 필요가 있고 다수의 회원을 얻으려면 부득이 농민에게로 가야 할 것이니, 대개 조선에서 일천 사백만은 농민인 까닭이다. 농민 중에서 많은 회원을 얻으려면 첫째 농민 중에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일을 하는 것이 교육적 결사의 사명이다. 교육적 결사에서는 일변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면서 타 일변 농촌 자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생활의 방식을 가르쳐 정치 생활의 준비를 줄 것이다. 그럼으로 정치운동과 농민교육운동과는 서로 복배(腹背)가 되어 상조상응(相助相應)할 것이다.

 

4. 산업적 결사도 그 최후의 목적은 전 조선 내의 모든 산업의 통어(統御)에 있을 것이니 그리하려면 거액의 자본이 필요하고 거액의 자본을 得하려면 수백만의 회원이 필요하고 수백만의 회원을 얻으려면 역시 농민에게로 가야 할 것이다. 아마 이 대(大) 산업조합의 기초는 도시의 주민보다 농촌의 주민에 있을 것이요 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적 결사를 위해서도 농민을 본위로 하는 교육적 결사는 중요한 보조기관이 되는 것이다. 교육적 결사는 과학적 지식을 보급할 때에 경제학적 지식도 보급할 것이요. 특히 농촌의 경제적 자치와 조선의 경제적 생활에 관하여 가르칠 바가 있을 것이니 각 농촌에는 반드시 대 산업조합의 지점이 있어 그 농촌의 경제생활의 중심이 될 것이다.

 

5. 이 세 가지 사업 중에 가장 곤란할 듯한 것이 교육적 결사이거니와 이것도 결코 불가능은 아니다. 현재 지식계급의 청년 중에는 적당한 사업을 잡지 못하여 고민하는 이가 많으며 또 민중을 위한 헌신을 원하는 이가 많으니 상당한 방법과 자력(資力)만 얻으면 수백인의 민중교육자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요. 가령 이백인의 민중교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매년 2만 원 가량의 수입만 있으면 할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없어 못한다면 너무도 민족적 수치가 아닌가.

 

6. 이 세 가지 사업은 동시에 일으킬 것이니 동일한 최고 간부의 지도하에 분업적으로 하는 것도 좋거니와 사업 자체는 절연(截然)히 독립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특히 정치적 결사 이외의 것은 절대적 색채를 띠지 않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개 정치적 색채를 띠면 종종(種種)의 위험이 반(伴)하는 까닭이다.

 

7. 조선인으로 누구인들 조선인의 운명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또 조선인의 운명을 근심하는 이는 반드시 조선인의 생도(生途)를 궁구(窮究)할 것이다. 그러하거늘 지금 외지에 조선의 민중적 경륜이 확립하지 못하여 전(全)민족이 거취를 찾지 못함은 심히 개탄할 일이다. 이에 우리는 우리의 확언하는 바를 피력하는 것이니 이것이 기회가 되어 민족적 경륜에 관한 열렬하고 심각한 토구(討究)가 생기고 아울러 금년 내로 경륜에서 나오는 제(諸) 사업이 서(緖)에 취하기를 바란다.

 

1924년 1월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의 파문에 이어 그 해 4월, 이른바 ‘박춘금(朴春琴)사건’(또는 ‘식도원 권총협박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춘금사건’이란 재일(在日) 조선인 깡패 보스 박춘금이 송진우 사장과 인촌 선생을 식도원(食道園)으로 유인, 권총으로 위협하며 ‘관민야합의 어리(漁利)운동’이라는 제하의 사설(1924년 4월 2일자 1면)을 통해 박(朴)이 조직한 친일유지(有志)조직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을 비판한 것에 대해 사과할 것과 동아일보가 모금한 재외동포위문금 중에서 3000원을 자신들에게 내놓을 것을 요구한 것. 이 때 송 사장이 ‘사담(私談)’이라며 ‘주의 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치 못한 줄로 인(認)함 – 대정(大正) 13년 4월 2일 송진우’라고 써 준 것이 친일지를 통해 먼저 공개되며 문제가 됩니다. (추후 상술) 

 

매일신보 1924년 4월 13일자 5면

이 사건으로 1924년 4월 25일 열린 임시 중역회의에서 사장 송진우, 전무 신구범, 상무 겸 편집국장 이상협, 취체역 김성수, 장두현이 물러나고 그 다음날인 4월 26일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떠납니다.

 

이광수는 그러나 1년 3개월여 뒤인 1925년 8월 1일 재입사, 1933년 8월 29일 조선일보로 갈 때까지 8년여 동안 병마(病魔) 속에서도 사설 소설 횡설수설, 4설을 쓰며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등 하루 원고지 70장 이상을 써 지면에 쏟아 내는 열정적 활동을 펼칩니다. 그 시절 동아일보는 ‘가장 세력있는 신문’이었고 이광수는 ‘가장 세력있는 신문’에서 전성시대를 구가합니다.

 

김동인(金東仁)은 춘원연구(9) (삼천리, 1935년 9월호 242~244쪽)에서 “춘원이 병상에 넘어져 사무를 못 볼 때에도 춘원의 의자는 비워 두어서 후일 다시 나올 날을 기다리고 하였다. 그런지라 만약 춘원의 편에서만 동아일보를 배척치 않으면 언제까지든 동아일보는 춘원을 즐겨 맞았다. 이렇듯 서로 굳게 맺어진 동아일보가 점점 장성하였다. 다른 온갖 신문의 위에 군림하듯이 되게까지 되었다. 이 동아일보의 대성이라 하는 것이 춘원의 사회적 대성과 떼지 못할 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춘원은 동아일보 지상에 소설을 쓸 의무를 사(社)에서 지게 되었다. 사(社)와 춘원의 사이는 물론 소설을 쓰는 것이 「춘원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개 문학자로서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그것은 무엇에 비기지 못할 한 개 커다란 권리라 볼 수가 잇다. 대체 조선과 같이 출판계가 빈약한 곳에서는 자기의 작품을 활자화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이러한 가운데서 무한히 활자화할 의무를 지게 된 춘원은 바꾸어 말하자면 무제한으로 창작을 발표할 기관을 얻은 것이나 일반일 것이다. 춘원은 쓰고 또 썼다. 연달아 동아일보 지상에는 춘원의 작품이 나타났다. 가장 세력 있는 신문 지상에 가장 많이 쓰기 때문에 가장 넓게 알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광수전집 별권’(삼중당, 1976)과 ‘이광수와 그의 시대 2’(김윤식, 솔출판사. 1999, 562~575쪽) 연보를 참고해 재정리한 그의 문필 활동은 아래와 같습니다.

 

1923년(31세)

 

– 2월 12일 「가실(嘉實)」(단편), Y생이라는 익명으로 동아일보에 처음 연재를 시작, 23일까지 11회 연재. ‘가실(嘉實)’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진평왕 때의 설화(舌禍) 설씨여(薛氏女)를 바탕으로 한 것. 설화는 시골총각이 동네처녀(약혼녀)의 늙고 병든 아비를 대신해 고구려 원정에 나갔다가 포로가 돼 머슴살이를 하다 주인의 신뢰를 얻어 데릴사위가 될 수도 있었으나 신라로 돌아와 다른 곳에 시집보내려는 아비의 간청을 뿌리치고 기다리던 그 동네처녀와 6년 만에 결혼한다는 것이나 이광수는 ‘가실(嘉實)이 신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소설을 끝내 미완(未完)의 여운을 남기는 창작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23년 2월 12일자 1면, 가실 첫 회 

 

– 3월 27일「선도자(先導者)」(장편), 장백산인(長白山人)이라는 아호로 연재 시작. 도산 안창호 선생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은 총독부의 탄압으로 111회(7월 17일)로 중단됐습니다.

 

이것이 참말일까. 아아, 이것이 참말일까. 오늘 신문에 난 상항(桑港) 전보가 참말일까. 한번 다시보자!

 

“조선민족의 지도자 리항목은 작일 당지 국민회관에서 연설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조선 사람의 육혈포에 가슴을 맞아 시립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금조에 사망하였는데 가해자는 곧 미국 관헌에 체포되였다더라.”

 

이 전보가 과연일까. 아아, 과연일까. 그렇다 하면 진실로 조선 백성은 그의 참 지도자를 잃어버렸구나!

 

 

 

극적 요소를 앞세워 관심을 끈 ‘선도자’는 “종래 1면에 게재하여 오든 소설 ‘선도자’는 쓰는 이의 사정에 의하야 작일 중편 종결로써 아직 중지하고 후일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 하편을 게재하겠습니다” 는 사고와 함께 111회로 중단됩니다.

 

 

 

1923년 3월 27일자 1면

1923년 7월 18일자 1면 선도자 중단 사고

 

– 5월 16일 촉탁기자로 입사.

 

– 9월 9~17일 기행문 「초향록(草香錄)」연재(7회).

 

– 12월 1일 임(任) 기자, 소설 「허생전」연재 시작.

 

 

 

1924년(32세)

 

– 1월 2~6일「민족적 경륜」사설 연재.

 

– 3월 21일「허생전」111회로 연재 완(完).

 

– 3월 22일「금십자가(金十字架)」연재 시작.

 

– 4월 26일「민족적 경륜」 파문으로 퇴사.

 

 

 

퇴사 후 그는 비밀리에 북경 중앙호텔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8일간 같이 지내며 흥사단 운동의 방략과 동포들에게 전하는 도산의 어록을 필기해 돌아옵니다.

– 5월 11일 신병으로 「금십자가」연재 49회로 중단.

 

-11월 9일「재생」연재 시작(1925년 9월 28일자까지 218회 연재).

1925년(33세)

 

– 1월 1일 「조선 문단의 현상과 장래」(평론).

 

– 1월 12일 「타고르의 원정(園丁)에 대하여」(서평).

 

1924년 4월 퇴사 후 비밀리에 북경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기록해온 도산어록을 1925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전합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통하여 국내 동포에게 드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글은 총독부의 게재금지조치로 1월 26일자 4회분 전문이 깎은 채 나가며 중단됐습니다.

 

1925년 1월 23일자 1면

1925년 1월 26일자 1면

– 3월 21일「척추카리에스」로 백인제의원에서 수술 받고 100여일 입원했다 신천으로 정양을 떠나「재생」 집필.

 

– 7월 1일 「재생」연재 계속.

 

– 8월 1일 재입사.

 

– 9월 28일 「재생」218회로 연재 완(完).

 

– 9월 30일 「대춘향(大春香)」연재 시작(1926년 1월 3일까지 96회).

병마(病魔)에 시달리면서도 1925년 9월 28일 「재생(再生)」을 218회로 끝내고 이틀 뒤인 9월 30일 “이바라 방자야”로 시작되는 「대춘향(大春香」을 계속하고 「대춘향」을 1926년 1월 3일 96회로 마치고 이틀 뒤인 1월 5일「천안기(千眼記)」의 연재를 다시 시작하는 초인적인 작업을 계속합니다. 

 

1925년 9월 30일자 6면과 1926년 1월 3일자 8면

 

– 10월 9일 「꿈」육당께, 「古時調」(시조) 게재.

 

– 10월 10일 「중추월(中秋月)」(시조).

 

– 11월 2~12월 5일 「신문예의 가치(新文藝의 價置)」(평론) 24회 연재.

 

– 11월 5일 「곡 백암선생(哭 白巖先生)」 (조시).

 

 

 

1926년(34세)

 

– 1월 1일 부록 동아일보 사가(이광수 작사 김영환 작곡)

 

 

– 1월 1일「줄리어스 시이저」제2막 제3장 번역 시극(詩劇).

 

– 1월 2~3일 「중용과 철저」- 조선이 가지고 싶은 문학(평론) 2회 연재.

 

– 1월 3일「대춘향」96회로 연재 완.

 

– 1월 5일「천안기(千眼記)」연재 시작.

 

 

 

1월 2~3일 동아일보에 2회 연재한 ‘중용과 철저 – 조선이 가지고 싶은 문학’에 대해 양주동이 조선일보에 반론을 제기하자 이광수는 문필생활 중 처음으로 논쟁을 벌입니다.

 

 

 

조선일보 1월 22~23일자 ‘현하(現下) 조선이 가지고 싶은 문학, 이광수씨의 중용과 철저란 글을 비평하여 자가(自家)의 의견에 급(及)함’ – 양주동.

 

 

 

– 1월 27일 양주동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1회)

 

– 1월 28일 양주동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2회)

 

– 1월 29일 양주동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3회)

 

– 1월 30일 양주동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4회)

 

 

 

양주동의 반론에 이광수는 네 차례에 걸쳐 반박을 했고 양주동은 조선일보 2월 19일자 석간 3면에 ‘이광수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 그에 답하야’를 기고했습니다.

 

논쟁 요지는 이광수가 ‘중용(中庸)’의 ‘무과불급(無過不及 ·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음)’을 인용하며 우리 민족에게 주고 싶은 문학은 밥이나 물과 같은 ‘상적(常的) 문학’ 즉 ‘평범한 문학’, 윤리적 문학이어야 한다고 한 반면 양주동은 ‘상적(常的) 문학’에는 동의하나 문학의 영구성을 논하기 전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먼저 담아야한다며 헤겔의 변증법을 인용, 조선이 가질 문학은 양극화되는 ‘은둔’과 ‘혁명’, 즉 정(正)과 반(反)이 대립하여 합(合)이 되는 중용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4세의 조선 천재 이광수의 고전적 문학론에 23세의 신예 양주동이 반기(反旗)를 든 것입니다. 양주동은 이후 문단의 주목을 받고 모르는 것이 없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한 박사가 돼 ‘국보(國寶)’라는 호칭을 듣게 됩니다.

 

그는 동아방송(1966년 4월 10일 방송)의 ‘유쾌한 응접실’에 출연해 “맹자란 책에요, 옛날에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인데 ‘성문과정 군자치지(聲聞過情 君子恥之)’라 소문이 사실보다 지나치다는 것을 군자가 부끄러워한다, 그랬습니다. 사실 내가 국문학도 좀 하고 한문학은 물론 뭐 상당히 많이 알구요. 영문학이니 불문학이니 또 역사학이니 약장사를 많이 벌여서요, 달변이고 뭐 소위 박식이라고 그래서 학생들이 날 ‘국보’니 뭐 이러는데 참 송구스러운 얘깁니다. 그런데 ‘국보’란 이름은 누가 만들어 줬냐하면 손기정 씨 마라손, 그 이가 날 ‘국보’라고 해서 그 이가 한 그 말을 고맙게 지금도 생각합니다. 때는 1.4후퇴(1951년 1월 4일) 땐데 다른 권세 있는 사람, 세력 있는 사람들은 말짝 다 미리 갔어요. 자동차 타고 다 갔는데 나는 그런 편의가 없어서 동아일보 사장실(편집자 주 – 당시 사장은 최두선 선생임)로 이렇게 갑니다. 가서 어리적 어리적 하고 앉을라니깐 그 왠 사람이 앉아 있어요. 그래서 통성명을 했죠. 누구냐 그러니까 “제가 손기정이올시다.” 그래, 난 누구냐고 묻길래 내가 양주동이라니까 손기정 씨가 눈을 껌뻑 껌뻑 하더니 ‘국보’ 두 사람만 여기 남았군요. 다른 사람은 다 그러면… ‘국보’ 두 사람만 남았군요. 그래요. 그래서 내가 일평생 잊지 못해요. 다른 사람들이 날 ‘국보’라 해가지고 우습게 여기지만은 그 이가 그랬던거만은 내가 고맙게 생각합니다”고 ‘국보’라는 명칭의 유래를 설명했습니다.

 

 

 

– 3월 5일「동생」(동화).

 

– 3월 6일「닭」(동화), 「보낸 뒤」(시조).

 

– 3월 7일자로 2차 무기정간처분을 당해 「천안기」61회로 중단.

 

– 4월 21일 속간.

 

– 5월 1일「봄의 설움」(수필).

 

– 5월 10일「마의태자(麻衣太子)’」연재 시작(1927년 1월 9일까지 227회 연재).

 

– 6월 1일「육당의 근작 ‘심춘순례(尋春巡禮)’를 읽고」(평론).

 

– 6월 신병 재발로 경의전병원 입원.

 

-11월 8일 1차 편집국장 취임. 

 

그러나 이광수는 이듬해(1927년) 1월 9일 소설 「마의태자」를 227회로 끝낸 뒤 1월 16일 「유랑」연재를 시작해놓고 편집국장 취임 2개월여 만인 1월 28일 다시 각혈하고 쓰러져 「유랑」은 1월 31일 16회로 중단됩니다.

 

김동인(金東仁)의 글처럼 ‘춘원의 의자는 비워 두어서 후일 다시 나올 날을 기다리다’ 8개월여가 지난 1927년 9월 30일 편집국장직을 사임하고 편집고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로부터도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다 1928년 9월 4~19일 「젊은 조선인의 소원」이라는 논문을 15회 게재하고 10월 5일~11월 9일「병창어(病窓語)」를 31회 연재합니다. ‘병창어(病窓語)’란 ‘병실에 누워 창문을 바라보며 쓴 글’, 병상(病床)수필인데 그의 심사를 나타내는 그가 만든 말입니다.

1928년 9월 4일자 3면

1928년 10월 5일자 3면 「병창어(病窓語)」

 

* 10. 5. (1) 녀름ㅅ밤 달

 

* 10. 6. (2) 조선의 하늘

 

* 10. 7. (3) 입추

 

* 10. 9. (4) 젊은 혼의 찬미가

 

* 10.10. (5) 이별행진곡

 

* 10.11, (6) 보살(菩薩)의 병(病)

 

* 10.12. (7) 사(死)

 

* 10.13. (8) 참회(1회)

 

* 10.14. (9) 참회(2회)

 

* 10.16. (10) 생명욕과 소유욕

 

* 10.17. (11) 맘의 편안

 

* 10.18. (12) 소아(小兒)(1회)

 

* 10.19. (13) 소아(小兒)(2회)

 

* 10.20. (14) 소아(小兒)(3회)

 

* 10.21. (15) 거지

 

* 10.23. (16) 응공(應供)

 

* 10.24. (17) 복전(福田)

 

* 10.25. (18) 주기

 

* 10.26. (19) 오동

 

* 10.27. (20) 병(病)과 추(秋)와 자연(1회)

 

* 10.28. (21) 병(病)과 추(秋)와 자연(2회)

 

* 10.29. (22) 병(病)과 추(秋)와 자연(3회)

 

* 10.30. (23) 병(病)과 추(秋)와 자연(4회)

 

* 10.31. (24) 병(病)과 추(秋)와 자연(5회)

 

* 11. 1. (25) 시조

 

* 11. 2. (26) 시조의 자연률(自然律)(1회)

 

* 11. 3. (27) 시조의 자연률(自然律)(2회)

 

* 11. 4. (28) 시조의 자연률(自然律)(3회)

 

* 11. 5. (29) 시조의 자연률(自然律)(4회)

 

* 11. 8. (30) 시조의 자연률(自然律)(5회)

 

* 11. 9. (31) 시조의 의적구성

 

 

 

– 11월 7일 「구경꾼의 감상」이종우(李鍾禹)씨 개인화전을 보고.

 

 

 

1927년 1월 31일 16회로 소설 「유랑」을 중단한 지 1년 10개월만인 1928년 11월 30일「단종애사」를 연재하기 시작합니다(1929년 12월 11일까지 217회 연재).

 

 

 

1928년 11월 30일자 6면 「단종애사」첫 회

 

 

그러나 1929년 2월 신장결핵(腎臟結核) 진단을 받고 5월 24일 좌편신장 절제수술을 받아 「단종애사」는 5월 11일자 8면에 128회를 연재한 뒤 3개월여(5월 12~8월 19일) 동안 쉬게 됩니다.

 

그 사이

 

– 7월 16~22일 「아프던 이야기」7회,

 

– 7월 23~8월 1일 「문학에 대한 소견」10회를 쓰고

 

 

 

「단종애사」를 다시 연재하며

 

– 9월 24~28일 「사상(史上)의 로만스, 삼국시대 편 충신제상(忠臣堤上)」 사화(史話) 5회,

 

– 10월 28~30일「사상(史上)의 로만스, 삼국시대 편, 범 이야기 둘」3회,

 

– 11월 10일 「밤송이」(白岳山人 명의의 시)

 

– 11월 13일 「밤마을 가는 길에」(白岳山人 명의의 시)를 게재하고

 

– 12월 11일 217회로 「단종애사」를 끝냅니다.

 

 

 

“이 글을 쓸 때 어떤 날 춘원 자신이 「단종애사 만은 욕하지 말라」고 웃으면서 말한 일이 있느니 만치 춘원의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요 겸하여 이 작품이 동아일보에 연재되는 당시 누계(累計) 수천통의 투서(독자 편지라는 의미- 인용자 주)가 들어오니 만치 독자군(群)의 인기가 굉장하였던 작품이다.” (김동인, ‘춘원연구 9’, 삼천리 1935년 9월호)

 

 

 

– 12월 14일 근독(近讀) 서평 2, 3. 님의 침묵, 안서시집(岸曙詩集), 노동독본.

 

1930년(38세)

 

– 1월 1일 「군상(群像)」3부작으로「혁명가의 아내」1부 연재 시작(이상범 화).

 

– 1월 5일 「새해맞이」

 

– 2월 1일 「복조리」

 

– 2월 4일 「혁명가의 아내」1부 31회로 연재 완.

 

– 3월27일 군상(群像) 2부「사랑의 다각형」연재 시작(11월 2일까지 71회 연재).

 

– 4월 1~10일 창간10주년기념 축시 ‘10년사(詞)’ 7회 연재.

 

– 9월 2일 「군상(群像)」2부「사랑의 다각형」연재 완.

 

– 9월20일 본사 주최 여자정구대회회가, 이광수 작사, 안기영(安基永) 작곡.

 

 

 

 

 

1930년 9월 20일자 7면

 

 

 

 

– 9월 25일~10월 1일「정의는 이긴다」(영화소설) 6회 게재.

 

-11월 1일 취체역 편집국장(2차).

 

-11월 9일 임용련 백남순씨 부처전 소인(素人) 인상기(평론)

 

-11월29일「군상(群像)」3부 「삼봉이네 집」연재 시작(1931년 4월 24일까지 84회 연재).

 

 

 

1931년(39세)

 

– 1월 5일 「내가 소설을 추천한다면」(수필), 「조선어문연구」 연전(延專) 문과 연구집 제1집 (서평) 게재.

 

– 3월30일 「조선사화집」이은상 씨의 근저를 독(讀)하고 (서평).

 

– 4월24일 「삼봉이네 집」연재 완(84회).

 

– 5월 3일 「아비의 소원」(시).

 

– 5월 21일 충무공 유적순례 (기행문) 14회 게재(1931년 6월 10일까지).

 

– 5월 24일 충무공 고택을 찾아서 (시조).

 

– 6월 11일 고금도에서 충무공 유적 순례를 마치고.

 

– 6월26일 「이순신」연재 시작(1932년 4월 3일까지 178회 연재.

 

– 8월13~18일 「행주승전봉과 권율 도원수」기행문 4회 게재.

 

– 11월 11일「자장 3편(三篇)」자장, 저 산 넘어, 생쥐(시가)

 

– 11월 18일「우리 아기 자는 잠」(동요)

 

– 11월 27일「잃은 노래」(자장노래) (동요) 게재.

 

– 11월 28일 평화로운 잠 (자장가)

 

– 12월 1일「운동의 노래」 짓는 까닭(가요)

 

– 12월 17일「강용흘 씨의 초당」(상).

 

– 12월 18일「강용흘 씨의 초당」(하).

 

– 12월 신동아 「조선과 신미년(辛未年)」「잃어버린 댕기」(시화).

 

1932년(40세)

 

– 1월 신동아 「가정」.

 

– 1월 3일 「모를 냅시다」(시).

 

– 2월 신동아 「청년에게 아뢰노라」(논문).

 

– 3월 신동아 「입학과 졸업」(시화).

 

– 4월 3일 「이순신」178회로 완.

 

– 4월 12일 「흙」연재 시작.

 

– 5월 13일 「진달래」(동시).

 

– 5월 17일 영화「트레이더혼」본 감상(평론).

 

– 7월 단군 유적 답사.

 

– 9월 25일 연락선상에서 (서한)

이광수는 당시 동아일보에서의 하루를 ’이발 목욕할 여유가 없어서 곤란. 친구 방문은 거의 전폐. 이렇게 살아갑니다’ 고 묘사했습니다.

“신문사에 가서는 동료들의 출석 상황을 보고 숙직부를 보고 서신 온 것을 보고 주요한 신문을 보고 소설을 한 회 쓰고 혹시 횡설수설을 쓰고 부득이하면 사설도 쓰고 공장에 몇 번 들락날락, 사장실에 몇 번 불리어가고 사설, 횡설수설, 기타 각 면의 주요 기사를 읽어 혹시 시비 들을 것이나 없나 혹시 압수당할 것이나 없나를 보고 각 면 대장을 보고. 내객 몇 분을 보고, 전화 몇 십 차 주고받고 그리고 전표에 도장을 몇 번 찍고 간혹 편집회의를 하고 간혹 동료의 불평을 듣고 간혹 경무국에 불리고. 그리고 윤전기가 돌아 신문이 제 시간(오후 4시20분 이전)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나면 만족으로써 내 하루의 직업이 끝이 난다. 그리고는 곧 타기 싫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고, 일 있으면 동광사에 들르고. 집에 오면 대개 5시 반 전후. 내가 대문 여는 소리를 들으면 5세아, 6세 아가 ‘아빠!’ 하고 마루로 뛰어나와 매어달리고. 그리고 손 씻고 발 씻고 저녁 먹고 신문사에 압수, 삭제, 호외 등 사고가 있어 전화가 무시로 울지 아니하면 아이들과 노래하고 춤추고 말 되어 태워주고 그림 설명하다가 아홉시가 되면 5세아 자장가 불러 맡아 재우고 그리고 난 뒤가 내 시간이어서 신문도 보고 독서도 하고 공상도 하고 부처 간에 담화도 하고 원고도 쓰고, 11시 전후에 취침. 이발 목욕할 여유가 없어서 곤란. 친구 방문은 거의 전폐. 이렇게 살아갑니다(‘東光’ 1932년 11월호 35쪽 ‘나의 하로’)

 

 

 

 

 

1933년(41세)

 

– 1월 1일 연두송(年頭頌) (시)

 

– 1월 1~11일 「문인좌담회」(좌담, 9회).

 

– 3월 5일 「노송당(老松堂) 일본행록」(신간평).

 

– 3월 26일 자장노래(박경호 곡) (동요)

 

– 4월 15~19일 「합포(合浦) 풍광」(기행문, 3회).

 

– 5월 2일 「위인의 날」, 민족적 위인의 날도 지키자 (시화).

 

– 5월 11일 「윤석중 군의 ‘잃어버린 댕기’」(서평).

 

– 5월 31일 「박경호 씨 피아노 시청기」(음악평).

 

– 7월 10일 「흙」271회로 연재 완.

 

– 7월 13일 「흙」을 끝내며

1933년 7월 13일자 석간 3면

– 8월 9~23일「만주에서」 기행문 5회 게재.

 

– 8월 28일 조선일보 부사장(8.29~1934.5.22).

 

동아일보의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간 것은 당시 큰 화제가 됐습니다.

 

 

 

이광수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2’(솔 출판사, 1999)를 쓴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광수와 그의 시대 2’ (209~219쪽)에서 이 일련의 변화, 이 시절 이광수가 가졌을 심정과 생각을 아래와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춘원의 직장과 가정의 모습은 이처럼(‘나의 하로’)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힘껏 당겨진 활처럼 그는 팽팽한 생태였다. 한참 일할 나이인 인생의 장년기에 바야흐로 이른 것이다. 친구를 만나 한담할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는 신문인이자 동우회 기관지 ‘동광’의 주재자요, 소설가요, 아버지요, 남편이었다. 더구나 그의 직업은 다름 아닌 민족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다. ‘이천만 가슴속에 풀린 자유혼/깨어라 소리치어 자유의 소리/나날이 새 힘자라 새는 날마다/영원히 외치도다 자유의 소리’(동아일보 옛 사가)도 춘원 자신이 지은 것이었다. 그는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가장 많은 글을 썼고 그 글의 종류와 범위 또한 매우 다양하였다. …(중략)… 춘원은 그의 생애의 커다란 절망을 앞둔 1932년의 시점에서도 ‘청년에게 아뢰노라’에서 이렇게 외쳤다. …(중략)… 춘원은 청년에게 이 절개 지키기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중략)… ‘동광’ 종간호에는 학생에게 보내는 공개장(‘영웅이 되라’, 1933.12)을 실었다. 이렇게 대단한 신념을 지닌 동우회의 책임자 춘원이 절망을 체험하는 과정은 언제, 왜,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것을 우리는, 첫째로 도산의 체포와 국내 수감(1933), 둘째로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이적하는 과정(1934), 셋째로 차남 봉근의 죽음(1934)등 세 단계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중략)… 둘째 단계를 우리는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옮겨감에서 찾아낼 수 있다. 1933년에 춘원은 동광 편집을 하는 한편 만주를 여행하고(6월), 그리고 ‘흙’(7월)을 끝내었다. 9월엔 장녀 정란이 태어났다. 그가 조선일보로 옮긴 것은 이해 8월이었다.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춘원 자신이 이에 관해 말해놓은 바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그만큼 이 대목은 춘원에겐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내가 연전 동아일보를 나와서 조선일보로 간 것은 세상이 배신행위라고 비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비록 내 내적 동기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변명은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설사 내가 조선일보로 간 것이 부득이한 사정이 있고 또 공적 견지로 보아서 죄 될 것이 없다하더라도 내 은인에 대한 배신 행동임에 다름없는 것이다’ (‘다난한 반생의 도정’, 454쪽). 다른 곳에서 춘원은 16년 간 있던 동아일보를 떠난 이유로, ①동아일보는 이제 기초가 잡혀 자기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음과 ②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편집국장 주요한, 그 밖의 여러 동지와의 관계를 들었다. …(중략)… 춘원은 조선일보 부사장(1933.8.29~1934.5.22) 및 편집국장(1933.9.14~1934.1.1)을 겸임한 것으로 되어있다(조선일보 50년사, 1970). 호남 중심의 동아일보와 서도 중심의 조선일보의 계보 속에서 서도인 춘원과 주요한이 어째 더 견디지 못했을까. 우리가 겨우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춘원과 주요한의 본업이 동우회였다는 사실에 관련된다. …(중략)…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어가며 조선일보로 옮긴 내적 동기는 아마도 침체한 동우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방도의 일환이었으리라. 이 명분이라면 춘원은 어떤 비난도 능히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조선일보의 부사장직을 가짐으로써 또 동지 주요한이 편집국장을 함으로써 그야말로 조선일보라는 대 사회적 공기를 배경으로 보다 적극적인 동우회 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도산까지 수감되어 복역하고 있는 마당이어서, 춘원은 최후의 도박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조선일보에 취임하고 보니, 사정은 썩 달랐다. 주요한은 이내 사표를 내고 얼마 후 화신산업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동사의 전무 취체 역을 역임한 주요한이 사임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요컨대 춘원이 조선일보에서 1년도 못되어 나와 버린 것은 사장과의 알력이라든가, 인화 문제, 실권 부여 문제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동우회 운동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던 것이 큰 이유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동우회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춘원은 어떤 악조건이나 수모도 참았을지 모른다. 도산의 징역으로 한 풀 꺾인 동우회 운동은 춘원의 동아일보로 부터의 이탈로 두 번째 풀이 꺾인 셈이었다.”

 동아일보를 떠난 뒤 5년여 후 이광수는 인촌 선생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仁村 恩兄鑑(인촌 은형감)오래 가물어 염려 많으실 듯하옵니다. 산거(山居)에는 벌써 칠칠하고 메뚜기 나는 소리 들리게 되었습니다. 뵈온지 벌써 일 년이 가까와옵니다…(중략)…산거에 일이 없어 고요히 생각하오매 오직 지난날의 잘못들만이 회한의 날카로운 칼날로 병든 심혼을 어이 옵니다. 모두 모래 위에 엎지른 물이라 다시 주어 담을 길 없아오매 더욱 고민만 크옵니다. 형의 넓으신 마음은 벌써 광수의 불신을 다 잊어버리셨겠지만 어쩌다 광수의 생각이 나시면 유쾌한 추억이 아니실 걸 생각하오면 이 마음 심히 괴롭습니다…(중략)…지난 48년간에 해온 일이 모두 덕을 잃고 복을 깎는 일이어서 형을 마음으로 사모하면서도 형을 가까이 할 인연이 항상 적사오며 은혜 높으신 형께 무엇을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나 물(物)과 심(心)이 다 빈궁한 광수로써는 아무 드릴 것이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광수로써 오직 한 가지 일은 늘 중심에 형을 념(念)하여 건강과 복덕(福德) 원만하기를 빌고 사람을 대하여 형의 감덕을 찬양하는 것 뿐 이옵니다. 오늘, 날이 청명하고 새소리 청아하옵니다. 아무 일도 없으면서 형께 편지 드리고 싶어 이런 말씀 아룁니다. 이만. 1939년 6월 17일 弟 李光洙 拜上 (이광수전집 18권, 춘원 서간문, 366~367쪽)

“춘원은 안 도산의 지시에 따라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에 역시 흥사단계인 ‘동우구락부’의 통합을 위해 활동, 이듬해인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를 발족시켰다. 또한 5월에는 동아일보에 ‘마의태자’를 연재하고 종합지 ‘동광’을 주요한이 창간하자 그 일을 도왔다. 6월에는 신병의 재발로 경의전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 후 삼방, 석왕사 등을 여행한 후 11월에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이로부터 춘원과 동아일보는 김동인의 말대로 ‘굳게 맺아진’관계로 10년 동안 지속된다. 이 10년 동안에 춘원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소설은 장편(未完은 제외)으로도「선도자」「재생」「춘향전」「마의태자」「단종애사」「혁명가의 아내」「이순신」「흙」등이다. 이 시기에 이렇게 다작을 발표한 사람은 없다. 그동안 춘원은 필화로 한번 퇴사(민족적 경륜사설 1924· 1), 신병으로 한번 퇴사(1927· 9) 도합 두 번 퇴직, 다시 복직을 했다. 또 이 기간 중에 춘원은 두 번 대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맸으며 (1차는 1925년· 3, 척추카리에스 수술, 2차는 1929 ·5, 우편신장절제수술) 거의 2년 동안을 병상에서 혹은 정양지에서 보냈다. 그런 가운데도 다작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광수전집 별권, 화보 평전 연보’, 삼중당, 1976년 123쪽)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